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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자/山陰'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11.03  산인 여행 - 귀국 20
  2. 2012.10.31  산인 여행 - 사람이 사는 요괴마을 20
  3. 2012.10.25  산인 여행 - 미즈키 시게루 로드 18
  4. 2012.10.23  산인 여행 - 유시엔 3/3 21
  5. 2012.10.18  산인 여행 - 유시엔 2/3 14
  6. 2012.10.16  산인 여행 - 유시엔 1/3 18

 

 

여러가지로 절약이 가능했던 여행이라서 자금은 그럭저럭 널널하게 남았다.

가져간 현금의 1/3 정도 남았으니, 페리터미널에 가기 전 뭐라도 먹어볼까 싶다.

남들한테 줄 기념품은 이미 구입했고, 본인 것으로는 소설 원서 몇권 샀으니

여기서 할만한건 맛있는거 먹는 일밖에 없다.

 

식당에서 자리잡고 먹기에는 페리터미널로 출발하는 무료 셔틀버스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딴거 없다 둘러보고 있는데, 오랜만에 소프트크림이 눈에 들어와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보통 유제품이 아니더라도 싸잡아서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하드'라고 부른 빙과류에는 크림이라고 할만한 것이 안들어가니 뭔가 잘못 정착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키타로 마을에 왔으니 키타로 관련 아이스를 먹어봐야지. 잠깐의 유흥으로 가격은 더 비싸지만

관광지에서 1~2천원 더 주고 새다른 아이템 먹는것까지 아까워하기는 좀 그렇다.

소프트크림 맛은 수박맛이라는 묘한 맛이 있어서 골랐고, 크림 위에 토핑으로 고를 과자 하나 고르라고 한다.

주인공인 키타로를 선택할까 싶기도 했지만 시각적으로 제일 정감가는건 역시 눈깔아버지 쪽.

 

 

 

사진좀 찍어도 되겠냐니 흔쾌히 대신 들어주신다.

날씨가 더운 날이라 크림 위에 얹은 초코소스가 금방 굳지 않고 조금씩 흘러내리는게 위태위태하다.

서둘러 사진 찍고 밖에 나와서 먹기 시작한다. 눈깔 토핑은 사실 퍼석퍼석해서 별 맛이 없다.

 

크림은 한국의 수박맛바에 유제품을 섞은 듯한 맛. 부들부들하면서도 맛은 강렬하다.

수박맛 향기가 강하고 설탕이 많아서 그닥 좋은 크림을 사용한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광지에서 그런걸 바라진 않으니 별 불만없이 먹긴 했는데.

 

예전 자전거 여행시 신세를 졌던 키소(木曽)의 홈스테이 아저씨분이

맛있는 소프트크림 있다고 자동차를 몰고 30분이나 달려서 도착한 고원 목장지대의 아이스크림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농후한 크림맛이라서, 그때 이후로 그냥 평범한 소프트크림은 애들 장난감으로 느껴진다.

일본 몇몇 산간지역에 그런 프리미엄 소프트크림이 있는데, 제대로 된 우유를 쓴 크림이라는게 그런 맛이라는건 처음 느껴봤다.

유럽에서도 그렇고 원래 소프트크림은 그런 맛이었을텐데, 기술이 발달할수록 어째 식음료의 질은 떨어지는 아이러니함은 뭘까.

 

 

 

미즈키 시게루의 흉상과, 그의 저서에 적혀있던 행복론중 한가지인 글귀에 쓰여있는 조각상.

해석하자면 '게으름뱅이가 되어라' 인데, 이걸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게 될지도.

 

전쟁때 왼팔을 잃고, 40세가 넘을때까지 한끼 한끼 식사 해결해서 굶어죽지 않는것 하나만을 위안으로 삼으면서도

당시 천대받던 만화가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미즈키 시게루가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는게 어색하지 않을까.

 

원래 저서에 적혀있던 내용 없이 그냥 이 문구만 읽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할 듯 하다.

그가 하는 말은,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정진해서

일하지 않아도 충분히 소득이 들어와 부자유스럽지 않게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위치의 사람이 되라는 뜻.

그런 게으름뱅이라면 나도 되고싶지만, 그러러면 좀 더 노력해야 할 듯.

 

워낙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이해할만한 발언이지만,

호화스럽게도 나는 의미 그대로 진짜 게으름뱅이가 되길 원한 미야자와 켄지의 시구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비에도 지지않고' 라는 시를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지도.

외국어 시라서 한국어로 옮겼을 때 운율이 가진 느낌을 채현하긴 힘들지만 의미 전달은 어렵지 않은 편이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데, 주인공인 키타로도 독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셔터를 누른다.

지금에서야 일본인들에게도 신기한 복장이겠지만, 묘하게 학생복과 묘지기의 복장이 섞인듯한 모습은

당시엔 그리 특이한 복장이 아니었던 듯.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는 평범함이 요즘엔 오히려 매력포인트가 된 듯 하다.

 

 

 

사실 이 키타로 동상은 혼자가 아니고, 옆의 바위 위에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위치상 둘을 한꺼번에 넣으면 눈깔아버지가 아예 보이지 않을정도로 작아져 버리기 때문에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따로따로 남아버린 것.

 

맨날 키타로 어깨위에 앉아있어서 아버지가 아니라 포O몬스터의 O카츄같은 녀석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이 포O몬스터의 기초가 된 것일지도?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마수는 역앞 파출소에도 그 힘을 뻗친다.

파출소 앞에는 기념 스탬프도 찍을 수 있고, 왠지 다른 파출소보다 들어가기 쉬워보이는 분위기.

경찰서라는게 일반인들한테는 워낙 흉흉한(?) 곳인데, 왠지 이곳에서는 들어가서 잡담이라도 해 보고 싶은 느낌이다.

 

자전거 여행중이라면 길 물어보기 위해서 쉽게 들어가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거리가 없으니.

사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들과 경찰은 관계가 좋지 않아야 정상이긴 한데

의외로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주는게 신기했다. 세세한 지도까지 출력해서 펜으로 루트를 그려주기도 하고.

 

많은수의 장거리 여행자들이 공원에서 노숙하거나, 공공화장실 옆에서 밥 지어먹거나 하기 때문에

도시 경찰들은 쉽게 쫓아버릴수도  없고 놔둘수도 없고 난감해하는 분위기.

그래도 일단 도와줄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잘 도와주는 모습이 나름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한밤중에 도착한 시골 마을 파출소에서는 위험하다고 노인용 야광 어깨끈도 하나 받기도 했고.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그날 밤 도로에서 맷돼지를 만나기도 했지만.

 

 

 

셔틀버스는 5분이면 출발한다. 역 앞에 돌아와서 맨 처음 찍었던 조각상을 전체적으로 담아본다.

캐릭터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역시 이 조각상이 가장 느낌이 좋다. 미즈키 시게루의 인생이 담긴 듯 해서.

 

 

 

산책길 출발할때는 고양이소녀 전철이었는데, 지금은 눈깔아버지로 어느샌가 변신해 있다.

두 종류의 전철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왠지 이득본 느낌.

 

톳토리현은 매년 국제 만화박람회를 열어서 외국 작가들이나 젊은 지망생들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워낙 장기간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는 박람회에서 이렇게 3일 정도의 여행에서는 장님이 코끼리의 코를 만지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톳토리현이 사구 말고는 관광거리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장기간 박람회를 열 수 있는것이진 하지만

상당히 열성적으로 기획중인 만화박람회도 이곳 미즈키 시게루 로드 하나의 인기를 능가하기는 좀처럼 힘든듯 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공무원들 하면 세금이나 축내는 녀석들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한 공무원이 우연히 기획한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공무원도 한다면 할 수 있다는 쾌거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생각.

물론 나머지 대부분은 이런거 생각할 여유가 없겠지. 노느라고.

 

 

 

이 사진 찍고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페리를 탄 시간 이틀을 빼면 3일간의 여행이었는데, 이 3일간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

쓰레기 잘 버리지 않는다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행지라고 알려진 도시에서는, 번화가에 가면 얼마든지 쓰레기 구경(?)정도는 할 수 있으니.

자전거 여행을 하다보면 외딴 도로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어마어마하게 볼 수 있다.

사실 도로가에 떨어진 쓰레기는 한국보다 더 많다. 트럭 운전수들이 먹다가 아무데나 버리기도 하고

가전 폐기물을 돈 받고 수거해서, 산골 도로 깊숙히 그냥 버리는 사기꾼들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산골도로가 워낙 많은 일본이라 인력을 동원해도 좀처럼 그런 곳의 쓰레기까지 정리하기는 힘든 모양이다.

