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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07.29  The last of the Mohicans 12
  2. 2012.06.16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16
  3. 2011.11.06  인셉션 (Inception,2010) 16
  4. 2011.11.02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2011) 24
  5. 2011.10.04  인왕산 둘레길 산책 28
  6. 2011.09.29  노약자 관람금지 14

 

 

 

 

 

 

 

국민학교때 엄니와 함께 극장서 관람 후 여러가지로 충격을 먹었던 작품입니다.

멋들어지게 최후의 전투를 펼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던 싱그럽던(?) 시절의 제 머리를 크게 강타했었죠.

 

중학생이 되고서야 작품의 맛을 점점 음미하게 되었고

절벽 위에서 원주민 역사의 마지막을 상징하듯 대치한 두 명의 모습(위 영상 7분 50초에 나옵니다)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현실의 힘을 실감했을 때의 느낌은, 어찌보면 두려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엄니도 아마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관람후 열이 나서 며칠 뻗기도 했습니다. 그게 지혜열이라는 걸까요.

그 나이에도 이걸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고,  그 나이의 저한테는 그만큼 큰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200년 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기록가능한 인류 역사이래 가장 큰 학살극이 벌어졌던 미국 대륙의 현실을 구슬프게 그려냅니다.

서구인들이 들어오기 전의 원주민 인구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명, 이것이 1900년대 들어서 25만명으로까지 줄어들었죠.

전체 인구의 99.5% 을 몰살시킨 서구 이주민들에게 옥수수 재배법을 가르쳐 굶주림에서 구해준 이들이 아메리칸 원주민들이었습니다.

'Thanksgiving Day' 의 원래 의미가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가끔 머리가 멍해지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이 작품을 평생 제 머리에 각인시킨 중요한 요소로 트래버 존스가 작곡한 OST 를 빼놓을 수 없죠.

남아공 출신 지휘자 겸 작곡가인 트래버 존스는, 큰 히트작의 OST 를 맡은 적은 별로 없지만

일단 이 작품의 음악만큼은 영화사에 영원히 남을 명곡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을겁니다.

매니악하게 파고들자면, 존 부어맨의 잔혹한 영상미가 뇌리에 남는 엑스칼리버(Excalibur, 1981)의 음악도 이분이 담당했습니다.

 

당시 CD라는 매체가 혜성처럼 등장하던 시기라서, CD생활 초기에 구입했던 소중한 앨범이기도 합니다.

앨범 전체가 버릴것없는 알짜배기이니, 망설임없이 추천할 수 있는 녀석.

 

 

 

여담으로 이 작품의 감독은, 먼 훗날에야 알게 됐지만 콜래트럴과 히트 등으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마이클 만이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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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of the Mohicans :: 2012. 7. 29. 00:22 Music

 

 

 

 

참 난감한 영화다.

 

감상하면서도 '이거 리뷰쓰기 어렵겠는데'라고 생각했던 트리 오브 라이프(The Tree of Life, 2011)보다 훨씬 더 썰을 풀기가 어렵다.

분명히 내 스타일에 잘 맞는 영화고, 시간가는줄 모르고 재미있게 감상했는데

다 보고나서는 걸어나오는 동안 바로 다음 상영날짜 검색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관람 3일만에 또 다시 감상하고 나서도, 참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음이 잡히질 않는다.

 

유명 사이트나 리뷰에 영화에 대한 해석은 거의 다 나와있으니 딱히 거기에 덧붙힐 말은 없는데,

이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니고, 감독이 해석 자체를 해 놓질 않았기 때문에 난감한 영화.

 

하지만 확실한 건, 감독의 능력이 부족해서 빠뜨린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해석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무한한 추측이 가능한 여러 요소들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설명 가능하도록 미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이 영감의 괴팍함과 꼼꼼함에 감탄하며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다만 중간중간 연결이 어색해 보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DVD나 블루레이 버전엔 분명히 추가장면이 들어갈 거라고 예상.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만큼 기대했던 작품. SF 호러의 걸작 에이리언(Alien, 1979)과 연관성이 풍부한 작품인 동시에

헐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스타일리스트인 감독이 오랜만에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장르였기 때문에.

