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하라의 밤이 춥다고 했는가!
밤엔 영하에 가깝게 기온이 떨어진대서 일부러 오리털 침낭까지 들쳐매고 왔는데
더워서 웃통 다 벗고 퍼질러 잘 정도로 적당히 서늘하고 살짝 따뜻할 정도였다.
그때는 정신이 없었지만, 훗날 나침반님 이야기를 들으니 대회 코스를 어렵게 잡으려다 보니
이렇게 험한 지형과 고온 코스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 몸은 뻐근하기 그지없고, 어제 달린 영향은 둘째치고 아직 비행기 여독도 안 풀린듯한 느낌.
새벽에 해 뜨자마자 토착민인 베르베르족이 텐트를 훨훨 걷어가 버린다.
빨리 다음 야영지에 가서 수백개의 텐트를 설치해 놔야 하니 우리보다 더 급하다.
찬물에 즉석쌀 적당히 불려놓으며 장비 점검하고, 대충대충 우드득거리는 몸을 움직이다 보면
무심하게도 하늘은 벌써부터 엄청난 햇살로 우리를 반겨준다.
텐트가 없어지니 세상천지 그늘이라고는 없는 허허벌판이라 앉아서 쉬어도 땀은 계속 흐른다.
멤버들은 짐 정리한다고 분주한데 나는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고야 말았다.
그래 인생 뭐 있길래 짐 정리따위 하나... 그냥 가다 쓰러지면 알아서 차가 실어가겠지.
그래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똥폼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슬픈 생물.
그나마 아직 봐줄 만한 몰골이라서 이렇게 올릴수나 있지.
1주일동안 씻지도 않고 사막 속을 달리고 나면 서울역 앞 노숙자는 버킹엄의 공작처럼 보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푸른 하늘이 원망스러워 보이는건 왜일까.
한국의 흐리멍텅한 하늘이 싫어서 여기 왔을 터인데.
역시 난 아직 수행이 부족한가보다. 내가 원하는건 전부 여기 있는데 왜 계속 짜증만 나는지.
어째 슬그머니 와서 놀자던 피터가 결국 우리 텐트에서 잠까지 잤다.
아무래도 자기네 텐트보다 이쪽이 더 편한갑다.
일본인 혼혈 2세라 그쪽과는 그리 친근하게 끼어들지 못했는지도. 뭐 아무렴 어떤가.
사막 레이스에서 중요한 스패치.
신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가면 물집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저렇게 감싸줘야 한다.
경험자인 나침반님은 직접 신발에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 오셨다. 나는 그냥 파는거.
출발 전에 모여서 스트레칭을 하니까 외국인 선수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와서 구경도 하고 따라하기도 한다.
몸이 얼마나 뻐근한지 몸을 제대로 늘리기도 힘들더라.
이제 둘째 날 출발하기도 전인데 몸 상태는 레이스 마치고 귀국 비행기 기다리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행자분은 프랑스 공항에서부터 계속 통역해달라고 조르던 일본 연예인과 사진 찍으며 즐거워한다.
'아이나'라는 이름의 이 연예인 아가씨는 SES처럼 세 명으로 이루어진 아이돌 그룹같은데
아직 여자아이돌 그룹은 3명이 SES, 4명이 핑클, 떼거지가 소녀시대라는것 밖에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예시. ㅡㅡ;
한국 프로그램으로 '도전 지구탐험대'같은 느낌의 프로그램에 참가한건지, 따라오는 스텝들이 무지 많다.
스폰서도 한건지 MDS 주최측에서도 신경 써주는 분위기였다. 연예인이니 살 태울수도 없어서 완전무장했다.
저렇게 가냘픈 몸으로 완주 할수 있으려나 생각도 들었지만
나처럼 우람한 몸으로 남 완주 걱정하는건 건방진 생각이다.
즐거워 죽으려는 행자 뒤에서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나침반님과 걸러.
어찌됐든 시간은 가고 출발은 해야 한다.
오늘은 35km.
어젠 28km 라는 거리에 속아서 무지 힘든 산행까지 했는데 오늘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설마설마 했는데 눈 앞에 보이는 저 산이 첫 번째 코스란다.
그냥 날 죽여라.
죽기전에 나침반님이 본인과 나 모두에게 포트레이트가 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진을 한 장 찍으셨다.
사하라 마라톤 사진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녀석 중 하나.
