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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11  2월 17일 홋카이도 - Skyfall 6

 

조식을 든든히 챙겨먹고 삿포로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간다.

삿포로까지는 4시간 정도 걸리지만 갈아타지 않아도 되니 걱정할 일은 없다.

 

단지 눈이 그쳤다고는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매서운 바람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있어서, 홋카이도 여행 중 처음으로 뼛속까지 추위를 느낄 수 있다

하늘의 눈이 아니라 땅에서 일어나는 눈은 훨씬 매서운 법.

산더미처럼 쌓인 눈이 칼바람 때문에 온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어서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한번 땅으로 내려왔다 다시 흐트러지는 눈은 어찌나 매서운지.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지만 바람 탓에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있다.

포근하게 보였던 눈이 칼바람에 굳어버린 것인지 지금 피부를 때리는 눈송이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섭다.

 

 

 

레일 너머가 신기루처럼 흐려지는 풍경은 조금 뒤에 이쪽으로 몰아칠 눈보라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이게 극지방에서 강화된다면 소위 말하는 블리자드가 되리라 생각.

 

도저히 이래서는 못버티겠다 싶어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폭설 때문에 기차가 25분 정도 연착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첫 연착.

평소라면 그냥 기다리면 되지만 개방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조금 귀찮아 진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올라오는 앞에서 오밀조밀 모여있다. 다들 밖에서 기다릴 수가 없으니까.

밀도가 너무 높아서 그냥 1층으로 내려가 개찰구를 나와버린다.

어차피 홋카이도 레일 패스는 따로 티켓을 기계에 집어넣거나 하지 않고 역무원에게 제시만 하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들락날락할 수 있으니까.

 

역내 매점에서 따뜻한 옥수수 스프 한 캔을 사들고 손을 녹이며 주변을 서성인다.

25분이란 시간이 참 애매해서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서 있으니 꽤나 지겹다.

 

역에서는 거의 2~3분에 한 번씩 연착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전광판에도 당연히 연착 정보를 표시해 놓았다.

10분쯤 뒤에 도착하는 열차는 내가 예약한 차가 아니라 그 전 시간에 도착하는 열차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4시간을 서서 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런 점은 주의를 요한다.

워낙 쉴세없이 연착 소식을 방송중이라 어지간하면 헷갈리지 않을거라 생각하지만 외국인이라면 좀 난감한 상황일지도.

 

다행히도 25분 뒤에 온 열차는 따뜻해서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터라 창가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한다.

 

 

 

지루해지기 쉬운 기차 여행이지만 홋카이도만큼은 그럴 틈이 없다.

원채 조용한 객실 안이지만 참다 참다 결국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장면이 수도 없이 펼쳐진다.

 

조심해서 셔터를 누르고 이제 괜찮겠지 싶으면 금새 더욱 황홀한 광경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아예 긴장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이런 이동중 사진은 항상 보던 것보다 조금 아쉬운 장면만을 간신히 담을 수 있다.

그렇다고 4시간 넘게 계속 창밖을 뚫어져라 주시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마음을 비우고 중간중간 무덤덤하게 셔터를 누르기로 한다.

 

 

 

홋카이도의 날씨는 수직적이기도 한 동시에 수평적이기도 하다.

한 곳에 머무를 때도 쨍한 하늘에서 폭설로 휙휙 바뀌기도 하고

기차로 빠르게 이동중일 때 역시 푸르던 하늘 아래를 넘어가면 갑자기 시야를 막아버리는 눈보라가 떡하니 나타나기도 한다.

 

울창했던 푸른 생명력들의 역동성이 전부 바람과 눈으로 스며들어 간 건지, 살아있는 건 나무와 풀숲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보라 속을 부담없이 찍을 수 있게 해 주는 열차의 든든함이 고맙기도 하지만 역시 속도가 속도이다 보니 감도를 좀 높여야 한다.

아예 감도를 낮추고 자연스러운 패닝샷 기분을 내는 것도 괜찮지만 창가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의 감정을 좀 더 고스란히 담고 싶다는 기분.

 

 

 

대도시는 그렇다 치고 중간중간 위치하는 작은 마을은 어떻게 겨울을 넘기는지 궁금하다.

홋카이도 자동차들은 기본적으로 출고시부터 스노우 타이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고

얼음보다는 눈이 많은 곳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잘만 달린다. 본인처럼 눈이 적은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은 조마조마한 기분.

 

여름의 초목이 지겨워 질 때쯤이면 이렇게 세상을 뒤덮어버리는 눈밭이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니 역시 기후변화가 다양한 지역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푸르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진행 방향의 심상치 않은 하늘 쪽은 열차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기다리고 있다.

지면의 모양이나 색깔마저도 단조롭게 변해버리는 겨울이지만 하늘만큼은 변화무쌍해서 부족한 역동성을 채워준다.

 

눈을 잠깐 감고 졸다가 깨어나 보면 대체 여기가 무슨 세상인지 모를 정도로 변해버리는 점이 매우 인상적.

