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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01  동해안 자전거여행 Fin. 18
  2. 2011.10.29  동해안 자전거여행 7편 26
  3. 2011.10.27  동해안 자전거여행 6편 20
  4. 2011.10.25  동해안 자전거여행 5편 21
  5. 2011.10.23  동해안 자전거여행 4편 23
  6. 2011.10.22  동해안 자전거여행 3편 18


포항과 거기 속한 흥해읍은 내 어린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곳이다.
제 2의 집이자 제 2의 고향이라 할 만한 곳이었고, 대구와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른 곳이라 세상을 넓히는 데 큰 일조를 한 곳.

삼사 해상공원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장사 해수욕장부터는 그런 이유로 인해 새로운 여행이라는 느낌이 들질 않는다.
내 인생중 찾아간 해수욕장의 90% 는 이곳 포항쪽이었으니.

여기서부터 다시 7번 국도와 합쳐지는데, 사실 바닷가 도로도 있긴 했지만 이곳은 그냥 전속력으로 내륙쪽 7번국도를 달렸다.
이번 여행중 속도를 낸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두시간에 30km 를 내달렸다. 평지에서 내 자전거로 낼 수 있는 최대속력.
7번국도는 역시 해안도로보다 편안하다. 그냥 편안한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자동차를 배려한 것이겠지만 경사도 급하지 않고 거의 직선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이런 곳에 비하면 해안도로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겠지.

흥해읍의 이 사진은 관광지가 아니라 오직 본인한테만 의미가 있는 곳이다.
두 번 다시 저기 보이는 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고, 내 인간불신에 크나큰 공헌을 해 준 장소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으며, 어디까지 뻔뻔해질 수 있으며, 어디까지 망각할 수 있는가를 체험한 곳이기도 하고.
가해자는 용서받을 마음은 커녕 잘못했다는 마음조차 없음에도 항상 용서 용서라는 단어를 달고 살아야 하는 피해자 타령에 진저리나는 곳이기도 하다.

덕분에 난 아마 남한테 사기는 안당하고 살거다. 아마 당한다면 그 금액 이상의 가치를 반드시 뺏어올 테니까.
본인이 별로 중요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부류한테 사기치다간 일생 좋은 꼴 못 볼거다.

포항 구경은 이 사진 한장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이 부근에서는 여행이라는 걸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래서 바로 포항으로 들어가 구룡포로 후다닥 달려나가는 도중, 아버지께 연락이 왔다.
내일이 제삿날인데 왠만하면 돌아오라는 전화였다.
자식이 하는 일에는 굉장히 관대한 아버지지만 집안 제사에 빠지는 것은 천하에 있어서는 안될 일로 여기는 분이라서.
제사라는 의식을 굉장히 싫어하지만, 그래도 여행이라는 핑계로 빠지기에는 너무 야비하다.

포항 언저리서부터 사진은 접고, 울산쯤 가서 다시 마음 다잡고 여행을 즐기려던 찰나였기 때문에
전화 받은 후 방향을 돌려 포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사진을 찍은 게 하나도 없다.
가던 길을 돌아가면 그 만큼 감흥도 떨어지는 편이고.

포항에 도착하니 시간은 4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부터 밤까지 열나게 페달 밟아서 경주 근처까지 간 후, 다음날 새벽부터 미친듯이 달리면 제사 전까지 대구에는 도착한다.
며칠동안 제대로 눈을 붙여보지 못한 지금 그런 짓 해서 거지몰골로 본가에 돌아가서 바로 제사 지내는 건 하나의 개그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말끔하게 돌아가자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둘러본 끝에 비즈니스 호텔을 찾아 투숙했다.
일본서 매번 이용하던 비즈니스 호텔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만, 목욕탕이 없이 샤워시설만 갖춰진 점만 빼면 편안한 곳이다.
조식도 나온다 하니 근처 슈퍼에서 적당히 먹을거 사들고, 마지막 기념으로 맥주도 한캔 사들고 돌아왔다.

포항제철 바로 근처라서 환상적인 야경을 자랑했지만 아침에 지나온 코스가 진득하게도 마음속을 조여와서
사진 찍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행을 치장하고싶은 생각은 없다. 그 기분에서 멋들어진 사진을 찍는건 내 여행이 아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문득 생각나던 장면이 있었다. 이때 정말 기분 좋았지.
역시 난 일출보다 일몰이 더 마음에 든다.

이번 여행땐 이런 장면을 보지 못한게 조금 아쉬웠고, 그 외엔 그냥 무덤덤했다.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던가, 성취감을 느꼈던가 하는 감정은 없었다.
1년간의 자전거여행에 비하면 정말 가볍게 산책하고 온 듯한 느낌이라서.
그래서 내일 버스로 돌아간다는 사실에도 별로 아쉬움이 없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자전거를 서울에서 대구까지 옮기는 것이었으니.

거의 매일 매시간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꿈을 꾸지만
이번엔 여행을 한다는 느낌 자체를 처음부터 많이 배제한 상태에서 시작한 터라
자동차로 치면 가볍게 드라이브하며 기분전환한 정도의 감정밖에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게 아쉽다는 말은 아니고. 밋밋하든 짜릿하든 내 여행의 목적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의 것이다.



다음날 버스를 타고 대구 터미널에 도착해 집까지 달리는 30분간 좀 민망하긴 했다.
대구정도의 대도시에서 완전무장한 여행용 자전거로 달리는 건 역시 좀 시선이 쏠린다.

막상 돌아와보니 안돌아왔으면 큰일날뻔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저런 사정때문에 불참한 친척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나마저 없었으면 아버지 많이 쓸쓸해 하셨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부터 울집의 제사 형태가 바뀌었다.
요즘 한창 성당의 교리에 빠져있는 아버지께서 제사도 성당식으로 해 보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
기독교는 아예 제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성당에서는 거의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
사실 기존 제사와 별로 바뀐 건 없다.

조금 일찍 지내고, 제삿상이 간소해지며, 간단한 기도와 함께 여성들도 함께 절을 올리고 참가한다는 것 뿐.


매번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 장만해야 했던 엄니께서는 당연히 좋아하신다.
내가 어릴 적엔 새벽 6시에 출근하시는 엄니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항상 밤 12시에 제사를 지냈지.
음복후 고주망태가 된 집안 남자들 처리한후 설거지하고 4시간도 안되는 수면 후 다시 출근하셨다.

물론 음식 만들때도, 음식 치울때도 이 집안의 남자들이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한마디로 개같은 짓이었다.

물론 엄니의 절규에 가까운 항소로 제사 시간이 9시로 바뀌었고, 이제는 더더욱 편안한 방법으로 바뀌었다.
지난 번 내가 타 블로그를 참고하며 만들었던 오븐구이 닭도 만들어 보시고, 신세대틱하게 치즈케이크까지 올려놓으셨다.
물론 이런 변화는 나로서도 흐뭇하다.