 

이러나저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기억을 더듬어봐도 길가에 쓰레기 떨어진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관광지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가장 촌동네라서 그런 걸까. 결론적으로 깔끔해서 기분은 좋았지만.

 

 

 

버스는 10분도 걸리지 않아 페리 터미널에 도착한다. 승선시간을 엄수해 달라고 해서 일찍 들어왔지만

정말 할게 없는 곳이니 심심하긴 하다. 한국쪽보다 훨씬 외딴 곳. 한국에서는 그나마 밖에 나가면  식당이라도 있었다.

여기는 식당이고 뭐고, 주위는 전부 물류창고밖에 없다. 사람 사는 흔적조차 안 느껴지니.

 

인내와 끈기를 갖고 할일없는 시간을 보냈는데,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은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서 승선 직전에야 도착한다.

그래도 가이드하고 말이 다 되어 있었는지 관광객 여권을 뭉터기로 들고 와서 금방금방 승선권을 넘겨준다.

개인 관광객들에겐 승선 1시간 전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으라더니, 단체 관광객들은 승선 15분 전에 오는건 뭔 짓인지.

 

이래서 단체 관광객들하고 같은 날짜에 움직이는게 싫다. 괜한 박탈감 느끼게 하니까. 그런 특권마저 관광비용에 들어있다면

그건 권력 남용이라고 부를만한 것이니 신경질 내도 관계없겠지.

 

 

 

이번 산인 여행 날씨는 참 묘하다. 유시엔 이동중 폭우를 만나고, 유시엔 관람시엔 화창하고

미즈키 시게루 로드까지도 이렇게 맑은  하늘이 있었나 싶었지만, 승선시간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힌다.

대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극단적으로 바뀌는 건지. 일단 페리만 타면 끝이니까 이제와서 날씨 걱정할 일은 없지만.

 

승선을 마치자마자 카메라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몇  초만 늦어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이라서

그 전에 사진이라도 남길까 싶은 마음에. 이게 10분 전만 해도 맑디 맑은 하늘의 모습이다.

 

 

 

그 다음부터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일본서 사온 마시는 멀미약을 6시간 간격으로 한병씩 마시고 잔 것밖에는.

저녁식사는 운이 좋게도 출항하기 전에 미리 먹는 바람에 멀미걱정 없었다. 맛은 여전했지만.

 

멀미약 덕분에 덜 어지럽길레 이번에 산 책이라도 읽어볼까 하고 과감한 도전을 해 봤지만

역시 움직이는 배 위에서 책까지 읽는건, 아무리 멀미약의 힘을 빌어도 무리였다. 그대로 누워서 줄창 잠만 잤다.

 

12시간 달리고 달려서 강원도가 보이는 곳에 도달하니 이건 또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쨍한 날씨.

이번 여행은 예정에 없던 이벤트들이 자주 생기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하늘만큼은 여행중에 만날수 있길 바랬는데.

다 끝나고 돌아오니 이런 하늘이 반겨주는 모습은 왠지 더 서글프다.

 

 

 

바람도 없고 파도도 매우 잠잠해서, 바다는 흐늘거리는 실크 같은 느낌이다.

이것도 머피의 법칙이라고 할까. 멀미약 없을때는 넘실넘실 사람을 말려죽이더니

멀미약 먹는 날에는 왠지 바다가 매우 평온하다.

 

 

 

원래는 매우 부정적인 성격이지만, 여행중 만큼은 항상 긍정적이 되는 두얼굴의 사나이.

그래서 이제서야 나타난 화창한 하늘 역시, 바다 위에서 멋들어진 모습 연출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산인 지역의 화창한 모습을 놓친 대신에 햇빛 반사되는 바다를 감상할 수 있었으니.

좋은 경험이긴 했지만, 다음엔 아무래도 비행기로 후딱 갔다오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쯤 유시엔의 가을을 만끽하러, 직원 할머니에게 인사라도 하러 다시 들러볼까 하는 성급한 상상을 하며 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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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100만명 정도의 무시하지 못할 관광객이 찾아오는 원동력이 되는 이곳에는

한창 만화 좋아할 때의 유아들은 그닥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절반쯤이 한국인 절반쯤이 일본인 어른이 보인다.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젊은 관광객도 보이긴 하는데, 역시 작품이 작품이다 보니 아이들보다는 성인들이 주 고객층인가보다.

 

그래도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던 곳은 이곳 연못.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동상이 곳곳에 숨어있다.

산책나온 젊은 어머니들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방목하는 듯한 장소.

 

 

 

이미 게게게의 키타로라는 작품은 만화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일본 근대사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위치에 이르러 있다.

유명 만화가들의 출신지에는 나름 선전문이나 간단한 기념품들을 파는 곳이 없잖아 있음에도

이렇게 마을 전체 경제가 한 만화가의 작품에 의존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곳은 명실공히 일본에 이곳 뿐.

 

작품과는 전혀 상관없는, 요괴 신사라고 이름붙여진 이런 장소 역시 그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멋져보이는 바위와 특이한 나무 몇그루를 전시해놓은 이곳은, 신사라고 부르기도 뭣한 조그만 장소지만

묶여있는 소원 종이와 에마의 수를 보니 나름 관광객들에게 짭짤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이곳의 에마는, 기원이 기원이다보니 평범한 신사의 에마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녀석들이라서

외국에서 관광온 경우에는 소원을 적어서 걸어놓는것 자체가 아까울 정도로 기념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일부러 연출한 화면이 아니고, 빛바랜 나무 담벼락 한모퉁이에 걸려진 각양각색의 에마들이 이곳 분위기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어디서든 재미있는 에마 내용 찾아보는게 이젠 일과가 되었는데

'대학에 합격해서 만화가가 될수 있기를' 이라고 소원을 적어놓은 녀석이 인상적.

만화가 지망이다보니 그럴싸한 그림도 그려놨다. 어디의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력은 나름 있는것 같으니 열심히 하면 만화가가 되지 못할것도 없겠지만, 만화가하고 대학하고 무슨 관계인지는...

아마도 만화 전문대학이라던가 그런 곳일 듯.

 

그것과는 별개로, 사진 담고나서야 보인 오른쪽의 한국어 에마 역시 나름 신선했다.

내용이 신선했다는게 아니라, 이런 장난끼 넘치는 요괴신사에서 너무나도 장중한 필체로 염원을 담아내는 모습이.

 

 

 

이곳의 특이한 에마들을 한데 모아서 담아본다. 기념품으로 하나 가져갈까 싶었는데

이번 여행은 특히 기념품에 돈을 꽤 많이 사용한 편이라서 좀 자재하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준비한 현금의 1/3 정도는 남겨가긴 하지만, 멀지 않는 훗날 또 다시 일본 가야 할 일이 생길테니 항상 여행시엔 현금을 좀 남겨오는 편이다.

 

지금 집에 모아놓은 엔화는 한화로 약 14만원쯤. 다음 여행갈때 든든한 후원금이 되어주겠지.

 

 

 

신사 안의 모습도 나름 재미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인기있는 녀석은 신사 입구앞에 세워져 있는 이 녀석이다.

키타로의 아버지가 흐르는 물바구니 속에서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

좀 어지러울듯 하지만, 매끈한 표면을 무기로 마구 회전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다.

 

많은 관광객들이 웃으면서 손을 뻗어 눈깔을 멈추곤 한다.

본인은 관광객이 없을때 회전하는 눈깔이 딱 보이는 순간을 위해 꽤나 한참동안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지금까지 사카이미나토 시 차원에서 제작된 여러가지 키타로 관련 컨텐츠들을 살펴봤는데

이곳에 거주중인 주민들이 이 미즈키 시게루 로드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역시 충분히 멋진 관광거리에 속한다고 생각.

 

1950년대 작품인 만큼, 산책로 주변의 가게들은 삐까뻔쩍한 건물이 없다.

다들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한다는 의미일까. 낡은 나무판자집에 추억의 미닫이 유리문이 한국에서 온 나로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사실 이곳은 안에서 열심히 사진 찍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편인데, 워낙 소심한 마음이라서 왠지 셔터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밖에서만 찍었는데, 단순히 시가 주선한 관광거리에 편승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본인들의 힘으로 손님을 모으겠다는 열정이 느껴진다.