눈길 자동차 운전에 어느 정도 숙련이 된다면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인상적인 장면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부터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기만을 반복하던 무아지경의 시간이라

글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과 함께 하니 예술 전시회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난 뒤 갑자기 평온해 보이는 거대한 설원과 그 위를 거니는 젖소들이 나타난다.

땅이 넓으니 목장도 여유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방목장인지 모르겠다.

 

여름에 이런 곳을 지나갈 때는 확실히 울타리가 보였지만 지금은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울타리 너머에서 자전거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으면 소들이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까지 다가오기도 했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나자 온화한 풍경이 펼쳐지는 순간은 마치 소설 '설국'의 첫 장면을 연상케 한다.

정말로 도착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서, 여행의 끝을 조용히 축하해 주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오랜만에 삿포로로 돌아오니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분주한 도시 풍경은 이제껏 즐겼던 차분함과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현실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는 반가움도 없지 않다.

 

삿포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뜨겁게 달궜던 눈축제장의 스키 점프대는 빠르게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축제란 건 준비하는 기간이나 열리는 도중이나 열기가 넘치지만 이렇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연해지는 강도도 그만큼 크다.

부자가 아니라 매년 겨울 이곳을 찾아오는 사치를 누릴수는 없으니 이제 내려놓을 감정은 내려놓고 돌아가라는 느낌이 든다.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삿포로에서 해야 할 몇 안남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저녁에 맥주 공원에서 징기스칸을 즐기는 것은 제외하고라도 겨울 삿포로의 별미인 수프 카레를 먹지 않고 떠나기는 아쉽다.

 

오비히로뿐 아니라 오늘은 홋카이도 전역의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는지 쓰러진 자전거가 한층 더 무섭게 느껴진다.

대체 쓰러진 자전거가 저만큼 파묻힐 정도라면 눈이 얼마나 왔다는 것인지. 마치 물 속에 잠긴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이곳의 기후에 대해 감탄하게 만든다.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 만큼 해체 작업도 보통 일이 아니다. 아마 준비 기간과 마무리 기간을 합치면 축제 기간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원래 축제란 그런 것이지만 이런 아련한 모습 또한 다음 축제를 위한 안식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삿포로는 여전히 흐렸다가 맑았다가 눈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날씨를 자랑하고 있다.

내일 귀국이니 이제는 억눌러 놓았던 구매 욕구를 풀어재끼는 일만 남았다.

서점을 돌아보며 읽을 만한 책을 10만원 어치 정도 쓸어담는다. 가능하면 한국에 발매될 일이 적을 듯해 보이는 책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나름 긴 여행이다 보니 자금을 좀 넉넉하게 가지고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은 자금을 전부 써버리기엔 아까워서 꼼꼼하게 검토를 하며 구매한다.

이 정도면 내일 공항에서 선물 몇 개 사들고 가도 2만엔 이상 남아있을 테니, 다음 여행의 자금 보충으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하다.

 

 

 

오비히로에 맞먹는 추위를 뚫고 이리저리 해맨 끝에 건물 지하 구석에 아담하게 숨어있는 수프 카레점을 찾아낸다.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다 카운터 석에 앉아도 부담없어 보이는 친근한 아가씨가 맞이해 줘서 긴장이 풀린다.

 

수프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탄생한 변종으로, 워낙 추운 홋카이도의 겨울을 좀 더 후끈하게 즐기기 위해 고안된 카레.

점성이 없는 찌개같은 카레로 처음 볼 때는 위화감이 들 수도 있지만 짜릿한 카레의 자극은 더욱 강렬해서 매력적인 녀석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오히려 찌개 먹는 느낌으로 밥과 함께 먹으면 매우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얼어버린 콧속에 확 퍼지는 뜨끈뜨끈한 카레 수프의 얼큰함은 묘하게 한국 정서와 어울린다. 겨울의 홋카이도라면 꼭 먹어볼 만한 녀석.

 

지역 별미라 가격이 좀 세긴 해도 불만없이 즐길만한 음식이다. 맛은 기본적으로 보장이 되니 부담도 없고.

식사와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생각보다 졸리고 피곤하다. 어제까지의 강행군도 그렇고 장시간 기차 여행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90분 정도 쉴 시간이 있는데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니 슬금슬금 고개가 밑으로 내려간다.

날씨가 춥다 보니 들어왔다 나가는게 한층 번거롭지만 홋카이도의 마지막 밤에 징기스칸을 먹지 않는다는 건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해가 지고 한층 추워진 공기를 마시며 눈덮힌 길을 조심조심 걸어 삿포로 역으로 향한다.

역에서 맥주공원까지 저렴하게 왕복중인 버스가 있어서 찾아가기도 편하다.

오비히로만큼이나 눈이 쏟아지고 있어서 여행 막바지의 아쉬움과 애상이 배가 되는 느낌이지만 고기와 맥주로 즐거운 마무리를 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