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알람을 설정해 놓고 자긴 하는데, 소리를 듣고 눈을 떠도 자기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새벽녘이 다가오기 전의 어슴프레함 때문에

혹시 시간을 잘못 설정해 놓고 잔 건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상하다 싶어 커튼을 걷어보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아침해는 밝았지만 무식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같은 눈발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다.

자동차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밖은 더욱 조용하다. 도심지에 위치한 비지니스 호텔에서 아침이 이렇게 조용한 것도 참 신선한 경험이다.

 

조식 먹으러 가기도 전에 카메라부터 주섬주섬 꺼내들어 촛점이 맞지 않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다.

이번 여행은 적어도 날씨라는 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로또를 맞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침이라 환호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지 않지만 입가엔 미소가 흐른다.

 

 

 

오늘의 목적지는 눈이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좋기 때문에, 더 할 나위 없는 최상의 조건이다.

삿포로에서도, 아사히카와에서도, 시레토코에서도 눈은 많이 내렸지만 오늘 내리는 눈은 비교를 불허한다.

일반적인 관광이었다면 오늘 과연 이동할 수 있을까 하고 가슴이 철렁했을 법도 하다.

 

눈이 이만큼 많이 온다면 오히려 얼어붙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들은 별 무리없이 운전이 가능하다.

문제는 바퀴를 덮을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역시 사고 위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단체 여행객으로서는 치명적일지도.

 

 

 

이곳 토카치 지역은 원래 눈 많이 오고 춥기로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은 별 신경 안쓰고 돌아다닌다.

이쪽에서는 눈 때문에 학교나 회사가 쉬는 경우도 있을까 궁금하다.

원 서식지인 대구에서 이만큼 눈이 왔다고 하면 도시 전체가 눈 속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데.

 

 

 

평소 자신보다 위에 서 있는 것들을 더 높은 곳에서 망원으로 당겨 보는것은 묘한 신선함이 있다.

이게 부적절한 호기심과 욕망으로 연결되면 범죄가 되겠지만, 어쨌든 평소와는 다른 시야를 즐긴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눈은 많이 와도 바람은 심하지 않은 듯, 가로등 위에 덮인 눈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높게 쌓여 있다.

경사면에서 녹아내린 물이 다시 얼어버려서 고드름을 만들어 낸 모습이, 토카치 지역의 살아있는 기후 소개를 담당하는 듯 하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싶더니 제설차 두 대가 열심히 눈을 한쪽으로 치워내고 있다.

이 정도로 눈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라 제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더 쌓이다가는 자동차가 전진을 못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을 듯.

 

치워내는 눈의 양은 상당하지만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힌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제설차는 한없이 작고 연약해 보인다.

처음엔 바램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지만 심상치 않게 눈이 내리니 오늘 목적지가 영업을 하는지 오히려 걱정까지 되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다름아닌 경마장인데, 원래 겨울 스포츠이긴 해도 눈이 이렇게 오면 과연 괜찮을까 싶다.

 

 

 

고민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 조식을 먹은 후 역으로 출발한다.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이동이 힘들어 시레토코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도 든다. 주위 풍경은 전혀 다르지만.

가끔 바람이 불기만 해도 건물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마법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카메라를 꺼내기는 좀 불안한 상황이지만 이런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어 조심조심 셔터를 누른다.

방진방적 정도는 지원하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렌즈 앞에 물기가 묻으면 닦아내기 귀찮아서.

 

 

 

도시 기능이 거의 마비되는게 아닐까 싶은 폭설인데, 도로에는 버스나 택시 등이 간간히 보이지만 승용차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 홋카이도는 그것대로 워낙 매력적이라서 지난 자전거 여행 도중 겨울의 풍경이 궁금한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 와 보니 역시 이곳의 겨울은 여름 못지않은 자연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다.

 

생물이 살 것 같지 않은 이런 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강렬히 충만된 여름의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것일 듯.

 

 

 

일단 카메라를 들고 나니 이곳저곳 시야가 넓어진다. 습관 탓인가.

일찍 나섰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본다.