PEACE 가득가득 적힌 버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속마음은 '건들기만 해봐, 다 쓸어버리겠어'라는 방향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다.
그냥 덥고 지치고 짜증날 뿐.
군대 끌려온 것도 아니고, 제 돈주고 왔는데 이렇게 짜증만 내서야 되겠나.
일단 둘째날이 시작되었으니 따라가고 본다.
나만 힘든 건 아닌지 어제처럼 환희에 들뜬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
등에 짐을 짊어진 패잔병들처럼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장하다.
아이나씨를 따라온 스텝들이 선수들보다 더 고생이다.
미리 산을 올라가 있다가 아이나 일행이 오면 찍어대고
그녀들 사라지기 전에 다음 포인트로 후다닥 먼저 이동해야 하니.
시작하자마자 산을 오르니 아주 입에서 향긋한 욕이 베어나올 정도다.
다행히도 산은 그리 높지 않았고, 저 멀리 펼쳐진 끝없는 세계가 날 협박한다.
어제는 거리에 따른 물 소비량을 완전히 잘못 계산했기 때문에 낭패를 본 터라
이번엔 어지간히 목 말라도 거리를 잘 봐가면서 조금씩 마시기로 했다.
참고 참았다가 체크포인트에서 새 물을 받으면 남은 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테니.
스텝 자격으로 온 슈가님은 차를 타고 미리미리 지점으로 이동하며 사진을 찍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첫 도전이라 카메라를 아무데서나 꺼내들 만한 체력적, 심리적 여유도 없었던 터라
멤버들 전원의 사진을 다 모아도 한창 레이스 도중의 사진은 별로 건질 게 없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뭔놈의 사진이냐. ㅡㅡ;
그런데 지금은 이를 갈면서 준비하고 있다. 다음에 갈 땐 DSLR 세트를 들고 가서 작품 하나 찍어와야지 하고.
나도 이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다.
다음엔 다스베이더 옷을 입고 달려볼까? 아마 훈제돼지구이가 되겠지.
퍼포먼스를 즐기며 가면 마음도 좀 가벼워 질 것 같다는 느낌이 이제서야 든다.
다음엔 나도 근엄하게 똥폼만 잡지 말고 뭐 좀 만들어 가야겠다.
본인이 힘들어서 찍을 여유가 거의 없었는데 슈가님 덕분에 사진도 건졌다.
물론 뒤로 가면 갈수록 나하고 홍일점 홍양만 뒤로 쳐지는 바람에
앞선 선수들 따라가며 사진 찍던 슈가님 카메라에 거의 담겨지지 못했던 비극이 있었지만.
아이나씨 일행은 완전 우주인처럼 입어놓고 잘도 걷는다.
아마 내 몸무게의 2/3도 안될텐데, 역시 연예인이란 것도 불굴의 정신력 없이 그냥 설렁설렁 하는건 아닌가 보다.
하긴 내가 연예인이라도 저 정도는 하겠지만. 돈과 인생이 걸렸는데.
어쩐지 어제보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서서인지 코스 자체가 어제보다 어렵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제 코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첫 날에 너무 심한게 아니었나 싶다. 도대체 산을 몇개나 넘은거야.
그렇다고 오늘도 무난하다고는 하기 힘든게, 12시가 넘어가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칼날같이 날카로운 모래폭풍이 한번 불면 맨살을 들어낸 다리쪽은 마치 사포로 갈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체크포인트를 통과하면 그나마 천국과도 같은 차량 밑 그늘에서 쉬며 물도 마시고 음식도 먹고 한다.
나처럼 늦게 걸어오는 사람은 이미 자리잡기도 글렀지만.
햇볕 아래서는 체력이 회복되는 기미도 거의 없어서 오래 앉아있기도 뭣하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잠깐 쉬어보긴 했는데, 분비되던 아드레날린이 멈춰서인지 오히려 고통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물과 초콜릿만 좀 먹고 다시 일어섰다.
처음 몇 발짝은 하반신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때문에 절룩거렸는데, 30분쯤 걷다보니 통증이 둔해져서 꼭 마취제를 맞은 것 처럼 다리가 뭉툭한 느낌이다.
오후 3~4시쯤 되고 슬슬 체력의 한계와 상황의 익숙함이 동시에 찾아올 때가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지평선밖에 없는 이 사막 한가운데서 드디어 조금이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귓가에 들리는 매서운 모래바람 소리와, 그것보다 더 크게 들리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어두운 스포츠 고글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버프 속에서
프라이버시에 가까운 아득한 고독감을 느끼는 순간은,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라면 꼭 경험해봐야 할 순간이라고 본다.