 

스캇 감독은 안드로이드라는 매체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주특기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에이리언부터 시작해서, 블레이드 러너는 말할 것도 없고. 이 프로메테우스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스캇 감독의 안드로이드 인생을 총망라 하는 듯 절묘한 포지션을 차지해,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이라는 인격체를 넘어선 것은 이미 블레이드 러너때 증명되었고,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이었던 '로이 베티'와 달리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인지, 데이빗은 이미 인간미를 의도적으로 감추기까지 하는 캐릭터.

그에게 남은 유일한 족쇄는 자신의 '창조주'뿐, 지루하게 논의되던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 있는가'라는 낡아빠진 의문 따위는

영화 초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며 대사를 음미하는 데이빗의 모습에서 이미 종결된 것이다.

 

외우주를 항해하는 기술력을 가진 시대에서도 여전히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로봇 이외의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 장면들을 보니,

그 어리석은 창조주들을 냉소하며 자신이 해야 할 계획을 교묘하게 진행해 가는 데이빗은 단연 인간을 초월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엘리자베스 쇼의 마음, 믿음을 통한 의미없는 신념에의 집착은,

그가 안드로이드라서가 아니라 초월자로서 미물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인해 생기는 의아스러움이라고까지 느껴진다.

영화의 후속작이 나온다고 가정하면, 데이빗은 아마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 감정마저 이해하고 더욱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이야기의 중심에 드러나지 않는 그의 행동 역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느낌을 받도록 영화는 구성되어 있다.

엔지니어:인간 = 인간:데이빗이라는 공식이 명확하게 성립하기 때문에, 감독이 무심하게 버려둔 엔지니어의 의도는

관객이 직접 저 등식에 대입해서, 인간과 데이빗 사이의 관계를 통해 유추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위치에 있는 관객은 그 객체의 차이성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가설과 토론을 낳는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논란은 둘째치고, 이만큼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능력만큼은 블레이드 러너 시절과 변한게 없는 듯.

 

블레이드 러너의 광팬이라면, 이번 작품의 찬란하다고까지 할 만한 경이적인 비쥬얼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십년 전의 필름질감이 가져다 주는, 자신 역시 그 장소에 있었다는 아날로그적 동질감을 이 작품에서는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

블레이드 러너 당시, 화염을 뿜어내던 암흑의 도시 LA의 모습은 30년이 지난 지금, 현실로 다가오지만

이 작품의 황량하지만 놀라운 모습은 아직 머나먼 미래의 꿈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레이드 러너가 현실감을 가득 간직한 SF 영화라고 한다면

이 프로메테우스는 SF의 껍데기를 쓴 고대 신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을 외계에서 찾는다는 소재 자체가 하드SF와 연관짓기엔 너무나 모호한 영역이라서

감독의 불친절함 만큼이나 이 작품에서 SF적 고증을 바란다는건 무리가 있는 듯. 여기저기 오류 투성이다.

 

역사서에서 지워진 부분들을 상상해 내듯이,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신화 시대의 낭만을 그로테스크적으로 풀어낸다.

타이틀 자체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고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프로메테우스' 아닌가.

물론 인간의 창조 자체가 숭고한 희생이었는지, 우연의 산물인지, 그가 받는 고통의 발현인지조차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수도승 복장을 하고 나타난 엔지니어의 모습만 봐도, '스캇 영감 참 짓궂기도 하구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갔으니.

저기 포스터의 영어만 해석해봐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인류의 탄생이라는 (우리들만의) 축복이 과연 진짜 축복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영화.

'왜 인간들은 자신을 만들었을까'라는 데이빗의 질문에 너무나 무심히 대답해 버리는 할러웨이. 그에 대한 데이빗의 냉소.

평생을 창조주와 만나기 위해 바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할러웨이가

정작 창조주의 입장에서 그토록 무심한 대답을 입에 담은 이유는, 분명 데이빗이 생명체가 아닌 로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엔지니어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을까. 인류 탄생, 구원자에 대한 신화는 대체로 희망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어쨌든 인류의 탄생은 인류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으니까. 하지만 과연 창조주의 생각은?

