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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16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16
  2. 2011.11.06  인셉션 (Inception,2010) 16
  3. 2011.11.02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2011) 24
  4. 2011.09.15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5 (Final Destination 5, 2011) 10
  5. 2011.08.20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2011) 10
  6. 2010.04.20  그린 존 (Green Zone, 2010) 2

 

 

 

 

참 난감한 영화다.

 

감상하면서도 '이거 리뷰쓰기 어렵겠는데'라고 생각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 2011)보다 훨씬 더 썰을 풀기가 어렵다.

분명히 내 스타일에 잘 맞는 영화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재미있게 감상했는데

다 보고나서는 걸어나오는 동안 바로 다음 상영날짜 검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관람 3일만에 또 다시 감상하고 나서도, 참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음이 잡히질 않는다.

 

유명 사이트나 리뷰에 영화에 대한 해석은 거의 다 나와있으니 딱히 거기에 덧붙힐 말은 없는데,

이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니고, 감독이 해석 자체를 해 놓질 않았기 때문에 난감한 영화.

 

하지만 확실한 건, 감독의 능력이 부족해서 빠뜨린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석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무한한 추측이 가능한 여러 요소들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설명 가능하도록 미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이 영감의 괴팍함과 꼼꼼함에 감탄하며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다만 중간중간 연결이 어색해 보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DVD나 블루레이 버전엔 분명히 추가장면이 들어갈 거라고 예상.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만큼 기대했던 작품. SF 호러의 걸작 에이리언(Alien, 1979)과 연관성이 풍부한 작품인 동시에

헐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스타일리스트인 감독이 오랜만에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기 때문에.

 

스캇 감독은 안드로이드라는 매체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주특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에이리언부터 시작해서, 블레이드 러너는 말할 것도 없고. 이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스캇 감독의 안드로이드 인생을 총망라 하는 듯 절묘한 포지션을 차지해,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이라는 인격체를 넘어선 것은 이미 블레이드 러너때 증명되었고,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이었던 '로이 베티'와 달리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인지, 데이빗은 이미 인간미를 의도적으로 감추기까지 하는 캐릭터.

그에게 남은 유일한 족쇄는 자신의 '창조주'뿐, 지루하게 논의되던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 있는가'라는 낡아빠진 의문 따위는

영화 초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며 대사를 음미하는 데이빗의 모습에서 이미 종결된 것이다.

 

외우주를 항해하는 기술력을 가진 시대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로봇 이외의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 장면들을 보니,

그 어리석은 창조주들을 냉소하며 자신이 해야 할 계획을 교묘하게 진행해 가는 데이빗은 단연 인간을 초월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엘리자베스 쇼의 마음, 믿음을 통한 의미없는 신념에의 집착은,

그가 안드로이드라서가 아니라 초월자로서 미물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인해 생기는 의아스러움이라고까지 느껴진다.

영화의 후속작이 나온다고 가정하면, 데이빗은 아마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감정마저 이해하고 더욱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이야기의 중심에 드러나지 않는 그의 행동 역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느낌을 받도록 영화는 구성되어 있다.

엔지니어:인간 = 인간:데이빗이라는 공식이 명확하게 성립하기 때문에, 감독이 무심하게 버려둔 엔지니어의 의도는

관객이 직접 저 등식에 대입해서, 인간과 데이빗 사이의 관계를 통해 유추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위치에 있는 관객은 그 객체의 차이성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가설과 토론을 낳는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논란은 둘째치고, 이만큼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능력만큼은 블레이드 러너 시절과 변한게 없는 듯.

 

블레이드 러너의 광팬이라면, 이번 작품의 찬란하다고까지 할 만한 경이적인 비쥬얼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십년 전의 필름질감이 가져다 주는, 자신 역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아날로그적 동질감을 이 작품에서는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

블레이드 러너 당시, 화염을 뿜어내던 암흑의 도시 LA의 모습은 30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다가오지만

이 작품의 황량하지만 놀라운 모습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꿈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레이드 러너가 현실감을 가득 간직한 SF 영화라고 한다면

이 프로메테우스는 SF의 껍데기를 쓴 고대 신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을 외계에서 찾는다는 소재 자체가 하드SF와 연관짓기엔 너무나 모호한 영역이라서

감독의 불친절함 만큼이나 이 작품에서 SF적 고증을 바란다는건 무리가 있는 듯. 여기저기 오류 투성이다.