모태신앙이긴 하지만 지금은 종교와 연을 끊은 나로서는 기도시간이 조금 어색했지만
사진 찍는다는 명목으로 거의 넘어갔으니 뭐. 다음부터는 함께 기도문이라도 읽어야지.


그 후, 집 크기에 비해 상당히 넓은 현관 안에 놓여진 자전거를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얼마 안되서 서울로 출장가신 엄니 대리운전 명목으로 잠시 올라가기도 했다.
나침반님 만나서 이번 여행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무사히 엄니대신 거대한 G모 자동차를 몰아 본가로 돌아왔다.
왠지 그 때서야 여행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설픈 마무리를 매듭짓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자전거로 한국을 다시 돌아볼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다.
비수기의 동해안 도로만큼 자동차 신경안쓰고 달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을테니.
그리고 자전거로 즐기기엔 한국은 좀 좁다. 자동차나 바이크가 적당할 듯.
속도면에서 비교가 안되는 탈것들이긴 하지만, 자전거 여행은 시간을 진득히 들이는 것 자체가 여행에 들어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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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필할만한 특징과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공원이 된 것인가.
부지나 접근성 등에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공원이 된 것인가.

일단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으면 위의 두 공원은 모두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하지만 아무리 해가 지나도 두 공원의 본질적 차이점은 좁혀지지 않는다. 태생이 다르기 때문에.

해맞이공원 중에서는 꽤 유명한 이곳은, 객관적인 사실여부를 배제한 개인적 견해로 후자에 속하는 듯 하다.
울진, 영덕, 포항을 어우르는 편리한 접근성과 함께 해산물 시장으로 유명한 강구항과 인접,
숙소가 풍부한 삼사해상공원과 자동차로 쉽게 이어지는 연계성, 주변에 어촌이 형성되지 않은 공간적 이점 등등.

반대로 경상도 해안가도로중 이곳의 해돋이가 더 장관이고 유명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시야, 이런 언덕은 이곳에서 너무나 흔하거든.


그 무난함과 차별화되는 특징을 위해 세워진 창포말 등대는 좋은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밤엔 루미나리에와 함께 등대에서 발산되는 몽롱한 레이저도 사람을 끌어들이고
창포말 등대에서 바라보는 동해 일출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으니까.

좋은 공원이면 그걸로 됐지 뭘 그리 따지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것도 아니지만
어느 한쪽의 우월을 위해, 그리고 그걸 이용해 내 불만을 표출하자는 의도는 아니다. 이곳은 굉장히 잘 만들어지고 훌륭한 공원이다.

단지, 자전거여행을 정리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던 중
무의식적으로 끌렸던 여러 관광지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곳들은
위에서 말한 전자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의 관광지 선택 기준은 그런 쪽으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했다는 것 뿐이다.

즐길거리와 볼거리는 동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에게는 그 두가지가 꽤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밤에 이런 루미나리에 사이로 난 계단을 '연인과 함께' 걸어 내려가며 낭만을 즐기는 것. 훌륭하다. 하라쇼.
내가 여행을 즐기는 방향도 아마 '혼자'라서 즐길거리보다 볼거리쪽으로 기우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냉철하게 생각해봐도 그렇다.

물론 그 볼거리라는건 가능하면 설정 갖다붙여서 만든 게 아닌,
지역의 역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던가 위대한 자연의 손재주가 만들어낸 것이라던가가 더 좋다.
아쉽게도 내 옆에는 옆구리를 근질거릴 짝도 없고, 이 공원에는 시간이라는 재료를 들여 빚어낸 특징이란 것도 없다.
그래서 그냥 좋은 사진 건지겠네 라고 생각하며 바람 쇠는 정도의 감흥밖에 들지 않는 듯 하다.


이런 감정과 함께 공원을 둘러보면 사물을 대하는 인상도 바뀌는 법.
이 사진을 찍을때도 생각하던 건 '흰색 건물을 하늘과 찍으면 하늘이 시퍼렇게 잘 나오지. 좋다' 정도였으니까.
영덕의 상징인 대게의 다리를 본떠 만든 어쩌구 하는 감상은, 여기서 기억해 낼 만한 특징조차 아니어서 아무 느낌이 없었다.

일본의 전래동화 모모타로 이야기의 고향인 오카야마와 그 옆의 쿠라시키에서는
원형이랄게 남아있지 않은 그 소재를 적극 활용해, 도시 전체에서 모모타로라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도록 했었다.
조그만 공원에도, 개천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다리 위에도 모모타로와 친구들의 동상이 소박하게 자리 잡고
가게에서는 모모타로가 먹었다는 경단을 캐릭터 스티커와 함께 팔고, 다른 지역에는 없는 모모타로 버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을 판다.

울진과 영덕에서 대게 관련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경쟁하듯이 세워진 대게 동상과 도로변에 끝도없이 늘어서 있는 대게모양 장식물. 그리고 이 등대 정도다.
여행에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크고 특징적인 것들이지만
굵고 짧은 것보다 길고 가는 것이 여행에서는 여운을 남긴다고 본다.

관광버스를 타고 주르륵 둘러보거나, 자동차로 일일관광을 즐길 때는 분명 이런 게 어울리겠지.
그런데 자전거로 사골까지 고아먹으려는 나 같은 여행 스타일에겐 이건 수명이 짧다.
하다못해 한국 최고의 해돋이를 자랑한다는 이 곳에서 대게모양 휴대폰 스트랩하나 파는 가게가 없다.


이러저러하게 이 곳의 관광전략에 대해서는, 참 애써서 만들었는데 활용할 생각은 별로 없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지만
일단 풍경 하나는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곳이라 그것만으로도 7번국도를 포기하고 이쪽으로 달려올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여행중 처음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만난 곳이기도 하고.
좀 더 편리한 이동수단을 갖고 이곳에 온다면 아마 밤풍경도 즐기고 야영장에서 밤 세운 후 멋들어진 일출을 보며 셔터를 누를 것이다.
단지, 그런 유희에 적합한 시기가 되면 지옥같은 인파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상상만으로도 느껴지는 듯 하다.


낙서해도 될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글씨가 써 지고 보여질만한 장소에는 여지없이 낙서가 즐비하다.
등대 벽에다 낙서하는 인간이 남한테 정신 챙기라는 조언을 할 위치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아이를 동반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를 안고 이 등대를 오르락내리락 하더라.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조금 아찔하고 어질하다. 수없이 뱅뱅 돌기 때문에 좀 어지럽다.


전편과 이어지기 때문에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이날 아직 아이스크림 한개 외엔 뱃속에 넣은게 없었다.

해맞이공원에 위치한 간이 가게에서 과자와 컵라면을 팔고 있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정도의 폭리에 내 배고픔이 무릎을 꿇을 정도로 부조리에 대한 저항심이 약하진 않았기 때문에
해맞이공원을 지나 또 다시 나타난 조그만 어촌마을 횟집을 찾았다.