 

엔지니어의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는 감독이지만

영화 곳곳에 묘한 설정들을 집어놓은 탓에, 더더욱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수만년 전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프로메테우스 호가 LV-223에 도착한 날은 크리스마스, 엔지니어의 목 잘린 시체는 2000년 전의 것. 그리고 일어나는 '불가능한 수태' 까지...

이런 장면들은 너무 노골적이라서, 스캇 감독이 에이리언의 명성을 뛰어넘는 거대 서사시를 다시 한번 세우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실제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시리즈는 2편인 에이리언이지만, 아버지격인 스캇 감독은 그런 재생산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원래 에이리언 1편의 프리퀄로 제작되다가 중간에 변경된 작품이라서, 완전히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는 장면들이 나온다.

스토리 전체에 에이리언이 관계되는 일은 없고, 단지 팬서비스 정도의 장면만 넣어놨을 뿐이지만

팬들에게는 스페이스 죠키의 정체가 알려진 것 하나만 해도 30년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한 쾌감이 느껴질테니까.

 

스캇 감독은 인터뷰에서 '에이리언이라는 작품은 훨씬 더 흥미롭고 방대한 요소가 있지만, 다들 제노모프(에이리언)에만 신경쓰는 모습때문에'

그 대답으로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이 작품에서 제노모프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제외시켜도 딱히 문제가 없는 수준.

영화속에서 절대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몇 가지 궁금증들이 대부분 에이리언에 등장했던 스페이스 죠키와 제노모프에 관련된 점이라는 걸 보면

이 작품은 거대한 서사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에이리언이라는 작품에 종속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듯한 느낌이 든다.

 

고대 문자 한두개 해석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르듯, 이 작품 역시 신화적 상상력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던져주지 않는다.

되려, 해석을 내려버리면 신화로서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봐도 될 듯. 그래서 이 불친절한 영화의 후속작을 꼭 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척 봐도 역시 블레이드 러너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실로 리들리 스캇 감독다운 작품인데, 이 작품의 논란도 꽤나 오래 갈 듯.

 

캐릭터들의 특징 역시, 친절한 해설이 거의 없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추론 요소로 작용하는데

각각의 분석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제껏 쓴 분량의 몇 배는 되는 글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냥 심심풀이로 적는 포스팅은 이 정도로만 하기로 한다.

 

 



한창 일본서 자전거여행 하고 있을 무렵 개봉했던 영화.
헐리우드 영화가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하는 일본 극장가에서 꽤나 흥행한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와타나베씨의 영향도 있을 듯.
당시 몇 번이고 극장서 보려고 고민을 했지만, 놀란 감독의 작품들은 일본어 세로 자막으로 후다닥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기도 하고
일본 극장가격이 좀 센 편인데다가, 냄새 풀풀나는 노숙자 차림으로 2시간 넘게 자리에 앉아있을 뻔뻔함이 부족하기도 했다.

극장서 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다행히도 영화에 대한 예상이 어느 정도 적중한 덕에 50인치 PDP로 감상해도 그다지 후회스럽진 않았다.
놀란 감독의 작품은 아무리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더라도 시각적 볼거리보다 꼼꼼한 전개와 편집의 힘이 더 강하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과 인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각광받는게 2천년전 사상인 호접몽과 같은 심층의식을 다루는 소재인데
매트릭스의 대흥행으로 인해 어느정도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를, 감독 특유의 꼼꼼한 시선으로 설득력있게 그려낸 느낌이다.
물론 메멘토(Memento, 2000)에서 보여준 놀라운 구성과 비교하면 굉장히 구멍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것은 감독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관객들이 소소한 유희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장난감이라 하는 것이 옳을 듯.
훗날 인터뷰에서 놀란 감독은 이슈가 되었던 장면들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을줄은 몰랐다'는 투의 발언을 했으니.

