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주걸륜'에 해당하는 글들

  1. 2010.04.08  황후화 (Curse Of The Golden Flower, 2006) 18


장예모 감독만큼 필모그라피에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한 감독이 또 있을까.

비록 그의 작품 전반에 깔려있는 시각적 미장센의 극단적인 추구라는 요소는 데뷔 이래로 변한 게 없지만
훗날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듯한 느낌을 충분히 전해주었던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梁, 1988)에 이어
개인적으로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홍등(大紅燈籠高高掛. 1992)을 볼 당시만 해도 그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듯 했다.

기술과 노하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영상미로 시선을 사로잡던 서극 감독이
거대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시간에 그 매력을 습득해버린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버린 반면

색의 대비를 통해 전달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장예모 감독의 미적 감각은
과연 누가 이 감각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감상한 그의 작품 영웅(英雄, 2002)에서
그는 마치 공산당에게 끌려가 페이스오프를 당한 가짜 감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변화를 보여줬다.
분명 영웅이라는 작품에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아련하고 절제된 영상미는 빛을 잃지 않았지만
황당할 정도의 극단적 주제의식이 작품 전체에 듬뿍 발려있는 모습은
감독의 전작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중국 정부에서 엄청난 지원금을 받은 작품이고, 그네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작품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예모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는 추악한 사생아로 이름 남겨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되었는데
그 다음 작품 연인(十面埋伏, 2004)를 본 후로는 반쯤 기대를 접은게 사실이다.

그 후에 야연(夜宴, 2006)을 만든 풍소강 감독에게 기대감을 넘기는게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으니.

20년 전의 장예모에게서 느꼈던 기대감은 그렇게 무참히 무너졌고
이제 이 감독에게서는 눈을 돌리는게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황후화라는 작품 역시, 중국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스펙타클한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 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긴 했다. 그 제작비는 다 어디서 나온 건가.
이 작품이 개봉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장예모 감독은 중국의 영웅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의 영웅이라고 하는게 맞겠다.

하지만 무심결에 보게 된 이 작품은 또 한번 나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를 안겨주게 되었다.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한 감독이 아닐까 하는.

역시 예상대로 이번 작품에서는 물주인 공산당 측에서 엄청난 비난여론이 일어나고
금새 장예모 감독은 중국을 욕먹이는 저질 폭력씬이나 찍어대는 삼류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꽤나 화려한 수익을 올리긴 했지만 장예모 감독 영화중에서는 가장 욕도 많이 먹었고.

수천 명에 가까운 엑스트라와 역사상 어느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장센도
과격하고 엉성하기 그지없는 작품의 스토리텔링에 묻혀버린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작품이 장예모 감독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아도 될까 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니
이는 그의 전 작품들에게서 실망했던 점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일정 수준까지는 예전의 작품 성향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인 '滿城盡帶黃金甲'은 한국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중국 역사중 '황소(黃巢)의 난'의 주인공
황소가 쓴 '국화'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인데, 독특하게도 실제 작품의 내용은 중국의 희극인 뇌우(雷雨)의 리메이크다.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시대 배경은 황소의 시구가 쓰여졌던 때와 비슷하고, 내용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뇌우와 거의 동일하니
이 정도로 제목과 내용이 묘하게 어울리는 작품도 별로 없을 듯.
더군다나 '滿城盡帶黃金甲'의 뜻은 '온 성안 모두가 황금갑옷을 두르리'라고 하니 그야말로 직설적인 제목이다.

항간의 평가처럼 '스펙타클 부부싸움'이 이야기의 전부인 이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장예모 감독의 전작들처럼
어두운 욕심과 광기에 사로잡혀 처절하게 무너지는 인간 군상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그려내고 있는데
특히 그 광기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고 말하는 듯한
허무할 정도의 염세주의가 살짝 서려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보고 나면 기분이 참 더러워지기도 하고.

거기에 인간 세상이 아닐 정도로 화려한 황궁의 모습이 겹쳐지니
웅장한 금빛 황궁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지독한 감옥으로 변신한다.
손가락 하나로 수천 수만명의 목숨을 유린하는 절대 권력의 황실에서
세상의 온갖 추악함이란 추악함은 다 모아놓은 듯한 암투를 벌인다는 설정이
아주 불쾌하게 다가올 계층은 과연 누구일까. 그거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번 작품엔 의외로 코믹한 요소도 꽤나 실려있는데
피비린내가 화면 밖으로까지 풍길 정도의 살육이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착착 청소되는
황궁 내부의 모습과, 기계로 착각할 만큼 일사분란한 청소부(?)들의 모습에서
현대 중국 지배계층의 일그러진 모습이 투영되는 듯 해서 계속 웃음이 멈추질 않았더라.

공산당 측에서 그렇게 갈갈이 열받아 날뛰는 이유는
퍼부어준 돈만큼 지배계급을 우월한 성군의 존재로 표현해주지 않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카리스마 덩어리 주윤발이 역을 맡은 황제는 그야말로 쪼잔함과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겉으로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는 압도적인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끝까지 냉철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이걸 이해할 정도의 머리를 가진 공산당 측에서는 얼마나 열이 받치겠나.

장예모와 오랫동안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던 공리 역시 주윤발과 함께
이 빈약한 작품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 이 둘의 연기가 너무 굉장한 수준이라
나머지 인물들을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종의 부작용까지 만들고 만 듯한 느낌.

제작비에 비해 정말 소박한 영화이고, 도저히 메이저 시장에서 받아먹일만한 묘사가 아닌데도
아마 나처럼 예전의 장예모를 추억하며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된 사람들이 적진 않을 것 같다.
전개도 상당히 엉성하고, 인물들간의 비중 분담에 실패해서 작품 전체의 균형성을 봤을 때
결코 수작의 범위에 들어간다고는 하기 힘든 작품이지만
중국 공산당이 갈갈이 날뛰는 반대급부만큼 여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작품이다.

물주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장예모 감독의 다음 작품이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Play Station
주걸륜의 엔딩곡 '국화대(菊花台)'는 참으로 심금을 울린다.
국내엔 CD가 발매되지 않은 것 같아서 중국 사이트에 넘쳐나는 음악을 다운받았는데
만약 정식발매가 되었다면 바로 구입해야지.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린 존 (Green Zone, 2010)  (2) 2010.04.20
크레이지 (The Crazies, 2010)  (20) 2010.04.13
더 문 (Moon, 2009)  (16) 2010.03.24
디스트릭트 9 (District 9, 2009)  (2) 2009.11.07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2008)  (8) 2009.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