손으로 그려 조잡해 보이는 촬영 스팟이, 옆의 반듯한 벤치보다 더욱 어울려 보이는 것만 봐도 그렇고.

가게 정문앞을 비추는 전등 역시 키타로 아버지로 장식하는 꼼꼼함까지.

 

이곳의 큰손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이나 일본의 관광객들이, 키타로를 접하며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아쉬울 뿐이다.

기념품은 어느 정도나 팔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꼭 이런 정보수집증(?)이 앞서는 바람에 관광의 즐거움보다 지적호기심이 먼저 고개를 드는 것도 좀.

그렇다고 가게 주인한테 그런거 물어보는건 좀 실례고.

 

 

 

도시정비는 분위기만큼이나 그다지 현대화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온갖 전선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특히 요즘 일본에서는 사거리 신호 알리는데 저런 스피커를 쓰진 않는데도.

 

뷰파인더를 올려보니 의외로 푸른 하늘과 어지럽게 얽힌 전선, 그중에 유채색으로 빛나는 스피커가 꽤나 재미있는 풍경을 연출해 주길래

사진을 찍으려고 사거리 앞으로 다가가는데, 횡단보도 앞에 한국인 관광객 아주머니들이 단체로 사진을 찍고 있어서 잠시 기다려야 했다.

한동안 내가 서 있는줄 모르고 사진 찍느라 정신없던 아주머니가 이윽고 나를 발견하고 살짝 놀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이 사진을 찍는 동안 뒤에서 '한국사람 아니야~' 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하나.

 

 

 

관광객들로 흘러넘치는 그런 장소는 아니지만

어쨌든 톳토리 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서,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레벨을 갖춘 분위기.

 

원래 시골마을이니 일부러 그럴것도 없긴 한데

어쨌든 키타로의 마을이다 보니 대부분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로 마을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키타로의 아버지 눈깔이 술병 들고 앉아있는 저 그림 역시 마을 분위기에 참 어울린다.

고향의 부흥을 위해 모든 캐릭터들의 저작권을 무료로 사용하게 해 준 미즈키 시게루 덕택일지도.

 

 

 

현대화에 미친듯 채찍질을 가하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느긋한 마을이다.

연간 100만명의 관광객을 맞이하는, 인구 3만 5천명의 시골마을에서 보이는 풍경은

최신 시설이라고는 냄새 나지않는 화장실 정도밖에 없으면서도,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조용한 건물들의 연속.

 

택시회사라기보다는 자동차 정비소같은 느낌을 주는 저 회사의 모습도, 이곳에서는 관광지의 볼거리로 느껴진다.

사명 밑에는 '키타로와 만날수 있는 마을'이라고 적혀있다.

지붕밑에는 여지없이 눈깔아버지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고, 안에서 대기중인 택시 상단부에도 눈깔이...

마을의 특색이란 건, 입구에 크고 비싼 상징물 한두개 만들어놓는다고 생겨나는게 아니다.

요괴들의 마을이지만 어느 곳보다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곳의 특색은

시에서 어마어마한 세금을 쏟아부어 만든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 하나하나의 소소한 마음가짐에서 만들어진 것.

 

 

 

지금도 사용하는건지 모르겠지만, 길거리에 설치된 이 녀석은 일단 라디오라고 한다.

그냥 나사 두개와 뻥 뚫린 구멍이 사람 얼굴처럼 보여서 담아봤는데,

일단 미즈키 시게루 로드에서 볼 수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관광과 관련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시골마을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일사분란한 거리인 것.

 

 

 

요괴들 조각상은 워낙 많아서 그걸 다 찍어서 올리다간 이곳 홍보대사가 되어버릴 듯 하니

걸어가다가 좀 시선을 끌만한 녀석들만 살펴보게 된다. 다들 원작에서 뭐 하는 녀석인지 설명이 되어있지만

외국인에게는 역시 와닿지 않는게 아쉽기도 하다.

 

 

 

작품의 히로인격인 고양이소녀. 어쨌든 제일 유명한 캐릭터중 하나여서 그런지

사람 손을 많이 탄 흔적이 보인다. 세삼 느끼지만 미즈키 시게루는 여성 캐릭터 그리는데는 소질이 없나보다.

 

 

 

산책로 거의 끝부분까지 걸어갔다가 방향을 돌려서 역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산책로 끝에는 '미즈키 시게루 기념관'이 위치해 있어서, 이 파란만장한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페리 승선시간이 그렇게 널널하진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간다.

 

여행 출발전 대강 찾아본 바,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그다지 볼것도 없고 시간도 그리 걸리지 않는다는게 중론인 듯 한데

내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 오전 마츠에에서 라멘 먹으며 빈둥거린 시간이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아까웠다는 정도일까.

난 책도 몇 번씩이고 읽고, 영화도 몇 번이고 보는 성격이라서, 한번 간 여행지에 다시 가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약간의 여운을 남겨놓고 돌아가는것이 다음 여행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딱 그 정도의 아쉬움만 가지기로 한다.

 

돌아가는 길에 뭐 놓친 건 없나 싶어서 둘러보던 중, 능히 동상들의 가치에 견줄만한 화장실 간판에 눈을 뺏긴다.

디자인적으로 매우 훌륭한 픽토그램. 키타로를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즐거우며, 모르는 사람이라도 전하는 바는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표본이다.

왠지 툭 떼어내서 집의 화장실 앞에 붙여놓아도 어울릴 것 같은 녀석인데, 아무래도 저걸 파는 상점은 보지 못했다. 내가 좀 특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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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쯤 기다려 한적한 버스를 타고 금새 사카이미나토(境港)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페리터미널까지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중이라서 요금 걱정은 없지만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50분 정도.

 

사카이미나토는 강릉과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페리 선착장이 있긴 하지만

산인 지방이 워낙 외딴 곳인데다가, 관광객 대부분이 이곳을 경유해서 다른 관광지로 이동하는 부류라서

그 외국인들에게만 관광 수입을 기대해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는 항구마을이다.

 

지금껏 내가 돌아다닌 마츠에, 이즈모 등은 모두 산인 지방중 시마네(島根)현에 속해있지만

유시엔이 위치한 조그만 섬 다이콘지마(大根島)를 버스로 15분쯤 달려서 도착한 이곳 사카이미나토는 톳토리(鳥取)현에 속한다.

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현이 톳토리현, 그 다음가는 현이 시마네현이니까, 산인 지방의 고립적인 상황이 이해가 될런지.

 

그나마 이즈모타이샤라도 있어서 나름 관광객을 끌어모았던 시마네현과 달리 일본에서 가장 큰 해변가 모래사구 단 한개만이

유일한 볼거리인 톳토리현이고, 그것도 공항이나 항구에서 1시간 넘게 달려야 도착하는 톳토리 시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매우 떨어져서 여러가지로 관광자원이 부족한 곳.

 

하지만 어떻게든 현의 관광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머리를 짜내던 관계자들은 훌륭한 컨텐츠를 만들어 냈다.

일본의 국민만화중 하나인 게게게의 키타로(ゲゲゲの鬼太郎)의 작가인 미즈키 시게루(水木じげる)의 고향이 이곳 사카이미나토였던 것.

그걸 이용해서 아무것도 없던 조그만 항구마을인 이곳에 설립된 것이 미즈키 시게루 로드(Road)이다.

 

사카이미나토역을 나서면 바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이 산책로 덕분에 톳토리현은 나름 자랑할만한 관광 상품을 만들어냈고

물질적인 관광자원이 없다면 문화컨텐츠를 관광자원으로 삼자는 일념으로, 매년 만화축제를 개최하는 등 방향성을 확립해 가고 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현재 일본의 국민만화중 하나인 '명탐정 코난'의 작가 아오야마 고쇼(青山剛昌) 역시 톳토리현 출신이라서

키타로와 코난, 반세기를 뛰어넘은 국민만화 두 작품의 작가를 바탕으로 삼아 낙후된 현을 되살리려 노력하는 중.

 

사카이미나토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거대한 키타로 간판. 일본인들에게는 맹꽁이 서당만큼 친근한 이미지다.

 

 

 

역 앞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맨 처음 볼 수 있는 동상. 이 만화를 보면서 커온 사람들이 본다면 참으로 감회가 새로울듯한 모습이다.

만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 미즈키 시게루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만화속 주인공 키타로.

5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추억의 일부로 간직하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다시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떨지.

 

게게게의 키타로는 원래 1930년대 유행하던 민화 '아이키우는 유령'을 그림연극으로 각색한 '묘지의 키타로'가 그 기원이다.

