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바를 거뜬히 비운 다음 역쪽으로 걸어간다.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조금씩 피곤이 쌓일 즈음.

좀 전에 지나쳐 왔던 개미공방에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젊은 커플손님이 안에 있어서 살짝 망설이기도 했다.

아트공방은 너무 시끄러워도 너무 조용해도 문을 열때 살짝 긴장감이 도는 느낌.

 

그래도 뭔가 재밌어 보이는 공예품들이 창문 너머로 보이길래 큰맘먹고 안으로 돌격한다.

 

 

 

주인장이 먼저 온 커플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동안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던 녀석을 먼저 살펴본다. 지인의 작품을 대신 전시해 주는 특별 기간인 듯.

 

다양한 종류의 나무조각을, 원본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정도까지 다듬은 후

눈이 동글동글한 새 한마리를 그려넣고 격언이랄것도 없는 짧은 문구 하나를 적어놓은 녀석.

사용법은 스스로 만들어 보시라고 적혀있다. 목걸이나 열쇠고리로 제격일 듯 한데.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해서 손의 감촉, 무게, 색깔, 향기 등이 꽤나 차이가 난다.

모양도 불규칙한데다가, 뒤에 적혀있는 글자도 랜덤성이 강해서 한참 보고 있어도 고르는 맛이 있고.

문득 제천 솟대박물관에 늘어서 있던, 자연 그대로의 나무조각만 모아서 완성시킨 솟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하다.

도시에 살고 있으면 의외로 다양한 나무의 질감과 차이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어서 더욱 반갑기도 하고.

 

막 태어난 조카한테 부적 대신으로 하나 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한참동안 만지지도 못하겠지만

생후 첫 선물이니 나이가 좀 먹은 후에 가지고 있어도 충분히 역할은 할 것 같고.

똑같은 녀석이 하나도 없어서 약 30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계속 적당한 녀석을 찾아본다.

 

주인장 아주머니가 아마 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여간해서는 뭔가 딱 맞는다 싶은게 손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결국 크기나 모양, 색깔이 제일 무난하다 싶은 녀석을 고르긴 했다. 뒤쪽에는 'ゆっくり、ゆっくり' 라고 적혀 있다.

뜻은 여기서 해석하지 않아야지. 조카가 혹여 몇년 후 뜻을 물어본다면 가르쳐 주겠다.

 

 

 

사진 촬영 허락을 받고, 그리 적극적이진 않지만 조금씩이나마 대화를 시도해 본다.

전부 자기 작품은 아니고, 지인들의 작품도 정기적으로 전시를 한다고. 방금 전의 나무조각들은 친구의 작품이지만

앞의 유리선반 위에 올려진 나무 조각품들은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보면 느껴지겠지만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상품들과 공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듯한 느낌.

뭔가를 구입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그냥 천천히 돌아보면서 분위기를 감상하는게 더 적합한 방법일 듯 하다.

 

 

 

여러가지 악세사리와 함께, 안쪽에는 가볍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다.

마침 손님도 나밖에 없어서, 주인장 아주머니와 커피 한잔씩 하면서 재미있는 대화를 이끌어 갈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부담감이 계속 엄습해 와서 그냥 소심하게 몇가지만 슬쩍 물어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았다.

 

개인공방이라는 게 참 푸근하고 정감있는 곳일텐데, 나는 이상하게 이런 공간에 발을 들이는데 조금의 긴장을 필요로 한다.

좋은 공방은 판매를 위해 전시된 제품이 아니라 공방 자체가 주인의 예술성을 주장하는 공간이라서

굉장히 폐쇄적으로 집필활동을 하는 본인 성격상, 왠지 쉽게 건드려서는 안될 초조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기회가 있다면 혼자보다는 누군가 함께 오는 편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참동안 혼자 둘러보고 있으니 주인장 아주머니는 까페 깊숙한 곳에서 여러가지 나무조각에다가 뭔가를 만들고 계신다.

이번 여행에서 기념품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이곳은 몇개 집어가면 나름 괜찮은 선물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서

먹는것 외에는 쓸일이 없는 자금을 조금 과감하게 투자해도 될 듯 하다.

 

 

 

조카의 생후 첫 선물로는 자연미 풍기는 위의 나무조각을 선택했고

줄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 마음에 드는거 몇개 사 가면 언젠가 누구한테 줄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본 결과, 이 녀석들이 어쨌든 제일 귀엽고 앙증맞다. 이렇게 간단한 발상임에도 흉폭할 정도의 귀여움과 개성이 살아있다니.

 

여유가 아주 많았다면 종류별로 여러개를 사 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단순해도 어쨌든 예술품의 일종이니 저거 한개에 내 밥값은 된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올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일단 이것 중에서 하나, 그리고 이것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역시 훌륭한 조각품 하나를 구입.

 

아주머니께서 받침판 필요하시면 하나 가져가시라고, 동그랗고 넓적한 나무조각들을 여러개 보여주신다.

그냥 손바닥만한 나무줄기를 양파 썰듯이 잘라놓은 조각인데, 나무 공예품의 받침판으로는 딱이다.