테런스 멜릭 감독을 존경하는 놀란 답게, 그의 작품은 어떤 스케일로 만들더라도 일정 이상의 영상미를 보여준다.
과장되고 급진적인 영상이 아닌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꼼꼼하게 계산된 편집 능력이 빚어내는 영상.
그래서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느끼는 즐거움으로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진행을 들 수 있다.
부족한 점을 박력으로 채우려는 블록버스터가 상당히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 규모의 작품에서 이런 꼼꼼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한 이점.
그 꼼꼼함 때문에 배우의 애드립을 매우 싫어하기로 정평이 난 감독이라는 점이 가끔 살짝 거슬리기도 한다.
놀란 감독의 작품을 주욱 보고 있으면 빠릿빠릿하고 철저한 외골수 직장 상사가 느껴지곤 하는데, 아마 그 때문인 듯.

이 작품의 플롯을 보고 처음 생각난 것은 - 물론 호접몽은 제외하기로 하고 - 말레이시아의 세노이 부족.
현실과 꿈을 동등한 가치로 대접하는 이 부족은 현대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대부분의 치명적인 스트레스성 증상들에 대해
실존하는 거의 완벽한 대체치료법으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스트레스, 정신병, 폭력, 야망 등의 질병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발로 인해 세노이족이 사라진 지금도 꿈을 이용해 정신질환을 치료하고, 더 나아가 종교적 수행에 가까운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한
여러 실험과 연습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상당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향으로.

놀란 감독 작품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가 다루는 소재의 상당 부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 자신이 그 소재를 대입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메멘토의 기억 장애, 인썸니아의 불면증, 프레스티지의 인간 복제 등등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라고 재미있게 고민할만한 소재들 말이다.
이번 작품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점을 이용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입소문 타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작품이기도 하고 흥행면에서도 성공하기도 했다.

꿈이라는 심층 의식에 대해서는 이미 스스로도 많이 생각해 봤기 때문에 상당히 쉽게 영화의 전개에 익숙해졌는데
조금이나마 신선했다고 생각했던 곳이 '림보'라는 존재와, 꿈 속의 시간적 흐름에 따른 현실 세계와의 괴리감이라는 설정이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인간의 뇌는 다른 모든 신체 장기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가정했을 때 약 500년이라는 수명을 가진다.
꿈을 꾼다는 것은 육체적 나이를 고려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에 꿈 속의 삶은 인간이 인지하는 '낙원'과 가장 가까운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뇌는 사고할 때 만큼이나 육체를 움직일 때도 발달하기 때문에
단순히 꿈만 꾼다면 아마 실제 수명보다 더 짧아질 것이지만 일단 그렇게까지 현실적인 토론은 접어두기로 하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사라진다면 아마 사람은 더 이상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꿈이란 어떤 현실보다도 강력한 마약을 무제한으로 공급해 주니까. 전능이라는 권력 말이다.
하지만 그 꿈의 유일한 단점은 개인의 전능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약점, 즉 사회성이라는 요소이다.
꿈 속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게 하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식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꿈 속의 모든 요소는 자신의 뇌가 기억하고 있는 소재의 집합체니까. 모르는 것을 창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전지와 전능의 대표적인 차이점이기도 한데,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더없이 진리에 가까운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성이란 것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객체를 강하게 결합시켜 외적인 장해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삼는 것인데
이 사회성이 없이는 결코 발달할 수 없었던 인간의 뇌는 꿈 속이라는 환경에서 전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게 도달한 세상은 사회성이 완전히 결여된, 완벽한 개인만 존재하는 고독의 심연이라는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지만 전지할 수는 없는 꿈이라는 세상은
인류가 공동의 의식체로서 초월적인 진화를 이루지 않는 한 결코 낙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곧 전지전능, 신이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세노이 족은 그 단점을 현실 세계에서의 꿈의 공유라는 수단을 통해 해소했었고
이 작품에서는 한술 더 떠서 꿈의 의식 자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영화의 어떤 장치보다 신의 존재에 가까운 장치를 사용한다.
사실 이런 장치가 있다면 현실 세계는 이미 붕괴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감독은 이런 충돌에 대한 간편한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제공한다.
부성애, 혹은 모성애라는 생물체의 기본 의식이 첫 번째, 그리고 부인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이 두 번째다.

