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동경'에 해당하는 글들

  1. 2013.02.16  도쿄 산책 - 그때의 시작과 지금의 끝 10
  2. 2013.01.25  도쿄 산책 - 삿포로 라멘 스미레 18
  3. 2013.01.20  도쿄 산책 - 요코하마 라멘 박물관 20
  4. 2013.01.07  도쿄 산책 - 관광, 식사, 그리고 쇼핑 18
  5. 2013.01.06  도쿄 산책 - 스카이트리 좀더 20
  6. 2013.01.04  도쿄 산책 - 스카이트리 14

 

새벽에 갑자기 호텔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길래 깜짝 놀랐다.

프론트 직원이 '손님 오늘 콜택시 예약하셨는데요' 하고 말하길래 더욱 깜짝 놀랐다.

예약은 체크아웃 당일인 내일 새벽에 해 놓은거라고 하니까 자기는 'Tomorrow' 라고 들었다고 한다.

어쨌든 내일이라고 확인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시간은 4시 45분쯤.

 

콜택시를 4시 반에 예약했으니, 택시기사는 15분 혹은 20분쯤이나 도로에서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프론트를 불렀을 터.

본의는 아니라고 해도 괜한 수고를 하게 해서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새벽 불시에 잠이 깬 터라 전화기에 제대로 응수를 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직원쪽의 미스라는 확신이 생긴다.

내가 외국인인걸 알고 있으니 직원은 자꾸 자기가 'Tomorrow' 를 들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난 일본에 왔을때는 머릿속 생각조차 일본어로 떠올리는데 익숙해 있다.

나하고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해도 내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걸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런 내가 호텔 직원한테 영어를 이야기 할리가 있나? 한국어는커녕 일본어보다 더 못하는게 영어인데 말이다.

 

어느 쪽이든 변명은 필요했을테니 직원에게 악감정을 가질 것까지는 없지만

이런 일이 있고나니 잠은 완전히 깨어버리고, 두시간동안이나 침대에 파묻혀서 당시의 잘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되짚어보는 고행만이 남을 뿐.

 

조식 먹고나서 문득 네거티브한 생각이 든다. 여행중에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생겨난 방어기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무튼 직원에게는 좀 미안한 가정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호텔은 새벽시간중엔 프론트가 휴무를 하기 때문에, 이 직원은 괜히 근무시간 외에 잠이 깨서

내 뒷수습을 해 준 셈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든 짜증일런지, 아니면 순수한 착각의 산물로 인해

내일 새벽의 콜택시 예약을 그만 잊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그다지 바람직한 추측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늘로 착각한 콜택시가 그만 취소되어버려서 내일 오지 않는다면

나는 비행기도 타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버릴지도 모르니, 이런 경우엔 재차 확인해 두는것도 나쁘진 않다.

 

프론트 직원분한테 다가가자 그쪽에서 먼저 웃으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줘서 한결 기분이 풀린다.

내일 콜택시 다시한번 정확히 확인하고, 어제 직원이 내 이야기 받아적던 종이를 다시 펼쳐들었는데

거기엔 분명히 내일 날자가 프론트 직원의 손으로 정확히 적혀있었다. 동그라미까지 친 상태로.

여기서 '이거 봐요. 분명히 내일이라고 적혀있네' 라고 확인사살을 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해만 풀린다면, 굳이 이 친절한 직원에게 면박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웃으며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내일 예약시간을 정확히 확인해 두었다.

나같은 사회부적응자 치고는 꽤나 스무스한 일처리였다는 만족감에 조식도 한층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내일은 새벽 4시 반에 공항으로 출발하니 사실상 오늘이 여행 마지막날.

닛코를 다녀오지 않은 이번 여행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행선지는 미리 정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콘크리트 정글인 도쿄에서 숨막히게 돌아다녔으니 마지막으로 숨 좀 돌리는 의미로, 일본식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기로 한다.

 

 

단지, 지갑속에 남은 현금을 탈탈 털어보니 불안감을 떨칠 수 없긴 하다.

남은 금액이 5천엔쯤 되니, 예정에 없었던 선물까지 계산에 포함하더라도 그리 흥청망청 쓴 것은 아니고

귀국 하루 남겨두고 이 정도면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 모든 계산을 무시하고 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내일 새벽의 콜택시 요금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요금 비싸기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일본의 택시인데, 콜택시 추가요금까지 붙으니 얼마나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우에노 역에 도착해 거기서 공항까지 전철요금은 약 1천엔쯤.

그러니 콜택시 요금이 거진 2천엔쯤 나오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해 본다면, 오늘 맛있는거 사먹을 돈은 1천엔밖에 없다는 셈이다.

점심, 저녁, 그리고 간간히 먹을 간식을 생각하면, 1천엔으로 하루 버티는건 사실상 편의점 컵라면과 주먹밥 정도가 전부.

 

오늘 산책할 정원 리쿠기엔(六義園)의 입장료와, 거기까지 왕복 차비를 계산하면 1천엔도 남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고.

그놈의 새벽출발만 아니었어도 5천엔은 느긋하게 즐길거 다 즐기고 책한권까지 사도 될 금액인데.

 

이렇게 머리 쥐어뜯던 내 고민은 사실, 맥이 풀려버릴 정도로 너무나 손쉽게 해결되었다.

돈이 없으면 ATM에서 뽑으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 버렸기 때문에.

시티은행 카드를 갖고 온게 아니라 저렴한 수수료는 기대할 수 없지만

4~5천원 정도의 수수료를 지불하면 편의점에서도 엔화를 바로 인출할 수 있다.

 

조식 먹고 옆의 편의점 가서 몇초만에 1만엔 한장을 뽑아내니, 이제껏 한 고민은 무엇인가 마음이 허전해진다.

외국 신용카드로는 1만엔 단위로밖에 인출이 되지 않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1만엔 뽑은게 조금 아쉽긴 했다.

몇분 전까지 돈을 어떻게 세이브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소지금이 3배로 펄쩍 뛰어버려 돈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차피 남겨서 돌아가봤자 환전수수료때문에 손해밖에 못 볼 것. 여행 마지막날을 컵라면으로 때워야 하나 고민했던 나는

한순간에 '오늘은 사고싶은 책이나 사고 먹고싶은거 막 먹고 호탕하게 놀아보자' 라고 자신만만해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바보같긴 하지만.

 

목표지인 리쿠기엔은 우에노역에서 야마노테선 전철을 타고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또다시 무료 셔틀버스의 힘을 빌어 공짜로 우에노역세 도착한다.

일부러 할 것까진 없지만,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셔틀버스나 조식같은거 많이 먹고 많이 이용할수록

왠지 이득봤자는 기분에 뿌듯해진다. 이런게 소시민의 소소한 기쁨이려나.

 

 

야마노테선 코마고메(駒込)역에 내려서 조금 걸으면 이곳 리쿠기엔에 도착한다.

도쿄에는 중앙에 큰 연못을 중심으로 돌길이 형성되어 있고, 그 주변을 잔디와 초목이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의 '회유식 천수정원'이

접근하기 좋은 곳에 꽤나 여러군데 흩어져 있다. 과거엔 쇼군이나 지역 유지들의 개인 소유 정원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국가에 귀속되어 문화재나 명승지로 등록되어 있다. 덕분에 이렇게 일반인들도 구경할 수 있는 것이고.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도쿄 내부의 여러 회유식 정원중 이 리쿠기엔이 특별히 더 훌륭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현존하는 도쿄의 모든 회유식 정원은 지진, 화재, 전쟁등으로 오리지날이 사라진지 오래고, 모두 전후 재건된 것들이니까.

 

그런 것들 재쳐두더라도, 이곳 리쿠기엔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경치와 매력을 가진 정원 역시 없지 않다.

구 시바리큐온지 정원(旧芝離宮恩賜庭園) 역시 경치가 빼어나고, 코이시카와 코라쿠엔(小石川後楽園) 같은 중국식 감각이 남아있는 정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쿄가 콘크리트 정글임에도 서울보다는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들 회유식 정원이 곳곳에 가동중이기 때문.

복잡한 빌딩숲에 둘러쌓여 있어도, 전철 조금만 타면 도쿄 어디에서든 자연 가득한 정원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요소가

도시로서의 가치에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다 주는지, 직접 다녀보지 않으면 실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정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와본곳인 이곳 리쿠기엔을 다시 찾은것은

새로운 정원을 탐미하는 즐거움보다, 예전의 추억을 다시 곱씹어 보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 때문이다.

 

 

이곳은 생애 첫 자전거여행을 시작한 2008년, 도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아간 정원이기 때문에.

첫 자전거 여행으로 짐 40kg 가까이 싣고, 장거리 여행전용 자전거를 사고, 막 발매된 니콘 D700 과 렌즈군을 들고

도쿄에서 홋카이도 최북단까지 약 2000km 정도를 달릴 생각에 흥분도 되고 불안도 하고 정신없는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아늑한 정원이나 산책하면서 마음을 좀 다스리자고 생각하고 찾아온 곳이 여기 리쿠기엔이었다.

그때는 9월이라 도쿄는 아직 한창 더울때였고, 마음을 다스리는데는 훌륭하게 성공했다고 자신할 만큼

고즈넉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 매우 만족했었는데, 문제는 모기가 창궐하기 딱 좋은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산책하고 사진찍는동안 정말 미친듯이 모기에 물어뜯겨서, 팔다리에 근육이 불어난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은 편안해지고 몸은 가려워지는 이면적인 성과를 안고 출발한 자전거여행은 나름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긴 여행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곳 리쿠기엔이니

이번엔 오랜만에 찾은 도쿄 산책의 마지막 코스로 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것이다.

 

지금은 겨울이니 더 이상 모기의 습격에 벌벌 떨 필요는 없을테고

반대로 숨막힐 정도로 생명력을 뿜어대던 이곳의 초목들은 지금 꽤나 느긋한 겨울잠 중일 듯 하다.

실제로는 벚꽃과 낙엽으로 도쿄 내에서 가장 유명한 명승지라서

봄과 가을 시즌이 되면 지금처럼 느긋하게 둘러본다는 건 꿈도 못꾸는 호사가 되어버리니

멋진 풍경도 인파에 치여가면서는 보고싶지 않은 나에게는 지금같은 시기가 어울릴 법도 하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맨 먼저 보이는 빨간 의자와 양산.

자연적인 붉음과는 다른 강렬함이 항상 첫 번째로 눈길을 끈다. 나름대로 괜찮은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입구 지나치자마자 지칠 일은 없으니 항상 이곳은 텅 빈채로 담게 된다.

이곳은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곳이라, 정원 산책을 한바퀴 끝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 그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긴 한데.

 

 

아직 제대로 된 정원 내부엔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기분은 굉장히 좋다.

2008년 첫 장거리 자전거 여행때문에 잔뜩 긴장해서 심히 우울했던 나에게

아주 훌륭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준 곳을 다시 한번 찾게 된 즐거움이기도 하고.

 

이번 도쿄 여행중 제대로 된 산소 한번 들이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상쾌하기도 하고

의도치않게 매번 해질녘이나 해가 지고나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제야 화창한 날씨아래서 마음껏 카메라질좀 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고.

 

입구 언저리에 아직 단풍이 남아있는걸로 봐서, 완전히 황량한 리쿠기엔을 상상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본인은 그런 황량한 정원도 얼마든지 좋아한다. 자연의 모습은 활기차던 숨죽이던 모두 빠트릴것 없이 멋지니까.

 

 

요즘들어서는 카메라를 꺼내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이번 도쿄 여행사진을 봐도, 외국에 여행까지 와서 최고급 카메라 장비 들고 고작 하루에 50~60장 찍은게 전부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미러리스나 컴팩트나 휴대폰 사진에 비하면야 꺼내들고 조준하기 여간 힘든게 아니니

셔터 수가 줄어드는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행사진이 하루에 50~60장이라는 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

 

하지만 오늘같은, 정원을 산책하는 날에는 유난히 셔터횟수가 늘어나는게 내 성격인가보다.

입구에서 10m 밖에 걸어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사진이 4장째다. 어제까지는 4장 찍으려면 30분 정도 걸렸는데.

사실 도쿄라는 콘크리트 정글속에서 뭘 더 찍어야 할지 난감했던 것도 있고

리쿠기엔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지닌 곳이라, 평소보다 더욱 반갑고 기분이 들뜬 탓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든 청명한 날씨다. 도쿄에서 이정도로 맑은 날을 보는건 드문 일.

물론 서울보다는 확률이 조금 높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맑은 날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 때가 12월 초였는데, 한국과 일본 동북부 전선이 묘하게 정체되어 있는 바람에

한기류가 정체된 곳에서는 눈도 어마어마하게 오고 날씨도 매우 매섭고 그랬던 시기다.

도쿄는 그런 전선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날씨도 따뜻했고 아주 깨끗한 하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단지, 구름이 전혀 없는 탓에 오전부터 아주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이고 있는 실정이라

이곳 정원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상당히 강하고 진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버리는게 살짝 아쉽다.

