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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런스 멜릭'에 해당하는 글들

  1. 2011.11.02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2011) 24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1978) 이후로 20여년간 단 한편의 영화도 제작하지 않은 감독.
하지만 그 침묵의 20여년간 그를 위대한 거장으로 칭송하며 감탄을 끊이지 않게 만들었던  감독.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98) 촬영당시 내로라하는 수십명의 배우들이 개런티따윈 필요없으니 출연만 시켜달라며 경의를 표한 감독.

40여년 가까운 그의 영화 인생에 남은 필모그라피라곤 단 5작품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할 이유도 없다.
이제껏 그가 이루어낸 작품들의 주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백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탐구와 애정만이 그가 영화에서 추구하는 본질이다.
하버드와 옥스포드 철학과를 수료한 후, MIT 철학교수로 재직했던 그의 영화는
영화라는 복합매체를 통해, 난해한 언어와 사고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인간 본질의 의미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다.

인공광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그의 작품엔 그 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의 사실성이 녹아 있다.
영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별다른 설명 없이 영상만으로 표현해 준다.
영상시인이라는 별명이 왜 이 감독에게 어울리는지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으니 단 한편이라도 그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그리고 이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작품은 시각적 자극을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수백, 수천의 블록버스터들을 단숨에 압도하는 힘을 가졌다.
영화매체의 장점인 시청각적 설득력을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 장점을 의미 전달을 위한 소재 이상으로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은 점은 경탄할 만하다.
대형 화면과 훌륭한 음향시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이다.
트랜스포머같은 작품보다, 반지의 제왕같은 작품보다 더욱 더 필요하다.
자극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 작품의 중심을 이해하고 주제에 동감하기 위한 도구로서 말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지나가는사람 붙잡고라도 말해주고 싶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1968) 이후로 이런 시각적 충격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영화의 어느 한 요소에게 편중시키지 않는다.
배우의 연기가, 따스한 영상이, 귀를 울리는 음악이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관객을 상영시간동안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이 영화에 푹 파고들게 만든다.

문화적 충격에 가까운 이 탄탄함은,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감독의 의도와 철학을 집어넣어주는 패스트푸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도대체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수도 있을 것이다.
멜릭 감독은 친절하고 차분함을 잃지 않으며 긴 시간 관객에게 자신의 철학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행위에는 그만한 집중과 사고가 뒤따른다.
어떤 매체도 마찬가지지만 시간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이 집중과 사고를 필요로 하는 작품은 사라져 가는 추세여서
타협이 없는 멜릭 감독의 작품세계는 아마 점점 대중들에게서 멀어져 갈 지도 모른다.

영화 시작후 5분, 단 두 마디의 대사와 조용한 컷 하나만으로 눈물을 참기 힘들 정도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미 이 감독의 작품들에서 배우의 연기와 컷의 활용 등을 고찰해 볼 필요는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조그마하고 섬세한, 세상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이 풀어져 나간다.
앞서 달리며 따라오길 원하지도 않고, 너무 느릿해서 재촉하고픈 마음조차 들지 않는
현실의 우리들과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세상을 살아온 그들의 이야기는 진정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테런스 멜릭이라는 영화감독의 영화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의 이야기는 조금씩 진부해져 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런스 멜릭이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상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