손님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가게에 들어가서 여느때처럼 혼자 먹을 게 있느냐 물었는데
다행히도 이 집에서는 회덮밥과 물회라는 개인용 메뉴가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회 역시 회덮밥처럼 밥을 말아 비벼먹을 수 있지만 아주머니께서 회의 신선함을 즐기는데 밥의 온기가 방해되니
그냥 따로 먹는게 정석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손님도 없고 작은 횟집이지만 워낙 바다와 맞닿은 어촌이라, 회는 상당히 신선했다.
사실 회를 채소와 고추장에 비벼먹는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어쨌든 꿀맛이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말에 안스러워하시던 아주머니는 밥도 덜 먹었는데
한그릇 더 드시라며 공기밥을 추가해 주셨다. 사실 한그릇으로도 충분했지만 호의를 거절할 순 없어서 거뜬히 먹어치우는 '척'을 했다.

식사 끝나자 커피도 한잔 드시라며 타 주시고, 아마 웰던이 된 직후 진흙탕에 넣고 몇일 숙성시킨 몰골을 하고 있어서인지
많이 애처로워 보였나보다. 거듭 감사인사를 드리고 든든하다못해 '이것은 마치 입에 넣자마자 밑으로 빠져나오는' 듯한 포만감을 느끼며 다시 출발.


해맞이공원과 강구항은 매우 가까워서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강구에서 개불 사다가 신나게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곳은 자전거 세워놓고 어디 들어가서 개불 먹기엔 조금 위험할 정도로 붐비는 곳이라
호객꾼들의 살가운 목소리를 뒤로 하고 천천히 자전거를 전진시켜 빠져나갔다.
나한테도 싸게 해드릴게요라고 붙잡는데, 내 행색이 해산물 싣고 달릴 수 있는 행색인가?

여기저기 대게대게 소리를 지르지만 강구항에서 대게를 살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니 애초에 희망도 가지지 말길.
어떤 곳은 대게 5마리 10만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간판도 걸어놨다. 요즘도 대게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일단 어떤 허풍과 거짓말도 쉽게 용서되는 배려심 철철 흘러넘치는 대한민국이니, 그 정도의 광고는 그냥 넘어가 주는것 같기도 하다.

최상급 대게를 먹었던 7년 전쯤의 가격이 한 마리 10만원이었다. 그것도 소매가가 아닌 도매가로. 그냥 웃고 말지.
그 정도 대게는 긴다리의 마디 하나가 내 오른손 쫙 찢어 벌린 정도의 길이다. 
거의 킹크랩급의 크기지만 맛은 천하일품이지. 킹크랩 5마리하고도 안바꾼다.


강구항은 그저 멋들어진 풍경하진 한 장을 남기고 지나갔다. 강구항 바로 옆에는 삼사해상공원이라는 거대한 공원이 자리잡고 있어서
비수기인 지금엔 어디든 노숙할만한 장소는 차고 넘쳤다. 지붕까지 달린 공연장도 텅텅 비었고 근처엔 편의점과 호프집도 완비. 술을 마실 건 아니지만.

동해안은 뭐, 사실상 어딜 달리든 해맞이 구경하는덴 최적이니 명소라는 수식어가 조금 퇴색하긴 하지만
확실히 편의시설, 숙박시설, 오락시설이 충분한 삼사와 해산물 풍부한 강구항, 산책하기 최적인 해맞이공원까지
모두 자동차로 10분거리에 위치하다 보니, 이곳은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효율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찍고나니 이 시기에 왠 벚꽃인가 싶었지만 전부 조화였다. 뭘 기대했던걸까.
넓은 녹지에 한산한 인파덕에 여기서 만난 고양이만 네 마리는 된다. 물론 경계심은 심해서 사진 찍을 순간도 없었지만.
어젯밤 모기때문에 잠을 설친 덕에 믾이 피곤했다. 편의점에서 오징어다리까지 사서 컵라면과 함께 뜯어먹고
시체가 되어도 한동안은 못 찾을만한 구석진 곳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가서 잠자리를 만들었다.
넓은 주차장쪽은 아무래도 너무 눈에 띠고, 의외로 관광버스라던가 바이크 라이더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하더라.

높은 언덕 위라서 파도소리도 그렇게 거슬리지 않고, 밤이 되니 정말 얌전할 정도로 조용해 진 덕에 꽤 편안했다.
자전거 끌고 언덕 올라가느라 고생좀 하긴 했다. 그리고 귀마개가 문방구에서 산 싸구려라 좀 딱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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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잠자리에 들때까지는 좋았는데 예상치 못한 적이 나타났다.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밤새도록 모기가 출몰한 것.
처음엔 한두마리 잡고 누웠는데 이게 끝도 없이 계속 나오고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바닷바람에 강하게 큰 녀석들인지 왠만해서는 안 붙는 눈이나 입 주변에까지 신나게 붙는다.
반대로 너무 무방비하게 달려만 드니 잡기는 편했지만 이상하게 끝도 없이 계속 나온다.
결국 새벽 4시까지 모기 14마리를 잡고 피곤에 지쳐 쓰러졌지만 그 와중에도 귀며 손이며 팔이며 계속 물린 탓에
결국 반쯤 깬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도 벽에 붙어있는 모기만 세 마리더라.

출발하려고 짐 챙기는데 할머니께서 물도 차가운거 받아가라고 식당쪽 정수기에서 꽉꽉 담아주신다.
모기 이야기를 하니 그렇게 들어올 리가 없는데 하시며 방 점검을 해봐야겠다고 하시더군.
그렇게 많았으면 모기약 받아가지라고 하셨는데, 새벽 3~4시에 혹시나 주무실까봐 내려가질 못했다.
어찌됐든 텐트에서 하룻밤 보낸 것보다 더 피곤한 상태에서 출발.

고래불 해수욕장 주변은 성수기때 굉장히 붐비리라는 예상이 가능한 곳이다.
넓은 주차장, 넓은 모래뻘, 고래를 잡진 않겠지만 거대한 고래상까지.
그런데 은근 꼬리의 위치가 좀 이상한 듯 하다. 고래가 저렇게 길었나?


어제 바람만 불지 않았으면 이곳에 느긋하게 잠을 청해도 괜찮을 뻔 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비수기는 정말 조용해서 좋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도중 도로 한복판에 뱀이 뒹굴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중앙선에서 수십 센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자동차 한두 대라도 달렸다간 그대로 즉사할 것임에 틀림없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지 몸이 안좋은지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긴 하는데 거의 움직이질 않는다.

나뭇가지 집어들고 슬금슬금 당겨서 갓길 수풀 속으로 밀어넣어줬다.
반항다운 반항도 없고 꿈틀꿈틀거리기만 해서 정상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거기까지.


꽤나 귀찮아보이는 산이 앞에 가로막고 서 있는 곳에서 자전거를 세워두고 숨을 골랐다.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보기 좋기도 해서.


성수기는 밀려드는 인파로 바쁘겠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지금도 바쁜 시기인가보다.
이제껏 달려온 거의 모든 어촌마을에서는 모두 오징어 말리느라 정신없으셨으니.