이런 곳은 은은한 풍취가 어울리는데, 지금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보다 대비가 좀 더 강해보인다.

 

물론 흐리멍텅한 날이나 비오는 날보다는 나으니, 분에 겨운 투정할 필요없이 줄기차게 셔터를 누를 뿐.

 

 

자전거 여행 도중에도 도쿄는 몇번이고 거쳐갔지만

이곳 리쿠기엔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 곳이었으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다시 찾고픈 생각이 없어서였을까.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흥분과, 여행 직후의 무기력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고

도쿄에서의 도시냄새나는 여행을 마무리짓기엔 역시 이곳의 힘이 필요하다는 기분이 든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별도 예약과 요금을 주고 들어갈 수 있는 차실로

일반 관광객들이 산책하는 도중에 차 마시는 가게가 아니다.

건물이나 좀 직어볼까 싶어서 다가갔는데, 사실은 저 위의 대나무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저 차실 예약하지 않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다.

 

제대로 돈을 내고 집회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니 납득은 가지만

오늘은 저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쩍 들어갔다 나와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애초에, 정말로 나이 지긋한 단체 몇몇을 빼면 저기를 이용할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일단 도쿄의 주요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대실을 한다고 해도 흡연, 음주 불가, 음악 등의 큰 소리 불가등의 제약이 있고

말 그대로 차분하게 차와 간단한 식사를 즐기며 정원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이니까.

내가 애늙은이 소리 자주 듣는 편이지만, 젊은층이 이런 곳에서 모임 가지지는 않을거라 본다.

 

 

언제 찾아와도 뭐라 그리 겁나는지 새파란 얼굴로 맞아주는 소나무 덕분에

정말 한적한 겨울의 리쿠기엔도 생명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하다.

 

겨울 오전중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산책은 거의 혼자 하는 수준이라 다행이다.

오후부터는 날씨도 풀리고 하니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듯 하다.

그래봤자 꽃놀이 단풍놀이 하는 시기에 비하면 텅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니 별로 신경쓸 건 없고.

 

 

저기 수용인원이 총 25명이고, 전실을 하루 통째로 빌리면 12만원쯤 하던데

6개월 전부터 이용할 수 있으니 아마 시즌 무렵은 이미 꽉 차있을듯 하다.

 

단풍구경은 둘째치고, 벚꽃구경에는 술자리가 빠지면 섭섭한 일본사람들이라서

음주가 금지되는 이곳 리쿠기엔은 조금 아쉬운 생각 드는 사람도 많을 듯.

눈처럼 깔려있는 낙엽의 파도들이, 화려했던 시기의 이곳이 남긴 조그마한 여흥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난리치고 난 뒤의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않지만

자연의 잔치는 그 뒷모습도 여윤을 남기곤 한다.

 

 

사실 입구에서 제대로 된 루트를 밟으면 맨 처음 눈에 들어오는게 이 모습이다.

도쿄에 와서 5일동안 나무다운 나무, 숲다운 숲, 공기다운 공기를 접한 적이 없다가

이렇게 이곳에 오고 나니 왠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도 별로 없어서, 멀리 담 너머 들려오는 도시의 잡음조차도

이곳에서는 적당히 자극을 주는 일종의 리듬으로 들리는 듯 하다. 시각적 풍요로에 청각 역시 너그러워지는 기분.

 

이렇게 보면 겨울이라도 충분히 푸르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지금 이 풍경은 1년중 가장 쓸쓸한 모습이다. 겨울이라서 이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것 같아서 2008년 9월에 비슷한 위치에서 담았던 리쿠기엔의 모습을 풀어본다.

봄엔 벚꽃, 가을엔 낙엽으로 색이 풍부해지지만, 여름부근까지는 그런 거 없다.

산책하고 있으면 마음도 잔잔해지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폭발하는 듯한 생명력의 향연은

도쿄 시내에서 없어서는 안될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물론 요즘엔 에어콘 있는 곳이 더 편하겠지만.

 

 

지금은 겨울에다가 오전이고 해서, 정원은 아직 잠이 덜 깬듯한 차가움을 보여준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단풍이 조금 더 남아있다고 해야 할까.

반대로 생각하자면 한창 가을무렵의 단풍이 너무도 대단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원이란 곳이 그렇다.

어느 계절에 오던 모습이 워낙 달라서, 눈 앞의 풍경에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계절의 모습은 또 얼마나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인가 궁금해져서, 또 다시 찾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리쿠기엔은 늦여름과 초겨울의 모습을 감상했으니 이제 봄과 가을이 남았는데

꽃놀이 무렵의 도쿄는 사실 내 상성과 심히 맞지 않는 곳이라 꺼려지긴 한다.

 

뭐, 평일날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구경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도쿄가 아닌 한적한 시코쿠의 정원에서는 인파가 꽤나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꽃구경 실컷 했으니까.

 

막 걷기 시작했을 뿐이라 지치진 않았는데, 벤치에서 낙엽 감상이라도 할까 싶어 잠깐 앉는다.

2008년의 리쿠기엔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지만 주위를 둘러볼수록 그 때의 모습이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 든다.

 

 

본인은 이런 추억에 젖을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어릴적 아버지께 들었던 기억은 난다. 마을에서 누가 흑백 테레비 한대 샀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애들은 물론 마을사람 전체가 모여와서 함께 시청하곤 했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

 

지금도 서울역 안의 거대 TV 앞에서는 여전히 시대를 뛰어넘은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이곳의 이 TV는 과연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건지 조금 궁금하다.

정말 오리지날 흑백 브라운관을 어떻게든 계속 사용하고 있는건지

요즘 TV에다가 겉만 저렇게 옛날 티나게 만들어 놓은건지.

 

영상이 반복재생 되는걸로 봐서 내부에 현대식 장치가 되어있다는 사실까지는 알겠는데

아무래도 LCD 모니터가 아닌 듯한 느낌때문에 묘하게 느껴진다. 어디까지가 오리지날일지.

 

그러고보니 시골의 작은할머니 댁에는 이만큼 낡은 TV도 있긴 했다.

프레임이 나무로 되어 있고, 양쪽 옆에 붙박이 여닫이문이 있던 TV.

없어진지 오래지만,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나름 가치가 있는 녀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청법이다 셧다운제다 하면서 물심양면 완벽한 독재와 겸열의 부활을 꿈꾸는 요즘 한국의 꼬라지를 생각하면

이런 저속한 옛 거리 모습의 재현이란 낯뜨겁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퇴폐적 풍경일텐데

이곳에서는 이런 풍경으로 돈 잘 벌고 있는듯 하다.

 

하긴 돈이 주머니에서 샘솟고 넘쳐서, 인터넷 따위 사용할 필요 없이

화려한 대구의 밤문화를 얼마든지 직접 즐길 수 있는 우리 국회의원 어르신들이야

자기 딸내미 나이의 여자들 껴안고 나뒹굴 수 있을테니, 이런 추한 옛 모습은 저속하게도 느껴지시겠지.

 

캬바레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 일본은 이 단어 별로 안쓰는 것 같던데.

요즘엔 스낵바라는 말을 많이 쓰는듯 한데, 이쪽 방면으로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문에 붙은 찌라시는 칼립소 쇼라는걸 선전하고 있는데, 뭔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카리브해 부근의 경쾌한 전통 음악이란다.

1958년도의 허름한 캬바레라는건 의외로 국제화에 빨리도 눈을 떴나보다.

 

옆의 조그만 창문에 붙어있는 찌라시는, 호스티스 모집이라고 적혀있다.

그러고보니 청량리 롯데백화점 갈때, 그 뒤쪽의 그렇고 그런 거리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2012년의 경험이지만, 생각해보니 1958년의 이 모습과 놀랄 정도로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역시 가장 기본적인 운동을 산업화한 업종이다보니, 50년쯤 지나도 별로 발전이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

 

 

 

시간이 점점 흘러서, 더 지채하다간 폐점시간까지 정말 라멘 못 먹을 위험성이 있으니

서둘러 한그릇 먹으러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생각해 봤는데, 길을 잘못들어 지하 1층부터 시작한 탐험이니까

그건도 인연이다 생각해서 지하 1층에 위치한 라멘집으로 들어가 본다.

 

지난번 포스팅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대부분의 라멘가게는 지하 2층에 빙 둘러서 영업중인데

좁디 좁은 1층 통로에도 영업중인 가게가 있다. 지하 2층이 왁자지껄한 시장 한복판이라면

지하 1층의 통로에 자리잡은 라멘가게는, 그 음침하고 어두운 조명만큼이나 훨씬 진득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마침 팔짱끼고 즐겁게 돌아다니는 젊은 커플들과 달리 난 아저씨 냄새 풀풀 풍기는 솔로니까 왠지 분위기에도 어울리는 듯 하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은 삿포로 라멘 전문점 '스미레'라는 곳.

삿포로 하면 역시 된장을 베이스로 한 미소라멘인데, 아무 생각없이 메뉴 자판기에서 미소라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순간적으로 옆에 있는 버튼에 눈길이 갔다. '옛날식 라멘(昔風ラーメン)' 이라는 메뉴가 눈에 보인 것.

 

이 옛날식 라멘이라는 이름은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자전거 여행의 여파도 있겠지만, 일본 중에서 홋카이도를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다시 보는건 근 4년만이다.

 

'옛날식 라멘'이라는 건 오직 홋카이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인데, 이것은 홋카이도가 라멘의 발상지이기 때문.

라멘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전에는 '중화 소바'라고 불린 이 음식은, 이름 그대로 중국에서 들여온 녀석.

메밀을 중심의 면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에서, 꼬들꼬들 쫄깃쫄깃한 중국식 면은 매우 생소하고 신기한 이미지로 다가왔었다.

 

중화소바가 가장 먼저 들어온 삿포로에서는, 생선육수 혹은 닭고기 육수에다가 간장으로 맛을 내麩고

돼지고기, 멘마, 계란, 나루토(저기 똥글똥글 말린 오뎅같은 녀석), 시금치, 후(麩) 를 넣는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사진에 나온 저 녀석이 최초의 일본 라멘의 모습이라는 뜻.

 

라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쯤에서 고개를 갸우뚱할수도 있겠는데,

쇼유라멘(간장라멘)과 뭐가 다른지 말이다.

 

사실 중화소바 = 쇼유라멘 이라고 생각해도 틀린게 없다. 그리고 삿포로에서만 이걸 '옛날식 라멘'이라고 부르고

다른곳에서는 그냥 중화소바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라멘. 알고보면 조금 맥이 빠지는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라멘의 시작점은 홋카이도의 삿포로였고, 지금은 된장라멘으로 유명한 삿포로지만

라멘의 시대를 연 것은 간장라멘이었다는 조그마한 잡지식.

 

중화소바라고 부르는 라멘은 기본적으로 이 녀석과 거의 흡사하지만

'옛날식 라멘'이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를때는 반드시 시금치와 '후'가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

후(麩)는 사진의 라멘 중앙에 둥둥 떠있는 녀석. 얼핏 보면 오뎅 말린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유부 말린것 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도 통용되던 때가 있었으니 먹어본 사람도 있을 듯 하다.

 

저 녀석은 밀기울, 즉 두부의 비지처럼 밀가루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에서 추출해낸 글루텐이라는 성분을 말려서

마쉬맬로처럼 만든 것이다. 단백질의 일종이고, 밀가루 가공 찌꺼기로 만들기 때문에 단가도 매우 저렴해서

전후 영양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에서 많이 사용되던 녀석. 단지 저렇게 추출해낸 글루텐 덩어리는 무미 무취였기 때문에

그냥 먹기는 좀 그렇고 해서, 저렇게 육수 위에 얹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유부덩어리처럼 국물을 흡수해서 맛이 생기니까.

 

우동위에 얹는 유부조각도 사실 저 '후'가 그 기원이다. 좀 먹고 살만해 지니 굳이 맛도 없는 글루텐 덩어리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

하지만 일본의 어느 현 어느 마을에서는 아직 마을사람들 전체가 저 '후'를 국에 넣어서 맛있게 먹고 있다.

저런 조그만 녀석이 아니라, 물 빨아들이면 한국의 호빵만큼 커지는 녀석이라서, 국 안에 넣으면 거대한 건더기가 된다.

저게 복합성 단백질 덩어리라서, 물을 아무리 흡수해도 쭉 찢어지지 않고 여전히 질긴 습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국물을 잔뜩 흡수한 녀석을 쭉쭉 뜯어먹는 그 식감은 상당히 묘한 체험이다.

 

쓸데없는 콩알지식 이야기하느라 길어졌는데, 아무튼 오랜만에 옛날식 라멘이라는 이름을 듣고

비록 된장라멘이 더 맛있을지라도 후회없이 그 녀석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곳 요코하마 라멘박물관이 1958년의 모습을 이렇게도 멋지게 재현해 놨으니, 거기 어울리는 라멘은 당연히 옛날식 라멘이겠지.

 

사실 간장라멘은 모든 라멘의 베이스가 되는 모델이라서, 라멘박물관에서 굳이 이 녀석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긴 했다.

