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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촌'에 해당하는 글들

  1. 2011.10.22  동해안 자전거여행 3편 18


아침에 일어나보니 역시 해안쪽엔 안개가 낀 덕에 일출은 물건너갔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아서 그런지 푸른 하늘도 얇은 막이 쳐진 듯한 느낌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속을 달릴 때는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나 고민도 하지만
그 후에 나타나는, 망막을 한꺼풀 벗겨낸 듯한 상쾌한 하늘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냄새나는 판초 우의와 신발도 견뎌낼 수 있었지.

편안하게 계속되는 맑은 날씨는 어려움없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격언이 틀리지는 않은 듯 하다.


컵라면 하나로는 역시 체력 보충하기 쉽지 않은지 허기가 좀 진다.
호텔 조식은 추가요금이 필요해서 아침 먹지 않고 나와 달렸는데, 다이어트엔 좋지만 정신건강엔 좋지 않다.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 항구마을의 식당에서 깔끔한 칼국수로 배를 달랜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지만, 넣을 것만 넣은 간소하고 깔끔한 칼국수가 생각외로 든든했다.
공기밥 추가도 가능했는데 그만큼 먹으면 자전거 탈때 괜히 고생하기 때문에 살짝 모자란 듯한 느낌이 낫다.

김치도 국산재료로 직접 담궜다는데 적어도 저질 중국산 김치가 아닌것은 확실했다.
5천원에 이정도면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식당 음식은 왠만해서는 먹고 속이 끓는 체질이지만 이건 멀쩡했으니까.


국물까지 깔끔히 비운 탓에 식사 후 바로 자전거 타기는 좀 더부룩하다.
엄니한테 전화도 한통 드리고 느긋하게 주변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기선 안보이지만 왼쪽 가장자리의 곰치국 전문점의 유리창에는 'KBS, SBS, MBC 방송 한번도 안한 집'이라고 적혀 있다.

언덕 비탈을 따라 소박하게 세워진 집들이 마음에 든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는 힘들지만.


남는 시간동안 가을 꽃도 좀 담아주고.
꽃은 역시 봄꽃의 찬란함이 마음에 들지만 가을 꽃은 나름 정취가 있다.


워낙 느긋하게 달리다 보니 아직 울진까지도 못 왔더군.
도 경계는 어디든 험하다고 하는데 과연 편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언덕이 자주 나타난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햇빛이 엄습해 와서 얼굴과 팔뚝은 이미 미디엄 웰던을 넘어가고 있다.


업다운중 라이더를 힘빠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푯말.
대충 이 푯말이 붙어있는 곳은 경사가 조금 심한 편에 속한다.
그래도 구 7번국도는 성수기가 아닌 이상 통과하는 차량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그저 쓴웃음 한번 짓고 천천히 페달을 움직이며 조금씩 조금씩 기어오르듯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해결된다.


해안도로의 장점은
저런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높은 확률로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흐르는 땀을 식히며 풍경 감상좀 해 주고 몸이 슬쩍 식을 때쯤 시원하게 내리막을 미끄러지면
오르막에서의 생성되는 건전하지 못한 분노와 짜증은 입에 넣은 1등급 한우처럼 녹아내려 버린다.


가끔씩 어쩔 수 없이 7번국도와 합류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때는 경치 감상할 여유도 없어진다.

바닥에 널려있는 사고 파편과 온갖 쓰레기, 자잘한 모래등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친절하게도 경적은 잘 울려주지만 속도는 결코 떨어트리지 않고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경계해야 하니까.

마을 안에서는 가끔 사거리에서 1차선 광속 우회전하는 정신나간 운전자도 만났기 때문에 시내든 시외든 방심은 금물.


몇개의 업다운을 지나 평지를 멍하게 달리고 있으니 궁촌 정거장이란 곳이 나타난다.
관광 버스가 상당히 많이 드나들고 있어서, 숨이나 돌릴 겸 들어가 봤다.

작년에 개장한 탓인지, 비수기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일바이크 외엔 제대로 작동하는 시설물이 없었다.
기념품점은 열고 있었지만 야외 휴게소도 식당도 완벽한 휴업상태라 음료수 하나 제대로 뽑아먹을 곳이 없다.