영덕, 포항쪽의 반 건조 오징어 피데기는 경상도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고
날씨와 지형 탓인지 맛이 훌륭하다는 평이 많아 아직 조금 이른 시기임에도 자동차를 세워놓고 사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곳에서 이리저리 사진 찍으며 놀고 있으니 해안가에서 여행차림의 청년 두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고 그냥 하루정도 걸리는 거리를 여행나온 듯 한데, 그래도 슬쩍 반갑긴 하다.
어째 일본에서 만난 여행자들보다 더 소심하고 쑥쓰러워하는 것 같아서 몇마디 말도 못건네고 말았지만.


여기서부터 영덕 해맞이공원을 낀 강구까지는 조금 험난한 라이딩이 예상된다.
예전에 자동차로 와 본적이 있는데, 7번국도가 아닌 마을 어귀를 도는 구 도로는 약간 리아스식 해안의 성질을 띄고 있어서
경사도 급하고 업다운이 잦았던 기억이 나기 때문.

그래서 잠을 못자 지친 마음을 조금이라도 추스리려고 시간 좀 보내며 사진이나 찍으러 다녔다.


블로그에서 검색했던 동해안 도로의 난이도에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1년간 자전거로 돌아다녔던 내 경험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었던 탓인지
막상 달려보니 동해안 도로는 그냥 쉽다고 말하지 못할 뿐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태어나서 첫 장거리 라이딩이라면 뭐, 충분히 투정부릴 만한 코스지만
그리 많이 달렸다고 하지는 못할 나 정도의 경험만 있어도 이 길은 그냥 땀만 좀 흘리면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도 몇번 경험이 있지만, 여행 전에 인터넷에서 겁주는것에 너무 쫄면 안된다는 사실을 세삼 실감했다.
그렇게 어렵다고 써 놓으면 그 여행을 끝마친 자신의 가치가 좀 더 높아질거라는 무의식의 발로일까.
자전거 세계여행 준비 끝내고 인증사진 찍은 분에게 제일 많이 올라왔던 댓글이
저도 경험 좀 있는데, 그 장비로는 절반도 못가고 돌아오실겁니다. 너무 무겁고 짐많고 쫑알쫑알... 였었지.

일단 자기가 해낸 건 대단한 일이고, 남이 그런거 하려면 최대한 겁을 주는게 이쪽 사람의 본능일까.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간 곳은 준비만 하면 아무나 갈 수 있다고.
사하라 사막 마라톤? 난 그거 갈때까지 마라톤 풀코스 완주 한 번 해본 적 없다.
1년간 자전거여행? 난 지금도 자전거 타이어 교체 말고는 수리하는 방법 모른다.
운동? 내 몸무게가 지금 90kg 가깝다. 짐 싣고 달리면 100kg 넘는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니. 땀흘리면 바로 픽 쓰러져 죽는 사람 아니면 못갈 길이 아니다.
무슨 극기훈련 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가라고 만들어놓은 도로를 자전거가 못갈 일은 없다.

사하라 맴버 나침반님은 자전거끌고 융프라우도 갔다 오셨는데 뭘. 해발 3000m 가 넘는 융프라우 말이다.
내가 지옥을 경험하면서 넘었던 하코네나 키이 반도도 기껏해야 900m 정도밖에 안 된다.

힘들어서 포기할 수는 있지만 힘들어서 못 가는 여행은 없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걸 너무 우습게 보면 안된다.
중요한 건 가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인 듯. 가고 싶은 사람은 주위 반응에 너무 신경쓰지 말길.


그러나저러나 역시 이런 해안도로는 힘들긴 하다.
사실 리아스식이라고 부를 정도까진 아니라 엄청난 난코스는 아닌데도
떨어진 체력과 더불어 구식 도로의 단점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라
저전거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땀 쫌 깨나 흘려야 하는 곳이다.

여름엔 고생 좀 하겠지만, 마음 느긋하게 먹고 느린 걸음걸이처럼 한 발짝씩 페달 밟는 느낌으로 올라가면
어쨌든 끌고 올라가는 것보다는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언덕 정상즈음에 잘 치장된 펜션이 꽤 많다.
비수기라곤 하지만 젊은 연인들이 간간히 차 타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펜션 측에서 만든 것 같은데, 도로 맞은편 절벽과 맞닿은 곳에 그네랑 정자 같은 것도 만들어 놓은 덕에
땀 좀 식히면서 꽃 사진도 찍고 놀아본다.


몇 개의 자비심없는 업다운을 넘나들고 나니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아마 저 곳이 영덕 해맞이공원이겠지.
그 이름답게 저곳에서 해맞이를 보면 참 멋질 것 같은데, 대낮에 도착해서 하룻밤 지셀 수는 없으니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
그건 그렇고 도로에 사마귀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거 피해가는것도 고역이다.
얘네들이 뭘 잘못 먹었나, 전부 도로에 떡하니 나와서 움직일 생각도 별로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연가시한데 조종당하고 있는 녀석인가 싶기도 한데, 물도 없는 도로 한복판에 나와있는건 그래도 의아하다.


영덕은 먹을것으로도,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곳이 많아서
조그마한 마을이라도 있다싶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될 만큼 민박과 횟집이 줄줄 늘어서 있는데
나같은 홀로 라이더한테는 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오후 2시가 될때까지 몇 번의 횟집에 들어가 봤는데, 혼자서 먹을 메뉴가 없단다.
회는 최소 2~3인분이고, 매운탕도 회를 시켜야 나오는 거라서.

해산물로 유명한 곳이라 횟집 말고는 음식점이 별로 없다는게 더 서글프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석면 플레이트 지붕과, 사람이 살지 않는것이 확실한 폐가의 모습이 꼭 내 심정이다.
하다못해 음식점 옆 구멍가게에 들어갔는데도 술안주와 술밖에 팔질 않아서
냉장고에 든 아이스크림이나 한개 사들고 허기를 채워야 했으니.

어제 저녁 7시에 컵라면 먹은 이후로 오후 2시까지 먹은 건 아이스크림 한개.


해맞이공원도 당연히 언덕 위에 있어서 올라가는건 좀 귀찮았다.
하지만 여기서 큰 착각을 하고 말았는데
그냥 해안도로만 스윽 달리면 그 옆에 있는게 해맞이공원인줄 알았지.

내려오고 나서야 알게 됐는데, 그 도로에서 좀 더 산쪽으로 올라가면 바람개비공원이라든가 볼거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신나게 바람을 타고 내려오고 나서야 그 표지판을 봤으니,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뭐, 영덕은 내 서식지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니 언제 가더라도 갈 기회는 더 있겠지라고 자조하는 수 밖에.