국물을 만들때 소금라멘이 가장 첨가되는게 적기 때문에 라멘의 기본은 소금라멘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소금라멘은 간장 -> 된장 -> 돈코츠로 이어지는 일본 라멘 가계도와는 완전히 별개로 만들어진 녀석이다.

 

 

 

취향에 맞춰 후추를 조금 뿌리고 후루룩 면발을 들이삼킨 순간

혀가 뇌에 보내는 신뢰성높은 화학신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보기에 정말 평범한 간장라멘인데, 놀랄 정도로 맛있다.

 

간장라멘이 제일 저렴한 편이라서, 자전거 여행중 380엔 정도 되는 저렴한 중화소바 참 많이도 먹었는데

이곳의 옛날식 라멘은 900엔이나 하는 고가니까, 뭔가 다르긴 다르겠지 하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되짚어봐도 이 라멘, 내가 이제껏 먹은 녀석중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맛있다.

 

면의 삶은 정도나 굵기 등을 개별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완벽한 식감에 제대로 우려난 닭육수의 가슴지리는 시원함이 나를 놀라게 한다.

사실 싫어하는 요리만 아니면 대강 맛있게 먹는 성격이라서 이런 표현은 잘 하지 않는데

이 라멘 정말 굉장히 맛있다. 간장라멘이 갖춰야 할 모든 기본기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레퍼런스 라멘이라 할 만하다.

 

챠슈의 상태, 멘마의 식감, 적당한 반숙계란, 아삭아삭 파조각과 딱 적당히 삶긴 시금치 등등...

평소 번개처럼 음식을 입안에 털어넣는 식습관을 가진 본인이라도,

이번엔 천천히 면을 빨아당기고 숟가락으로 한모금씩 국물을 떠먹으며 최대한 맛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요 근래 먹은 라멘중에 이렇게 단점을 생각해내기 어려운 녀석은 처음이다.

 

물론 간장라멘이라는 녀석의 범위도 정말 넓어서, 면의 굵기, 삶는 정도뿐 아니라 면의 구성 성분과 뽑는 방법에 따라

완전히 직선으로 뻗은 녀석, 꼬물꼬물한 파마같은 녀석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각각의 맛도 다르다.

간장 역시 무한대의 조합이 가능하다. 미림에 가까운 옅은 간장과 돼지뼈 육수의 조합도 있고

콜라만큼 시커먼 진한 흑간장과 닭육수의 조합 등등... 간장라멘의 바리에이션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그 모든 바리에이션 앞에 이름을 댈 수 있는게 이 '옛날식 라멘'이라고 생각.

가장 맛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간장라멘이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가이드같은 느낌에서.

 

 

 

라멘박물관에 입점한 가게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최고의 가게라는

이시다씨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은 확실히 사실인 듯 하다.

일단 이곳에 입점하는 것만으로도 최상급 라멘이라는 평가는 기본으로 따 놓는 것이라고.

 

삿포로 라멘 '스미레' 에서 맛본 라멘을 생각해 볼때, 아무래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라멘의 짠맛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광객들 입장에서야, 어디서 뭘 먹으나 그게 그거겠지만

본인은 적어도 일본 라멘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평가를 할수 있을만한 입맛을 가지고 있고

이 곳에서 먹은 한 그릇의 라멘 레벨은, 편의상 1~10 까지로 구분한다면 9 레벨 이상의 S급이라고 확신한다.

 

식사를 마친 후 지하 2층으로 내려와서, 1층과는 다른 시끌벅적한 번화가의 모습을 만끽한다.

어디 붙어있는 설명을 슬쩍 읽었는데, 이곳 2층은 1958년대 어느 역 앞에 들어선 거리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듯.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번성하긴 하지만, 어쨌든 역 앞의 에너지란 확실히 힘이 넘친다.

 

폐점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남은 시간으로 따지자면 라멘 한그릇 정도는 거뜬히 더 먹을수 있지만

스미레에서 라멘 먹은지 5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먹어봤자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가 없다.

폐점시간이 3~4시간쯤 남았다면 느긋하게 배를 비운 다음 다른 라멘을 시험해 보겠지만.

 

여기는 또 친절하게도, 입장권 한번 끊으면 그 날은 박물관 밖을 나갔다 들어갔다 해도 관계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시다씨와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 결과, 한밤중에서야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폐점시간을 이렇게 앞두고서는 급하게 먹어봤자 라멘의 맛을 즐기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이것도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언젠가 요코하마에 제대로 숙소를 잡고 와서

한 이틀쯤 느긋하게 여유를 내서 이곳의 라멘을 차근차근히 격파해 나가야겠다는 계획을 만들게 해 주었으니 그걸로 만족.

 

어차피 오늘 아무리 용써봤자 안될일은 안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는 수 밖에.

요코하마엔 크루즈 여행 매니아분과도 안면을 텄고 해서, 다시 찾을 이유는 충분히 만들어 놨다.

 

전봇대 위에 걸린 테레비는 정말 오래된 녀석이다.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테레비를 끄고 저 문을 닫아잠궈 버리는 것일까.

당시엔 레슬링이 유행한 듯 하다. 시기상으로 역도산이 활약할 때는 아닌가, 당시 레슬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역도산이라는 사람이 한국사람이었다고 자랑스레 기억해야 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것 쯤은 안다.

 

 

 

거의 끝물이라서 사람들이 적은 것 하나만큼은 참 기분좋은 일이다.

지하 2층은 1층보다는 좀 더 정리된 듯한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타일이 너무 깨끗한 느낌인데.

 

타일고 그렇고 나무 벤치도 그렇고, 살짝살짝 예전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들이 나와서 약간 아쉽다.

자전거는 상당히 옛날 녀석이고, 뒤에 실은 녀석은 아마도 우편물인 듯.

 

지하 2층은 라멘가게들이 밀집해 있어서, 붐빌때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붐비기 때문에

흐름을 위해서라도 저렇게 바닥에 표시를 해 놓을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공간이 마냥 넓은건 아니기 때문에

시대 재현과 라멘가게의 원활한 흐름, 두 가지 요소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머리를 쓴 흔적이 보인다.

 

 

 

어디로 향하는 계단인가 싶어서 올라가 봤는데, 마지막까지 센스넘치는 표지판으로 사람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그 위의 금간 듯한 모습은 물론 가짜겠지. 아무리 봐도 진짜 금간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설마 그러진 않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다음에는 정식 루트로 차근차근히 즐겨보는것도 나쁘지 않을듯 하다.

 

 

 

올라갈 때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마지막으로 셔터를 한번 더 누른다.

이거 한국에서 비슷한 사진 가져와 바꿔치기해도 모를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어릴때 제일 맛있었던 불량식품은 뭐였을까...

사실 학교 앞 불량식품은 엄니께서 워낙 강력하게 억압하시는 바람에 또래 아이들 치고는 별로 먹어본 기억이 없다.

 

흰색과 검은색 콩처럼 생긴 밀가루 과자가 달달하게 맛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어릴적 제일 맛있는 과자는, 당시의 나에게 혁명적인 맛을 선사해준 치토스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탄산캔디였다.

발바닥 모양의 사탕에 찍어먹던 톡톡캔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뭔가 위험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버린듯 하다.

가끔씩 혀가 얼얼할 정도로 퍽 거리면서 터지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게 문제였으려나.

 

 

 

300엔이 전혀 아깝지 않은 시간여행도 즐거웠고

900엔짜리 '옛날식 라멘'은, 내가 왜 여태껏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코하마 방문의 원래 목적이던, 이시다씨와의 토크 라이브도 문제없이 멋지게 끝났고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공감할 부분이 많은 즐거운 괴짜들과 인연도 만들고

정통 쉐프가 부지런지 만들어주는 멋진 요리도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웠으니

5일간에 달하는 이번 도쿄 여행은, 사실 이 이벤트 하나때문에 온 거나 마찬가지지만

오늘 하루만으로도 그 어떤 후회 한점 남지 않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

 

첫날부터 지금까지 별 생각과 의욕없이 터벅터벅 걸어다니기만 하던 내 컨디션을

일시에 흥분 상태로 각성시켜 준 듯한 기분이다.

 

특히 자전거 여행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는 요코하마라도

이렇게 찾아오니 여기저기 즐길거리가 산재한 곳으로 변모하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면.

역시 어떤 형태의 여행이든 각자에게 맞는 즐길거리가 있는 법인가 보다.

 

신요코하마역 앞의 사거리는 교통량이 많아서인지, 이렇게 커다란 원형 고가도보가 만들어져 있는데

야간사진도 문제없겠다, 요코하마에는 좋은 추억도 남겼겠다, 높아진 텐션으로 여기저기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제 2년이나 지난 자전거 여행이라서, 정신차리지 않고 그냥 달려나간 곳의 기억은 애매해진다.

요코하마는 여행 거의 막바지에 슬쩍 통과했을 뿐이라, 기억에 남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자전거여행중이라면 어떨까 하고, 마음을 예전으로 살짝 돌린 후 육교위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역시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면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콘크리트 숲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걸 보니

참 여행이란 녀석은 이렇게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최악의 여행 타입으로 생각하고 있는 단체 투어도

뭔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굴려보는데,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무리.

 

국딩 5학년, 한달간의 미국 여행중 1주일쯤 여행사 따라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건 여행이 아니라 거의 고문이었다. 대놓고 요구하는 팁에 흔해빠진 말장난, 형편없는 중국식당으로의 안내 등등.

아무래도 어릴때의 트라우마가 인격 형성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사실인 듯.

 

 

 

숙소로 돌아오니 11시 40분쯤. 일본 여행하면서 이렇게까지 늦게까지 돌아다닌건 오랜만이다.

오늘 잠은 잘오겠구나 싶어, 그것마저도 즐거운 기분. 오늘은 어쨌든 모든 경험이 다 만족스러웠으니까.

 

내일부터는 또 할일이 별로 없어서 대강 부탁받은 물건이나 사러가볼까 싶다.

보고싶은 것들을 하루에 한개씩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널널하다.

오늘 이벤트는 날짜가 고정된 바람에 다른 계획을 수정해야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냥 마음가는대로 뒹굴거리다가 어디 슬쩍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행하면서도 이렇게까지 게을러질 수 있다는걸 온몸으로 보여줘야 할것 같다.

 

라멘 박물관의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100엔어치 추억의 과자들.

사탕이야 별로 변한게 없고, 중간의 저녀석은 사이다맛 가위바위보 젤리.

왼쪽은 담배모양을 한 코코아 사탕이다. 그러고보니 국딩때 애들이 저걸로 폼잡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본인은 엄니의 편집증적인 건강 염려로 인해 불량식품을 벌레보듯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냥 옆에서만 바라보던 과자였는데,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 드디어 처음으로 맛을 보게 된다.

 

일단 여행 중간중간에 천천히 먹기로 하고, 사탕 하나 빨면서 TV 보다가 새벽 2시쯤 취침.

 

 

원래는 붐볐을테지만, 9시가 다 되어가는 일요일 밤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입구쪽도 옛날 방식이라 그런지 제대로 안내표시가 없어서,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는지 모르는 바람에

되는대로 지하1층의 어느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예상하지 못한 골목이 나온다.

 

아마 이곳이 정식 루트는 아닌듯 한데, 그러나저러나 아무 관계없다. 여긴 그냥 구경하고 라멘먹으면 되는 곳이니까.

 

운이 좋았다고 할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타나는 옛날 구멍가게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내가 어릴때는 이런 가게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정말 놀랄 정도로 재현도가 높다.

 

 

 

안에 들어가서 사진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마음껏 직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 추억과 상당부분 겹치는 이 가게 안에서 유일하게 별로 겹치지 않는 요소가 가게 주인.

이곳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서글서글하고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타입인데

내 기억에, 예전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렇게까지 친절한 표정을 지었던 적은 없었다.

 

이시다씨가 좀 전에 역에서 '그곳에 가면 자기도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든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럴만도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학교앞 문구점에 아직 이런것들 팔고 있지 않으려나.

 

내 경우는 학교 문구점보다, 집 앞의 재래시장 귀퉁이 3~4평도 안되는 쪽방 가게에서 이런 것들 사먹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조립 로봇 장난감조차 50원짜리가 있었던 시절이니까. 500원짜리 프라모델은 각오 단단히 하고 사야 했다.

 

모양만 봐도 대충 한국의 소위 불량식품들과 다를게 없는 친근한 모습이다.

단지, 처음엔 참 정겹고 즐겁게 구경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 현실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트는 기분.

 

이 사람들의 추억과 나의 추억이 이토록 겹쳐지는 것은

결코 쌍방간의 호의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류로 인해 생성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방후 40년이 넘었던 그 시절조차 여전히 일제의 흔적은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형태로 사람들의 생활속에 녹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추억을 향유하는 그 감상적 즐거움조차 분노로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유년시절의 추억이고, 그저 맛있고 신기한 과자들을 싸게 먹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난 지금 회상해본다면

그 정형화된 이미지의 근원에 훨씬 복잡한 역사의 흔적이 세겨져 있음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역시 내가 쓸데없이 네거티브에 꾸질꾸질한 성격인 걸까.