이제 그만 주저앉아서 날 데려가줄 백차탄 왕자님이나 기다릴까 싶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그러지 않고 계속 걸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이거다.
그늘이 전혀 없어서 앉아서 쉬어도 편할 것 같지 않았거든.
어차피 땡볕에 앉아서 편하지도 않게 차를 기다릴 바에는 똑같이 힘들어도 그냥 걸어만 가자고 생각했다.
별로 듣고싶은 말이 아닐수도 있지만 이쯤 되면 두 다리와 내 뇌를 연결하는 신경이 느슨해진 느낌이라
이젠 뇌 속에서 아무리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던 말던 그냥 두 다리를 교차해서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가긴 가더라.
이런 생각 하면서 걷다보면 가끔 진한 동료애를 느끼게 만드는 녀석들과 만나기도 한다.
나도 포기하고 널부러져서 자동차나 기다리고 있으면 딱 이런 꼴 아닐까 싶어서
눈물을 훔치며 '니 몫까지 내가 달려주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원래 더우면 사람이 살짝 가는 경우도 있다.
오늘 최고의 난코스라고 생각되던 모래언덕... 이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지도대로라면 무지막지한 모래언덕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데 여긴 겨우 발에 살짝 채일만큼의 모래밖에 없다.
표지판이 있는걸 봐서 길을 잘못 든건 아닌데 의아해 하면서 어쨌든 칼날같은 모래바람을 뚫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청난 모래바람이 지속된 탓에 원래 있던 모래언덕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댄다. ㅡㅡ;
참 사하라에선 희한한 일도 다 만나게 되는구려.
모래바람 덕분에 종아리 뒷부분에 찰과상에 가까운 화상을 입긴 했지만
모래언덕이 사라진 덕분에 오늘 겨우 완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멤버들 5명중 4번째로, 앞선 멤버들과는 3~4시간이나 차이나게 도착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마실 물을 챙겨들고 텐트로.
홍일점 홍양은 나보다도 늦어서 앞날이 걱정된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사막은 사람을 비정하게 만든다.
여기선 결국 무슨 짓을 해도 혼자 완주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텐트에 도착해서 쉬고 있으니 비보가 들려온다.
홍양이 제한시간에 걸려 탈락해 버렸다는 것.
원래는 제한시간을 넘겨도 그냥 계속 달리게 해 주는데, 이번엔 뭔가 사고가 있었나 보다. 제한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고 늦은 사람은 탈락시켰다.
힘이 다해 탈락한 것이 아닌 터라 홍양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래도 홍양은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기서 함께 생활하겠단다.
참가자 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성숙하고 배려심 깊었던 홍양이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다음 탈락자는 나였다.
물집을 터트리고, 실을 꿰매서 진물이 흐르도록 놔 두고.
저건 알맨님 다리지만 내 다리는 상상 이상으로 망가져 있다.
진물에서는 피가 섞여 나오고, 양쪽 새끼발가락 부분은 워낙 물집이 생겼다 터졌다 해서 너덜너덜하다.
먼저 오신 멤버들이 성심성의껏 식사까지 만들어 주셔서 편안하게 밥 먹고 누웠지만
탈락한 홍양 생각과, 남은 멤버들 중에선 확연하게 체력이 떨어지는 내 입장때문에 쉽게 잠이 안온다.
오늘도 많은 수의 탈락자가 생겼고, 내일은 중앙에 거대한 산이 떡 버티고 있는 38km 구간.
지도상으로는 Long Day 다음가는 난이도로, 이번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이 아닐까 싶다.
어찌보면 홍양의 탈락때문에 나로서는 겁도 먹고 용기도 얻고 하는 이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는데
다음 탈락자는 확실히 내가 될거라는 불안감과,
탈락한 사람을 옆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감정때문에
절대로 탈락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이 동시에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게 참 장관이었다.
'현실도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 - Good Day (12) | 2009.11.06 |
---|---|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4 - Long Day (8) | 2009.11.02 |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3 - 38km (4) | 2009.10.30 |
21th Marathon Des Sables - Stage 1 - 28km (8) | 2009.08.14 |
21th Marathon Des Sables - 출발 전 (18) | 2009.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