 

역사서에서 지워진 부분들을 상상해 내듯이,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신화 시대의 낭만을 그로테스크적으로 풀어낸다.

타이틀 자체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고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프로메테우스' 아닌가.

물론 인간의 창조 자체가 숭고한 희생이었는지, 우연의 산물인지, 그가 받는 고통의 발현인지조차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수도승 복장을 하고 나타난 엔지니어의 모습만 봐도, '스캇 영감 참 짓궂기도 하구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갔으니.

저기 포스터의 영어만 해석해봐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인류의 탄생이라는 (우리들만의) 축복이 과연 진짜 축복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영화.

'왜 인간들은 자신을 만들었을까'라는 데이빗의 질문에 너무나 무심히 대답해 버리는 할러웨이. 그에 대한 데이빗의 냉소.

평생을 창조주와 만나기 위해 바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할러웨이가

정작 창조주의 입장에서 그토록 무심한 대답을 입에 담은 이유는, 분명 데이빗이 생명체가 아닌 로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엔지니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을까. 인류 탄생, 구원자에 대한 신화는 대체로 희망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어쨌든 인류의 탄생은 인류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과연 창조주의 생각은?

 

엔지니어의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는 감독이지만

영화 곳곳에 묘한 설정들을 집어놓은 탓에, 더더욱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수만년 전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프로메테우스 호가 LV-223에 도착한 날은 크리스마스, 엔지니어의 목 잘린 시체는 2000년 전의 것. 그리고 일어나는 '불가능한 수태' 까지...

이런 장면들은 너무 노골적이라서, 스캇 감독이 에이리언의 명성을 뛰어넘는 거대 서사시를 다시 한번 세우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실제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시리즈는 2편인 에이리언이지만, 아버지격인 스캇 감독은 그런 재생산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원래 에이리언 1편의 프리퀄로 제작되다가 중간에 변경된 작품이라서, 완전히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는 장면들이 나온다.

스토리 전체에 에이리언이 관계되는 일은 없고, 단지 팬서비스 정도의 장면만 넣어놨을 뿐이지만

팬들에게는 스페이스 죠키의 정체가 알려진 것 하나만 해도 30년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한 쾌감이 느껴질테니까.

 

스캇 감독은 인터뷰에서 '에이리언이라는 작품은 훨씬 더 흥미롭고 방대한 요소가 있지만, 다들 제노모프(에이리언)에만 신경쓰는 모습때문에'

그 대답으로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이 작품에서 제노모프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제외시켜도 딱히 문제가 없는 수준.

영화속에서 절대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궁금증들이 대부분 에이리언에 등장했던 스페이스 죠키와 제노모프에 관련된 점이라는 걸 보면

이 작품은 거대한 서사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에이리언이라는 작품에 종속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듯한 느낌이 든다.

 

고대 문자 한두개 해석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르듯, 이 작품 역시 신화적 상상력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던져주지 않는다.

되려, 해석을 내려버리면 신화로서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봐도 될 듯. 그래서 이 불친절한 영화의 후속작을 꼭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척 봐도 역시 블레이드 러너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실로 리들리 스캇 감독다운 작품인데, 이 작품의 논란도 꽤나 오래 갈 듯.

 

캐릭터들의 특징 역시, 친절한 해설이 거의 없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추론 요소로 작용하는데

각각의 분석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제껏 쓴 분량의 몇 배는 되는 글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냥 심심풀이로 적는 포스팅은 이 정도로만 하기로 한다.

 

 



한창 일본서 자전거여행 하고 있을 무렵 개봉했던 영화.
헐리우드 영화가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는 일본 극장가에서 꽤나 흥행한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와타나베씨의 영향도 있을 듯.
당시 몇 번이고 극장서 보려고 고민을 했지만, 놀란 감독의 작품들은 일본어 세로 자막으로 후다닥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기도 하고
일본 극장가격이 좀 센 편인데다가, 냄새 풀풀나는 노숙자 차림으로 2시간 넘게 자리에 앉아있을 뻔뻔함이 부족하기도 했다.