1950년대 미즈키 시게루가 만화를 연재하던 당시엔 요즘과 같은 만화잡지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전후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시게루는 5달 가까이 원고료를 받지 못하거나, 만화 원고가 소실되기도 하는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입지를 다져갔다.

한국에서는 외팔이 만화가로 더 유명한듯 한데, 태평양전쟁때 라바울 뉴기니 전투에서 폭격에 왼팔을 잃은 것.

 

'전후 일본인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표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산 작가라서

2010년엔 '게게게의 아내'(ゲゲゲの女房)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대히트 하기도 했다. 당연히 미즈키 시게루와 그를 뒷받침해준 아내의 이야기.

 

 

 

맞은편에서 만화원고를 쳐다보고 있는 캐릭터는 키타로의 악우인 생쥐인간(ねずみ男).

실제로 게게게의 키타로가 국민적 작품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은 애니메이션화가 진행되고 나서인데

그 전에 연재한 만화쪽은, 괴담민화에서 파생된 작품답게 의외로 아이들이 보기에 무서울 정도로 심각한 작품이었다.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는 캐릭터라고 할까, 키타로와 친구관계이면서도 매우 속물적이고 욕심이 많은 성격으로

키타로를 곤경에 빠트리는 경우가 많은 녀석. 그래도 작가가 애착을 가지는 캐릭터인지 당당히 메인 동상으로 참여했다.

 

 

 

문화컨텐츠를 이용한 관광상품 개발이라고 하면 사실 어느정도 패턴이 정해져 있는데

이곳 미즈키 시게루 로드라는 곳은, 딱히 크게 관심을 끌만한 뭔가가 있는 곳은 아니다.

상점가 사이사이에 세워져 있는 등장 요괴들의 동상과, 키타로 관련 상품, 전철에 그려넣는 캐릭터 등등.

 

하지만 전후 피폐했던 시절에 어린이였던 사람들, 고도성장기에 사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 사람들에게 있어

이 미즈키 시게루 로드는 특별한 추억으로 다가올 것이다. 외국인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관광지.

 

전철에 그려진 캐릭터는 키타로의 친구이자 작품의 아이돌(?) 고양이소녀(猫娘).

지금 기준에서 본다면 여성적 매력이란걸 느끼끼 힘든 캐릭터지만, 사실 연재 당시에도 별로 색기는 없었다.

이는 미즈키 시게루의 그림체가 워낙 여성 캐릭터 작풍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심지어 타 만화가에게 부탁해서 여성캐릭터를 그려달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

 

키타로 애니메이션은 지금도 극장판으로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데, 요즘의 고양이소녀는 일본풍 미소녀로 변신했다고.

 

 

 

전쟁때 한쪽 팔을 잃고도 만화가로 대성한 작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며 지탱해준 아내.

일본사람들에게 이처럼 여러가지 면에서 귀감이 되는 부부가 또 있을까 싶다.

 

전쟁당시 라바울 뉴기니 원주민들과 매우 친해져서,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귀화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인데

만약 그의 바램이 이루어졌다면 게게게의 키타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 역사의 흐름이란 건 참 아이러니하다.

 

젊을때는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나, 아내의 도움으로 성공한 이후로 온화하고 웃음기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금술좋기로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했고, 이곳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초안을 들고 찾아간 사카이미나토 공무원에게

제작에 관련된 모든 캐릭터들의 저작권을 무료로 제공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의 주된 볼거리는 역시 산책로를 따라 세워져 있는 요괴들의 동상들.

큰 동상은 사카이미나토역 앞에 세워져 있고, 거리에 세워져 있는 동상들은 손바닥보다 작은 녀석들이다.

시게루 본인이 직접 감수를 했으니 재현성은 매우 높지만, 한국 관광객들에게 별로 재미없는 코스로 알려지는 것도 어쩔 수 없을 듯.

 

워낙 오래전에 오랫동안 연재된 작품이고, 온갖 다양한 요괴들이 등장하는 옴니버스식 구성이라서

아마 일본사람들도 여기 전시된 캐릭터들이 어디 나온 녀석인지 다 기억하지는 못할 듯 하다.

여담으로 코믹스판에는 한국 요괴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최대한 작가의 오리지날 요괴를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 역시 생각보다 귀엽지 않은 캐릭터들에 놀랄 수도 있을것 같다.

초기 연재본은 아동용 애니메이션과 달리 거의 호러 장르에 가까웠기 때문에.

 

친절하게도 동상 옆에는 각각의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세세하게 적혀있었는데

설사 그걸 내가 찍어와서 전부 번역한다 하더라도, 그게 이 블로그와 대체 뭔 관계가 있을까 싶어서 패스.

애초에 게게게의 키타로 원작을 읽어본 사람이 한국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다.

물론 근래 복각판이 한국에도 출시되긴 했으나, 이미 뛰어넘기 힘든 시대의 간격이 놓여있으니까.

 

 

 

물론 동상이 주된 볼거리이긴 하지만, 이 산책길 곳곳에는 문득 사람을 미소짓게 만드는 요소들이 상당히 빼곡하다.

이 눈알 가로등은 키타로 작품에서 뺄 수 없는 중요 캐릭터. 캐릭터 일부분이 아니라 정말 캐릭터다.

눈깔아버지(目玉親父)라고 불리는데, 정말 키타로의 아버지. 예전에 한번 죽었는데 키타로를 염려하는 마음에 눈깔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그냥 훵하니 둘러보면 별것 없는 거리지만

세세한 것을 찾아다니는 성격의 관광객이라면 상당히 유용한 곳이다.

처음엔 조그맣게 늘어선 동상에만 눈을 뺏기지만, 잘 둘러보면 마을 전체에 키타로의 손길이 깃들지 않은곳이 없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라고 부를게 아니라 미즈키 시게루 월드라고 해도 될 만큼

이 산책로에 존재하는 모든 소품들, 심지어 거의 관계없어보이는 일반 주택들 사이에서도 키타로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요괴 동상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인데

의외로 요즘의 눈깔미소녀화가 진행중인 애니메이션 캐릭터보다

50년대 그림체인 키타로 캐릭터들이 입체화에 더 적응력이 있는 듯 하다.

 

흡사 고바우영감과 같은 신문만화 느낌이 나는 그림체라서, 미적 의무감이나 캐릭터의 몸값 늘리기에 연연하지 않으니

추해보일수 있는 모습이라도 입체화시에는 그게 고스란히 캐릭터의 특징으로 부각되는 느낌.

 

 

 

주인공이다 보니 여러군데서 출몰중인 키타로와 시게루 본인.

시게루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눈깔이 키타로의 아버지이다.

 

 

 

방금 전 언급했듯이, 이곳에는 키타로가 서려있지 않은 곳이 없다.

멀리서 얼핏 봤을때는 키타로 자판기인가 싶었는데, 옆에 자판기가 있는걸 보니 그건 아니다.

 

망원으로 길 건너편에서 담았기 때문에 재생해보고야 알았는데, 자판기가 아니라 재활용 쓰레기통이었다.

자판기용 분리수거 쓰레기통이니 캔과 페트병이 들어가는 구멍을 구분해 놓았다.

주위 목조건물과 나름 잘 어울리는 디자인인데 살짝 아쉬운 점이라면

기왕 두 개의 투입구니까 키타로 아버지인 눈깔요괴의 그림을 구멍 주변에 그려놓는게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정도.

그것도 생각해보면 키타로 아버지 눈알에다가 쓰레기 집어넣는 형국이 되니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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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길지 않은 코스길이지만 두 번째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더운 날엔 이렇게 한번씩 쉬어가는게 꽤나 도움이 된다.

 

센스있게도 휴게소 앞에는 이런 모래정원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다.

이는 일본의 정원, 사찰 등에서 자주 보이는 방식인데, 일본 근대 최고의 작가중 한명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서양의 정원이 레크리에이션과 공간활용에 중점을 둔다면 일본의 정원은 그림을 감상하듯

미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 모래 정원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띄엄띄엄 놓여있는 돌은 우리가 살고있는 육지를 의미하고

모래는 바다, 가지런한 줄무늬는 파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엄격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차도(茶道)와 함께, 정원의 구조와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도

옛날 일본의 잘나가는 분들이 가져야 했던 소양과 덕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좀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긴 하지만.

 

 

 

맞은편에는 그늘이 시원한 휴게소가 자리잡고 있다. 바람도 잘 통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땀을 식히기에는 그만이다.