몇십년만에 다시 마주하는 추억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한 켠에 침울해지는 마음이 자리잡는다.

 

 

 

얼굴은 냉정하게 유지하는데 일가견이 있지만

머릿속의 감정을 정리하는건 어쨌든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머리를 비우고, 그냥 순수하게 이곳 라멘 박물관의 옛 거리풍경을 즐기는데 집중하려 한다.

 

슬쩍 가게를 둘러보니, 그때 그 시절만큼 싼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시대의 편의점보다는 저렴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가격대. 아무래도 입장료까지 받는 곳이다 보니 커버가 되는 듯.

추억의 불량식품에 사진빨도 잘 받고, 가격도 싸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입구에 비치된 바구니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집어갈만한 녀석을 찾아본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손이 가는대로 마구 사버리면 의외로 돈을 써버리게 되는 것이 이런 불량식품류.

이곳에 왔다는 기념 정도의 의미로 적당히 세 개 정도만 담는다.

정겨운 먹거리는 널리고 널렸는데, 가방에 넣고 갈 부피를 생각하니 좀 작은것들로만 챙기게 된다.

이런 류의 간식거리는 가격에 비해 양이 많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해서, 겉보기에 좀 큰것들이 많으니.

 

가게 할아버지는 '딱 100만엔!' 이라고 기운차게 계산해준다. 물론 100엔이라는 의미.

구입하고보니 확실히 예전처럼 싼 가격은 아니다. 요즘엔 일본 편의점에서 100엔으로도 팝콘 한봉지 사먹을 수 있을 정도니까.

 

밖에서 좀 더 주위 풍경을 담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나와서 그걸로 기념사진 찍어줄까 하고 묻는다.

본인 사진은 별로 찍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완전한 수동렌즈라 촛점 맞추기가 쉬운편이 아닌 탓에

이리저리 설명을 해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비싼 녀석이니 맡기기 좀 그렇지?' 라고 짖궃은 말투로 장난을 친다.

 

 

 

시작부터 정해진 루트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기 때문에 홀가분하게 아무렇게나 걸어다닌다.

원래 저 가게는 라멘 투어 신나게 마친 후 돌아가기전 기념품 대용으로 들러보는 곳이었으니까.

 

2층은 두 사람이 간신히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회상하며 만들어져 있다.

내가 어릴적에도 물론 여기저기 이런 좁은 골목이 있긴 했는데

어머니 연세쯤 되는 분들의 추억에 남겨져 있는 골목길은 정말 이런 느낌이었을 법 하다.

대구에 남아있는 몇몇 옛 골목들을 보며 어머니가 '예전엔 거리 곳곳에 이런 골목들이 빼곡했는데' 라고 말씀하신적이 있다.

 

방금 전 골목가게까지는 내 추억속에서 회상할 수 있는 범위지만

이 정도까지 가면 역시 나로서도 어딘가 이야기속에서만 들었던 법한 비현실감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낮에 학교 가면서 이런 골목 분위기를 보지 못한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활동시기는 대부분 아침이나 대낮이었던 고로, 어둠속에서 본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거리풍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이런 박물관의 레벨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라면 뭐니뭐니해도 그 재현도를 들 수 있겠는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곳 라멘 박물관의 레벨은 정말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다.

 

군데군데 불이 나간 전구, 너덜너덜해진 간판, 벗겨지고 녹물이 내려오는 콘크리트 벽 등등

지금 이 모든 요소요소들이 전부 철저한 계획아래 정교하게 재현된 녀석인지

아니면 정말 관리를 되는대로 해서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착각할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어찌보면 개장 당시엔 저 전구가 다 켜져있었는데, 개장 후 2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렇게 낡아버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현도가 뛰어난 이곳은, 계속 걸어다닐수록 점점 현실이라는 시공간에서 멀어져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현실과 망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은, 망상이 현실만큼 현실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니까.

 

오른쪽 간판은 삿포로 미소라멘 '스미레' 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옛날 거리 재현하기위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진짜로 이곳에서 영업하는 라멘부스중 한곳이다.

마리화나 몇대 빨고 이곳에 들어오면 정말 과거로 훌쩍 넘어온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굉장한 리얼리티.

 

 

 

이곳의 시간대는 아무래도 늦은 저녁, 해가 거의 지면으로 넘어가며 어슴프레한 핏빛만이 지평선에 살짝 스며드는 그런 순간인 듯 하다.

거의 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어두운 곳이라서, 이때만큼은 새 카메라 갖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도 3200 까지 올리고 조리개를 F2.0 까지 개방해야 겨우 사진을 건질 수 있을 정도.

 

힘겹게 사진을 담으면서도 이 장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매번 감탄을 금할수가 없다.

이건 1950년대를 그럭저럭 흉내낸게 아니라, 정말 그 시절의 시공간을 뚝 잘라서 가져온 레벨.

건축법상 의무적으로 표기된 소화기 안내판만이 나를 2012년에 붙들어놓는 유일한 이정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벽의 낙서, 흘러내린 물 흔적, 색바랜 나무 문과 벽보까지. 무서울 정도의 현실감에 기분이 묘해지는 느낌.

옆의 안내도는 폼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니고 진짜 지도다. 재미있는건 대부분의 가게들이 간판만 존재하는 이름뿐인 녀석들이지만

그중에는 색깔만 살짝 다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있는 진짜 라멘가게도 있다는 것.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고 발걸음을 멈춘다.

좁은 골목길에서부터 시작한 터라 이 박물관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이곳은 지하 2층이 진짜 라멘가게였던 것. 지하 1층의 좁은 골목거리는 이 가게들의 2층 뒤에 나 있는 샛길이었다.

 

물론 폐점시간이 다가올 정도라서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이 정도라면 어느 가게라도 쉽게 들어가서 원하는걸 먹을 수 있을듯 하다.

 

 

 

이곳에서 제일 비현실적인 녀석이라고는 저 하늘그림 그려진 지붕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몇 번을 봐도 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실적인 재현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시다씨가 극찬을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국인인 내가 느끼는 완성도보다는

직접 이 시대 이 공간을 살아온 이시다씨 입장에서라면 이 정도로 완벽한 고증은 하나의 예술로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이 곳의 시대 고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확하다.

내가 어릴 적에도, 경북 점촌이나 영천 시장골목 정도는 들어가야 간신히 남아있던 이런 담배가게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뽑아낸 듯이 재현해 놓았다. 물론 그 시절의 담배곽까지.

 

도쿄나 삿포로의 라멘 테마파크를 생각한 탓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라멘박물관이란 녀석은

실상을 알고보니 나머지 테마파크와는 비교하는게 어리석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녀석이다.

라멘을 팔아야 하는 공간에 '거만하게도' 입장료까지 받는 건가 싶었던 내 불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곳에서 친근함과 그리움을 느낄지도 모르는 한국인의 입장에선

역사가 만들어온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흔적마저 다시 상기시키는 기분이 들 가능성 역시 있기 때문에

이곳과 마주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런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복잡난해한 곳.

 

 

 

 

아직 지하 1층을 한바퀴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걸어본다.

원래 목적은 맛있는 라멘이었지만, 이제와서는 라멘은 그냥 마지막에 맛보면 되는, 그런 레벨로 내려가 버렸고

이곳의 풍경을 좀 더 담아보겠다는 일념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한국은 전후 일본보다 목조건물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기 때문에

이런 풍경만큼은 한국과 일본의 추억이 상반되는 결과를 도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문옆에 걸려있는 개량기 모습은 뭐, 예나 지금이나 추억거리가 되긴 하지만.

 

라멘 박물관 소개글을 보면, 1958년대 어린이들은 이런 골목길에서 이렇게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놀곤 했었다고 한다.

인스턴트 라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쌀밥 대체음식으로 장려되는 녀석이었는데

라멘이라고 하면 딱 생각나는게 그 시절 이런 장소와 이런 시간대의 풍경이었다고.

 

 

 

정말 문열고 한번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라서 참는데 고생했다.

이 풍경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아마 저 문 너머에서는 화려하지 않지만 맛있어 보이는 저녁이 준비되고 있겠지.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시기에 한창 불을 붙이고 있던 시절이라

소시민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했지만 그래도 나라 전체가 희망에 넘치던 시절이긴 했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것도 그런 이유에서일듯.

 

반대로 한국은 이런 풍경을 감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조금 더 늦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같은 젊은(?) 사람도 이런 거리의 풍경에서 조금씩이나마 향수를 느낄 수 있는것 아닌가 싶다.

 

 

 

디자인쪽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동감하겠지만

이런 식의 디테일을 살리는데 세심한 고증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다른 동식물의 차이점은 구별하기 어려워도, 같은 사람의 차이점은 손쉽게 구별해 내듯이

실제 존재했던 시대상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고증이 조금이라도 어색하다면 사람 눈에 단점으로 쉽게 들어오게 된다.

 

하늘에 홀로그램 쏴올려서 구름 만드는 하이테크까지는 구현하지 못했겠지만

정말 어디 하나 흡집을 잡고싶어도 도무지 찾을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성이다.

억지로 잡아내자면, 당시 이런 거리 곳곳에 널부러져 있던 각종 오물과, 지독한 냄새를 풍기던 절임반찬의 강렬한 인상 등등

후각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 정도일까. 그것까지 구현한다면 아마 라멘 입맛이 떨어져 버리겠지만.

 

심지어 이곳의 구멍가게나 간식파는 가게 등에서는, 맥주나 음료수마저 옛날 유리병에 담긴 녀석을 제공한다.

라멘 가게를 찾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적당히 꾸며놓은 테마 파크들, 도쿄나 삿포로의 가게들이 딱 그 정도 수준이라서

5분에서 10분정도 슬쩍 걸어다니다가 적당히 라멘집 찾아 들어가는게 전부였는데

이곳은 일본 굴지의 라멘가게들이 경합하며 내 놓은 특급 라멘의 맛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만큼

외적인 구경거리가 가득한 곳이라서, '라멘'과 '추억의 거리'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서 나머지 한쪽을 지탱해주는, 손님 입장에서는 왠지 끼워팔기라는 느낌을 받는 그런 테마파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시다씨를 만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요코하마에서

이런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건 개인적으로 큰 성과다.

자전거 여행때는 멈춰서기도 어려운 대도시여서 그냥 통과해 버렸는데, 그렇기에 더욱 이번 방문의 가치가 높다.

 

천천히 둘러보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보니 맨 처음 출발지였던 구멍가게 앞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나 말고는 아무도 저 앞의 문을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 없는걸 보니

혼자서 길을 완전히 잘못 든 것 같지만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일본 최고라고 불리는 이곳의 라멘중 하나를 골라서 맛있게 음미해야 할 시간인데

편안하게 추억을 씹어먹으며 걸어다니던 이제까지와 달리 이건 중요하기 그지없는 선택이다.

 

 

10시가 되니 소라마치의 문이 열린다. 가면 갈수록 사람이 많아질테니 여기도 재빨리 치고빠져야 할 듯.

'하늘마을'이라는 뜻의 소라마치는, 사실 마을이라기보다는 거대 쇼핑몰이지만

적어도 지상층 몇군데만큼은 마을 주변의 가게처럼 살짝 소박하게 장식해놓았다.

 

이게 몇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층은 살짝 맛만 보는 느낌이고

위로 올라가면 한국의 백화점따윈 쌈싸먹을 정도로 거대한 쇼핑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층은 작은 가게들이 모여서 간단한 기념품, 먹을거리를 팔고 있어서

사실상 내가 볼일있는건 이곳 뿐.

 

 

 

사실 호텔 조식을 뱃속에 집어넣고 왔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뭘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점심시간 맞춰서 가면 대기열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라서 겁난다.

 

거기다가 슬쩍 둘러보려고만 했던 상점가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라멘사진이 떡하니 놓여있어서

이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막 개점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라멘이라니 가게 주인장도 이상하게 생각하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옆의 중국인 관광객도 잘 먹고 있는데다, 그 후에 찾아온 백발의 일본인 관광객 두명은

군만두와 생맥주까지 시켜서 잘 먹고 있는걸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서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여지것 일본서 먹어본적 없는 새우라멘의 모습을 보고는 패배를 선언할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해물을 베이스로 한 면음식은 라멘보다 짬뽕과 우동이다.

물론 해물라멘도 없진 않고, 새우로 맛을 낸 라멘은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꽤 유명하기도 한데

여기서 본 이 라멘은 구성이 꽤나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새우 베이스의 라멘은 보통 바다내음을 강조하게 위해 소금으로 간을 하는 시오라멘이 주를 이루는데

이쪽은 일본식 된장인 미소라멘을 베이스로 하고, 국물맛을 내기 위한 우려내기용 작은 홍새우에다가

짭쪼름한 튀김옷을 얇게 입힌 큼지막한 새우를 건더기로 올려놓은 푸짐한 녀석.

 

사실 양은 가격에 비해 작은 편이라서, 한끼 식사라고 생각하면 분명 이것만으로 모자라겠던데

배가 고프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무리하지 않고 먹을만한 분량이라서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

 

죽순 절임인 멘마도 오돌오돌하게 맛있고, 계란도 적당히 간이 들어가서 합격점이다.