지금쯤이면 바다보단 산 쪽이 장관이겠지.
본격적인 가을을 맞아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산으로 산으로 몰려든다고 하더라.
이렇게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지면, 앞으로는 어딜 가든 비수기만 골라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 성수기 관광지와 맞닥뜨릴 때가 있었는데, 컬쳐 쇼크에 가까운 인파에 정신이 혼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시에서 일상 생활을 보내다가 간다면 그리 문제될 것 아니지만,
하루 많아봐야 열댓 명 정도의 사람과 얼굴 스치며 지나가는 여행 중에
갑자기 수만 명의 인파에 휩쓸리면 가끔 스스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새끼고양이가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해맞이공원은 홀로 고독을 즐길만큼 한가하진 않았다.
주차장은 널널하지만 그래도 여남은 명 정도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으니. 더불어 간이 매점도.
주위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으니 이 공원은 언덕 위쪽부터 아래로 나 있는 산책로가 즐길거리인 듯.

일조량의 차이 때문일까, '영덕해맞'과 '이공원'의 빈부격차가 안타깝다.


자전거로 힘겹게 언덕 올라온 터라 농담으로라도 자전거 세워놓고 혼자 산책로로 내려가고싶진 않다.
그냥 바람 쐬고 전망대에 올라가보고 사진이나 찍고 갈 생각.
이 때 조금만 주위를 둘러봤다면 이 바다 반대편에 다른 여러가지 시설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배가 빈 만큼 머릿속에도 든게 없었다는게 적당한 표현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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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와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울진과 영덕은 서로 대게의 원산지라고 주장하며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실제로 예전부터 대게 많이 잡히는 쪽은 울진이었는데, 물류센터 역할을 하던 곳이 영덕이라 영덕 대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뭐, 대게가 고양이처럼 영역 가지고 살아가는 애들도 아니고 해서
딱 붙어있는 울진과 영덕의 지리적 특성상 어느 쪽이 더 대게마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곳인가를 판단하는 건 그닥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색하긴 하지만 과거 식민지 시절 영국과 프랑스가 지네들 멋대로 선을 죽죽 그어버리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온갖 내전과 폭력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습을 느꼈다고 하면 과장된 생각일까.

일단 사진에 나온 대게라면 냉동보관해서 3~4일 정도는 맛있게 뜯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앞서긴 했다.


도 경계를 넘은 뒤부터는 크게 힘들다고 생각할 업다운도 없어서 몽롱한 기분으로 전진을 게속하던 중
표지판에 관동팔경의 하나라는 월송정이 나타나고나서 조금 고민했다.
이제껏 느긋하게 달려온 터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많이 지채되었는데, 이런 거 보고 가도 괜찮을까 생각 좀 해봤는데


묘하게 날씨도 좋겠다, 멍하니 달리다보니 사진도 별로 찍은 것 같지 않아서 가 보기로 했다.
월송쪽으로 가기 전 모습을 드러낸 소나무숲도 꽤나 멋졌다.
이곳 소나무는 곧게 뻗은 황토빛 몸통과 푸른 솔잎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그 명성이 높다.
아버지 친구분 중에는 평생 이곳의 소나무만 찍는 프로 사진가분도 계시단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월송정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정원을 즐기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듯.
정확히는 평해 황씨 시조 대종회 소유의 정자와 연못, 구름다리가 어우러진 고즈넉한 정원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더군.

문은 잠겨있지만 낮디 낮은 흙담 사이에 샛길이 얼마든지 나 있으므로 마음껏 즐겨도 된다.


월송정으로 향하며 접하는 수많은 소나무숲은 확실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닥 기개가 느껴지진 않지만 아담하면서도 하늘로 쭉쭉 뻗은 소나무 군체들은 다른 곳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풍경.
슬슬 본격적으로 익어가는 벼이삭에 반사되어 한층 더 황금색으로 물들어진 태양빛이 새어들어오는 숲의 모습은 심히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러다가 월송정에서는 감동을 못받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동팔경이라고 해서 기대를 한 탓인지, 실제로 월송정의 첫 모습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원형은 파괴된지 오래고, 지금 서 있는 정자는 1980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정자 자체의 운치를 느끼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나마 멋들어진 소나무숲이 감싸고 있어서 음주가무엔 부족함이 없겠지만.


현재는 '越松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일간에서는 '月松亭'이라고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마음에 든다.
보름달 즈음에 정자에 앉아 달빛에 비치는 파도소리를 안주삼아 술을 즐기는 것이 이 곳에 어울릴 듯한 느낌이라서.


60년대 복원했지만 복원 상태가 고증과 전혀 맞질 않아 80년대 다시 개축했다고 하는데
신라, 고려시대 양식에 대한 문헌이 남아있을리가 없으니 실제로는 거의 조선후기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아쉬운면이 없잖아 있고, 조그만 슈퍼 하나 외엔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는 주위 모습을 보면
이게 과연 관동 팔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관광 명소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당연하게도 관리 사무소 같은 건 있지도 않으니 문화재적 가치가 전무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선전하는 듯 하다.


지금 남아 있는건 단지 '술마시고 놀기 좋은'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하다.
천 년도 넘은 예전 그 월송정 주변의 바닷가와 소나무숲은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겠지.
그래서인진 몰라도 바닷가가 정자에서 꽤 먼데다가 소나무에 가려있어서 '越松'이라는 이름이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아담한 관광 회사에서 온 건지 아주머니 서너 명을 데리고 월송정을 설명하는 가이드분도 있었다.
정자 위에서 바라본 모습. 이곳은 아무래도 달이 뜰 무렵이 그 명성에 걸맞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함께 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내고 근처 슈퍼에서 술이나 좀 사와서 달을 보며 즐겼을 것이다.

혼자서도 물론 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혼자 움직이는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서 달을 벗삼아 혼자 홀짝이는건 내공이 필요하다.


하룻밤 묵어가기엔 최적의 장소였지만 아직 시간이 이른 터라 조금 더 달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비수기라고 해도 너무 쓸쓸한 모습의 월송정은 아쉬움을 많이 남겼다.

이곳의 진가는 아무래도 밤에 발휘되는 듯 하니, 다음엔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저녁즈음 와 보는게 좋을 듯 하다.


본격적으로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시간 난 김에 일본의 소야노씨 가족한테 전화를 걸어 봤다.
예전 태풍 때 전화를 받지 않아서 뭔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마침 그때 하와이로 놀러 가셨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기억이 난다.

부부끼리 간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계속 천문대에서 일하시고, 따님과 둘이서 다녀왔다네.
재활치료를 위해서는 나가노의 매서운 산지보다 푸근한 하와이가 시설이나 환경면에서 훨씬 좋다고 하셨던 말이 기억나서
이번엔 아마 사전 탐사 겸 관광으로 가신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담으로, 따님 얼굴이 모 일본 연예인과 완전히 판박이다. 머리 자르러 가면 싸인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저녁이 되니 좋던 날씨는 어디 가고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한다.
예전에 몇번 경험했던, 자전거가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다.
느긋한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녁부터 바람이 강해지면 노숙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일본에서 오기로 강풍 속에서 텐트를 친 적이 있었는데, 귀마개도 소용없고 텐트 전체가 밤새도록 휘청휘청거려서
거의 한 숨도 못 잤던 기억이 난다. 자연과 맞짱뜨는건 부질없는 짓이라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꼈던 한 때.