극장서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다행히도 영화에 대한 예상이 어느 정도 적중한 덕에 50인치 PDP로 감상해도 그다지 후회스럽진 않았다.
놀란 감독의 작품은 아무리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더라도 시각적 볼거리보다 꼼꼼한 전개와 편집의 힘이 더 강하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과 인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각광받는게 2천년전 사상인 호접몽과 같은 심층의식을 다루는 소재인데
매트릭스의 대흥행으로 인해 어느정도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를, 감독 특유의 꼼꼼한 시선으로 설득력있게 그려낸 느낌이다.
물론 메멘토(Memento, 2000)에서 보여준 놀라운 구성과 비교하면 굉장히 구멍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것은 감독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관객들이 소소한 유희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장난감이라 하는 것이 옳을 듯.
훗날 인터뷰에서 놀란 감독은 이슈가 되었던 장면들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을줄은 몰랐다'는 투의 발언을 했으니.

테런스 멜릭 감독을 존경하는 놀란 답게, 그의 작품은 어떤 스케일로 만들더라도 일정 이상의 영상미를 보여준다.
과장되고 급진적인 영상이 아닌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꼼꼼하게 계산된 편집 능력이 빚어내는 영상.
그래서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느끼는 즐거움으로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진행을 들 수 있다.
부족한 점을 박력으로 채우려는 블록버스터가 상당히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 규모의 작품에서 이런 꼼꼼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한 이점.
그 꼼꼼함 때문에 배우의 애드립을 매우 싫어하기로 정평이 난 감독이라는 점이 가끔 살짝 거슬리기도 한다.
놀란 감독의 작품을 주욱 보고 있으면 빠릿빠릿하고 철저한 외골수 직장 상사가 느껴지곤 하는데, 아마 그 때문인 듯.

이 작품의 플롯을 보고 처음 생각난 것은 - 물론 호접몽은 제외하기로 하고 - 말레이시아의 세노이 부족.
현실과 꿈을 동등한 가치로 대접하는 이 부족은 현대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대부분의 치명적인 스트레스성 증상들에 대해
실존하는 거의 완벽한 대체치료법으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스트레스, 정신병, 폭력, 야망 등의 질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발로 인해 세노이족이 사라진 지금도 꿈을 이용해 정신질환을 치료하고, 더 나아가 종교적 수행에 가까운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한
여러 실험과 연습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상당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향으로.

놀란 감독 작품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가 다루는 소재의 상당 부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 자신이 그 소재를 대입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메멘토의 기억 장애, 인썸니아의 불면증, 프레스티지의 인간 복제 등등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라고 재미있게 고민할만한 소재들 말이다.
이번 작품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점을 이용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입소문 타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작품이기도 하고 흥행면에서도 성공하기도 했다.

꿈이라는 심층 의식에 대해서는 이미 스스로도 많이 생각해 봤기 때문에 상당히 쉽게 영화의 전개에 익숙해졌는데
조금이나마 신선했다고 생각했던 곳이 '림보'라는 존재와, 꿈 속의 시간적 흐름에 따른 현실 세계와의 괴리감이라는 설정이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인간의 뇌는 다른 모든 신체 장기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가정했을 때 약 500년이라는 수명을 가진다.
꿈을 꾼다는 것은 육체적 나이를 고려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에 꿈 속의 삶은 인간이 인지하는 '낙원'과 가장 가까운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뇌는 사고할 때 만큼이나 육체를 움직일 때도 발달하기 때문에
단순히 꿈만 꾼다면 아마 실제 수명보다 더 짧아질 것이지만 일단 그렇게까지 현실적인 토론은 접어두기로 하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사라진다면 아마 사람은 더 이상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꿈이란 어떤 현실보다도 강력한 마약을 무제한으로 공급해 주니까. 전능이라는 권력 말이다.
하지만 그 꿈의 유일한 단점은 개인의 전능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약점, 즉 사회성이라는 요소이다.
꿈 속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게 하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식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꿈 속의 모든 요소는 자신의 뇌가 기억하고 있는 소재의 집합체니까. 모르는 것을 창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전지와 전능의 대표적인 차이점이기도 한데,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더없이 진리에 가까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성이란 것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객체를 강하게 결합시켜 외적인 장해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삼는 것인데
이 사회성이 없이는 결코 발달할 수 없었던 인간의 뇌는 꿈 속이라는 환경에서 전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게 도달한 세상은 사회성이 완전히 결여된, 완벽한 개인만 존재하는 고독의 심연이라는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지만 전지할 수는 없는 꿈이라는 세상은
인류가 공동의 의식체로서 초월적인 진화를 이루지 않는 한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곧 전지전능, 신이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세노이 족은 그 단점을 현실 세계에서의 꿈의 공유라는 수단을 통해 해소했었고
이 작품에서는 한술 더 떠서 꿈의 의식 자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영화의 어떤 장치보다 신의 존재에 가까운 장치를 사용한다.
사실 이런 장치가 있다면 현실 세계는 이미 붕괴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감독은 이런 충돌에 대한 간편한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제공한다.
부성애, 혹은 모성애라는 생물체의 기본 의식이 첫 번째, 그리고 부인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이 두 번째다.

