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제작비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500만 달러 초저예산 영화이자
2009년 시체스 영화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
보통 아카데미가 보수적이라는 관념의 대명사로 표현되듯 중소 규모의 인지도있는 영화제에서 이름을 날리는 작품들은
대부분 좀 철학적이고 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팽배한 듯 한데, 전자는 그럭저럭 들어맞는다 쳐도 후자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이번 42회 시체스 최우수상을 거머쥔 이 작품은 내가 그토록 목말라하던 우주 프롤레타리아(?) 영화라서
부푼 마음을 안고 극장에 갔는데, 하느님이 보우하사 독립영화만세~ 관객이 단 한명도 없었다.
새벽 1시 반쯤 마지막 상영이라, 올라가는데 프런트 직원이 불러세우더라.
'손님 어디 가십니까?' -> '영화보러 가죠' -> '1시 반 마지막 영화 말씀하시나요?' -> '네'
도대체 그 건물 전체에서 그 시간에 문 연곳은 극장밖에 없는데도 그걸 꼬박꼬박 물어보는 직원의 의도가 심히 의아했지만
극장 전체를 통째로 전세냈다는 즐거움 덕에 그냥 넘어가주기로 했다.
영화 끝나고 나갈때도 이미 극장 복도엔 직원외엔 단 한명도 없는 정적 그 자체였으니 좋은 경험했다.
이 작품을 SF라고 부르기 껄끄러운 이유는, SF의 사실적 고증에는 완전히 눈감은 듯한 설정을 보여주는데다
소재만 근미래를 채용했을 뿐이지 실상은 40년전 광산업에 종사하던 Blue Collar들의 자화상과 전혀 다른 점이 없기 때문.
거기다가 충분히 관객들의 다양하고 즐거운 고민거리를 충족시켜주는,
심리적 고뇌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소소한 장치들 역시 요소요소에 적절히 삽입되어 있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저예산 영화치고는 때깔도 상당히 좋은 느낌이다.
스포일러때문에 직접 언급하진 않겠지만
이 작품에서의 샘 락웰은 감독이 원하는, 작품에 필요한 딱 그만큼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사실상의 원맨쇼나 다름없는 이 작품에 굉장한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샘 락웰의 어색함과 두려움, 진실에 대한 갈망이 담긴 눈동자가 마치 물리적인 호소력에 의해
가슴에 압박을 느낄 정도의 상태를 체험하게 되는 사실에 그저 관람 내내 즐겁고 즐거울 뿐이다.
목소리와 화상 통신에까지 나오는 모든 인물을 다 합해도 총 등장인원 10명이 되지 않는
이 극단적인 단절의 작품은, 그 10명에게서 60억 인류의 모든 자화상을 다 그려내려고 노력했고
결과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밖에 칭찬할 말이 없다.
영화가 끝나도 계속 머리싸매는 고민을 즐길 수 있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프레스티지(The Prestige, 2006)의 설정처럼
이 작품도 샘 록웰의 (어느 쪽이든) 심리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개인적인 납득, 혹은 부정적인 견해를 파고드는데
영화 러닝 타임보다 더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프레스티지의 장면을 생각해 보자.
순간이동 장치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나'라는 존재는 이 우주에 단 하나 뿐.
하지만 이동이 끝나는 순간부터 완벽히 하나였던 자아는 합쳐질 수 없는 두 개로 나눠지고
분명 1초 전까지 나였던 '상대방'은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는 타인이 된다.
그리고 순간이동 장치의 한 쪽에밖에 놓여있지 않은 한 자루의 총.
매번 장치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자아는 과연 총을 맞고 죽어가는 쪽이 될 것인가 총을 쏘아 방금 전까지 자신이었던 타인을 죽이는 쪽이 될 것인가'
라는 두려움에 떠는 그 느낌은 아무리 거머쥐려 해도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같은 애절함과 비슷한 감정이다.
이 'Moon'이란 작품은 이런 정체성의 정의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10명도 안되는 등장인물을 통해.
타인의 정체성 따윈 안중에도 없이 이익을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 'SARANG'스러운 인물.
조작되고 통제된 감옥속에서, 자신이 감옥에 갖혀있다는 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노예 계급.
진실을 알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생명도 버릴 수 있는, 좀 더 인간다운 인물.
그리고 인간 본성이 다다라야 할 선의 정점인, 냉정한 공정함을 갖춘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 '거티'
이 모든 사회 구조적인 계층과 인물상을 이렇게까지 우겨넣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너무나 진부한 소재,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어 온 불평등과 윤리성에 대한 질문, 최소한의 안전 장치조차 밥말아먹은 SF 요소의 오류투성이.
찰랑거리는 액체수소만큼이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공식들을 다 머무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초저예산 영화는 그저 조용할 뿐이다.
헬륨 3를 채취하는 달표면처럼 조용할 뿐이다.
하지만 헬륨 3를 채취하는 거대한 굴착 기계의 괴물같은 역동성 역시 갖고 있다.
매우 힘있고 단단하며, 감독의 의지를 과장없이 드러내는 힘을 갖고 있다.
이런 무언의 파괴력을 가진 작품이야말로
저예산, 혹은 독립영화들이 가진 최고의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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