카메라 장비를 들쳐매고 이리저리 렌즈 바꿔가면서 곳곳마다 발걸음을 멈추는 이쪽으로서는 오늘의 날씨가 좀 부담스럽지만

별 힘들이지 않고 후다닥 감상중인 단체 관광객들은 여기서 별로 쉴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냥 모래 정원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데 더욱 정성을 쏟는 듯.

 

1년동안 자전거여행을 다니면서도 본인 얼굴이 찍힌, 소위 인증사진이란 건 두세 장밖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에서 자기 모습 남기는 행위에 어떤 만족감이 존재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전부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의 흔적이고, 거울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는 한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없으니까.

 

반대로 여행중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찍은 본인 사진은 아마 그사람들 하드디스크에 잘 저장되어 있을 듯 하다.

나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많이 담은 편이니까.

 

 

 

날씨와 거리상의 문제로 결국 찾아가보지 못했던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그 유명하다는 '미술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정원 모습'을 한번 흉내내 본다.

아무래도 이렇게 넓직넓직한 창문을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아다치 미술관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품보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이 더욱 유명한 아다치 미술관은

조금만 검색해보면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실제로 이곳 산인지역에 여행을 온다고 해도, 워낙 교통편이 드물고 거리도 꽤 떨어진 개인 미술관이라서

이것저것 둘러보다보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곳의 절경이라 불리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휴게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유시엔의 모습이 충분히 그 마음을 보듬어 주는 듯 하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정말 사계절 모두 한번씩 찾아와서 각각의 매력을 담아내고픈 생각도 들고.

 

 

 

아다치 미술관의 정원이 유명해 진건, 창틀이 마치 미술품 액자와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

그래서 대부분의 사진은 정방향에서 액자처럼 찍힌 모습뿐인데, 유시엔에서까지 그런 흉내를 내려니

살짝 아쉬운 느낌도 들어서 이렇게 아무렇게나 각도를 틀어 담아보기도 한다.

 

신나게 내린 소나기 덕분에 햇살도 쨍쩅하고, 물을 실컷 머금은 조경수들도 생동감이 넘친다.

3일 내내 비가 와서 조금은 우울해져 있었는데, 귀국날 그 소나기 덕분에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가 상쇄되는 느낌. 어떤 여행이라도 끝나고 나면 그 총합은 제로가 되는 듯 하다.

 

 

 

땀도 식혔고 해서 슬슬 장비 점검해 마지막 코스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 전에 외로운 섬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한장 더 담아보고.

 

마치 우주 어딘가에 살아숨쉬고 있을 다른 생명체에게 날 좀 봐달라고 외롭게 소리치는 지구의 전파를 보는 듯 하다.

 

 

 

유시엔 산책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간다. 일반적인 코스와는 달리 두갈래로 나눠진 길이 있어서 안쪽으로 들어가 봤더니

언뜻 봐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불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 키보다 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담해 보이는 인상이고

특별한 미술적 가치를 가진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든 느낌이라서 의아스럽다.

 

일본식 정원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 정원을 만든 사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츠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히 안내책자를 뒤적거리다가 얼핏 읽은 바로는,

이 유시엔(由志園)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정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마도 근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정원일 듯 하다.

중앙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든것 같지는 않다. 이곳 다이콘지마까지 버스를 타고 오면서 풍경을 훑어보니, 정부나 시 차원의 계획 관광지로서

조성된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 그렇다면 아마도 이 지역 유지가 개인적으로 만든 정원일테니, 그 사람과 관계된 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원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것 역시 그런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정부나 마츠에 시에서 만들었다고 보기엔 좀 아담하다.

 

 

 

출발지였던 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경치 감상하랴 카메라 셔터 누르랴 해서 시간은 예상보다 많이 걸린 편.

그래도 워낙 여유있게 마츠에 시를 출발했기 때문에 승선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친다. 그쪽에도 유명한 볼거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긴 하지만.

 

출발할때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인의 지도를 받아 바로 정원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건물 안 테이블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걸로 봐서 찻집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듯 하다.

시원한 건물 안에서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차 한잔하는것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옆구리에 같이 온 사람도 없고, 일기장마저 잊어버리고 온 여행이라서 혼자 차 마시는게 왠지 어색하다.

경치 감상만으로 반찬(?)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건 왠지 본인의 미적 우아함보다 더 잘난체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이 든다.

 

 

 

산책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뭔가 놓친건 없나 싶어서 주변을 더 살펴보게 된다.

바위 위에 끼는 이끼와 비옥한 토양 위에 끼는 이끼, 나무줄기에 끼는 이끼가 전부 다른 종류라는 것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담아보기도 하고. 이 정도 기후에서 바위 위에 이끼가 낀다는건 꽤나 낮은 확률이다.

 

 

 

위의 바위와는 전혀 다른, 흐르는 개울가 옆의 그늘진 곳에서는 충분히 이끼가 번성할만한 여건이 조성된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실제 개울가에서 저렇게 소복히 깔린 이끼를 보게 된다면

밟는게 아까워서 개울가에 다가가기도 힘들 듯한 느낌. 감상에 목적을 두는 일본의 회유식 정원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물론 경치 감상하는 정원도 좋긴 한데, 잔디밭에서 개와 뛰어놀고 싶은 나의 희망상, 이런 정원은 입장료 내고 구경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삼각대와 ND 필터가 있었다면 조리개를 F22 까지 조여놓고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곳.

한국인 단체 관광객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몇몇 개인관광객밖에 돌아다니지 않은 상황이라서

크게 방해는 되지 않겠지만, 일단 이런 좁은 정원에서 삼각대를 설치하는건 매너 위반이긴 하다.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 언제든 들려오는, 몰지각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해 마음껏 비난하고 있는 입장이니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을것 같아도, 그것보다는 주위에 폐가 되지 않는지를 먼저 고려하는게 언행불일치를 막기 위한 수단일 터.

주인장한테 직접 가서 부탁하면 못 찍을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다른걸 떠나서 지금은 삼각대와 ND 필터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산책을 마치고 처음 출발한 건물로 돌아오자 가슴 시원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더운데 수고하셨다고 준비해 놓은, 얼음에 파묻힌 물수건을 보자, 이 정원에서 느꼈던 관리인들의 손길이 과연 착각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판기처럼 기계 한대 가져다놓고 척척 얼음 물수건이 나오게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손님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대나무 광주리에 아날로그식으로 놓여진 얼음에서는, 직접 손발로 뛰면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주변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원답게, 얼음 위에 살짝 놓여진 단풍잎 두 장이 더욱 운치를 풍긴다.

 

시원한 물수건이 목덜미를 적시니 정원 산책의 만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 하다. 이런 배려라면 점수를 더 줘도 괜찮겠지.

이 앞에는 정원 운영에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기념품들이 포진하고 있을테니, 위치상으로도 절묘한 배치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정취가 가득한 정원에서, 에어콘이 완비된 현대식 건물로 들어갈 때의 위화감을 줄이려는 의도였을까.

자동문 앞에 과하지 않게 홀로 서 있는 꽃꽃이 모습도 과하지 않게 자기주장을 하는 중이다.

회유식 정원 관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소소한 분위기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물수건이나 꽃꽃이에 눈길을 주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거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가치가 있었다. 정원 산책할때만큼이나 나를 기분좋게 해 줬으니까.

 

 

 

건물 내부는 상당히 넓고, 정원을 향해 나있는 창문이 내 키의 세 배는 될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어찌보면 정원쪽보다 더 밀도가 낮아서 널널하다는 인상이다.

 

마침 푹신푹신한 창가쪽 테이블에서 양복입은 장년층이 뭔가 이야기중이라서

전체 모습을 광각으로 담아내기는 좀 부담스러운 상황. 그냥 특이하다 싶은 녀석을 찾아보다가 이 인삼을 발견한다.

그러고보니 이곳 입장할 때도 붙어있었던 홍보 포스터에는 '모란과 고려인삼의 고장' 이라는 수식어가 적혀있던데

그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듯 하다. 고려인삼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으니 이곳에서 사용하는것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 인삼계를 주름잡았던 고려인삼의 명성이 일본에서까지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뿌듯하기도 하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본쪽도 인삼 재배에 과학적이고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어서

고려인삼이라는 타이틀을 제외하고, 순수한 약용효과로 따지자면 일본쪽 인삼도 세계 정상급에 속한다.