이즈모의 지역특색이 살아나는 기념품은 아니지만, 이 부근이 예술로 유명한 곳이니까 이런 녀석들도 좋지 않을까.

이런 부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질 녀석들이 많아서, 왠지 지갑을 쥔 손이 두려워지는 느낌도 든다.

 

 

 

마츠에로 돌아가는 기차도 한시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괜히 시간낭비 하지 않으려면 돌아가는 기차 시간은 알아보고 가는게 좋다.

이런 말 하는 본인은 사실, 시간 남으면 앞에서 커피나 한잔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출발 5분전에 딱 맞춰서 도착.

 

일단 돌아가서 남는 시간을 좀 활용해 볼까 싶어서 전철에 올라탄다.

전철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고양이는 시마네현의 마스코트 시마네코.

왼쪽의 눈매 사나운 캐릭터는 '매의 발톱단'이라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요시다군.

예산이 있다고 말하기에도 어색할 정도의 초저예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인데

혼자서 감독, 연출, 성우, 작화 전부 다 도맡은 원작자 FROGMAN 의 고향이 이곳 시마네현이라서

전국적 컨텐츠가 극히 부족한 이곳에서는 꽤나 밀어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병맛넘치는 애니메이션을 시험삼아 한편. 참고로, 모든 목소리는 감독 혼자서 낸다.

 

 

 

 

 

전철 통로에는 시마네코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특출날 것 없는 마스코트지만, 이런 소소한 곳에 인상을 꾸준히 남기는 것이 정석이겠지.

돈이 많은 쪽은 그런 마스코트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예 애니메이션까지 제작하곤 하지만

일본에서 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은 시마네현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태로 노력하는게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한시간쯤 달려서 마츠에 역으로 돌아왔는데, 이쪽은 하늘 색이 영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란게 마츠에쪽에만 딱 들어맞는 녀석이었을까. 이즈모와는 그리 거리가 멀지도 않은데.

아무튼 어꺠에 살짝살짝 비가 흩뿌리는게 영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편의점보다 훨씬 저렴한 대형마트 이온(AEON)이 있어서 서둘러 그쪽으로 향한다.

이번 중국 시위대에게 박살난 그 이온 맞다.

 

도시락이나 음료수 전부 아껴봤자 300엔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이온에 가려는 건 그것때문만이 아니라

친구가 구해달라고 하는 게임소프트를 찾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워낙 시골이라서 그런거 없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센터에 물어보니 이곳 이온과, 다리건너 있는 전자제품 양판점 데오데오 두 군데가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일본만 가면 꼭 게임소프트 사달라고 하는데, 구할 수 있으면 구해주는게 어쩄든 나쁠거 없으니 발걸음을 옮겨본다.

날씨가 영 불안하긴 해도 이 정도면 맞아도 걸어가면서 말라버릴 정도의 가랑비라서 다행인데.

 

시골이라고는 해도 일단 시마네현 제1의 도시다보니, 이온 마트는 상당히 큰편이다. 건물 안애 영화관과 게임센터까지 있고.

전자제품쪽에서 찾아보니 친구가 찾는 게임은 신발매품이라서 이곳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 유감이로군.

허탕치고 그냥 돌아가기는 뭣하니, 지하 식품매장에서 먹을거 대충 사고 푸드코트에서 소고기덮밥 한그릇 먹는다.

여행이란게 중간중간 군것질 없이는 금새 배가 허해지는 녀석인데다, 일본은 음식 양이 적어서 그냥 삼시세끼로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

지금 소고기덮밥을 먹어도, 어차피 숙소에서 쉬다보니 입이 심심해질거라 생각하고 오징어다리와 맥주 한캔을 건져온다.

 

 

 

이온을 나오자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한다.

어제 비를 신나게 맞은 경험이 있어서 더 이상 맞고싶진 않은데, 일단 시간은 넉넉하니 그냥 기다려 보기로 한다.

일기예보에서 맑다가 갑자기 소나기라고 했으니, 기다리다보면 다시 맑아질 거라고 희망적인 예측을 하면서.

 

그래도 약 30분간 아주 신나게 내리는데, 기다리는게 지겹긴 해도 우산 사서 나가기는 싫다.

이쯤되면 거의 자존심 싸움으로, 어차피 버리고 가야 할 싸구려 비닐우산을 비싼 돈 주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다.

비싼것도 아니고 몇백 엔밖에 하지 않긴 한데, 한국에 비하면 비싸고, 그런데다 돈 쓰기는 이상할 정도로 싫다.

 

그래서 비 그칠때까지 사진이나 찍으면서 논다.

대도시 전자상가 근처에 밀집한 메이드까페란게 여기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고

그 메이드까페란게 다른 곳에서 본 샤방샤방한 것과는 달리,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은근히 들어가려는 그렇고 그런 업소같은 분위기라서 더욱 놀랐다.

저게 메이드까페라고 쓰여있지 않으면 캬바레로 보이지 메이드까페로 보이나?

보통 메이드까페 앞에서는 메이드복장을 한 아르바이트생들이 호객행위를 하곤 하는데

그러기는 커녕, 벽화에 그려진 메이드마저 검은색 실루엣으로 표현해놓다 보니 이건 뭐...