출근길 시민들에겐 참 괴롭겠지만 쌓인 눈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과 순백색 배경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도시를 치장한다.

 

대도시였다면 아무리 눈이 많이 쌓여도 먹고살기 위한 인간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어서

도로와 도보는 온통 흙탕물로 얼룩질 수밖에 없겠지만, 이곳은 겉으로 보이는 도시 규모에 비해 한적한 편이다.

자전거 방치 금지구역 팻말이 평소보다 따뜻해 보이는 것도 그런 기분 탓일까.

 

 

 

한국에서도 번안되어 인기를 끌었던 '눈의 꽃'이라는 노래가 어울리는 풍경.

이런 조경수들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풍성한 잎들을 노리고 조성된 경우가 많은데

겨울에만 피는 이런 꽃은 확실히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과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오늘 비가 이만큼 오는데 경마장이 열렸으려나 물어본다.

가볍게 물어본 것 뿐인데 아가씨는 직접 경마장에 전화까지 해서 개장 여부를 알아본 후 문제없다는 답변을 건네준다.

 

더불어 정보 부족인 나에게 여기서 경마장까지 가는 왕복 버스티켓과 경마장 입장료를 한꺼번에 사면 경마장 입장료 할인과 함께

당일 사용이 가능한 토카치무라 200엔 할인권까지 끼워준다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토카치무라는 경마장 앞에 있는 조그만 문화센터 같은 곳.

따로따로 구매하는 경우에 비해 500엔 정도 할인이 되기 때문에 왕복 버스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없는 이득이다.

더더구나 나 같은 손님들을 위해 귀여운 말 캐리커처까지 프린트 된 왕복 버스 시간표까지 챙겨줘서, 출발 전에 만족감을 듬뿍 선사해 준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버스 시간표마저도 여행 후의 추억으로 보관할 가치가 충분하도록 만드는 소소한 배려가 여행 산업의 진짜 핵심이 아닐까.

 

 

 

10분만 기다리면 버스가 오기 때문에 굳이 안내소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필요를 못느끼고 눈발을 감상하러 밖으로 나간다.

 

맞은편 벤치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이미 벤치로서의 기능은 상실한지 오래지만 이미 그 자체로 예술 작품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가치가 충분하다.

대구에 살면서 평생 보아온 눈보다 더 많은 눈을 홋카이도에서의 10일동안 본 탓에, 이국의 정취를 찾아다니는 여행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사실 역에서 경마장까지는 날만 좋다면 30분 정도만 걸어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평균 시속 20km 정도로 마실 나가듯이 천천히 도로를 거니는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도 각별하다.

눈 때문에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힘들어 정류소 이름을 외치는 안내기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마장 정류소쪽에 내리긴 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시레토코처럼 천혜의 자연속이라면 오히려 주변 풍경만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만

모든 곳이 비슷비슷한 도시 속에서는 폭설이 그나마 남아있던 분석 가능한 지형들을 전부 가려버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의 혼란을 야기한다.

 

하는 수 없이 같이 내린 노인 일행에게 경마장이 어디인지 물어봤는데 어이없게도 도로 바로 건너편에 경마장 입구를 가리킨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니 이런 실수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고개를 돌려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눈이 일으킨 방해공작이라 변명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경마장 들어가기 전에도 놀라운 풍경은 여기저기서 나를 반기고 있어서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고 있다.

 

상록수인 소나무마저도 끝없이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색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은 처절하기보다는 아름답다.

 

 

 

오비히로는 도시 전체가 평야이긴 하지만

혹여 저 눈안개 앞에 라우스산이 버티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이곳에서 보는 풍경은 평야와 다를 바 없을 듯 하다.

 

이쪽 사람들에겐 매년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모습만으로도 오비히로까지 온 보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좋아하는 풍경에 너무 몰입해서 경마장의 재미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마저 느끼며 무릎까지 푹푹 꺼지는 눈 속을 걷기 시작한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 해도 강압적이라 해도 될 만큼 주위의 풍경이 자신을 담아달라는 듯 미려함을 뽐내는 탓에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춰 셔터에 손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형성된 흑과 백의 차분한 대비는

그림같은 풍경을 찾아 몇 시간이고 이동하고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진가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물론 본인이 그런 사진가들하고 비교할 만큼 건방진 편은 아니고.

