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눈축제 마지막날이지만 사실 눈축제 구경은 어제로 끝이 났다.

오늘은 Y양 일행과 오타루를 꼬박 하루 즐기기로 한 날. 작은 마을이지만 관광지로는 삿포로만큼이나 유명한 곳이다.

 

Y양 일행은 오늘까지가 휴가였기 때문에 오타루 구경 후 바로 키타미까지 돌아가야 한다.

버스로 5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서 여기까지 짧은 휴가를 즐기러 온 그들에게 경배를.

 

새벽에 일어나 적당히 조식 챙겨먹고 9시 반쯤 삿포로 역으로 향하는데, 오늘 날씨도 상당히 심상찮다.

어제 스키 점프때 쏟아지던 눈이 아직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 중이다.

역 주변을 비롯한 삿포로 주요 도로와 인도에는 열선이 깔려 있어 눈을 잘 치워놨지만 이렇게 꾸준히 내리는 눈에는 속수무책.

 

 

 

겨울 삿포로는 새벽만 되면 탱크같은 제설차들이 밤새도록 제설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열선이 깔려 있는 곳은 눈이 쌓여도 딱딱하게 얼어붙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가 미끄러지지 않고 달리는 편인데

아무래도 이런 계단에까지 열선을 깔 수는 없었는지, 행복해 보이는 관광객들 앞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다.

 

사람의 끈기와 부지런함이 이루어내는 의지의 승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사실 이 계단 왼쪽의 뒤덮힌 눈더미도 원래는 계단이다.

 

 

 

Y양을 기다리는 도중 눈이 점점 거세게 내리더니 마침내 하늘을 뒤덮어버릴 만큼 무서운 모습을 보인다.

바람은 또 그다지 심하지 않아서 고운 눈발이 하늘하늘 내리는 모습임에도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섬뜩해진다.

 

물론 눈을 거의 보지 못하는 지역에 사는 본인이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입가에는 피식피식 미소가 흐르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내린다면 오타루 관광에 큰 차질이 생기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 보는것이 참 흥미롭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것은 여행의 본질 중 하나니까.

 

 

 

오타루행 열차 시간표에 맞춰서 넉넉하게 만날 시간을 정해놨기 때문에 바쁘진 않다.

이렇게까지 쏟아붓는 눈 속에서도 열선이 깔린 인도는 멀쩡한 모습이 매우 인상깊다.

 

서울에서도 매년 헛돈 쏟아부어가면서 블럭을 갈아치우는 습관 대신 이 열선을 깔아놓았다면 참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하지만 애초에 한국의 도로는 기초공사가 매우 부실하고 질 낮은 아스팔트를 사용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울퉁불퉁해지는 터라

열선따위 깔아봤자 얼마 가지 못할거라고 나름의 가설을 세워 본다.

 

 

 

오타루행 기차를 기다리던 도중 옛날 증기기관차 모습을 한 클래식한 열차가 보여서 의아했는데

코마츠군이 눈을 반짝이며 설명해 준다. 오사카에서 삿포로까지 1500km 를 달리는 일본 최장거리 열차 '트와일라잇 익스프레스' 라는 유명한 녀석.

가격이 상당히 비싸고 시간도 하루 꼬박 걸리지만 철도 매니아들의 로망과도 같은 녀석이라고 한다.

 

올해 25년째 달리고 있는 그 열차는 아쉽게도 2015년 봄에 운행을 종료하게 되는데, 평소 열차 여행엔 별로 관심이 없던 본인도

종료 전에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오타루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도 창 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시야를 방해할만큼 흩날리고 있다.

하지만 겨울 홋카이도라면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라 생각보다 걱정스럽지도 않다. 걱정스러운 건 본인보다 Y양의 체력이 괜찮을까 하는 점.

Y양 일행은 휴가 마지막날이라 밤새 버스를 타고 키타미로 돌아가야 하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본인 입장에서는 아직 파릇파릇한 사람들이라 나보다는 건강하리라 생각하지만.

 

 

 

코마츠군은 이쪽 토박이기도 하고, 홋카이도 중에서 오타루를 가장 좋아하며 여건이 되면 오타루에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라

삿포로에서 오타루로 향하는 열차에 대해서도 상당히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어느 지점에 도착하니 지금이 바다가 보이는 장소라며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덕분에 본인도 한 장 건질 수 있었다.

 

새하얀 지면과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짙푸른 바다의 조합은 여행의 즐거움을 북돋워 주는 조미료 같은 풍경.

 

 

 

오타루에 도착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아직 살짝 눈발은 날리고 있지만 하늘은 이미 푸르다.