일본 라멘의 짠맛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질색하는것도, 당연히 지역간 식감의 차이이니 이해하는데

일단 기본적인 레시피를 볼때, 멘바나 계란이 제대로 절여지지 않고 밋밋하게 나오는건 레벨이 떨어진다는 의미.

그런데 겉치레로 붙어있다는 생각이 드는 챠슈는 별로 훌륭하지 않다. 새우가 메인이니 어쩔 수 없는건가.

 

1100엔이나 하는 고가라멘인데다가 양은 적어서 추천하기에는 좀 꺼려지는 녀석이지만

일반적인 미소라멘과는 달리 새우의 미묘한 단맛이 우러나 있는 국물은 괜찮은 경험이다.

짠 건더기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편인데도, 그걸 계산해서 미소국물의 간을 살짝 싱겁게 조절해 놓은게 마음에 든다.

물론 이건 평균적인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고, 한국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짠 편이다.

애초에 한국사람들이 이정도면 되겠지 싶은 맛의 라멘은 일본에서 인기가 없을 걸.

1년간 자전거 여행하며 일본 각지에서 120그릇이 넘은 라멘을 먹어치운 나로서도

어쨌든 첫경험인 새우미소라멘이었다. 새로운 경험에 투자한 금액이 좀 비싸긴 헀지만.

 

 

 

빵빵해진 배를 잡고 촛점없는 눈으로 소라마치를 서성인다.

하다못해 부모님이라도 함께였다면 이것저것 구경하는 부모님을 뒤에서 바라보는 재미라도 있을텐데

쇼핑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본인 혼자서 이런곳에 와 봤자 뭘 하겠는가 싶다.

단지 스카이트리와 함께 조성된 유명한 관광 스팟이니 한번 둘러나 보자 하는 기분.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뭐좀 사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거대 쇼핑몰이 생겨서 기분좋을듯 하다.

기본적으로 사진촬영 금지인데다가, 메인 통로쪽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사진을 못담았을 뿐이지

한국의 백화점과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크다.

조카 기저귀사러 청량리 롯데백화점에 가본적이 있는데, 그것의 2.5배 정도는 크지 않을까 싶다.

 

시부야나 신쥬쿠의 쇼핑타운은 워낙 대규모 물량공세라서 이곳과 비교하기 힘들지만

단일 매장으로는 오다이바의 비너스 포트를 능가하는 규모라고 느껴진다.

 

거기다 개장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반짝반짝 새 건물에

가벼운 기념품에서부터 캐쥬얼한 의류, 꽤나 고급 브랜드까지 없는게 없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쇼핑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 폐점시간까지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모자람없는 곳이라고 생각.

 

이번 여행은, 허구헌날 시골구석이나 찾아다니다가 오랜만의 도쿄여행이라 그런지

지인들로부터 뭐 사달라는 요구를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받은 여행이었고

그 중 헬로키티 브랜드의 조그마한 핸드백도 들어있었는데, 여기는 헬로키티 매장만 서너개가 넘는다.

 

묘하게도 대부분의 헬로키티점은 정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그런 물품들을 파는 곳이고

나머지 한군데는, 패션에 관심있는 여성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고급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매장.

그곳의 헬로키티 핸드백은 패션의 패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거 괜찮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녀석이었다.

 

크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도 헬로키티 특유의 원색 강조가 잘 나타나 있고

재질은 가벼우면서도 방수기능이 기본적으로 첨가된 고가 원단이라고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일본어를 알아들어도 패션 관련 단어를 알아들을수가 없는 나는 오랜만에 일본에서 이국맛을 실컷 느꼈는데

어쨌든 굉장한 인기품이고, 2012년 겨울 한정품목이라서 재고 수급도 간신히 맞추고 있다는 듯.

 

물론 브랜드 사치품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는 8700엔의 가격이지만, 내가 부탁받은 헬로키티 핸드백은 3000엔 짜리였다.

아무리 좋아보여도 이 가격차는 좀 아니다 싶어, 훗날 바이어(?)와 연락이 가능할 때 한번 물어보기로 하고

이번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왔다. 조금 쫄았지만 다행히도 친절한 점원은 인상 변하지 않고 웃으며 배웅해주셨다.

 

 

 

콩글리쉬로 윈도우 쇼핑이라는건 신나게 즐겼지만, 사실 소화좀 시키려고 돌아다닌 것 뿐이라

뭘 봤는지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글쎄, 내가 좀 부자라서 현금뭉치를 수십만엔쯤 들고온 사람이라면

지나다니다가 괜찮다 싶은 옷 몇벌 사서 이미지 체인지를 해 보는것도 나름 행복을 누리는 방법일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굉장하다는 인상을 받으며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던 도중, 재미있는 상품을 발견하고

점원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는 척하며 슬쩍 사진을 담아본다.

사실은 대놓고 찍어도 별로 뭐라 할사람 없겠지만, 쇼핑몰 안에서의 촬영은 언제나 긴장된다.

 

부피에 비하면 꽤나 비싼 녀석인데, 정말 잘도 이런 상품을 만들어내는구나 싶다.

스카이트리형 초콜릿이다. 밑의 마을모형 역시 초콜릿. 스카이트리는 화이트초콜릿으로 임팩트를 줬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스카이트리 옆의 스미다가와 강까지 표현해 놓은걸 보니, 진짜 신경좀 썼구나 싶다.

 

스카이트리 모양이 모양이다 보니, 제품의 포장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릴수밖에 없지만

그 효율을 높여보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스카이트리 모양의 초콜릿만 덜렁 팔고있었다면

이렇게 내가 사진을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자연스럽게 고급 기념품이라는 이미지도 생기고.

 

사소하지만 이런 발상의 전환이 기념품 장사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념품의 덕목은 가격대 성능비가 아니라 임팩트다.

누워있는 스카이트리 초콜릿과, 이 녀석을 나란히 전시한다고 생각해 보라. 어디에 눈길이 갈지.

 

물론 사들고 가서 혼자 까먹어 버린다면야 가격 싼녀석이 제일 좋겠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의 기념품은 주위 사람들한테 선물 주기위해 사 가는 것이다.

어떤걸 선물로 줬을때 상대방이 더 좋아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흡족한 기분으로 소라마치 관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이곳으로 올때 전철을 타 봤기 때문에, 아사쿠사까지는 그냥 걸어서 가기로 한다.

 

어디서든 스카이트리를 카메라에 담느라고 관광객들이 정신없는데

영락없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에게 촬영 스팟을 조언해주고 있다.

 

여기 이 지점에서 찍으면 전부 다 담을수 있다느니, 시간대별로 멋지게 보이는 촬영장소 등을 읊어대는데

반쯤은 관광객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얼핏 들으면 그냥 혼잣말같기도 하다.

관광지라서 사람들이 좀 온화해 진건지, 그 설명 들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 땟국물 줄줄 흐르는 노숙자 할아버지한테 카메라 맡기도 자기들 좀 찍어달라고 부탁도 한다.

 

굉장히 보기좋은 광경인데, 유럽에서나 볼만한 모습을 여기서 보니 내가 좀 어리둥절했다.

 

소라마치와 스카이트리를 한 화면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이 거리에서는 35mm 렌즈로도 무리였다.

소라마치는 긴 직사각형의 건물이라서, 둘을 한꺼번에 담으려면 이거보다 더 광각렌즈를 사용하던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이어붙어야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파노라마는 귀찮아서 그냥 패스.

그거 못담았다고 내가 아쉬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자연경관 풍성한 곳이 아니라 도쿄같은 도시에서 35mm 보다 더 광각이 필요할줄은 몰랐다.

 

소라마치는 쇼핑몰뿐만 아니라 수족관까지 포함된 복합센터라서, 인파에 휩쓸릴 각오만 있다면

하루 꼬박 소비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는, 도쿄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명실공히 입지를 다지고 있다.

수족관은 물론 본인도 참 좋아하지만, 전망대 입장료와 미지의 라멘탐험으로 이미 출혈이 상당하고

몰려드는 인파만큼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냥 도망치기로 결정.

 

만일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서 왔다면 이런 불평없이 얼마든지 인파에 치여가며

평범한 관광을 즐기겠지만, 홀로 떠도는 여행에서는 스스로의 기분에 반하는 행동은 절대로 하고싶지 않다.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어서 걷다보면 땀도 슬쩍 흐를 정도다.

영하의 한파속을 헤매는 서울에서 왔으니 체감적으로 더욱 덥게 느껴지기도 하고.

느긋하게 25분쯤 걸으니 다시 스미다가와 강을 넘어서, 어제 신나게 셔터누른 장소로 돌아온다.

 

역시 제일 간편하게 담을 수 있는 위치는 이곳이라는 생각. 옆에 똥덩어리와 아사히 빌딩도 볼만한 녀석들이고.

도착을 늦게 하는 바람에 첫날 사진이 전부 해질무렵이었는데, 역시 대낮에 사진 찍으니 거리낄게 없어서 좋다.

 

 

 

이곳 촬영포인트 주변에서는 노인 두명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한 사람은 구슬픈 하모니카를, 한 사람은 점잖게 한 곡조 뽑아내고 있는데

옛날 노래들이라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건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며 걷자' (上を向いて歩こう) 정도밖에 없었다.

 

이 곡은 일본인들에게는 국민가요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아시아 노래중에서는 최초로 1963년 빌보드차트 1위를 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재미있게도 해외에서는 제목 발음이 어려워서 '스키야키'로 알려진 그 곡.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위를 보며 걷자'는, 심금을 울리는 가사의 내용덕분에

안그래도 유명한 이 곡이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로 어마어마한 반향과 함께 다시 대인기를 얻었다.

대지진 이후 TV CM에서 이 곡이 부드럽게 흘러나올때, 일본 국민들의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곡의 분위기가 그토록 잘 어울릴수는 없었겠지만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현재의 상황이 더욱 적나라게 느껴진다고 할까.

 

 

 

아사쿠사에서 아키하바라로 바로 가는 전철은 없기때문에

버스나 타고 가자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15분이나 기다리고나서야 깨달았다.

적혀있는 노선표를 자세히 보니 일요일엔 아키하바라 행 버스가 3~4시간에 한대씩 온다.

 

도쿄 한복판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허탈한 마음과 함께 그냥 전철을 탄다.

갈아타면 요금도 비싸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한대 얻어맞고 조금 체력이 빠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다.

오타쿠와 전자제품의 성지 아키하바라(秋葉原), 원래 이곳은 한국의 용산처럼 조그만 영세가게들이

수도없이 밀집해서 이루어낸 개미집과 같은 장소였는데, 지금은 거대 체인 요도바시 카메라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매장을 역앞에 떡하니 건설하는 바람에 그 독특한 매력이 많이 퇴색되어 버렸다.

 

진짜 매니아들의 아키하바라는, 골목골목 구멍가게를 누비며 이 세상 어떤 전자부품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의 모습을 가리키지만, 이제와서는 대기업의 천편일률적인 제품과

귀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뿌리는 페로몬에 이끌려 하악거리는 오타쿠들의 천국으로 그 모습을 바꾸었다.

 

하긴 나도 20년전 처음 도쿄에 갔을때는 무조건 아키바부터 달려가서 게임팩 사는데 열중했으니까.

지금도 그때 뭐 구입했는지 기억난다. 슈퍼패미콤이라는 가정용 게임기의 'FEDA' 라는 녀석.

난 왜 이런걸 이렇게 오랫동안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게임팩 구입후엔 친구 강군과 함께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종횡무진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때 버추어 파이터 2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라 게임센터에서도 요금이 2배 비싼 200엔이었지만

태어나서 경험해본적 없는 폴리곤 덩어리들의 환상과도 같은 향연에 돈을 마구 쏟아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그 게임센터 아직도 영업중이긴 하다. 내부 구조는 많이 바뀐것 같더라만.

 

여담으로, 원래 이 지역의 한자명을 읽으면 '아키바하라'가 되는데

공무원이 한자를 잘못 읽어서 '아키하바라' 라는 전철명이 붙어버린 황당한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이게 또 재미있는게, 요즘엔 다들 이름을 생략시켜서 '아키바' 라고 읽는데 이게 사실은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는 것.

 

 

 

스카이트리에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것저것 많은데, 주된 목표는 역시 부탁받은 선물 구입이다.

요도바시 아키바는 단순히 전자제품이나 카메라만 파는게 아니라

백화점이라도 해도 될만큼 없는게 없는 가게라서, 의류같은 패션 상품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건 다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구입할건 쿄세라의 세라믹 부엌칼. 가볍고 오래가고 잡내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팔긴 하지만, 최상급 프리미엄 브랜드는 팔지 않고 한단계 낮은 등급의 제품만 있어서

도쿄 가는김에 좋은거 사가기로 했다. 훗날 돌아와서 한번 써보니 확실히 좋긴 하더라.

 

칼 하나에 10만원이나 하는걸 보고 덜덜 떨었지만, 막상 돌아와보니 독일제 부엌칼은 하나에 몇십만원씩 한다.