이곳 다이콘지마의 고려인삼도 전량 수출용으로, 일본 본토에서도 굉장한 가격대인 인삼을 수출용으로 쓴다는 건

본토보다 더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요즘 중국이 떠오르기 전엔 소비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던 일본에서

자국 소비보다 수출쪽에 중점을 둔다는 건 그리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

 

설명을 보니 이 인삼은 자연산으로 발견된 녀석중에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게 큰 녀석으로

추정 가치는 수억원을 넘는 듯 하다. 그걸 이렇게 전시해놔도 되는건가 싶은데.

 

 

 

인삼 사진찍고나니 매점 카운터를 보던 할머니께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정원 구경 잘 했고, 물수건 놔둔 것이 참 인상깊었다고 본말전도격인 칭찬을 하니 기뻐하면서 차라도 한잔 들라고 하신다.

종이컵에 담긴 녀석은 알싸한 맛이 감도는 인삼차. 과연 이곳은 인삼쪽으로도 유명한 곳인가 보다.

 

정원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을이나 겨울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니 꼭 한번 다시 와보라고 하신다.

특히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절경중의 절경이니 보면 좋을거라는데, 올해 가을이 한달 반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다시 오는건 무리고, 잘해봐야 내년에나 올 수 있을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는 조금 아쉬운 기분.

 

중간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 하니까 여느때처럼 깜짝 놀라주시고, 귀한 손님 오셨다는 듯한 대우를 해주셔서 약간 쑥쓰럽기도 하다.

단체 관광객은 한국쪽이 제일 많지만, 아마 이정도로 자기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 관광객을 보는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테니까.

처음부터 말은 잘 통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인하고 말이 통한다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할머니는 정원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자세히 풀어주신다.

 

산인 지방이 원래 낙후된 변경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다이콘지마는 제주도처럼 화산 융기로 솟아난 섬인데다가

서울의 동 하나보다도 작은 손바닥만한 화강암 섬에서는 제대로 된 농사도 짓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을 여성들은 이곳 특산품인 모란꽃을 한가득 등에 매고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방금 전 보았던 불상은 그 여인들의 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 그러고보니 가슴팍에 모란꽃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의 지주였던 사카에(栄)씨는 원래부터 장사에 소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젊어서 안해본 장사가 없다고.

1950년대, 전후 더욱 피폐해진 마을의 사정을 실감한 사카에씨는

'여성이 꽃을 팔러 멀리 떠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일본 각지에서 관광객이 구경하러 오는 정원을 만들자'고 결심하게 된다.

사카에 씨 본인의 가계는 생활에 그리 궁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에서 큰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예전부터 정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조(由蔵)씨가 아들의 의지를 지원해 주었다고.

 

주위의 논밭을 전부 사들이고, 화강암 덩어리인 토양에 흙과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같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착공 당시엔 이름 그대로 이곳은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중고로 배 한척과 불도저, 크레인을 각각 1대씩 들여와

끊임없이 육지를 옮겨다니며 자재와 나무를 실어날랐다고 한다. 지금은 육지를 잇는 도로가 만들어져 버스로 편하게 올 수 있지만.

그 때의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건물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를 직접 그곳까지 끌고 가셔서

자신이 지내왔던 세월의 흔적을 되짚어 가듯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신다.

 

착공 8년만에 일차 공사가 마무리되고, 사카에씨는 아버지 요시조가 꿈에도 그렸던 정원을 기억하기 위해서

유시엔(由志園)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공사를 거쳐서 점차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외국인으로서 듣기 어려운 생생한 세월의 기억을 알려주셔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자

할머니께서는 예상 외로, 그 건물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점원들은 모두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굉장히 뻘쯤하다.

아무튼 다들 쑥쓰러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뒷 배경의 커다란 모란 그림도 유명한 화가의 작품.

나를 안내해 주던 할머니는 앞줄 왼쪽에 앉아계시는 분이고, 앞줄 중앙의 할머니는 사카에 씨의 따님으로, 유시엔의 2대 주인이라고 하신다.

 

오늘 귀국날이라서 바로 가봐야 한다는 말에 조금 아쉬워하시는 할머니.

만약 우연이 겹쳐서 귀국일과 관계없는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함께 식사하는 정도의 대접은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가을의 유시엔은 정말 훌륭하니 꼭 다시 한번 찾아와 발라고 당부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뭔가 의무감이란게 드는 느낌.

실제로 이곳은 꽤나 마음에 드는 정원이고, 가을의 절경이 상상되는 듯 해서, 내년 가을에라도 인사하러 찾아가보게 될 것 같다.

 

또 하나 여행의 인연을 만들었으니 뭐라도 사 갈까 싶어서 기념품점을 둘러본다.

형체가 남는 물건은 어제 개미공방에서 구입했으니 넘어가고, 추천하고픈게 있느냐고 물어보니

요즘에 자신들이 개발한 모란전병을 추천해 주신다. 짭짤한 전병 사이사이에 모란을 닮은 분홍색 반점이 들어가 있는 녀석.

물론 모란 자체는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새우맛 소스를 대신 집어넣었다고. 고급스러운 새우깡 느낌이라 마음에 들어서 2개 구입.

하나는 집에서 먹고, 하나는 형님부부쪽으로 보내려고 한다.

 

 

 

폭우와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던 벼락이 떨어지던 좀 전의 하늘에서

잠깐 정원 산책을 하고 온 것 뿐인데, 청명하게 펼쳐져 있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었다가 꿈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그냥 버스 코스가 맞아서 귀국하기 전에 들렀을 뿐인 유시엔에서는

훌륭한 풍경과 함께 사연 많은 현지인들의 배려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화려한 모란에 숨겨져 있던 고난의 시간이, 한 지역 유지의 노력으로 인해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공간.

 

나와는 동떨어진 수백 년 전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원이라던가

중앙정부나 시 차원에서 조성되고 관리되는,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서의 정원이 아닌

힘겨운 생활을 보내는 마을 여인들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된 조그만 정원은,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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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가 여기저기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잘 둘러보면서 걸으면 거의 모든 지역을 다 볼수 있다.

수리중인지 원래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한두 군데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있는 곳도 있는데

그렇게 넓은 정원은 아니기 때문에 멀리 서서도 감상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예를들면 이런 곳. 지나갈 수 없게 만들어서 아쉽긴 하다.

오리지날 정원은 통로를 저런 자갈로 깔아놨기 때문에, 주인장이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고 나면

하인들이 매일 자갈을 고르게 펴서 깨끗한 형태로 만드는게 일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식 정원은 100% 확률로 개장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옛날 이 정원의 주인은 해가 지고 나서도 정원 곳곳에 설치된 불빛과 초롱 하나 들고 밤의 정원을 즐길 수 있었을 듯.

연못가에 반딧불이라도 서식하고 있다면 밤에 보는 풍경도 참 운치있을것 같다.

 

 

 

여름 한철이 지나가고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애매한 시기라서

푸른 초목과 이끼에 비해 화사한 꽃들은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에 모란관이라는 작은 건물이 한채 있는데

그곳은 초겨울이라고 할만큼 선선하며, 안에는 형형색색의 모란들로 이루어진 조그만 정원이 있다.

단순히 모란꽃만 모아놓은게 아니라, 작은 공간이지만 제대로 정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훌륭한 볼거리.

모란은 향이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지만 폐쇄된 공간에 그만한 모란이 피어있으니 은은한 향기가 가득 차 있다.

 

사진 촬영금지라는 푯말이 적혀 있어서 그냥 감상만 했는데, 단체 한국인 관광객은 그런거 신경쓸 이유가 없다.

모란꽃 앞에 가족들 세워놓고 신나게 찍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실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을때는 찍어도 큰 문제 없을듯 하다.

작은 건물이라서 사람들에게 방해될까봐 촬영금지라고 붙여놓은 듯 하니까.

 

어쩄든 관리자한테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모란관의 내부 모습은 촬영없이 눈으로만 감상하고 나왔다.

어쨰서 이 정원이 모란을 그렇게 중요시 하는지는 심히 궁금하다. 사시사철 다른 종류의 꽃이 피는 곳이라서 모란에 집중할 이유가 없는데

모란관이라는 별장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 이 정원과 관련된 뭔가가 있겠지. 훗날 알아보기로 한다.

 

 

 

밖은 덥고 모란관 안은 시원해서 나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이끼들 모습을 보니 땀 흘리며 셔터 누르는 보람이 있어 즐겁다.