삿포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을지 몰라도 도착할 때가 되어서 맑아지는 오타루의 하늘은, 오늘 여행에 행운이 따르고 있는건가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삿포로 눈축제 기간엔 주변 도시들도 대부분 축제를 열기 때문에 어디나 관광객이 넘친다.

인파 속에서 맑아진 하늘을 담으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코마츠군이 오타루 역내 명물이라 설명해 준호롱병들의 사진을 남겨본다.

오타루는 여러가지 공예품으로도 유명한 곳이라 이렇게 유리를 이용한 호롱병을 역에 전시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듯 하다.

 

Y양 일행은 기차로 삿포로에 돌아가서 키타미행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일찍 돌아가야 한다.

본인은 오타루의 밤거리도 산책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마 이곳에서 작별을 나누어야 할 듯 한데

저녁에 보는 호롱병들의 모습은 조금 더 아름다울거라 예상해 본다.

 

 

 

역 밖으로 나오자 그 맑았던 하늘이 또다시 눈으로 뒤덮힌다. 참 변화도 무쌍한 홋카이도의 겨울 하늘.

애초에 자전거 여행 당시 눈이나 비는 신물나도록 맞아봤기도 하고, 머리를 감싸주는 든든한 비니 덕분에 별 관계는 없었지만.

 

오타루 역은 사진 찍으면서도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곳 역시 서너 번은 와 봤기 때문에 그런가 싶었지만

알고보니 이 역은 도쿄의 우에노 역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이라고 한다. 우에노 역은 수십 번 정도 가 봤기 때문에 그렇게 친숙했나 보다.

 

 

 

삿포로 이상으로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오타루지만 사실 관광객이 둘러볼 지역은 꽤나 좁은 곳이다.

걸어서 모든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에 산책에 안성마춤인 곳이고, 보통 여행의 본거지가 되는 역 앞 호텔들보다

조금만 내려가면 위치한 운하 바로 앞의 호텔들이 훨씬 더 붐비고 비싼 편.

 

역 앞은 그다지 볼거리가 없는 평범한 마을 풍경이지만 쏟아지는 눈 속에서는 일행의 색깔이 더욱 또렷해지기 때문에 사진 찍는 재미도 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는 일행 덕분에 이곳저곳 사진 찍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좋다.

물론 이 눈속에서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좀 미안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걸어가다가 키만큼 쌓여있는 눈더미를 보고 신기해서 한 장 남겨본다. 홋카이도 토박이들에게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지도.

 

 


아무래도 눈을 계속 맞아가며 걷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지붕이 설치된 상가거리로 빠져나온다.

 

오타루를 좋아하는 코마츠군은 오늘 오후에 무료 골목투어가 있다는 것도 조사해 와서, 거기에 참가하기로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전까지는 자유시간이나 마찬가지니 경로를 어디로 정해도 문제없다는 뜻.

코마츠군이나 나나 오타루의 관광 코스는 빠삭한 편이니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본격적인 관광지는 아니지만 상가 거리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찻집 모습을 보고 카메라를 올려 든다.

당일치기 관광객이 가지기 힘든 시간과 마음의 여유라는 약점 때문에 벌써부터 들어가서 차 마실 마음은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는 이런 모습의 눈덩이들이 많이 솟아나 있어서 뭔가 싶었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저 색색의 얼음덩이 속에는 타오를 준비를 하는 양초들이 놓여있다.

저녁무렵부터 오타루 전체가 아련한 촛불로 잔잔히 물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개척 전까지는 일본 문화와 별 관계가 없었던 홋카이도지만

어쨌든 본토 사람들이 이주해서 만든 도시다 보니 축제 기간을 맞아 마을 곳곳에 이런 키리에 카루타(切り絵カルタ) 간판이 설치되어 있다.

키리에는 말 그대로 종이를 찢어서 붙여만든 그림이고, 카루타는 그림과 시가 적혀있는 전통 카드를 의미한다.

 

전통 카루타에 홋카이도의 특징을 녹여 만든 그림을 접목시킨 센스는 좋은 점수를 줄 만하다.

자국 관광객을 우선시 하는 것을 좋게 보는 편이라 위화감이 없지만, 워낙 외국 관광객이 많이 오는 이곳에 이런 완전 일본식 간판이 놓여있는 건 어떨런지.

 

 

 

세계 최악의 주택이라고 소문난 일본의 빡빡한 거주지지만 본인은 이런 골목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든다.

어릴 적엔 아직 집 주변에 이런 골목이 많이 남아있어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상상력을 자극해 주곤 했다.