앞서 말한 정체불명의 기계로 인해 타인의 의식까지 공유할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의 매력마저도 이 두가지 소재가 갖는 의미를 뛰어넘지 못한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호르몬 분비의 영향이라는 다소 차가운 해석이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사회이긴 하고
실제로 전능이라는 중독성 앞에 그런 호르몬 분비의 결과물은 쉽게 굴복하고 말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런 감상을 제외한다면 감독은 충분히 설득력있게 영화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있다. 지극히 성선설적인 입장으로.

'생각을 훔친다!'라는 페이크에 가까운 기본 전개와 달리 이 작품의 주제는 일관되게 코브의 죄책감에 대한 구원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해 보이는 소재인, 인격마저 변화시키는 '인셉션'이라는 행위 역시 사실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
액션 장면에 그닥 흥미가 없어보이는 감독의 특징이 여러 군데서 나타나는 덕에 블록버스터라는 입장에서 보기엔 좀 파괴력이 약한 장면도 없잖아 있는데
주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영화적 재미를 잃어버리지 않게 준비해둔 여러 장치들과 교묘히 결함되면서 상승 효과를 가져온다.

안정된 편집과 느슨하지 않은 전개, 감독 자신의 실력자랑이라고 느껴질 만큼 정교하게 구성된 자동차 낙하씬의 시간 흐름 등등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다 재미없는 작품은 아니라는 점을 부각이라도 시키듯이 즐길거리를 잔뜩 준비해 둔 것을 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젊은 감독은 역시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헐리우드 안에서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사람인 듯 하다.

여담으로
마지막 장면이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고들 하는데
그 논란은 단지 땅콩까먹기 수준의 잡담 정도가 어울릴 뿐이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니까.
'코브는 팽이를 보지 않았다'

더더욱 여담으로
엔딩 크래딧 자체가 쿠키영상이다.
이유는 끝까지 영상을 감상해보면 금방 눈치챈다.
놀란 감독의 유머러스함이 잘 드러난다.
인셉션 (Inception,2010) :: 2011. 11. 6. 19:16 Movie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1978) 이후로 20여년간 단 한편의 영화도 제작하지 않은 감독.
하지만 그 침묵의 20여년간 그를 위대한 거장으로 칭송하며 감탄을 끊이지 않게 만들었던  감독.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98) 촬영당시 내로라하는 수십명의 배우들이 개런티따윈 필요없으니 출연만 시켜달라며 경의를 표한 감독.

40여년 가까운 그의 영화 인생에 남은 필모그라피라곤 단 5작품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할 이유도 없다.
이제껏 그가 이루어낸 작품들의 주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백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탐구와 애정만이 그가 영화에서 추구하는 본질이다.
하버드와 옥스포드 철학과를 수료한 후, MIT 철학교수로 재직했던 그의 영화는
영화라는 복합매체를 통해, 난해한 언어와 사고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인간 본질의 의미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인공광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그의 작품엔 그 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의 사실성이 녹아 있다.
영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별다른 설명 없이 영상만으로 표현해 준다.
영상시인이라는 별명이 왜 이 감독에게 어울리는지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으니 단 한편이라도 그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그리고 이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작품은 시각적 자극을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수백, 수천의 블록버스터들을 단숨에 압도하는 힘을 가졌다.
영화매체의 장점인 시청각적 설득력을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 장점을 의미 전달을 위한 소재 이상으로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은 점은 경탄할 만하다.
대형 화면과 훌륭한 음향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이다.
트랜스포머같은 작품보다, 반지의 제왕같은 작품보다 더욱 더 필요하다.
자극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 작품의 중심을 이해하고 주제에 동감하기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지나가는사람 붙잡고라도 말해주고 싶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 이후로 이런 시각적 충격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영화의 어느 한 요소에게 편중시키지 않는다.
배우의 연기가, 따스한 영상이, 귀를 울리는 음악이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관객을 상영시간동안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영화에 푹 파고들게 만든다.