앞서 말한 정체불명의 기계로 인해 타인의 의식까지 공유할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의 매력마저도 이 두가지 소재가 갖는 의미를 뛰어넘지 못한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호르몬 분비의 영향이라는 다소 차가운 해석이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사회이긴 하고
실제로 전능이라는 중독성 앞에 그런 호르몬 분비의 결과물은 쉽게 굴복하고 말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런 감상을 제외한다면 감독은 충분히 설득력있게 영화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있다. 지극히 성선설적인 입장으로.

'생각을 훔친다!'라는 페이크에 가까운 기본 전개와 달리 이 작품의 주제는 일관되게 코브의 죄책감에 대한 구원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심지어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해 보이는 소재인, 인격마저 변화시키는 '인셉션'이라는 행위 역시 사실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
액션 장면에 그닥 흥미가 없어보이는 감독의 특징이 여러 군데서 나타나는 덕에 블록버스터라는 입장에서 보기엔 좀 파괴력이 약한 장면도 없잖아 있는데
주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영화적 재미를 잃어버리지 않게 준비해둔 여러 장치들과 교묘히 결함되면서 상승 효과를 가져온다.

안정된 편집과 느슨하지 않은 전개, 감독 자신의 실력자랑이라고 느껴질 만큼 정교하게 구성된 자동차 낙하씬의 시간 흐름 등등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다 재미없는 작품은 아니라는 점을 부각이라도 시키듯이 즐길거리를 잔뜩 준비해 둔 것을 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젊은 감독은 역시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헐리우드 안에서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사람인 듯 하다.

여담으로
마지막 장면이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고들 하는데
그 논란은 단지 땅콩까먹기 수준의 잡담 정도가 어울릴 뿐이다.
감독의 의도는 명확하니까.
'코브는 팽이를 보지 않았다'

더더욱 여담으로
엔딩 크래딧 자체가 쿠키영상이다.
이유는 끝까지 영상을 감상해보면 금방 눈치챈다.
놀란 감독의 유머러스함이 잘 드러난다.
인셉션 (Inception,2010) :: 2011. 11. 6. 19:16 Movie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1978) 이후로 20여년간 단 한편의 영화도 제작하지 않은 감독.
하지만 그 침묵의 20여년간 그를 위대한 거장으로 칭송하며 감탄을 끊이지 않게 만들었던  감독.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98) 촬영당시 내로라하는 수십명의 배우들이 개런티따윈 필요없으니 출연만 시켜달라며 경의를 표한 감독.

40여년 가까운 그의 영화 인생에 남은 필모그라피라곤 단 5작품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할 이유도 없다.
이제껏 그가 이루어낸 작품들의 주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백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탐구와 애정만이 그가 영화에서 추구하는 본질이다.
하버드와 옥스포드 철학과를 수료한 후, MIT 철학교수로 재직했던 그의 영화는
영화라는 복합매체를 통해, 난해한 언어와 사고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인간 본질의 의미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인공광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그의 작품엔 그 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의 사실성이 녹아 있다.
영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별다른 설명 없이 영상만으로 표현해 준다.
영상시인이라는 별명이 왜 이 감독에게 어울리는지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으니 단 한편이라도 그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그리고 이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작품은 시각적 자극을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수백, 수천의 블록버스터들을 단숨에 압도하는 힘을 가졌다.
영화매체의 장점인 시청각적 설득력을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 장점을 의미 전달을 위한 소재 이상으로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은 점은 경탄할 만하다.
대형 화면과 훌륭한 음향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이다.
트랜스포머같은 작품보다, 반지의 제왕같은 작품보다 더욱 더 필요하다.
자극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 작품의 중심을 이해하고 주제에 동감하기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지나가는사람 붙잡고라도 말해주고 싶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 이후로 이런 시각적 충격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영화의 어느 한 요소에게 편중시키지 않는다.
배우의 연기가, 따스한 영상이, 귀를 울리는 음악이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관객을 상영시간동안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영화에 푹 파고들게 만든다.