 

 

 

비가 오니 한 곳에서 주변을 계속 살펴보게 되고

고정된 화각에서 오래 살펴보다 보면 문득 담고 싶을만한 요소들이 슬그머니 떠오를 때가 있다.

사진 담으러 다닐때 조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중 하나지만, 이렇게 빗줄기에 의해 억지로라도 멈춰지지 않으면

사람이란게 자기 마음을 그렇게 간단히 컨트롤 할 수 없는 종족인가 보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다지 싫지 않은데

결국 또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아쉽다.

어제부터 계속 저녁에는 날씨가 영 좋지 않은데, 지금 상태라면 일몰을 볼 수 있을만큼 하늘이 맑아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

그냥 인연이 아닌가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까지 미친듯이 보고 싶은것도 아니니 기회가 되면 언젠가 볼 일이 있겠지.

 

자전거 여행중에는 아주 멋진 일출스팟이 있다고 누가 소개해 줘서, 큰맘먹고 거금 들여 그곳 앞의 호텔에 하룻밤 투숙한 적도 있었는데

특수한 여행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평범한 여행중에는, 똑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차이가 나는것 같다.

지금 자전거 여행중이었다면 신지코 호수의 일몰을 보지 못하고 통과하는것을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했겠지.

 

 

 

바람을 동반한 폭우라서 전신주가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비는 미친듯이 내리는데 정작 전신주는 한 쪽만 시커멓게 젖어있고, 반대편은 물기가 없이 깨끗한 것.

20분쯤 보고 있으니 서서히 반대편도 물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왠지 중세의 공성전을 생각나게 해서 재밌게 관전중이다.

 

저 반대편 전신주마저 완전히 젖어버리면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라서, 비닐 우산을 하나 구입해버릴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일듯 한데

묘하게도 30분쯤 내리던 비는, 아주 조금의 마른 공간을 남겨놓고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진격.

 

 

 

그런데 하늘이 불쌍하다고 한번 던져준 기회를 또 이렇게 놓치고 만다.

비가 그쳤다고 열심히 걸어가다가, 강 건너편에 있다는 양판점에 결국 한번 가보자고 다리를 건너버린 것.

 

이온에서 숙소로 바로 걸어가면 15분쯤, 이온에서 데오데오에 들렀다가 숙소로 가면 30분쯤 걸린다.

사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거기엔 있을까 싶어서 결국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넓직한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는 도중 결국 인내의 한계를 드러낸 빗줄기가 다시 무정히도 쏟아지기 시작한다.

방금 전과는 달리 다리 한가운데라서 숨을 곳도 없다. 결국 어제 마츠에 성에서와 같이 쫄딱 젖어버릴 수 밖에.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그 비를 맞아가며 다리 위의 풍경도 한장 남긴다. 그냥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었으니.

다리를 건너면 바로 시민회관 비슷한 건물이 있고, 거기에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니 거기까지만 힘내기로 한다.

그래도 5분 넘게 폭우를 맞았으니 어제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간신히 지붕있는 건물로 대피했지만 또다시 30분간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다.

방금 쫄딱 젖어가며 건너온 다리가 유독 길어보이는 느낌.

일기예보를 보면 분명 우산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카메라 장비때문에 우산은 워낙 거치적거릴 뿐이라

비가 오면 맞을 각오를 하고 나왔다. 하지만 진짜로 맞아보니 이건 이거대로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여기서 데오데오까지는 5분쯤. 데오데오에서 숙소까지는 15분쯤 걸리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이동하기에는 여러가지로 힘든 길이다. 꼭 이렇게 하루 한번씩은 비에 얻어맞는 여행도 참 오랜만.

이렇게까지 애를 써서 왔는데, 친구녀석의 게임소프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참 맥빠질듯 싶다.

 

결국 이 비도 30분 정도 지나니 물러가는데, 여기서부터는 오래된 상가거리가 주욱 이어지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역 주변의 오래된 상가거리는 천막으로 지붕을 줄지어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아서, 비가 와도 그 안을 잘 걸어가면 크게 문제가 없으니.

기대를 안고 데오데오로 들어갔지만, 이곳은 아예 게임기 코너가 존재하지 않았다. 크게 실망.

마츠에 시내의 관광지 한두군데는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두 군데나 걸어다니 찾아본 게임소프트는 결국 꽝이었다.

게임을 살 수만 있었으면 젖어버린 옷과 머리카락도, 둘러보길 포기한 관광지도 다 흘려보낼 수 있었는데, 완전히 헛수고한 느낌.

하긴 이런 시골에서 최신 게임 사려고 돌아다닌다는것 자체가 좀 웃기는 일이긴 했다.

친구도 없으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부탁을 받은 쪽에서 성의없이 찾아보기는 힘들고.

 

답답한 가슴은 비닐봉투 안에 든 캔맥주 한병이 해결해줄거라 믿고, 어둑어둑한 구 상가거리를 지나서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은 귀국행 페리를 타는 날이지만, 출발이 저녁 7시라서 아직 여기저기 둘러볼 여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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