사진 찍는 모습을 본 코마츠군이 본인도 이런 모습 좋아한다고 말을 건다. 오후에 신청할 골목길 투어도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오타루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획이라고.

 

 

 

홋카이도 자체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강력한 자연의 힘 때문인지 낡아보이는 건물이 참 많다.

창문이 눈더미로 덮여버린 모습을 보니 집 안에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수십 년을 이런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신기하고.

오타루는 도시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 드는 곳인데, 내 경우엔 이런 자연환경 자체가 사는 재미를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축제는 역시 마을 구성원들이 직접 준비해야 사람의 흔적이 느껴져서 정겨운 법.

관광객이 구입해 갈런지는 조금 의심스러운 신발집 앞에 떡하니 전시해 놓은 거대 장화가 인상적이다.

눈이 많은 지역에서라면 굉장히 든든해 보이는 장화인데, 한국에서 내가 저걸 사용할 일은 없으니.

 

신발집의 아이콘과도 같은 녀석이겠지만 제작하는데 어느 정도의 재료와 자금이 소요되었을지 궁금할 정도다.

 

 

 

길지 않은 상점가를 빠져나오니 왠걸 하늘은 그 쏟아붓던 눈이 다 떨어진건지 새파란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소문으로 익히 알고는 있어도 역시 홋카이도의 겨울 하늘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하늘이 맑아질수록 바닥에 쌓인 눈이 일으키는 반사가 강렬해서 눈을 크게 뜨기가 힘들다.

눈이 많은 곳에서는 고글이나 선글라스가 필수인 것을 알고는 있는데, 사진 찍는데 많이 불편하기 때문에 좀처럼 착용하지 않는 편이다.

이 정도면 아직까지 견딜 순 있을 수준이지만, 아직 일주일이나 남은 여정상 눈을 혹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방속엔 나침반님에게 받은 고글이 항상 준비중이라 여차할 땐 폼 좀 잡아볼까 싶다.

 

 

 

어지간히 눈구경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라도 겨울 홋카이도의 적설량은 나름 볼만한 거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데

일년에 하루 이틀 정도밖에 눈구경 하지 못하는 지방 출신인 본인으로서는, 드디어 맑게 갠 하늘아래 빛나는 눈더미들의 모습이 마냥 신기할 뿐이다.

 

곧게 뻗은 길엔 좀 전 상가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한 눈기둥들 위에 얼음으로 만들어 진 스노우 캔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 모습만 봐도 저녁 이후 이곳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 간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눈더미 위를 걷는 것도 신기하고, 내 키만큼 쌓아올려진 눈더미도 보물처럼 보인다.

상가 건물을 빠져나온 시점에서 다시 중앙 거리쪽으로 눈길을 걸어가는데, 지금 이 길은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였던 테미야선의 일부 구간이다.

Y양은 여름에 이 곳을 와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이 철로 위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초에 철로가 전혀 보이지 않을만큼 눈이 쌓인 상황 자체를 본 적이 없으니 Y양은 아마 상상력을 펼쳐서 철로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여름에 몇 번이고 와 봤던 본인은 알고 있는만큼 신선함도 줄어든다고 할까, 분명 새로운 모습이긴 한데 머리에 입력된 지식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상태로 와서 놓치는 것들 역시 있는 만큼 여행은 이러나 저러나 많이 가면 갈수록 좋은 것이라는 찬양론에 손을 들어준다.

 

 

 

축제 준비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만들어 놓은 스노우 캔들 위에 또다시 눈이 내리다 보니

이건 뭐 어디까지가 사람이 만든 모형이고 어디까지가 눈이 쌓인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창고처럼 보이는 저 건물은 겨울 지날 때까지 그대로 봉인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고.

눈이 많이 왔다는 점 하나만으로 주변이 모두 신기하게 보이는 홋카이도의 겨울은 참 신기할 따름이다.

반대로 강원도 대설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겨울 홋카이도에 찾아오지는 않을 듯.

 

 

 

여름에 찾아왔을 땐 이런 터널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시 축제 기간을 맞아 과거의 향수를 되살려 놓았다.

터널 안이라 그런지 철로도 살짝은 보인다. Y양은 드디어 여기가 철로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체감하신 듯 하다.

 

눈으로 만든 터널이라 혹시 이 쨍쨍한 날씨에 무너지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막상 만져보니 망치로 두들겨도 꼼짝도 않을 얼음덩어리.

폐선된지 30년이 되는 철로지만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있다는 점이 대도시 서식자로서는 부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