슬슬 가게 안에 들어가기도 민망할 냄새가 몸에서 솔솔 올라오는 것을 보니 바람이 더 심해지기 전에 민박이나 한번 찾아볼까 하며 전진.
해안가엔 비수기라 문 닫긴 했어도 민박이 그럭저럭 눈에 들어왔는데 이곳은 의외로 그런 게 별로 없었다.
바다가 보일랑 말랑 하는 언덕 위쪽에 그럴듯한 모텔이 있어서 슬그머니 들어가 말을 걸어보니
나이 지긋하게 드신 노부부께서 혼자 자전거끌고 왔으니 싸게 해주신다며 만원이나 깎아주셨다. 비수기 가격까지 합쳐서 2만원.

예전에도 자전거 여행하는 사람이 묵은 적이 몇번 있단다. 이곳은 원래 바람이 강하다고 하시니 아마 비슷한 이유로 온 사람들 아닐까.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짐을 끌고 2층까지 올라가는게 좀 힘들긴 했지만
주인장께서 그것도 고려해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준비해 주셨다. 역시 뻣뻣한 호텔보다 이런게 좋구나.
근처 슈퍼에서 컵라면과 과자, 음료수를 사온 후, 내 모니터보다도 작은 볼록TV에서 나오는 이름모를 버라이어티 쇼를 보며 배를 채웠다.

2중으로 된 창문조차 무서울 정도로 덜덜 떨리는 걸 보니 이곳에 들어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삐그덕거리는 몸을 끌고 욕조에 세제를 듬뿍 풀어 빨래를 한 후 욕조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슬금슬금 침대로 들어간다.
한국에서 모텔이라고 하면 다들 그렇겠지만 뭔가 얼룩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이불이 조금 신경쓰이긴 했다. 뭐 그래도 감지덕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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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경계가 가까워질수록 업다운이 심해진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바로 옆의 7번 국도다.

구 국도와 신 국도가 한동안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나 있는데
신 국도가 완만한 경사로 주욱 올라갔다가 주욱 내려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구 국도는 확 내려갔다가 확 올라가는 방식으로 나 있어서
느긋하게 달리는 7번 국도 자동차들의 머리 위로 힘겹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는 코스가 계속된다.

어차피 신 7번국도는 자동차 전용도로라 자전거가 달리지는 못하지만 뭔가 차별받는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해안과는 좀 멀어져서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한참을 나란히 달리던 7번국도에서 떨어져서 잠시 땀을 식힌다.

강원도와 경상도는 이제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려 있는데
자전거로 오를 수 있는 길이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지금까지처럼 오래 걸리지만 못넘을 경사는 아닌 진득한 오르막길.
또 하나는 한동안 해안가에 바싹 붙어 평지를 달리다가 순식간에 산을 오르는 가파른 길.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경사가 완만한 곳을 선택하겠지만
그곳은 지금까지처럼 7번국도와 바싹 붙은 곳이라서 바다도 안보이고 매연냄새가 지독할 것 같아서
사실상 자동차도로가 아닌 가파른 마을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살짝 오기가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약 20분간 편안하게 해안 도로를 달릴 때까지는 모든것이 평화로웠다.
신기한 눈으로 한번씩 쳐다봐 주시는 마을 분들의 눈빛도 두렵지 않을 만큼.
해수욕장이 아니라 깔끔한 모래는 아니지만 한동안 업다운으로 지친 나를 위로하기엔 충분한 풍경이다.


역시 관광지에서 벗어난데다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라서 화장실이 없다.
가끔 이런 곳에서 실례하는 것이 그리 죽을 죄는 아니라고 장거리 여행자들은 다들 생각하지만
그래도 일반인들 눈에 들어와서 괜히 위축될 필요는 없으니 한참을 이리저리 경계한 후 수풀더미에 슬쩍 실례를.


마을 어귀에서 시작되는 오르막은 예상대로 상상을 초월한다.
약 10km에 달하는 오르막을 1.5km 만에 오르는 길이니 거의 정상 부근의 등산로를 생각나게하는 경사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였으니
터질듯한 허벅지 근육과 더불어 오랜만에 팔에 힘좀 들일 수 있는 경사였다.
머금다 머금다 한계를 넘어버린 버프에서 발걸음을 뗄 때마다 주륵 주륵 빗물처럼 땀이 흐른다.

물은 모자라지 않게 갖고 있었으니 중간중간 쉬어가며 수분을 보충해 준다.
가끔 굉음을 내며 슬금슬금 올라가는 자동차를 보니 역시 편하게 해안가를 달려온 댓가는 치뤄야 하나 보다.


여행 중 유일한 셀카도 한장 남겨두고 다시 자전거를 밀어 올라간다.
40분 가까이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랐는데, 정상에 도착하니 정말 산을 오른게 맞더라.
완만히 오르는 도로와 맞닿는 곳까지 오르니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선택을 잘못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게, 다른쪽 길도 2차선의 좁은 도로라 자동차 신경쓰며 오르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
이제부터 이어질 내리막과 평지에 가슴 설레며 그리웠던 자전거 안장에 올라탄다.

산을 내려와 기사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뭔가 메뉴에 이것저것 적혀있어서 적당히 주문했는데
아주머니께서 웃으면서 지금은 정식밖에 안되요 라고 하신다. 그럼 메뉴의 의미는?
흔쾌히 백반을 부탁하니 마침 볶음밥도 만들고 있는 중이라서 쌀밥 대신에 볶음밥도 가능하다고 하신다.
여러가지로 재미있는 곳이라 생각하며 볶음밥과 소박한 정식을 음미했다. 가정식에 가까운 소박하고 정갈한 요리라 부담없이 해치웠다.


조그마한 해수욕장에 무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계속 모래가 깎이다 보니 언덕 위에 만들어둔 주차장 한 쪽이 무너져 내린 것.
얼핏 봐서는 왜 이렇게 바다와 가깝게 주차장을 만들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래가 쓸려나가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니 이곳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완벽한 폐장상태의 해수욕장. 이곳저곳 심각하게 깎여나간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이제 몇몇 해수욕장은 개장시 모래를 다른 곳에서 대량으로 가져와 퍼붓는다고 할 정도니.
가뜩이나 냄비근성의 화신이라 불리는 한국사람들이 자연 훼손 따위에 신경이나 쓰며 만들었을까.

시즈오카쪽 해변가는 반대로 모래가 해안가로 자꾸 밀고 들어와서 도로까지 침식될 정도던데
일단 사람 손을 타면 망가지는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인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바다에 들어간 게 15년은 넘은 듯 하다.
여름에 이 정도로 한적한 곳이 있다면 들어가고픈 생각이 없는 것 아니지만
몰려드는 인파를 생각하면 도저히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찌나 그렇게도 쓰레기를 여기저기 잘 버려두고 즐기는지... 그냥 쓰레기장에서 뒹구는 느낌이었다.