그래도 레일바이크는 꽤나 인기인지 사람들이 가득가득 차서 출발하고
꽤 많은 후발 주자들이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에 아쉬워하며 돌아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레일바이크는 6km 정도 거리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원래는 석탄 수송하던 길이라고 한다.
가족이나 연인들끼리는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상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버스는 사람들이 출발한 후 도착지 역을 향해 미리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편리하군.


덥긴 하지만 멋진 날씨라서 주변 공원을 거니는 맛은 훌륭했다.
전부 레일바이크 타러 간 덕분에 사람도 없고.

지금이 저녁이라면 들어눕고 싶은 멋진 정자라서 대낮인 지금이 오히려 아쉬워졌다.


꿀 나온다고 해서 내 기억이 최대한 남아있던 때부터 계속 빨아대던 기억이 나는 붉은 사루비아.
마당에 지천으로 피어있어서 당시 그 사루비아들은 거의 남아나질 않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런데 달콤한 무언가가 입으로 들어온 기억은 남아있지 않아서 좀 궁금하긴 하다. 정말 꿀이 들어있었을까.


일렬로 늘어선 붉은 군대의 위엄이 지나치다는 느낌에 찍어본 녀석.


내 자전거도 느리기로 치면 가슴을 펴고 자만해도 될 정도지만
레일바이크만큼 느리진 않기 때문에 한참 전에 출발한 녀석들을 쉽게 지나쳐 버린다.
그래도 레일바이크 덕인지 한동안 사치스러울 정도로 편안한 평지가 이어졌는데
종작점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시 업다운이 시작되어서, 다른 의미로 레일바이크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면 항상 해변가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시야를 방해해 온 레일바이크가 사라져서 카메라를 꺼낼 맛이 난다고 할 수도 있겠네.


숨은그림찾기 같지만, 우연찮게 찍은 이 사진을 보니 맥이 풀렸다.
왜 저기에다가 음료수라고 써 놨을까.
이곳도 성수기엔 사람들이 미어터져서 좌판이라도 벌리는 걸까.
얼핏 본 바로는 내려갈 길도 없어보이는 곳이었는데.

이번에 나에게 모습을 드러냈던 동해안은 겨울잠에 들어가는 곰과 같은 존재였을지도.


징하게 나타나는 해안선 업다운을 넘나들다가 중국집이 눈에 들어와서 얼른 들어갔다.
매번 국수나 해장국 같은거 먹으며 달리니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들었는데 중국집 간판을 보니 확 땡기는 게 있더라.

느긋한 아주머니께서 느긋하게 준비해 주는 호사스러운 삼선볶음밥을 입에 퍼부어 넣으니 만족감이 몰려온다.
중국집은, 일단 배달음식은 논할 가치조자 없는데다, 직접 가서 먹어도 괜찮다 싶은 집은 그다지 찾기 힘들었는데
피곤과 시장이라는 두 가지 향신료와 함께 서울보다 훨씬 푸짐한 오징어와 새우가 함께하니 맛이 없을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원덕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항구마을을 지나고 잠시 앞으로 나가보니
오후 5시 40분부터 넘기에는 상당히 귀찮을 법한, 산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언덕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사실상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면이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해야 할까. 6시 20분만 되면 라이트를 켜야 할 정도로 해가 빨리 지고 있어서
괜히 지금 올라가봤자 자동차소리 시끄러운 도로 옆 덤불 어딘가에서 뒹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느긋한 여행인데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해서, 원덕쪽 슈퍼에서 적당히 먹을 것좀 사고
슬금슬금 마을 외곽을 돌아다니다가 도로가 끊기는 지점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 텐트를 쳤다.
주변에 군사시설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좀 긴장되긴 했지만 두세 시간동안 아예 자동차 흔적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
보이는 즉시 사살당하진 않겠지 생각하고 누워서 가져온 책이나 읽었다.

일본에서는 건전지가 아까워 텐트 속에서 책 읽는 시간도 많이 줄이곤 했었는데
이번엔 AAA형 건전지 잔뜩 가지고 왔으니 최대로 밝혀놓고 느긋하게 읽었다.

살짝 피곤한 느낌도 드는 것이, 만약 여름의 강렬한 햇살 아래였다면
확실히 동해안의 업다운은 라이더를 쉽게 지치게 만들 것이란 느낌이 든다.
물도 조금 남았겠다. 대강 얼굴과 손을 씻어내고 1시간 가량 음악을 듣다가
살짝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이어폰을 빼고 귀마개로 귀를 막은 뒤 송충이처럼 몸을 움츠린다. 하루의 멋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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