문화적 충격에 가까운 이 탄탄함은,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감독의 의도와 철학을 집어넣어주는 패스트푸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도대체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수도 있을 것이다.
멜릭 감독은 친절하고 차분함을 잃지 않으며 긴 시간 관객에게 자신의 철학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행위에는 그만한 집중과 사고가 뒤따른다.
어떤 매체도 마찬가지지만 시간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이 집중과 사고를 필요로 하는 작품은 사라져 가는 추세여서
타협이 없는 멜릭 감독의 작품세계는 아마 점점 대중들에게서 멀어져 갈 지도 모른다.

영화 시작후 5분, 단 두 마디의 대사와 조용한 컷 하나만으로 눈물을 참기 힘들 정도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미 이 감독의 작품들에서 배우의 연기와 컷의 활용 등을 고찰해 볼 필요는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조그마하고 섬세한, 세상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이 풀어져 나간다.
앞서 달리며 따라오길 원하지도 않고, 너무 느릿해서 재촉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는
현실의 우리들과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세상을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테런스 멜릭이라는 영화감독의 영화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진부해져 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런스 멜릭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니까.


아바타로 시작된 극장가 3D 열풍은 그 거품이 꺼지면서 그나마 안정세를 찾고 있는 모양인데
아바타처럼 고도로 계산된 구도와 3D 효과를 착실히 준비하지 않은 영화에게
3D란 그저 돈 비싸게 받기 위한 상술일 뿐.
생동감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는 3D 기능을 제일 잘 활용할 수 있는 장르는 역시 호러가 아닌가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호러란 관중을 깜짝깜짝 놀래키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슬래셔 무비.
넓혀 말하면 말초신경 자극을 목적으로 하는 가벼운 팝콘무비에 어울린다는 뜻이다.

이번 데스티네이션 5가 3D 효과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살인을 저지르는 주체가 단 한번도 관객들의 눈 앞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범행의 동기나 범인의 심리 등등 자질구래한 추리의 가지를 전부 쳐내버리고
어떤 소재로 어떻게 사람을 죽여나갈 것인가에만 집중할 수 있는 독특한 소재의 이 영화야말로
시각적 흥분도를 높일 수 있는 3D 효과에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참신했던 소재만큼이나 그것을 비틀고 요리할만한 건덕지가 별로 없던 탓에
1편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멋들어지게 사람을 죽여나갈까'라는 고민 외엔
거의 변한게 없는 시리즈인지라, 이번에도 그 이외의 것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진화한 특수효과와 3D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덕에, 이번 5편은 웃고 즐기는(!) 오락영화로서의 본분은 충실히 만족시키고 있다.
단지, 1편부터 봐 온 사람들에게는 뻔히 다 알고 있는 설정 설명을 계속 들어야 하는 지루함을 참을 인내심이 필요하긴 하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3D 효과 탓인지 작품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의 이펙트가 너무 인공적이라는 느낌이다.
아무리 눈 앞으로 피칠갑이 튀어나오고 사지가 찢겨나가도 현실감이란게 안 느껴진다.
뭔가 물리법칙이 약간 무시되어 CG 티가 난다고 할까나... 너무 잘 썰리고 피가 젤리같은 느낌이더군.

개인적으로는 2편의 오프닝 학살 씬이 가장 잘 편집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5편의 오프닝 학살도 합격점을 줄 만하긴 하다. 피가 피처럼 안보인다는게 문제지만.
제일 조마조마했던 장면은 화려한 사망 장면이 아니라 발바닥 콕! 장면이었다. ㅡㅡ; 아휴 살떨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사망장면은 대충대충 때우는 느낌이고
최후반부의 전작과 연결되는 장면이 그저 피식 할 정도의 재미를 줬을 뿐.
3D 효과와의 적절한 조화를 최대의 성과로 삼고, 작품 자체는 오리지날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평작이라 본다.