울진에 들어가서 덜컹거리는 자전거 앞바퀴를 고친 후 여행 후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현대문명의 산물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맛있어서라기보단 단순히 도시라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을 뿐.
장거리 여행시엔 이런 도시향기 맡기가 그리 쉽지 않아서 가끔 그리워 지기도 한다.

카운터를 맡은 직원 두명이 모두 신입연수 중인듯, 차라리 내가 들어가서 세트 만들어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주문한 메뉴 오더 넣는 방법도 모르고 카드 결제하는 방법도 모르고
햄버거는 한참 전에 만들어서 차갑게 식어가는데 한참동안 감자 튀긴후 그걸 세트라고 건네주는 행태를 보니
떠돌이 여행만 아니었다면 당장 점장불러서 이게 햄버거냐고 소리를 지르고도 남을 만큼 인상깊은 곳이었다.

햄버거 패티가 내 손가락보다 차가웠다. 울진에 롯데리아가 몇개 있는진 모르겠지만 가히 내 인생 최악의 지점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힘들면 들어가서 푹 쉬었던 일본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느꼈던 안식을 무의식으로 바라던 차에 들어간 곳이었는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먹어도 이딴 수준의 햄버거보다는 낫겠다고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준 곳.



세련되게 번화한 것이 아니라 옛날냄새를 많이 풍기며 번화한 울진은
느긋하게 둘러보기에 훌륭한 옛 냄새가 여기저기 남아있지만
반대로 자전거를 위한 도로 사정은 최악이라 이곳저곳 고생했다.
갓길주차는 도를 넘어서 2차선까지 깜빡이 켜고 서 있는 자동차들이 즐비하며
가로수와 전봇대가 가로막고 있는것도 모자라서 이곳저곳 파이고 울퉁불퉁한 자전거 도로는 흉악한 지뢰나 다름없었다.

머물면서 관광하려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나에게는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픈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후다닥 울진시내를 빠져나와 달리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데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이 추천해주셨던 공원과 비슷한 녀석이 등장해서 순간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주고받았던 문자로는 지금 나타날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도를 보면서 좀 더 조사해보니 해맞이 공원이란 곳은 영덕쪽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마 이곳은 그냥 이름만 같은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해맞이 공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저녁엔 사람도 없고
어차피 비수기에 찾아올 사람도 없을 것 같아서 적당한 공터에 짐 풀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아니나다를까 안개가 심해서 해는 보이지도 않는다. 미련 버리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출발.


해맞이공원을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또 여유로운 해안도로가 이어져서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여기저기 멈춰서서 이것저것 찍어대고 있는데 이 사진을 찍다가 메모리 상태가 불량한 것이 판명되었다.
여행때문에 새로 준비한 CF 메모리였는데, 꽤나 유명한 회사의 메모리가 초기 불량이었다니 기분이 팍 상했다.

서둘러 예비 메모리로 바꿔 끼웠다. 서너 장 정도가 데이터 에러로 사라져 버렸다.
만약 이제까지 찍은 사진이 전부 날아가 버렸다면, 아마 여행 때려치우고 메모리 회사로 쳐들어가지 않았을까.


1년간의 일본 자전거 여행중 수고해 준 구닥다리 CF 카드는 여전히 잘 작동한다.
만지면 보슬보슬해서 기분 좋을듯한 바위를 상대로 테스트를 여러번 해 봤지만 이 메모리는 문제 없다.


평년보다는 좀 메말랐던 가을이라서 그런지 잠자리도 좀 의기소침해 보인다.
뻑난 메모리 때문에 기분이 좀처럼 밝아지질 않아서 한참동안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진만 찍어대던 기억이 난다.


어제 롯데리아의 괴랄한 햄버거 이외엔 아직 뱃속에 집어넣은 음식이 없어서 약간 허기가 진다.
일본의 편의점에서는 지갑의 다이어트가 무섭지, 자금만 있다면 배 채울만한 도시락과 호빵, 치킨조각등은 널리고 널렸는데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이곳의 편의점은 아사 직전이 아닌 한 절대로 입에 넣고싶지 않은 저급하기 그지없는 도시락밖에 없다.
아무리 찾아보고 찾아봐도 음료수와 초콜릿 말고는 당기는 음식이 전혀 없어서 몇번이나 그냥 돌아나왔다.

한국이라서 먹을 걱정은 하지 않고 달리겠구나 싶었는데, 매번 제대로 된 식당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귀찮아진다.
굉장히 한쪽으로 기운 판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편의점의 도시락 수준만큼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평가를 바꿀수가 없다.
한국 편의점의 도시락은 쓰레기다. 컵라면이 고급 정식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다행이랄까, 거대한 몸집과는 달리 굶는데는 이골이 난 몸이라
상황에 따라서는 하루 한끼 먹는것은 기본이고, 무리해서라면 이틀 정도는 물과 칼로리메이트만으로 버틸수 있어서
한국의 편의점에게는 기대를 완전히 접어버리기로 했다. 상비된 물이 떨어졌을 때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동해안 도로는 의외로 비 관광지 부근에도 구멍가게는 여기저기 있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사진이나 찍으며 약 한시간을 바닷가에서 보냈다.
바다 반대편의 조그마한 밭두렁에는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냥이님께서 진득하게 누워 계시던데
카메라의 육중한 움직임을 보자마자 스윽 일어나서 허둥대지 않게 사박사박 사라져 버리셔서 카메라에 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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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보니 역시 해안쪽엔 안개가 낀 덕에 일출은 물건너갔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아서 그런지 푸른 하늘도 얇은 막이 쳐진 듯한 느낌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속을 달릴 때는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나 고민도 하지만
그 후에 나타나는, 망막을 한꺼풀 벗겨낸 듯한 상쾌한 하늘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냄새나는 판초 우의와 신발도 견뎌낼 수 있었지.

편안하게 계속되는 맑은 날씨는 어려움없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격언이 틀리지는 않은 듯 하다.


컵라면 하나로는 역시 체력 보충하기 쉽지 않은지 허기가 좀 진다.
호텔 조식은 추가요금이 필요해서 아침 먹지 않고 나와 달렸는데, 다이어트엔 좋지만 정신건강엔 좋지 않다.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 항구마을의 식당에서 깔끔한 칼국수로 배를 달랜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지만, 넣을 것만 넣은 간소하고 깔끔한 칼국수가 생각외로 든든했다.
공기밥 추가도 가능했는데 그만큼 먹으면 자전거 탈때 괜히 고생하기 때문에 살짝 모자란 듯한 느낌이 낫다.

김치도 국산재료로 직접 담궜다는데 적어도 저질 중국산 김치가 아닌것은 확실했다.
5천원에 이정도면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식당 음식은 왠만해서는 먹고 속이 끓는 체질이지만 이건 멀쩡했으니까.


국물까지 깔끔히 비운 탓에 식사 후 바로 자전거 타기는 좀 더부룩하다.
엄니한테 전화도 한통 드리고 느긋하게 주변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기선 안보이지만 왼쪽 가장자리의 곰치국 전문점의 유리창에는 'KBS, SBS, MBC 방송 한번도 안한 집'이라고 적혀 있다.