 

 

콘크리트 도심 속에서도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빛이 바래지 않지만

경마장 관계자와 마을 사람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열성적인 태도 역시 그에 밀리지 않을 만큼 볼만한 것이다.

 

자전거 보관소의 지지대가 눈썹까지 예쁘장하게 그려놓은 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한탕 벌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아저씨들의 집합소라는 선입견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경마장에 대한 이미지가 한층 부드러워진다.

물론 경마도 도박의 일종이라 마음이 흐려진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이곳 오비히로의 경마장은 사실상 주민들이 자랑하는 문화 공간으로 형성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해도 될 듯 하다.

 

 

 

경마장 앞에 세워진 동상은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혼신의 레이스 후 몸에서 쏟아지는 땀처럼 보여서 굉장히 인상적이다.

 

금방이라도 저 말의 콧가에서 거칠고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느낌.

경마에 빠삭한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의 동상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경마용 말은 덩치만 큰 유리 세공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모든 부위가 속도만을 내기 위해 매우 세심하고 가냘픈 편인데

이 녀석은 사람 허벅지만큼 굵고 튼튼한 하체를 가지고 있어서 경마용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 경마장을 찾을 이유이기도 한데, 오비히로의 경마는 반에이(ばんえい)경마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눈이 많고 험난한 지형상 소를 경작지 개척에 이용하기 힘들었던 이곳은 소 대신 말을 이용해 돌을 부수고 땅을 골라 논밭을 만들어 왔다.

그러기에 이 곳의 말은 속도를 중시하는 말과는 달리 수백 kg에 달하는 짐을 끌 수 있는 육중한 덩치가 필요했던 것.

반에이 경마는 그 농경마들의 힘자랑을 위해 만들어 진 독특한 이력때문에 일반적인 경마와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경마 시작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이곳은 경마장 외에도 산지 직송의 신선한 농산물을 파는 슈퍼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오비히로와 반에이 농경마들의 역사를 전시한 박물관 등 즐길거리가 충분하기 때문에 일찍 와도 부담이 없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바닥이 깔끔하게 보일 정도로 눈을 치워낸 모습인데, 옆에서는 직원들이 열심히 눈을 퍼담고 있다.

옷을 두툼하게 입긴 했지만 가녀린 여직원이 거대한 제설장비를 들고 눈을 이리저리 치워내는 모습이 인상적.

 

 

 

푸드코트쪽에 오비히로 경마장 한정이라고 선전하는 우유 라멘이 매우 신경쓰였지만

아직 조식의 여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저 쪽은 경마 시작전 마지막으로 들르기로 결심한다.

땀을 흘리던 동상과는 달리 토카치무라 앞에 전시된 붉은 말조각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농경마들의 역사를 간직한 듯한 느낌을 준다.

 

노리고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토카치무라는 건물이 전부 붉은색으로 되어 있어 이렇게 눈내리는 날에는 굉장한 임팩트를 느낄 수 있다.

 

 

 

자료관 쪽에는 커다란 애니메이션 광고판이 놓여 있는데 이곳 출신 만화가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작품인 '은수저 Sliver Spoon'이다.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로 큰 인기를 모은 작가로

재미삼아 시작했던 고향 오비히로의 농촌 이야기가 워낙 도시 독자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는 바람에 그걸 토대로 장기 연재를 시작한 특이한 작품이다.

 

미국같은 농업 대국에서야 그게 별건가 싶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처럼 고도화 된 국가 사람들에게

홋카이도의 농업 형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신기한 것들 뿐이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작품 속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 반에이 경마가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로서는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고향 출신 만화가가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니 본인들도 굉장히 뿌듯할 듯.

본인은 이 작품이 연재되기 전에 이곳을 다녀왔기 때문에 크게 연관성은 없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홋카이도의 생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도, 이곳 홋카이도는 그 기대감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만큼 신기한 곳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