정식 교육을 받은 셰프들의 칼이야 수백만원짜리도 전혀 비싸지 않은 레벨이긴 한데

가정집 주방에서 대체 뭘 만드시길래 수십만원제 칼이 필요한지까지는 내가 알수있는 범위가 아니다.

쿄세라의 세라믹 칼은 어찌됐든 무지하게 가볍고 절삭력이 좋아서 어느정도 돈값을 하겠지.

 

요도바시 안에는 서점도 있어서 부탁받은 유아용 동화책 몇권과 내가 읽을책 몇권을 산다.

계산은 같이 했다. 지인의 부탁이 아니고 엄니를 통한 2중 부탁이었던 터라 이 정도 수고비는 챙겨도 되겠지.

읽고싶은 책은 산더미같은데, 중고책방이라도 가야지 신품서점에서 구매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물론 새 책을 산 이유는 내가 돈내는거 아니니까. 그래도 항상 정도는 지킨다.

 

이러저러해서 참 인연이 깊은 아키바인데, 역을 나서는 순간 굉장한 상실감이 밀려온다.

아키하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라디오회관(ラジオ会館)이 건물채로 사라지고 없었던 것.

지금은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각종 장비들이 가동되고 있다.

 

라디오회관은 아키하바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층 건물중 하나로, 그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초기엔 라디오 트랜지스터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의 집합체였다. 아키하바라라는 장소와 동시에 태어난 역사의 산 증인.

 

 

 

2010년 자전거 여행때 담은 라디오회관의 모습.

노란색 네온싸인이 걸려있는 건물이다. '세계의 라디오회관 아키하바라' 라는 촌티나는 제목의 전광판.

 

2000년 이후로야 아키바 대부분이 그렇듯 전자부품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가전제품, 애니메이션, 만화, 피규어 등으로 채워졌지만

이게 1953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아무리 개축을 거듭해도 결국은 노화를 피할 수 없어서

전면 해체후 재시공이라는 처방을 받고야 말았다. 물론 해체 한참 전부터 이곳에 입주해있던 회사들은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지만, 새 건물이 들어서는 즉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거라고.

 

아키바의 터줏대감 같은 건물이라서, 이 건물이 해체되던 때엔 아쉬워하며 사진을 찍는 오덕들이 많았다.

본인도 만화책 살때는 반드시 이곳 라디오회관의 'K-BOOKS'를 이용했던만큼 감회가 새롭기도 했고.

왜 거기서 만화책을 샀느냐 하면, 특이하게도 저 서점이 부스 두개로 나뉘어

한쪽은 비닐 안벗긴 새책을 팔고 다른 부스에서는 중고책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중고책은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아서, 일단 신품부스에서 신나게 구경하고 구입할 책을 정한 후

중고부스에서 그 책을 찾아 구입하면 금액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물론 중고품이 없는 책은 어쩔 수 없이 신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담이지만 K-BOOKS 는 그것 외에 어른용(!) 만화책도 샘플본을 많이 비치해서, 구입하지 않고도 읽어볼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었다.

세계 어디든 어른용일수록 구입전까지 내용물 못보도록 철저하게 막는게 일반적인데, 그걸 과감히 깨트린 영업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어른용 만화책은 그림 수준이 좀 떨어져서 본인은 별 관심이 없다?

 

 

 

친구가 닌텐도 게임소프트를 부탁해서 그것도 찾아봐야 하는데

일단 그걸 오늘 구입할 생각은 없다. 게임소프트는 중고유무와 가격대 등을 넓게 조사해 봐야

쓸데없이 돈 더주고 구입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조사하는데 하루, 구입하는데 하루 정도는 투자해야 한다.

 

얼핏 둘러본 바로는 그게 굉장히 인기있는 신작게임이라서 어지간한 곳에 중고물품이 없다.

이렇게 되면 다음에 구입할때 이야기가 좀 편해지긴 한다. 신품가격 제일 저렴한 곳만 골라가면 되니까.

 

20년전의 전자상가 천국은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곳이라서 지루하지 않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 길거리 전체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가게등으로 가득찬 곳이 있겠는가.

굳이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길거리는 충분한 문화충격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저기 SEGA의 빨간 건물은 20년전 친구 강군과 내가 버추어 파이터 하려고 뻔질나게 들락날락한 곳.

그거 말고, 자기 사진을 찍어서 모니터에 그걸 띄워놓고 펀치머신으로 두들기면 얼굴이 찌그러지는 게임도 있었다.

내가 강군하고 원수지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며 배를 잡고 뒹굴었던 기억이 난다.

 

 

 

아키하바라라는 매니아 지향 상점가가 이렇게 유지된다는건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화면 하단부의 사람이 보인다면, 저 소프맙 건물이 어느정도 규모인지 알 수 있을 터.

 

아키바에는 이런 건물이 수십채씩 거리 전체에 줄지어 늘어서 있다.

건물에 걸린 거대한 그림들은, 얼핏보면 그냥 애니메이션이겠지 싶어도

사실은 아이들이 만져서는 안되는 어른들(!!)의 게임 광고다.

 

어른용 게임이다보니 수요는 적고 제작은 힘들어서, 게임 하나당 10만원이 넘는 고가를 자랑해도

열심히 구입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보니 이렇게 오늘도 아키바는 돌아가고 있는 것.

 

실제로 인파를 뚫고 성인코너로 들어가보면 그건 그거대로 훌륭한 타국문화체험의 현장이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니, 성인물에 관심이 없어도 그 분위기를 즐기는것 자체는 충분히 관광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항상 이런곳 안에 들어가서 어슬렁거릴때는, 이정도 극단적인 문화적 괴리를 생산하는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가 대부분.

물론 혈기왕성한 중고딩때 이런거 체험해보라는 뜻은 아니고. 어른이라면 이 오묘한 분위기 자체가 재미있는 경험이 될것이다.

 

여성분들은 또 여성분을 위한 그렇고 그런 코너가 있으니 그런데 가보는것도 좋고.

 

 

 

부탁받은 책 몇권 사고, 그냥 선물도 책으로 사고, 내가 읽을 책도 사고 하니 가방이 미어터진다.

이미 카메라는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어깨에 매고 있는데, 이곳 가게들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서

어깨에 카메라 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행에 방해가 될 정도. 굉장히 조심해가며 이동하다보니 진이 빠진다.

 

오늘 책 구입비용만 거의 10만원쯤 나왔는데, 그중에 내가 산건 5만원쯤 된다.

어쨌든 도쿄까지 왔으니 내가 만족하게 싸들고 돌아갈만한 녀석은 책밖에 없고.

 

아키바는 정말 올때마다 느끼지만, 한산할 때가 없는 곳이다.

이쯤 되면 이미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실제로 일본 최대의 아마추어 동인작가전인 코믹마켓에는 3일간 70만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인파가 모인다.

이 3일간 도쿄 시내의 모든 숙소가 마비될 정도니까, 직접 보지않으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곳.

 

자전거 여행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여름 코믹마켓에 잠깐 들른적이 있는데

인간이 이럴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 사진 퍼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런 느낌이다.

 

 

 

아키바에서 이것저것 부탁받은 물건 구입하고 가방이 빵빵해지니 어깨와 발이 뻐근해진다.

아침에 먹은 라멘덕분에 배는 고프지 않고, 이럴때 유용한 녀석은 조금 먹고 시간 오래 때울수 있는 녀석.

쥐꼬리만한 용량을 자랑하는 모스버거에서 한숨 돌린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10분쯤 기다렸다.

 

좋은 재료를 쓰고, 주문받은 후에 만들어서 바로 내놓기 때문에 맛이 괜찮은 모스버거지만

가격대비 크기가 정말 눈물날 정도로 작은 녀석이라, 이걸로 배 채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모스버거 특유의 양파향 나는 토마토소스는, 그래도 햄버거 소스중에서는 인스턴트 냄새가 덜 나는 편이어서

깔끔한 치즈와 함께 베어물면 나쁘지 않은 맛이다. 어디까지나 일반 패스트푸드점과의 비교우위일 뿐이지만.

 

모스버거에 들어가서 제일 마음에 드는 녀석은 언제나 음료수 컵에 그려져있는 그림.

사진은 있지만 이곳에 올리지 않는다. 혹시 갈일 있으면 음료수 컵 그림을 잘 살펴보시길.

모스버거의 정체성이랄까, 가장 모스버거 답다는 느낌이 들어서 참 친근감을 느끼는 녀석이다.

 

버거는 그냥 자릿세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피로를 풀며 메모장을 꺼내서 펜을 깨작거린다.

 

 

오늘 루트는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대강대강인듯 하다. 스카이트리와 아키하바라 두 군데밖에 둘러보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운 관광객들에게는 너무 낭비가 심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8시 반에 숙소를 나와서 라멘 먹을때 20분간 앉은것 빼고는 8시간 넘게 계속 걸어다닌 셈이라서

모스버거에 앉았을 때 몸이 밑으로 쑤욱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부터 힘내서 야경보기 좋은곳을 찾아다니면 너댓시간은 더 관광을 즐길 수 있겠는데

그런 식의 강행군은 오직 함께 가는 일행이 있을때만 시도하는 성격이다.

 

자기 물품보다 남한테 부탁받은 물품을 구입하는게 더 피곤한듯 하다.

논리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되게 피곤하다. 이 안에 든게 전부 내가 갖고싶은 것들이었다면 아직 팔팔할텐데.

 

밖으로 나오니 해가 슬슬 지고있다. 어느센가 아키바의 명물로 자리잡은 돈키호테 빌딩의 AKB48 극장이 앞에 보인다.

AKB48 은, 아마 나보다 더 잘 아는 한국인들도 많을거라 생각하는데... 요즘 일본 연예계의 최강 아이돌 그룹이라고 보면 될듯.

한국의 최강 아이돌은 소녀시대인가?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애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처음엔 무명이었던 그 그룹이 꾸준히 공연하던 곳이 이 아키바의 극장. 지금은 국민아이돌로 상승했기 때문에

AKB 전용 극장마저 생겼고, 조그마한 이벤트라도 있는 날엔 저 앞에 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물론 내가 그 아이돌들 이름이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오랜 일본여행끝에 하나 몸에 익힌건 있다.

'에이케이비 사십팔'이 아니라 '에이케이비 포티에잇'이라고 읽는단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해서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으니 비로소 해방감이 느껴진다.

저녁 6시쯤의 이른 귀가라서, 오늘은 느긋하게 피로를 풀 수 있을듯 하다.

할일이 없어서 소중한 여행중에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별로 할일이 없기도 하고.

사실 내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있기 때문에

조금의 문제도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서 휴식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뜨끈하게 목욕 끝내고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거리를 씹으면서 TV 보다가 11시쯤 잠자리에 든다.

TV가 예전에 비해 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도시의 진짜 얼굴은 야경이라는 세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특히 자연공원을 감상할 때처럼 멀리 떨어져서 그 대략적인 모습을 바라볼 경우에.

낮의 콘크리트 도시는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덤이지만

저녁이후부터 슬쩍슬쩍 들어오기 시작하는 불빛을 보면 그래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인파를 피해 아침일찍 찾아오는 나같은 관광객을 위해 전망대 위에는 꽤나 큼지막한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의 야경을 대충 맛이라도 보여주려고 노력중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마 저녁에 한번 더 올라오고 싶겠지.

 

이번 여행에서는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을 생각이지만, 다음에 도쿄에 오게 된다면 미리 예약하고 저녁에 올라가볼 예정이다.

스카이트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야경 정도 되어야만 돈값을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같은날 한국은 굉장한 한파에 폭설에 난리가 난듯 한데 도쿄는 위도가 좀 낮아서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 계속된다.

여기서는 이것도 춥다고 기상예보에서 찡찡거리기는 하던데, 당시 서울은 영하 9도, 도쿄는 영상 13도였다.

 

물론 서울쪽을 급습한 한랭전선이 일본 중북부까지는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홋카이도 등에서는 폭설로 항공시설이 마비되기도 했다.

도쿄는 어쨌든 따뜻해서, 도시의 미세먼지가 강한 햇빛에 산란되어 아지랑이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진을 유심히 보면 빌딩들의 선이 꾸물거리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 처음엔 카메라 불량인가 싶었지만 알고보니 아지랑이.

 

사막의 그것과 달리 덥다고는 할수없었지만, 시계가 넓고 유난히 맑았던 하늘에 도시의 미세먼지가 만들어내는 자연과 인류의 합작품.

 

 

 

시간이 지날수록 전망대에 사람이 많아진다.

이미 상당수의 인원은 1천엔 추가지불하면 올라갈 수 있는 100m 위의 전망대에 줄을 서 있다.

350m 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450m 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느정도의 차이가 있을런지.

 

만약 640m 최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면야 기꺼이 추가요금을 지불할 의향이 있지만, 1m 올라가는데 10엔이라는 등식에는 따르기 힘들다.