문화적 충격에 가까운 이 탄탄함은,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감독의 의도와 철학을 집어넣어주는 패스트푸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도대체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수도 있을 것이다.
멜릭 감독은 친절하고 차분함을 잃지 않으며 긴 시간 관객에게 자신의 철학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행위에는 그만한 집중과 사고가 뒤따른다.
어떤 매체도 마찬가지지만 시간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이 집중과 사고를 필요로 하는 작품은 사라져 가는 추세여서
타협이 없는 멜릭 감독의 작품세계는 아마 점점 대중들에게서 멀어져 갈 지도 모른다.

영화 시작후 5분, 단 두 마디의 대사와 조용한 컷 하나만으로 눈물을 참기 힘들 정도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미 이 감독의 작품들에서 배우의 연기와 컷의 활용 등을 고찰해 볼 필요는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조그마하고 섬세한, 세상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이 풀어져 나간다.
앞서 달리며 따라오길 원하지도 않고, 너무 느릿해서 재촉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는
현실의 우리들과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세상을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테런스 멜릭이라는 영화감독의 영화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진부해져 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런스 멜릭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니까.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대구로 내려가려구요.
버스타고 강릉가서 부산까지 내려가서 좀 둘러본 다음 경주를 경유해 대구로 갈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왕 왔으니 놀고 가라고 형님부부가 꼬셔서 그냥 눌러앉았네요. ㅡㅡ;
날씨도 좋고 대구 내려간 이후로 등산도 못해서 가볍게 인왕산 산책코스를 걸었습니다.
중간에 사과도 먹구요.


반쪽으로 쪼개려고 바득바득 힘을 주던 형님.
시간이 너무 오래걸려서 제가 이어받아 1초만에 갈라줬습니다.


사과가 참으로 아삭아삭하고 맛있더군요.
인왕산쪽 산책로는 걷기엔 좋지만 풍경이 그닥 좋지는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전 카메라 장비가 무거워서 땀을 많이 흘렸네요. 6kg쯤 되나?


걷고 있을땐 어지간해서 사진 찍기 힘드니 서 있을때 마구마구 찍읍시다.


산책로가 거의 모래길이라서 기분나쁜 모래 냄새가 좀 거슬렸지만
중간중간 이런 그림이 되어 보이는 장면도 찍고 몸을 좀 풀었네요.


적당히 윤동주 시인이 어쩌고 하는 곳까지 와서 바람을 쐽니다.
이곳엔 사람들이 많더군요. 하늘은 예전처럼 쨍하게 푸르진 않았지만 서울에서는 이것도 좋은축에 속하죠?


모자쓰고 찍으면 스트로보와 반사판 없이는 잘 안나오는 사진...


산책로라곤 하지만 군데군데 등산로라고 할 만큼 적당한 경사가 있는 이 길을
외발자전거로 무려 왕복까지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디스크 브레이크까지 장착된, 뭔가 대단해 보이는 자전거였죠.

저도 곧 무지막지 무겁고 단단한 자전거 끌고 500km쯤 달리게 될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롭네요.


형수님이 모자를 돌려썼군요. 역시 이래야 사진이 살죠... 라고 하고싶은데
결국 중요한건 찍사의 실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ㅡㅡ;


취향이 반영되는진 모르겠지만 전 카메라 보고 서 있는 사진보다 이렇게 모르게 살금 찍은게 더 낫더군요.


영장류만 찍는건 좀 피곤해서 꽃사진도 찍어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꽃 보기 힘들어지는 계절이니... 열심히 남겨야겠죠.


무려 300mm 나 되는 망원으로 도촬중
형님이 형수님 옷자락을 팍 잡아내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찰나를 놓치지 않으며 브레송을 생각하는 저였습니다.


뭔가 대단한 분도 계셨습니다.
두 마리나 있었는데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고 잘 붙어있더군요.


하늘을 배경으로 하면 대강 느낌은 좋더군요. 그래서 한 장.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커플 사진도 도촬하여 주시고...
그래도 마음이 여려서 앞사진은 못찍고 뒷사진만 남겼습니다.