 

 

 

숲 속의 숲이라고 할까. 고개를 숙이고 가까운 곳에서 지면을 바라보면

이제껏 봐 왔던 정원과는 다른 마이크로 세상이 따로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조경용으로 심어진 이끼는 나름 모습도 준수한 편이라, 방금 전 뿌린 비로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더욱 매력적.

 

 

 

절반쯤 코스를 돌다보면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조그만 가게에 도착한다.

분위기 타면서 한잔 해도 되겠지만 너무 여유부렸다간 버스 시간을 못맞출수도 있으니 조심하기로 한다.

호텔 숙박이라면 아무리 늦게 가도 관계없지만, 페리 승선시간에 늦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와버리니.

 

차 한잔은 넘기기로 하고, 그냥 그늘 벤치에 앉아서 숨좀 돌리며 주변의 꽃이나 찍어본다.

한달 정도만 더 넘기면 계절에 맞는 꽃이 활짝 필것 같아서, 그 모습도 기대가 된다.

 

 

 

가끔씩 코스가 두 부분으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조그만 언덕으로 나 있는 길 앞에는 폭포가 있단다.

정원의 크기를 볼떄 폭포라고 할 만한 녀석은 아니겠지만 아마 인공적으로 지어졌을 그 폭포의 모습이 궁금하긴 하다.

 

사실 일본의 정원은 뭔가를 보기 위한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길이 아니라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목적인 곳이라서, 이렇게 걸어가는 코스의 사진을 담는게 목적에 더 부함하는 듯.

 

 

 

인공 폭포임에도 꽤나 볼만하다.

인공은 인공이지만 돌 색깔로 칠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진짜 돌을 쌓아 만든 녀석이라서.

 

그렇지 않은 곳도 많지만, 중간중간 제주도에서나 많이 보이는 현무암이 많이 놓여있는 걸 보고

이곳도 화산융기로 솟아난 곳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곳 유시엔이 속한 곳은 여의도같은 내륙의 섬이다.

내륙 호수이긴 하지만 바다와 연결된 곳이라서, 사실상 그냥 섬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

 

이름은 재미있게도 다이콘지마(大根島), 다이콘은 무라는 뜻. 총각김치 만드는 그 무.

무리는게 생으로 먹으면 좀 매운 느낌이 있는데, 소바 양념장에 갈아넣는 무 종류중에는 특히 더 매운 녀석이 있다.

카라미다이콘(辛味大根)이라는, 의미 그대로 '매운맛 무'라는 이 녀석을 갈아서 양념장에 넣으면

시원시원하면서도 톡 쏘는듯한 매운맛이 소바의 맛을 더해준다.

 

아르바이트하던 소바집은 젊은 사장님부부과 그 부모님, 친척, 동네 할머니등이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키가 190은 되는 거구의 사장님은 전반적인 요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 외의 잡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힘 없는 다른 분들을 대신해, 재료중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무 갈기는 항상 내가 도맡아 했던 기억이 난다.

 

점심시간에 카라미다이콘과 와사비를 듬뿍듬뿍넣고, 한입 먹을때마다 머리속이 찡해지는 느낌을 즐기고 있으니

역시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하면서 놀라워하던 그쪽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아마 이곳이 제주도처럼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섬이라면, 벼농사보다는 무 재배같은게 주를 이루었을 수도 있겠지.

 

 

 

중간중간에 묘한 나무판이 보이길래 뭔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태우는 모기향이 설치된 상자였다. 대낮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조금씩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시원하게 물린 뒤라서, 이 넓은 곳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이란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손님들을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에 기분은 꽤나 흡족하다.

 

 

 

단체 관광객들은 이미 구경 다 마치고 기념품점에 와글와글 몰려있다.

나로서도 이곳 유시엔에서 좋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기념품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제 이즈모의 개미공방에서 몇가지 기념품을 구입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패스.

애초에 이 풍경을 놔두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기념품점에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이제 산책로도 중반을 넘은 듯 한데, 거닐어보면 참 즐거울듯한 연못 위 나무다리는

아쉽게도 출입할 수 없는 장소였다. 예전에는 실제로 거닐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게 조금 아쉽다.

 

사진 담으면서 여러번 느꼈지만, 단풍이 한창 물드는 시기의 유시엔은 정말 환상적일 듯 하다.

너무 꽉꽉 들어차있는 느낌이 드는 지금에 비해서, 소나무의 푸른색과 단풍의 붉은색이 적절히 혼합된 가을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완성도있는 풍경을 선사해 주지 않을까 싶다.

 

가을에도 꼭 한번 들러보고 싶지만, 사진을 담을 당시가 9월 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올해 가을에 다시 가기엔 좀 그렇지.

 

 

 

키우는 녀석인지 알아서 들어와 사는 녀석인지 모르겠다.

연못 안의 붕어들이야 구입해와서 기르는 녀석들이겠지만.

 

그래도 뭐 먹이 받아먹고 하다가 알아서들 정착한 녀석들이지 않을까 싶다. 천적도 별로 없고 사람도 안건드리고.

오리가 고개를 뒤로 접어서 턱을 앞가슴에 괴고 있는 저 모습은, 사람이 보기엔 뭔가 어색하지만 실은 편안한 휴식 자세.

일광욕을 즐기며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나보다도 저 녀석이 이 정원을 더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느긋하게 걷다보니 처음 출발했던 건물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면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인데, 오솔길마냥 시야가 가려지는 부분이 많아서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도 각각 다른 공간을 산책하고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게 나름 섬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강인한 생명력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던 시기라서

조경수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녹색 에너지에 조금 지쳐갈 즈음이면

이렇게 사진을 만져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와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어차피 푸른색 위주의 단색 풍경이었지만

무채색으로 바꾸고 나면, 화려한 색에 산란된 형태적 미학이 좀 더 쉽게 느껴지는 듯 하다.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는 곳에서 렌즈를 갈아끼우는게 나름 귀찮은 일이긴 해도

광각으로 담은 이끼와 망원으로 담은 이끼의 모습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즐거운 작업이다.

 

멀리서 보면 보슬보슬한 녹색 모래처럼 보이는 이끼지만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엄연한 조경수의 동료로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마크로 렌즈까지 가지고 왔다면 조경용 이끼의 모습을 좀 더 세밀하게 담을 수 있었겠지만

24mm 단렌즈, 50mm 단렌즈, 70-300 망원렌즈를 들고도 이렇게 헥헥거리는데.

 

육중한 본인의 카메라는, 일단 결과물에 불만을 주지 않기 때문에 굳건히 내 옆구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렌즈를 여러번 교환하는 도중에는 역시 가벼운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완전 기계식 필름카메라와는 달리, 수명이 정해진 디지털 기기라서 언젠가는 다른 녀석으로 바꾸겠지만

훨씬 작아진 녀석을 만지작 거리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또 지금의 육중한 반사식 카메라의 느낌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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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보여주고 입장료 반값 할인받은 후 짐 맡기는 곳을 물어보자 자기들이 직접 맡아주겠다고 한다.

백팩이 좀 커서 보관함에 안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애초에 보관함이 없으면 어떻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입구 부분이 수리중이라서 약간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정원쪽은 돌아보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다행.

 

변형된 입구로 들어가는데 안내하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방금 도착하신 일행분이신가요?' 라고 물어본다.

아마도 같은날 이곳에 페리로 도착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이곳에 온 모양인데, 그쪽과는 관계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출 리는 없을텐데... 아무래도 그쪽 팀 역시 비 그치기를 기다린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얽히는 일 없이 혼자서 느긋하게 돌아보고 싶으니 전후방 주시해가며 전진.

 

아직 비구름이 지나가고 있는 도중이라서 그렇게 화창하진 않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쨍쨍해 질듯한 하늘이다.

입구를 통과하고 처음 마주한 유시엔의 모습은 생각보다 넓으면서도 생각보다 좁은 듯 하다.

 

뭔 선문답인가 하면, 정원 전체의 크기는 생각했던것보다 커서

지역의 대표급 정원들에 비하면 좀 작아도 충분히 입장료를 지불할만한 넓이였다는 뜻이고

생각보다 좁다는 것은, 정원에 심어진 조경수들의 밀도가 좀 빡빡한 느낌이 들어서 확 트이는 시원한 느낌보다는 오밀조밀하다는 뜻.

 

 

 

그래도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한적한 시골마을의 외딴 정원이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다.