전망대가 '그들 나름대로는' 미어터지지 않도록 내부 인원을 꾸준히 체크해서 지상 엘리베이터를 가동시키고 있지만

개장 직후 방문했을때보다는 확실히 밀도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슬슬 발을 뺄 때가 된듯 하다.

 

겨울이라 늦은 아침햇살의 역광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은

먼지에 뒤덮힌 회색빛의 도시마저도 잠깐동안이지만 친근감을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산으로 치면 정말 별것아닌 언덕이나 다름없는 높이인데

산행으로 거치는 모든 요소들을 싹 빼먹어 버리고, 홀로 우뚝 서있는 타워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인공물이 가지는 특징이란, 풍경의 우열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도 특정 몇 군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을

쉽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스카이트리 전망대의 의미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도쿄라는 도시에 화장을 좀 더 시켜야 할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스카이트리의 그림자가 멋진 임팩트를 만들어준다.

유심히 내려다보니 학교로 보이는 건물에도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 한데

학생들에게는 재미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고, 전력회사에게는 그닥 유쾌한 광경이 아닐 듯.

 

전기를 가동하면 전력회사가 돈을 버는거 아니냐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도쿄는 지금 돈주고도 전기를 추가 생산할 수 없다. 무조건 아껴야만 하는 상태.

 

 

 

렌즈별로 한 바퀴씩, 두 바퀴를 돌아보고 내려간다.

바로 하강 엘리베이터를 타는게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관광객 분산을 위한 목적도 있고, 추가적인 수입을 기대하는 목적도 있다.

 

한층 밑에는 창문가에서 경치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 없고, 기념품점과 까페 정도가 영업중.

카톨릭과는 전혀 관계없는 나라지만 어쨌든 12월이 되면 대대적인 홍보가 일어나는데

스카이트리에도 벌써 마스코트가 생긴건지, 산타옷 입고있는 캐릭터가 보인다.

 

이 타워의 이름이 스카이트리다 보니, 트리에 제대로 조명만 설치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겠는데

전력부족으로 절전중이라서, 은은한 빛깔 이상으로 화려해지기는 어려운 듯 하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쯤되니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무리를 이루어 돌아다니고 있다.

기념품점에도 학생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는데, 이곳 기념품점은 아사쿠사의 그것과 달리 물건의 퀄리티가 예사롭지 않다.

 

상당한 요금과 긴 대기행렬을 뚫고 올라온 전망대이다 보니

이곳에서만 살 수 있다는 한정상품이 줄지어 서 있고, 그 한정상품은 고가일수록 가치가 있어보일 터.

아동용 볼펜이나 수첩, 손수건 같은 그럭저럭 저렴한 녀석들도 있지만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스카이트리 모형같은 수십만원짜리 기념품도 여기저기 보인다.

 

이곳에는 까페도 있는데, 형태상 전망대 층보다 더 작은 규모의 이곳에 이런 까페를 집어넣으니

아무래도 좀 복잡해 보인다는 인상이 든다. 묘하게 펜스를 쳐 놔서, 커피를 구입한 사람만

저 앞으로 지나가서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놓은듯한 분위기가 미세하게 신경을 긁는다.

 

뭐, 그냥 스윽 지나가서 창가에 들어가도 괜찮을것 같지만, 제품 주문장소와

음료 받는 장소의 위치를 보면, 아무래도 흑심이 없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야경도 아닌 도쿄 시내를 쳐다보면서 커피 마실만큼 매마르진 않았다.

 

 

 

고층 타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씨 스루 바닥.

토쿄타워에서도 볼 수 있었고, 별 감흥은 없었다.

 

이곳 스카이트리는 더더욱 감흥이 없을 수 밖에 없는것이

이 정도 높이라면 이미 사람의 높이감각은 그 의미를 상실하는게 당연하기 때문.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바람조차 느낄 수 없는 이 공간에서

밑의 개미같은 광경 조금 보인다고 겁나서 쉬야라도 해 버리는 사람이 있을것 같지는 않다.

 

학생들 중에는 '꺄~ 무서워' 하면서 우물쭈물거리는 부류도 있던데

지능이 높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질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이 무의식중에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혹시나 싶어서 윈도우 위에서 바라보며 찍은 사진을 올려보는데

아무리 사진을 확대해도, 설사 저 자리에 서 있다고 해도 별로 무섭진 않을 것이다.

 

측면에 스카이트리의 기둥 일부가 보이는데, 이것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정도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현실세계로 내려온다.

별 생각없이 일찍 나선 스카이트리 방문길이었는데, 지금와서 보니 정말 일찍오길 잘했다는 생각.

다시 올라가려면 최소 40~50분은 기다려야 할 법한 인파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스카이트리의 마스코트인듯 한데, 세계적인 인지도를 목표로 하는건지 의외로 일본색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느낌이다.

12월 초순인 지금부터도 TV 광고나 버라이어티 쇼 등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끊임이 없는데

한국도 그렇긴 하지만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뭘 그리 즐거워하는걸까.

 

기업들에게는 이유야 어쨌든 매상이 폭등하는 시기니, 거대 체인점들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방송내 광고가 허용되는 수준이 아니라, 1시간 혹은 2시간짜리 방송 전체를 한 기업이 스폰서 할수 있는 일본이라서

황금시간대 방송을 보면 내가 지금 버라이어티 쇼를 보고 있는건지 1시간짜리 광고방송 보고 있는건지 햇갈릴 정도.

 

물론 그런 방송도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굉장히 준수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로 음식관련 방송이 많아서 보고있으면 즐겁다)

그냥 보고 즐기기엔 나쁘지 않다. 거기 속아넘어가서 별것아닌 대량생산품을 굉장히 맛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뭐, 실제로 대량생산품이라도 일본의 먹거리들은 일정 이상의 품질은 통과하니 아예 맛없는건 아니다.

일본 편의점의 도시락은 그 돈주고 충분히 먹을만 하다는 느낌이니까.

한국 편의점의 도시락은... 자전거 여행 하는중이 아니라면 공짜로 줘도 안먹는다.

 

 

 

전망대에서 한층 내려오면 조그만 기념품점.

그리고 지상으로 내려오면 다시 나타나는 커다란 기념품점.

학생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액면가로는 나하고 나이를 구분하기 힘든 학생들도 있긴 한데.

 

일본은 여행 다녀올때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여행 선물을 돌리는게 예의의 일종으로 인식되어있기 때문에

학생들 수학여행때는 부모들이 선물용 용돈을 따로 챙겨주는게 일반적이다.

한국처럼 그냥 생각나면 사가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관계 서먹해지기 싫은 레벨이라면 무조건 줘야 하는 느낌.

 

덕분에 기념품점이 활성화되고, 좋은 품질의 아이디어 상품들이 계속 빛을 발하게 되는 좋은점도 있긴 하다.

일본, 특히 도쿄정도의 비정상적인 거대도시들은 활발한 소비활동이 없이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아무리 불경기라도 워낙 저축량이 빵빵한 일본의 서민경제라서 아직까지는 눈에 띄지 않고

재미있게도 2012년부터 내수경제가 확연히 살아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서, 이곳 역시 활기가 넘치고 있는데

이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 마지막 안간힘인지 정말 다시 살아나는 전조인지.

 

후쿠시마 대지진과 원전사고, 한국 기업의 군림과 자국 전자회사의 몰락 등 최악의 위기감이

이런 활발한 소비활동의 단초가 된 것만은 확실한 사실인데, 이게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보여줄지에 대해서는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개별적 원인 모두가 세계 역사상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

 

적어도 지금보다는 가난한 나라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한국이 일본의 GDP 를 뛰어넘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부정적, 정도라는 레벨이랄까.

 

 

 

스카이트리를 나서자 다시 한번 깨닫는다.

전망대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보다, 밑에서 스카이트리 쳐다보는게 더 재미있다는 사실을.

 

위에서 바라보는 도시 풍경은 먼지로 자욱하지만

밑에서 바라보는 스카이트리는 화창한 하늘을 배경으로 매끄러운 인공물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기술이 워낙 발전하다보니, 에펠탑이나 도쿄타워처럼 다리 4개로 지탱되는게 아니라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3개의 기둥으로 634m 나 되는 녀석이 지탱되고 있다.

기술적으로 진도 8.0 의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예전같으면 한번 믿어보겠지만,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인간의 기술력이란건 아직 멀었구나 싶다.

 

매장 한달도 되지 않아서 강풍때문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사고가 두 번이나 일어났으니.

 

 

 

어찌됐든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급의 기술력으로 제작된 녀석이란 건 분명한 사실.

옆 빌딩에 비치는 스카이트리의 모습에서, SF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무언가를 느껴보기도 한다.

 

난시청 해소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송출용 타워이긴 한데

완공 후의 행보는 보면, 이미 주객은 전도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관광객이 모인다.

이런 랜드마크의 조그만 장점이라면 역시, 돈내고 올라가지 않아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감상하며 사진 찍을수 있다는 점이겠지.

 

 

 

본인은 어디까지나 카메라들고 재미있는 모습이나 찾아다니는 평범한 관광객이니

이렇게 담은 사진은 사실 큰 감흥도 없고 별로 잘 찍은 녀석들도 아니지만

이 근처에서는 스카이트리가 완공되기 몇년 전부터 계속 이녀석의 모습을 꾸준히 촬영해오는 사진작가도 있다.

 

언젠가 뉴스에도 등장했는데, 어디서 찍으면 어떤 모습이 나온다는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스카이트리의 프로.

그 사람의 촬영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제대로 사진 담으려면 준비도 철저해야 한다는 사실을 세삼 깨달았다.

 

이 스카이트리는 어쨌든 워낙 크고 도심 복판에 세워진 녀석이라, 모습 전체를 방해없이 담을 수 있는 장소가 의외로 많지 않다.

장소가 특정되어야 한다면 렌즈의 화각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담아내는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고.

전망대에서 내려와 하염없이 주위를 멤돌며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나로서도

원하는 그 느낌을 살리려면 삼각대와 TS 렌즈정도는 있어야 할것 같다. 원하는걸 얻기 위해서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지.

 

 

 

전망대에서 나와서 바로 찍은 사진에는 위치상 450m 전망대가 보이지 않았다.

소라마치로 가려고 걸어가는 사이에 사람들이 자꾸 뒤를 돌아보며 휴대폰을 꺼내길래

뭔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거리가 멀어질수록 450m 전망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천엔과 기다림이 아까워서 올라가진 않았지만, 그 형태가 독특하다는 것은 밖에서도 잘 보인다.

복층구조로 되어있는 450m 전망대는 타원형으로 유리 튜브같은 길을 따라 걸으며 360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350m 쪽 윈도우가 생각보다 좀 더러워서, 야경 찍을때는 450m 쪽이 좋으려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긴, 밖에서 창문청소할 수 있는 높이도 아니고 기대가 너무 큰 쪽이 잘못일지도.

 

 

 

스카이트리 옆의 거대 쇼핑몰 소라마치(空町)를 둘러보려고 이동하는데

문이 닫혀있는걸보고 잠시 당황했다. 알아보니 지상 7층까지는 오전 10시에 개장하고

30, 31층의 스카이트리 플로어는 오전 11시에 개장한다는 것. 8시 반쯤 전망대를 올라가서 맘껏 구경했는데

아직 10시까지는 15분쯤 남아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온 것 치고는 굉장히 효율적으로 구경한 셈.

 

지금부터 스카이트리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전망대 올라가는데도 많이 기다려야 하고

내려와도 소라마치의 인파에 휩쓸려 다녀야 할것이다. 새삼 생각하지만 참 다행.

야경 촬영할때는 미리 예약하는것 외엔 도저히 방법이 없으니, 다음엔 주의해야겠지만.

 

소라마치 내부는 아니고, 버스 승강장으로 가는 길 옆에 지브리 기념품점인 '도토리 공화국'이 있길래

저기나 들어가볼까 했지만, 이곳 역시 10시부터 개장이라서 실패.

눈에 반짝반짝 독기를 품은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단단히 잡고 이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서

설사 개장하더라도 내가 들어가 구경할만한 공간은 없을것 같다. 지브리는 아이들에게 맡기자.

 

 

 

현재 도쿄 시내에서 사진찍는 사람이 제일 많이 보이는 장소라면 단연 이곳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것 같다.

제대로 된 카메라를 들고다니는 사람도 많거니와, 정말 이곳에 오면 누구나 휴대폰 꺼내들고 셔터 누르기 바쁘다.

 

안으로 뜯어보면 나름 볼만하지만, 어쨌든 덩치에 비해서 좀 심심한 도시인 도쿄에

이렇게 세계적으로도 특징적인 녀석이 턱하니 들어섰으니 그 호기심이야 두말할 것 없겠지.

아침부터 쫓기는 마음으로 후다닥 둘러보고 빠져나왔지만, 그만큼 이곳 관광객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같은 사람한테는 정말 고역이다. 그래도 호기심으로 한번 보려고 찾아왔는데 성공적이라서 나름 뿌듯한 기분.

 

 

 

 

잠을 일찍 잔 덕인지, 알람 맞춰놓은 7시 반에 일어나 조식 챙겨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어제 저녁 뉴스에서도 체크했지만, 다시 한번 아침뉴스에서 날씨를 체크.