극장개봉용 호러영화라는 건 점점 이렇게 가볍고 유쾌해지는 걸까. 나뿐만 아니라 실제로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들리더라. 
무겁기 그지없는 내 취향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듯 해서 아쉽기도.


신예 감독의 파격적인 선택과 섬세한 구조, 그리고 폭발적인 감정의 동화.

영화 외적인 면에서 원작 '혹성탈출'과의 관련성을 되짚어보며 키득거릴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상당수 관객이 전혀 키득거릴필요 없는 장면에서 키득거리더라.
원숭이가 진지한 표졍으로 진지한 연기를 하는게 그렇게 웃긴가 보다.
뭔가 영화가 영화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시저를 비웃던 인간들의 결말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는데, 관객들은 그래도 진지한 척 하는 원숭이가 재미있나보다.


월등한 육체적 능력을 가진 유인원의 야성은 비정함과 난폭함의 이빨을 감춘 인간의 지능에 유린당한다.
야성의 유인원이 지능을 갖게 되었을 때, 타종과의 소통이 가능해 진다. 그것은 진화(Evolution)라 부른다.
인간은 언제나 타종과 소통을 원한다. 지적 호기심과 발전적 응용을 위해.
하지만 그 소통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인위적이며 폭력적이다.

야성의 존재는 이윽고 자아(Ego)에 눈을 뜨고 지능이라는 공통 분모로 매꿀 수 없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를 향한 배려와 사랑은 죄책감에 적을 둔 인간의 자기 만족일 뿐. 동등한 지적 생명체로서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식에게 자동차 뒷트렁크를 열어주는 부모가 있는가?

혼란스러운 자아는 그의 생명의 뿌리, 동일종(species)과의 만남을 통해 확립된다.
지능에 굴복한 야성의 존재는 그의 가슴 속에서 지시하는 근원의 외침. 본능의 힘에 의해 굴레를 벗는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했던 곳으로 그를 인도한다.

본능을 억압하고, 야성을 굴복시킨 인간에 맞서 그들이 선택한 무기는 ALZ-112 였을까?

그들의 리더 '시저'가 선택한 무기는 ALZ-112가 아니다.
유인원으로서 부여받은 당연스러운 힘. 인간을 압도하는 신체적 능력과
인간에게 받은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힘. 지능을 이용하는 능력과
자신의 부모나 나름없는 윌과 그 가족에게서 느꼈던, 생명과 생명간의 순수한 애정, 그리고 존중.

이 세가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시저는 처절한 살육도, 증오에 찬 복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순수한 바램으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야성과 본능과 지능을 뛰어넘어, 선인과 학자들이 도달하려고 했던 '지성'의 경지에 이르는 것.
진화(Evolution)에서 혁명(Revolution)으로의 변화를 이루어 낸 것은 인간이 아닌 '시저'라는 유인원이다.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2004) 와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2007) 의 감독으로 유명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최신작이라 그의 숨막히는 영상미와 편집능력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대세인 '이라크전 영화는 망한다'라는 공식을 그대로 답습해서 흥행면에서는 쪽박찬 작품.
원작이 '에메랄드 도시에서의 제국 생활: 이라크 그린 존의 내막'(Imperial Life in the Emerald City: Inside Iraq’s Green Zone)
이라는 논픽션 베스트셀러인 터라, 이만큼 박진감을 가진 작품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평가받을 가치는 충분하지만
역시 영화시장에서 이라크전이라는 소재는 너무 빨리 식상해진 느낌이 든다.
애초에 뭐라고 비틀만한 건덕지가 없을 만큼 뻔하디 뻔한 이익관계에 물든 추악한 학살 전쟁이었으니까.

그린그래스 감독의 진정한 개성은 사실 액션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인 과격한 핸드핼드 촬영기법은 사실 액션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극의 사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린그래스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2002)가
처절할 정도로 현실의 부조리를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911 테러 당시의 현상을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한 플라이트 93(United 93, 2006)을 제작하는 등
이 감독은 원래 사회 고발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1973년, 모든 시위가 원척적으로 불법화된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평화시위에
공수부대가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1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던 피의 일요일.
평범한 청년을 폭탄테러범이라는 누명으로 치장하며 모든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으며
단 한명의 공수부대원도 처벌받지 않고, 지휘관은 영국 여왕에게 명예 훈장까지 받았던 이 사건은

어째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과 너무나도 판박이라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되풀이되는 이 잔혹한 역사의 굴레란 참 무정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건이기도 한데
그 사건을 영화화하는데 이 그린그래스 감독의 역량은 정말 최적화 되어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본 시리즈로 인해 박진감 넘치는 액션영화의 떠오르는 능력자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감독이지만
플라이트 93 이후 4년만에 이 '그린 존'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다고 본다.
반대로, 본 시리즈를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거의 어필하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도 쉽게 가능하다.