언덕 비탈을 따라 소박하게 세워진 집들이 마음에 든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남는 시간동안 가을 꽃도 좀 담아주고.
꽃은 역시 봄꽃의 찬란함이 마음에 들지만 가을 꽃은 나름 정취가 있다.


워낙 느긋하게 달리다 보니 아직 울진까지도 못 왔더군.
도 경계는 어디든 험하다고 하는데 과연 편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언덕이 자주 나타난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햇빛이 엄습해 와서 얼굴과 팔뚝은 이미 미디엄 웰던을 넘어가고 있다.


업다운중 라이더를 힘빠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푯말.
대충 이 푯말이 붙어있는 곳은 경사가 조금 심한 편에 속한다.
그래도 구 7번국도는 성수기가 아닌 이상 통과하는 차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그저 쓴웃음 한번 짓고 천천히 페달을 움직이며 조금씩 조금씩 기어오르듯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해결된다.


해안도로의 장점은
저런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높은 확률로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흐르는 땀을 식히며 풍경 감상좀 해 주고 몸이 슬쩍 식을 때쯤 시원하게 내리막을 미끄러지면
오르막에서의 생성되는 건전하지 못한 분노와 짜증은 입에 넣은 1등급 한우처럼 녹아내려 버린다.


가끔씩 어쩔 수 없이 7번국도와 합류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때는 경치 감상할 여유도 없어진다.

바닥에 널려있는 사고 파편과 온갖 쓰레기, 자잘한 모래등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친절하게도 경적은 잘 울려주지만 속도는 결코 떨어트리지 않고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경계해야 하니까.

마을 안에서는 가끔 사거리에서 1차선 광속 우회전하는 정신나간 운전자도 만났기 때문에 시내든 시외든 방심은 금물.


몇개의 업다운을 지나 평지를 멍하게 달리고 있으니 궁촌 정거장이란 곳이 나타난다.
관광 버스가 상당히 많이 드나들고 있어서, 숨이나 돌릴 겸 들어가 봤다.

작년에 개장한 탓인지, 비수기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일바이크 외엔 제대로 작동하는 시설물이 없었다.
기념품점은 열고 있었지만 야외 휴게소도 식당도 완벽한 휴업상태라 음료수 하나 제대로 뽑아먹을 곳이 없다.

그래도 레일바이크는 꽤나 인기인지 사람들이 가득가득 차서 출발하고
꽤 많은 후발 주자들이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에 아쉬워하며 돌아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레일바이크는 6km 정도 거리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원래는 석탄 수송하던 길이라고 한다.
가족이나 연인들끼리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상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버스는 사람들이 출발한 후 도착지 역을 향해 미리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편리하군.


덥긴 하지만 멋진 날씨라서 주변 공원을 거니는 맛은 훌륭했다.
전부 레일바이크 타러 간 덕분에 사람도 없고.

지금이 저녁이라면 들어눕고 싶은 멋진 정자라서 대낮인 지금이 오히려 아쉬워졌다.


꿀 나온다고 해서 내 기억이 최대한 남아있던 때부터 계속 빨아대던 기억이 나는 붉은 사루비아.
마당에 지천으로 피어있어서 당시 그 사루비아들은 거의 남아나질 않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런데 달콤한 무언가가 입으로 들어온 기억은 남아있지 않아서 좀 궁금하긴 하다. 정말 꿀이 들어있었을까.


일렬로 늘어선 붉은 군대의 위엄이 지나치다는 느낌에 찍어본 녀석.


내 자전거도 느리기로 치면 가슴을 펴고 자만해도 될 정도지만
레일바이크만큼 느리진 않기 때문에 한참 전에 출발한 녀석들을 쉽게 지나쳐 버린다.
그래도 레일바이크 덕인지 한동안 사치스러울 정도로 편안한 평지가 이어졌는데
종작점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시 업다운이 시작되어서, 다른 의미로 레일바이크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면 항상 해변가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시야를 방해해 온 레일바이크가 사라져서 카메라를 꺼낼 맛이 난다고 할 수도 있겠네.


숨은그림찾기 같지만, 우연찮게 찍은 이 사진을 보니 맥이 풀렸다.
왜 저기에다가 음료수라고 써 놨을까.
이곳도 성수기엔 사람들이 미어터져서 좌판이라도 벌리는 걸까.
얼핏 본 바로는 내려갈 길도 없어보이는 곳이었는데.

이번에 나에게 모습을 드러냈던 동해안은 겨울잠에 들어가는 곰과 같은 존재였을지도.


징하게 나타나는 해안선 업다운을 넘나들다가 중국집이 눈에 들어와서 얼른 들어갔다.
매번 국수나 해장국 같은거 먹으며 달리니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들었는데 중국집 간판을 보니 확 땡기는 게 있더라.

느긋한 아주머니께서 느긋하게 준비해 주는 호사스러운 삼선볶음밥을 입에 퍼부어 넣으니 만족감이 몰려온다.
중국집은, 일단 배달음식은 논할 가치조자 없는데다, 직접 가서 먹어도 괜찮다 싶은 집은 그다지 찾기 힘들었는데
피곤과 시장이라는 두 가지 향신료와 함께 서울보다 훨씬 푸짐한 오징어와 새우가 함께하니 맛이 없을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원덕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항구마을을 지나고 잠시 앞으로 나가보니
오후 5시 40분부터 넘기에는 상당히 귀찮을 법한, 산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언덕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사실상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면이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해야 할까. 6시 20분만 되면 라이트를 켜야 할 정도로 해가 빨리 지고 있어서
괜히 지금 올라가봤자 자동차소리 시끄러운 도로 옆 덤불 어딘가에서 뒹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느긋한 여행인데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해서, 원덕쪽 슈퍼에서 적당히 먹을 것좀 사고
슬금슬금 마을 외곽을 돌아다니다가 도로가 끊기는 지점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 텐트를 쳤다.
주변에 군사시설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좀 긴장되긴 했지만 두세 시간동안 아예 자동차 흔적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
보이는 즉시 사살당하진 않겠지 생각하고 누워서 가져온 책이나 읽었다.

일본에서는 건전지가 아까워 텐트 속에서 책 읽는 시간도 많이 줄이곤 했었는데
이번엔 AAA형 건전지 잔뜩 가지고 왔으니 최대로 밝혀놓고 느긋하게 읽었다.

살짝 피곤한 느낌도 드는 것이, 만약 여름의 강렬한 햇살 아래였다면
확실히 동해안의 업다운은 라이더를 쉽게 지치게 만들 것이란 느낌이 든다.
물도 조금 남았겠다. 대강 얼굴과 손을 씻어내고 1시간 가량 음악을 듣다가
살짝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이어폰을 빼고 귀마개로 귀를 막은 뒤 송충이처럼 몸을 움츠린다. 하루의 멋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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