아주아주 맑고 올 겨울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가 될거란다.

 

이렇게 된 이상 목적없던 도쿄 둘째날은 일단 스카이트리쪽으로 결정.

물론 올라갈거라는 생각은 숙소를 나설때까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이라 대기열이 적을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날은 토요일이었으니까.

 

어젯밤 잠깐 스카이트리 다녀온 사람들 포스팅을 찾아보니, 예약하지 않으면 대충 1시간보다 더 걸린다고 하더군.

순번표를 받아놓고 밖에서 한참 돌아다니다가 겨우 티켓을 받고, 또 거기서 몇십분 기다려야 승강기를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올라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지만, 일단 날씨가 좋으니 근처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싶어서 출발.

 

전망대 못가더라도 지상의 쇼핑몰인 소라마치(空町)역시 볼거리가 많으니 가보라고 하는 블로거들의 정보도 있으니

가까이서 스카이트리 사진이나 실컷 찍고, 소라마치에서 먹을거나 좀 먹으며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한다.

어제의 아사쿠사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스카이트리행 전철을 탔는데, 막상 타보니 거리가 너무 짧다.

 

블로거들은 대부분 생각보다 거리가 머니 걸어가지말고 전철 타라고 포스팅을 했던데

아무래도 기준을 잘못 잡은듯 하다. 이 정도 거리면 내 기준으로 식사후 잠깐 산책나가는 거리일 뿐.

서울서 사하라 멤버 나침반님 만나면 보통 지하철 너댓코스 정도의 거리는 걸어다는게 일상이라

이 정도 거리라면 38도쯤 되는 한여름 아래서도 음료수 한병으로 충분하다. 전철비가 좀 아까웠다.

 

물론 전철안에서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는 스카이트리의 모습은, 어제 스미다가와 강을 사이에 두고 보던 것과

상상도 못할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전철 승객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가서 사진 찍어대는 풍경이 연출된다.

 

원래 스카이트리가 있던 지역은 토부 철도의 화물창고로 사용되던 공터였는데

사실상 도쿄 부근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부지나 다름없었으니, 스카이트리는 자연스레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제는 역 이름도 스카이트리 역으로 바꾸고,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한 도쿄를 살려보려는 최후의 노력을 쏟고 있는 중.

 

역에서 내리니 육중한 모습의 스카이트리가 뿌리부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수백미터 떨어진 곳과는 역시 느낌히 달랐다. 사람이 이런걸 만들 수 있구나 싶은 생각.

겨울이라 해가 낮게 뜨니, 꼭대기쪽엔 햇빛이 걸려서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공적인 볼거리로서는 참 여러가지 생각을 들게 만드는 풍경.

 

 

 

매표소쪽으로 가 보니,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손님이 모여들기 전이라서

15분만 기다리면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회를 놔두고 흥미없다고 돌아오는건 아무리 나라도 좀.

 

하지만 입장료가 2천엔이나 하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건 어쩔 수 없다. 전망대 올라가는데 몇만원이나 내게 될줄은 몰랐다.

한시간이나 기다려서 바글바글한 전망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현실에서

돈이 아깝다고 15분이라는 시간의 혜택을 놓치는건 아무래도 결단력이 필요하고, 난 좀 우유부단하기도 하다.

 

스카이트리 전망대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놀라워하는 것은 엘리베이터의 속도.

무슨 기술을 적용한건진 모르겠지만, 350m 높이를 50초만에 올라간다. 일본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라고 한다.

바깥풍경이 보이지는 않아도 LCD 화면에 올라가는 높이를 표시해 주는데, 숫자가 주르륵 올라가는걸 보면 놀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속도에 비해 귀가 멍해진다거나 하는 현상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와 전망대가 완전히 밀폐되어 있기 때문일까.

 

이 엘리베이터는 개장 한달만에 두 번이나 바람때문에 멈춰서는 바람에 언론에서 많이 까이기도 했다고.

 

어쨌든 순식간에 전망대에 도착하니, 무리하지 않아도 창문쪽에 붙어 사진찍을 수 있을만한 공간이 남아있다.

사람 많을때는 유리창쪽에 달라붙는것도 순서 기다려야 할 정도라는데 왠지 이득본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하지만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라고 했는데, 350m 위에서 바라보는 도쿄의 모습은 뿌옇기 그지없다.

방금전 지표면에서 위를 올려다 봤을때는 꽤나 푸른 하늘이었는데, 역시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가지는 숙명과 같은 것일런지.

 

 

 

여러 정황증거들을 봤을때, 오늘 이 시간에 스카이트리를 찾은건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던 듯.

현재 도쿄 관광지중에서 가장 붐빈다는 스카이트리 전망대 안을, 인파 걱정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큰 수확이다.

젊은층들은 휴대폰으로 사진찍는것에 비해,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SLR 이나 RF 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조금 독특하다.

 

그리고 그런만큼 장년층 관광객수가 절대수치로 따져도 젊은사람보다 더 많은듯 보이는것 역시 놀랍긴 하다.

여전히 소비활동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고, 그럴만한 소득을 누렸던 세대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이렇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것은 좀 부럽다.

 

 

 

이렇게 보니 정말 도시의 숲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긴 넓다.

그런데 웃기는 건, 도쿄도는 서울보다는 좀 넓어도 대구 면적보다 좁다는 것.

서울이나 대구처럼 주변에 산지가 없이 완전한 도시숲인데다가,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서 체감적으로 서울이나 대구보다 더 넓어보인다.

 

이것은 도쿄도라는 행정구역과 실제로 사람들이 느끼는 도쿄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한국사람으로서는 도쿄와 별개의 이름이 붙은 주변도시들은 그냥 서울과 인천 정도의 차이겠지 싶겠지만

사실 거리상으로 인천의 관계와 그리 다르지 않은 요코하마의 경우 어디서부터가 도쿄이고 어디서부터가 요코하마인지 구별이 불가능하다.

이 스카이트리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후지산까지 보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렇게 보아서는 어디까지가 도쿄인지 알 수 없는 것.

 

위 사진에서는 숨은그림찾기가 가능하다. 도쿄타워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인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이곳 스미다구와 타이토구는 개발이 더딘 곳으로, 가까운쪽과 저 멀리 도쿄 중심부의 건물 모양만 봐도 금방 구분이 된다.

 

 

 

예전에 대구 우방타워에 올라서 찍은 사진을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스카이트리의 높이를 조금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제저녁 아사쿠사에서 바라본 아사히 똥덩어리와 스카이트리의 크기가 기억난다면

사진 중앙 하단부의 똥덩어리를 잘 찾아보는게 재미있을 듯. 이 정도나 차이가 나는 녀석이었다니.

 

우측의 수목이 우거진 부분이 아사쿠사 센소지.

 

 

 

도쿄 주민들이라면 내가 대구 우방타워에서 그랬던 것처럼

알고있는 건물이나 자기 집 찾아보는데 재미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듯 하다.

그런 면에서 고층 타워란 외부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에게 더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아닌가?

 

확실히 350m 씩이나 되는 높이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도쿄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인간의 흔적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풍경은, 의미를 가지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좀 가벼운 느낌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정도 높이에서 바라보면 고소공포증도 작용하지 않을 듯 하다.

너무 높다보니까 어딜 둘러봐도 무섭다는 감각이 생기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는 느낌.

바람이라도 통하고 있다면 무섭겠지만, 그랬다가는 이 전망대에서 스펙타클 호러영화 한편 찍게 되겠지.

 

 

 

 

전망대에 오르기 전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진 생각이었지만

실제로 보게되니 이 녀석의 민폐를 어느정도 실감할 수 있다.

 

워낙 높은 녀석이고, 스미다구와 타이토구는 고층 빌딩이 그렇게 많지 않은고로

이 근처 주민들은 아무래도 하루의 일정 부분이 인공 그늘에 가려지는 현상을 감내해야 할 듯 하다.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뀔테니 피해가구를 특정하는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일본인들의 성격상, 스카이트리가 이 지역에 가져다주는 이익을 고려해서 그냥 참고있는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다행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타워형태가 길쭉해서 그늘이 금방 지나가니 그렇게까지 불편하진 않을지도.

사실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들은 높이가 이렇게 높진 않아도 워낙 장막처럼 뻗어있어서

뒤편 주택이나 저층단지 세대들은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거기보단 낫다고 봐도 되겠지.

 

 

 

다양한 패턴을 보여주긴 하지만 역시 인공 구조물로 가득한 풍경은 금새 흥미가 떨어진다.

특히나, 자신과 연고가 없는 지역이다보니 뭘 유심히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래서 전망대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것인데, 어쨌든 큰돈주고 올라왔으니 본전은 뽑아야지.

그나마 바로 밑을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이 흐릿한 도시의 허리선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소위 말하는 보정용 코르셋같은 느낌이랄까. 스미다가와 강이 없으면 이곳 주변은 드럼통이나 마찬가지.

 

 

 

전망대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주변을 뜯어살펴보니 예전 자전거 여행이 생각난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순 없지만, 지금 내 눈으로 관측 가능한 곳까지는 대충 하룻만에 주파가 가능한 지역.

 

그 당시는 하루하루 달리면서 이 굼벵이같은 속도로 어디까지 갈런지 지루해 한적도 많았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니, 무동력으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그렇게까지 하찮은 건 아닌것 같다.

 

일반인은 올라갈 수 없는 타워의 최상층 634m 꼭대기에서, 관측사상 가장 가시거리가 넓은 날에 둘러본다고 해도

자전거로 삼일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스카이트리는 인류가 만든 두 번째로 높은 탑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겠나 싶다.

 

 

 

도시란게 원래 야경이라도 빛나지 않으면 원채 심심한 색채와 모양으로 점철된 녀석이라

스카이트리 전망대에서 제일 그림이 잘나온다 싶은 건 스카이트리의 그림자라는 묘한 결과가 나와버린다.

 

도쿄 역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어지럽게 개발된 도시라서

평소같으면 10분쯤 둘러보고 후다닥 내려와 버렸을 이런 전망대에서

그래도 30분 넘게 계속 돌아보며 이 끝없는 풍경이 가지는 매력을 찾아보려고 노력중이지만

난해한 수학공식과 같이 쉽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좀 골치가 아프다.

 

역시 해가 지고나서 전망대에 올라오면 그 풍경은 정말 은은한 아름다움을 발산할 것 같은데

저녁의 스카이트리가 훨씬 붐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티켓의 현장구매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좀 더 수월하게 입장이 가능하다는데

인터넷 예약은 최소 2주전에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불가능.

스카이트리에서 보는 도쿄 야경이라고 하니, 그건 한번 구경할 가치가 있을듯 해서

다음에 도쿄 오게된다면 미리 저녁시간에 예약하고 올라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사쿠사 앞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스미다가와 강을 타고 오다이바까지 갈 수 있다.

친구일행 데리고 딱 한번 타본적이 있는데, 외관이 아무리 멋져도 배는 역시 배일 뿐이라

크게 감흥은 없었던 기억이 난다. 볼것없는 전철보다는 풍경이 좋았지만, 오다비아로 갈때는

풍경 좋기로 유명한 무인열차 유리카모메를 타기 때문에 그것도 별 의미가 없다.

 

도쿄엔 한강만큼 폭이 넓고 유량이 풍부한 강은 없지만, 바다와 근접한 곳이다 보니

도시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지류의 수는 훨씬 많은 편이다.

도쿄가 그나마 숨쉴 만한 여유가 있는것도 이런 강들이 허파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고.

하지만 원전 사고 이후, 바다를 타고 들어온 방사능 물질들이 이제는 강으로 역류에 들어오고 있어서

도쿄의 허파가 오히려 종양전이의 전초기지가 되고 있는 실정.

 

사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니,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살고있는 도쿄 주민들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이나 걸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일런지...

 

내 개인적인 입장이라면, 아마 도쿄전력 임원들을 시장바닥에서 돌맹이로 공개처형이나 하고 싶겠지만.

 

 

 

광각역할을 담당하는 35mm 렌즈로는 넓은 영역을 담을 수 있지만

지상에서 350m 나 떨어진 스카이트리 전망대에서 그렇게 담으니 이거나 저거나 너무 콩알처럼 보여서 재미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람들 밀도가 높아지는 듯 해서 약간 신경쓰이지만, 아직 렌즈를 교환할만한 여유는 있다.

망원렌즈로 담으니 저기 하늘아래 세상이 좀 더 사람냄세를 풍기는 듯 하다.

 

솔직히 작정하고 찾아보면 일본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스팟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긴 한데

현지인도 아닌 내가 한국 블로그에서 관광 가이드 할것도 아니고, 그런거 골라담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처음 올라왔을때는 그래도 좀 마음이 두근두근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30분쯤 지나자 그 기대감의 절반 정도는 '지불한 2천엔이 가지는 의미'로 채워지는 느낌이다.

내려가면 두번다시 올라오지 못하니, 최대한 구경할거 많이 지긋하게 구경하자는 의미로 빙글빙글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