이라크전이라는 특성상 대규모의 부대와 부대가 맞부딪치는 장면은 아예 없고
그나마 본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긴박한 추격적인 영화 최후반부에 화려하게 펼쳐지고
그 장면은 과연 겉만 번지르르한 감독이 아니라고 항변하는듯 본 시리즈에 버금가는 명품 추격씬이라 하기에 무리가 없다.
단지 이곳에서의 맷 데이먼은 제이슨 본이 아닌 평범한 미군이기 때문에, 초인적인 원맨쇼는 보여주지 않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이제껏 그린그래스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갈 만큼 흡잡을 장면이 별로 없다.
액션씬이 극단적으로 축소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카메라워킹엔 힘이 넘치고
작중 내내 일정 수준 이상의 긴장감을 놓치 않아서 관객들은 화면을 따라가는데 즐겁게 에너지를 소비한다.
배우들은 욕심 부리지 않고 정해진 만큼의 역할을 완수하고 있어서 작품은 전체적으로 무리한 구석 없이 안정된 느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최대 약점은 이 감독이 너무 우직하다는데 있었다.

이 작품의 제목인 '그린 존'은 전후 미국 임시사령부가 들어선 바그다드궁 주변을 지칭하는 이름인데
마실 물 한잔이 없어서 총을 든 미군들 앞으로 몰려드는 이라크 시민들의 모습과
와인을 마시며 야외 수영장에서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미군 관계자들의 모습 두 장면만 대비해 봐도
더 이상 2시간의 상영시간이 필요없을 정도로 할 말은 다 한거나 마찬가지다.

작품의 내용은 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수색작업에 의문을 품은 한 미국 준위가 진실을 파헤친다는게 전부인데
이 부분이 작품을 너무 유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사실 전쟁 전부터 이라크에 WMD가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기는 했나?
IQ 가 2메가바이트 정도 되는 무뇌충 정도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라크와 미국의 안정을 위해' 몸도 아끼지 않고 작전에 몰두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 밀러 준위정도 되는 사람이
정말로 철썩같이 WMD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라서 웃음까지 나온다.
차라리 밀러 준위의 진실을 캐려는 집착에 '자신은 빠지겠다'고 팀을 나누는 부하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들의 머리 굴리는 능력이란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의 바보' 밀러 준위는 사실 감독이 추구하는 리얼한 고증과 가장 동떨어진 캐릭터였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만난 후세인의 오른팔 알 라위 장군이 내뱉은 냉소에 가득한 대사  '너네 정부가 원했던 시나리오일세'
그 대사 하나 유추해내는데 그렇게 머리를 싸매야 했던 밀러 준위의 IQ 는 도대체 몇인가?
정말로 단지 국방성의 인사 한명이 WMD 정보를 조작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는 순진무구한 생각을 했었단 말인가?
어쩌면 알 라위의 대사는 정공법으로 표현하기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얄팍한 눈속임이었던 이라크전의 진실을
찍는 자신도 민망해하는 감독에게 스스로 던지는 의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너무나 어설퍼서 과연 이런 말도 안되는 증거가지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움직임이 가능한 것인가 싶었지만
과연 세계 최고 멍청이가 수장을 맡은 미국이란 괴물은 어이없는 이유를 앞세워 한 나라를 멸망시켜버렸다.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최대한 사실적으로 촬영한 영화마저도 어색함이 느껴지는 이 어색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동양의 어느 지역에서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도 감지하지 못하는 외계인의 특수기술을 이용해서
1200톤급 초계함을 두동강 내버리는 세계 최빈국급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이것도 나중에 영화로 만들면 그린존 만큼이나 어색한 작품이 탄생할 듯 하다. 장르를 SF로 하면 좀 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