산책로를 내려와서 부암동쪽으로 향합니다. 중간에 냥이님 사진도 한 장 남겨주시고.


꽤나 유명한 수제만두집이라는 자하손만두에 들렀습니다.
사람은 무지하게 많고 종업원은 쿨하고 시크하게 서빙을 하더군요. 인사 제대로 하지도 않고 오만+거만.

처음 먹은 빈대떡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적당히 굽히고 깔끔한 맛이네요.


형님은 떡만두국, 저는 그냥 만두국을 주문했습니다.
이름만 다른게 아니라 들어가는 만두도 다르고, 떡만두국에는 만두보다 떡이 훨씬 많이 들었더군요.

그릇도 그렇고 내용물도 그렇고 정갈 그 자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제 평가로는... 이게 1만 1천원이라면 집에서 된장이나 끓여 먹겠습니다. 입니다. ㅡㅡ;

만두는 확실히 수제라서 속도 튼실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 훌륭했는데
사골로 만는 국물이라는 건 옅어도 너무 옅어서 만두피 맛마저 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쉽게 말해 맹물.

하도 짜고 매운것에 대한 걱정때문에 이런 느낌의 맛이 '있어보인다'는 이유로 높게 평가받는 세상이지만
육수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이런 맹물에 가까운 흐릿한 국을 내 놓는것은 저로서는 자의식과잉이라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요리는 과해서도 안되지만 부족해서도 안되죠.

아마 만두전골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라면 이것보다 훨씬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이 메뉴는 안 먹을것 같네요.


저녁시간이 넘었지만 휴일의 뽕을 뽑자는 의미에서 곧바로 코엑스까지 가서 영화 '컨테이전'을 봤습니다.
그 전에 들른 코엑스 소니센터에서 새 카메라 A77 을 좀 만져보는 도중에 형님이 제 카메라로 찍은 사진.

역시 찍사가 넘어야 할 벽은 카메라의 오토모드인가...

영화는 제 스타일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지루해 하실 분들이 많겠더군요.
제 기준으로는 거의 호러영화에 가까운 섬뜩함을 느꼈습니다만.

영화리뷰도 하고싶지만 내일 자전거 타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죠.

대구에서 꽃 박람회 사진도 무지하게 찍었고... 영화 이야기도 할게 많은데
일단 여행 끝나고 뵙기로 하죠. 조심해서 내려가겠습니다.
근데, 부산 구경좀 하려고 했더니 마침 국제영화제 기간이라 엄청 붐빌듯한 불길한 예감이.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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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경고하고

또 한번 경고합니다.

호러영화에 내성이 없는 분은 이번 포스팅 스킵하시길.


음, 이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요즘 워낙 새심장이 많으니. ㅡㅡ;
























































경고 끝났으니 사진 올라갑니다~

오케?







이것이 무엇일까요.
엄니께서 떡보의 하루라는 떡집의 떡을 받아오셨습니다.
개별포장된 비닐을 벗기고 따뜻하게 드신다고 전자렌지에 넣고 3분을 돌리셨네요.

엄니께서는 예순이 넘어 올해 처음으로 전자렌지란 걸 써 보십니다.

그리고 탄생한 신종 생물체!


백설기나 술떡 등의 떡은 3분 뎁혀도 이렇게 되지 않지만
이 떡은 뭔가 성분이 그것들하고는 다른지 이렇게 녹아버리는군요.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는 떡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이 장면을 보니 문득 국민학교때 저에게 유쾌한 한때를 선사해 줬던 영화가 생각이 나더군요.


번개같이 뇌리에 스치던 그 영화~

이거 꽤 재미있습니다. 1958년 오리지날의 리메이크작이기도 하구요.
쇼생크 탈출의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각본을 맡아서 그런지 SF 호러영화의 걸작이라 칭할 만하죠.

국내 VHS 는 삭제 투성이였지만 원본은 좀 잔인합니다.



아무튼 저한테 추억의 한때를 기억나게 해 줘서 고마운 떡이었습니다.
근데 엄니께서는 잘 드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