굉장히 세심히 주의를 들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확연히 드는 조경수들의 상태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정원이란 온갖 식물들을 최상의 상태로 보전하면서, 산, 물, 땅 등의 요소를 축소해 집약시킨 공간.

인위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쟀든 이런 인공적인 미를 유지시키려면

마치 축산업에 종사하듯이 휴일없이 사시사철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확실히 관리 하나는 잘 되어있다는 느낌.

 

 

 

입구가 달라졌기 때문에 원래 이 루트인지, 내가 지금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산책 시작하자마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정원 내부의 식당인데, 정원을 둘러보기도 전에 식당이 나오는건 조금 의아하다.

 

하지만 공사중이라고는 해도 소소한 서비스 정신을 잊을리가 없는 이쪽 사람들 탓에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 정확한 루트라고 나무 푯말이 확실히 박혀있기 때문에 어쨌든 지금은 이 방향이 맞다.

보통 식당이나 기념품점은 관광이 다 끝나는 지점에 세워놓는게 지극히 정상적인데,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건지.

 

아무튼 마츠에에서 밥은 여러가지 많이 먹고 왔으니 여기서 한끼 할 일은 없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한끼 하는 식사도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여기에서까지 외국인 할인은 되지 않겠지.

 

정원의 미관을 전혀 해치지 않는 외관이나 색상, 소재 선택은 이곳의 완성도를 재차 어필하는 듯 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기분이 좋아진 이유중 하나는, 이곳이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이끼 정원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고, 일본의 정원 중에서는 단연 이끼 정원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유명한 정원이라고 해도 이끼 정원이 아닌 경우는 많다. 정원 전체를 이끼로 덮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

예전에 도쿄 옆의 하코네 이끼정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태양빛에 반사되는 찬란한 이끼들의 향연이 너무나 인상깊었기에

오랜만에 접하는 이끼정원의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일시에 기분을 고취시켜준다.

 

하코네 이끼정원에 대한 포스팅은 아주 옛날 녀석이 남아있으니 보실 분들은 이곳으로.

 

 

 

이끼 정원은 일반 정원에 비해 풍성함이라고 할까,

걸어가는 루트 이외의 장소가 전부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힘들지만, 습한 기후의 일본에서도 이끼 정원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수십 가지의 이끼를 배양해서 정원을 만들어도, 그 기후와 토양등 수많은 요소에 적합한 녀석 몇종만 간신히 살아남는다.

생장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냥 놔둬서 되는 녀석들도 아니고, 사람이 만든 공간에서 살아가려면 사람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이끼 정원은 별천지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연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 저 사진의 토양 부분이, 이끼가 없는 평범한 흙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느낌이 어떨지 짐작이 갈까.

잔디와는 완전히 별개의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는 생소한 풍경이다.

한국에서도 이끼 정원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지만, 야외에 광범위하게 만들기에는 기후상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일본적인 맛을 느낄 수 있는게 이 정원이라면, 그 중에서도 이끼 정원이야말로 타국 여행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밀도가 조금 높긴 하지만 부족한 부분 없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유시엔의 모습은 1등급 정원이라고 결론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본의 3대 정원이라는 곳중 두군데는 돌아봤지만, 그 몇대 어쩌구 하는 수식어에 휘둘리는 듯한 느낌.

훌륭하기로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 이름값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정원의 모습은

본연의 가치를 감상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 유시엔은 한적하게 홀로 거닐만큼 여유가 있어서, 조금 빡빡한 느낌이 들어도 충분히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쪽도 여기저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긴 한데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찍는 기념사진인듯, 나하고는 다른 차원의 생물 같으니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진 찍는 반면 이동속도는 나보다 훨씬 빨라서, 내가 몇장 찍고 있으면 금새 앞질러 가버린다.

덕분에 이쪽은 얽힐 필요없이 천천히 진행할 수 있으니 나쁠거 없지만.

 

 

 

규모로 보면 그렇게까지 큰 편에 속하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봐도 상당히 알찬 느낌의 유시엔.

정원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동선과 그 주변의 풍경 등 설계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복잡하다.

걷다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차 한잔 할 수 있는 가게 등도 철저하게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적한 시마네현이기 때문에 이렇게 멋들어진 풍경 촬영에 열을 올려도 방해받지도, 남을 방해하지도 않는 여유가 가능.

유명한 정원에 가면 걷다가 마음껏 사진 담을 공간마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틀간의 페리 여행과 이어지는 비 때문에, 시작부터 뭔가 꿀꿀하고 초초한 기분이었던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홀로 녹음속을 마음껏 거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듯 하다.

 

 

 

사진 찍을 포인트만 찾아다니는 건 아니고.

사진 한장 찍기전에 1분쯤 그자리에 서서 천천히 주변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잊지 않는다.

 

옛날 일본 다이묘들은 이런 정원을 자기 집 안에 떡하니 지어놓고 매일 산책하며 물고기들에게 먹이나 주는 호사를 누렸다.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행위가, 다행히도 오늘날엔 약간의 입장료를 지불함으로서 체험이 가능하다.

 

물론 옛 다이묘들 중에는,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기 소유의 저택과 정원을 팔아서 곡식을 구입해 나눠준 사람도 있긴 하다.

 

 

 

자연 그 자체라면,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예술성을 뛰어넘는 장관을 연출하지만

미약한 사람의 힘으로 그 흉내를 내려는 노력이 빚어낸 일본식 정원은, 아주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써야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멘트 길 위에는 자갈이라도 뿌려서 그 인공적인 느낌을 감춰야 하고

들어가서는 안되는 정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철봉이 아니라 굽이진 대나무로 위화감을 없애야 한다.

 

소소한 곳에 신경을 쓴다면, 보는 사람 역시 소소한 곳까지 뜯어봐도 만족감이 드는 법.

나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벌써 저 멀리 기념품점에서 바글거리고 있는 단체관광객은 이런 요소들을 음미하고 있을려나.

 

 

 

햇살에 반짝이는 이끼의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하코네 이끼 정원에서 받았던 그 감격을 실로 오랜만에 느낄 수 있으니 셔터를 누르는 횟수도 늘어난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왼편의 저 나무가 단풍으로 물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잘 만들어진 정원은 사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을의 유시엔이 매우 절실해지는 느낌.

봄과 여름에는 이렇듯 색이 좀 단조로워지는 느낌이 있지만, 가을의 정원은 그야말로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절경을 뽐낸다.

 

물론 눈으로 덮인 겨울정원의 모습도 빠뜨릴수 없고, 자연을 모방한 정원이니 계졀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도 당연하다.

 

 

 

이끼의 생육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잘 자라다가도 조금만 일조량과 습도 등이 변화하면 곧 죽어버리는 녀석들이라서

나무 앞쪽의 이끼들은 이미 누렇게 죽어버렸다. 물론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지만.

 

죽은 이끼들 사이로 다른 종류의 이끼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도 보인다.

정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저 틈을 되살릴 것인지도 궁금하다.

 

 

 

반대로 그늘이 많아서 습도가 높은 지역의 이끼는 또 그 느낌이 다르다.

색도 진해지도 조밀해져서 이름 그대로 그늘에 걸맞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항상 일정한 색과 밀도를 유지하는건, 천해의 혜택을 받은 지형과 날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재로서도 불가능에 가깝고

넓은 벌판에 고립된 정원이 아닌 이상 주변 건물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하다.

 

여기저기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오늘 갈아입은 반바지 밑이 좀 가려워진다.

장소가 장소다보니 모기가 아주 신나게 활동중인듯 하다. 마지막 날이라서 편하게 반바지 입었는데 이런 함정이 도사릴줄은.

다 잡아낼수도 없으니 그냥 물리면 물리는대로 놔 두는수 밖에.

여담으로, 그때 물린 흔적은 한달 반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이끼 정원의 매력은 역광 촬영시에도 잘 드러난다.

빼곡한 조경수 덕분에 직광을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에 빛은 부드러워지고

오밀조밀한 이끼가 지면 가까이서 반사되는 빛에 부드럽게 퍼지는 모습은 푸근하기 그지없다.

 

인공적인 산물이긴 해도, '이 곳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기를 여러 차례.

 

 

 

나무의 새순들은 어떤 운명을 맞을지 궁금하다. 조경수라는 목적상 이런 새순은 쳐내버리는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새순 잎사귀 밑에 매미껍질이 보인다. 이번 여름은 한껏 더웠으니 이 녀석들, 원없이 울어대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늦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30도를 넘나드는 날씨라서,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남아있는 듯 느껴진다. 착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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