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관으로 들어가자 안내원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 장의 셔츠.
NHK 북해도 지부에서 2012년 제작한 '대지의 팡파레' 라는 드라마의 기념 셔츠다.
프린트된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 오비히로의 반에이 경마를 소재로 한 드라마인 듯.
장기 연재 드라마가 아니라 2편짜리 스페셜 편성이라 질질 늘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애초에 드라마란 걸 안 본지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은 없다.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대발이 나오는 내용이었는데.
사진 찍어도 되느냐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신다. 입장도 무료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본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경마장이나 카지노 같은 도박 관련 업종들은 주위 시설이 훌륭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 한다.
주 소득원이 도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잡아끌기 위해서 다른 서비스 수준이 뛰어나다고.
물론 이곳은 도박에 빠지는 경마장이라기보다 세계에서 이곳밖에 없는 문화시설로 이름이 높긴 하지만
이런 자료관의 유지 운영에 경마장에서 얻은 수익이 들어가지 않을 리는 없을 듯 하다.
'애마와의 이별' 이라는 슬픈 제목의 사진은, 공교롭게도 사진의 애상적인 분위기보다 '반에이 말이 정말로 크긴 크구나' 라는 감상이 먼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본격적인 관람 시작전에 위치한 정보검색용 PC 데스크 옆에는 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만화인 은수저 Silver Spoon이 서 있다.
가져가지 마라고 책 위에 '토카치무라' 라고 적어놓은 부분이 나름 매력포인트.
홋카이도 토박이들은 사실상 일본 최후의 개척민들이라 정착 초기에 고생을 어마어마하게 겪었는데
초기 개척민에서 3대째 자손이 되는 작가 아라카와 씨 역시 여성이지만 가업을 돕다보니 대형 트랙터 면허에 공수도 유단자이다 보니
여성만화가가 가질 법한 센시티브한 감정 묘사보다 근육 불끈불끈하는 모험활극쪽에 특화된 느낌을 보여준다.
이 은수저라는 만화는 홋카이도 농어촌 학생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물이지만 도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전개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섬세한 감정묘사가 그렇게까지 뛰어나지는 않은 느낌. 작가의 취향이니 비판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자료관은 경마에 대한 정보보다는 토카치 지역에서 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일본 최대의 평야인 이곳 토카치 지역도 첫 개척시에는 홋카이도의 거친 자연환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에
어마어마하게 자라나는 나무와 잡초를 끝없이 베어내는 것에서부터, 덩치가 말보다 더 큰 불곰의 습격에 사냥꾼도 잡아먹히고
메뚜기떼가 몇 년동안이고 지역을 습격해서 입고있는 옷까지 갉아먹는 눈물겨운 고생 끝에 지금에 이르게 된다.
우유를 생산하는 홀슈타인종은 추위에 강하지만 밭을 갈때 쓰는 품종은 겨울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추위에 강한 말을 소 대신으로 사용하다보니 점차 골격이 커지고 근육이 붙어 거대한 덩치가 되어 갔다고.
현재 사육되는 말의 대부분은 경마나 승마용이라 몸매가 좋고 스피드와 기교에 중점을 둔 스타일로 진화중인데
이쪽 반에이 경마에 참가하는 말들은 고대 로마시대 사람들을 깔아뭉개며 돌진하던 군마와 같이 육중한 몸매를 자랑한다.
키우기를 그렇게 키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양가집 규수같은 섬세한 마음씨를 자랑하는 서로우브레드 종에 비해
이쪽 녀석들은 의외로 한 성질 하는 편. 승부욕도 강하고 체력이 넘쳐 일종의 흥분상태다 보니 열심히 체력소모를 시켜줘야만 얌전해진다.
보통은 사육사와 사이가 좋은 경주마들이 장난삼에 사람의 어깨를 무는 등의 애교를 부리지만
반에이 경주마들이 사람 어깨를 장난삼아 물었다가는 멍 정도가 아니라 피부가 찢길지도 모르겠다.
반에이 경마는 어디까지나 농번기에 접어든 농장주들이 누가누가 썰매를 잘 끄나 경쟁하면서 시작된 경주라서
이쪽 말들은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짐을 끄는 힘과 지구력이다.
당시 농업에 사용하던 각종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빡빡하던 개척시대에 저런 도구들로 땅을 일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의 욕심에 고생하는 동물들은 아무리 연민을 가져도 모자라지 않다고 세삼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이나 일본같은 오래된 농경국가에서 1900년대 초반에 본격적인 개척이 이루어졌다는 건 나름 특이한 역사인데
일본쪽에서야 당연히 자랑할만한 일이겠지만, 이게 사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미국인들간에 이루어진 역사와 다를바가 별로 없는 것이라
밖에서 보기에 씁쓸한 인종 탄압의 역사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개간 없이 인류의 역사가 존재할 수 없기에 단순하게 자연 파괴라는 시점에서 접근하기는 난점이 많아도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 인식에 대한 주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자료관 중간중간에는 지역 상식 퀴즈가 놓여있어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어째서 말의 이름은 '~호' 였을까 라는 퀴즈고, 정답은 별관에 있다고 한다.
기억력이 감퇴하는 어른이라 질문을 잊어버릴까봐 사진까지 찍어 놨는데 사실 정답이 적힌 곳에는 질문도 다 적혀 있다.
재미있는 질문이 많았지만 그건 직접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재미로 남겨두기로 한다.
한국 사람에게 소가 재산 1호였듯, 오비히로에서는 말이 목숨만큼 중요한 가축이었다.
토카치 평야는 당시 홋카이도 인구를 고려할 때 사람이 개간할 수 있는 수준의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와 말이 없으면 그냥 거지라고 해도 될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개인 재산이라는 측면을 제외하고, 초기 개척민들은 거의 예외없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살아남기에 바쁜 상황이긴 했다.
집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가지고 튀어나오는 것이 소유한 말의 명부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고.
롯시 2호 라는 이름을 가진 말의 오래된 사진.
본인 역시 경마장에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일반 경주마와 직접 비교를 하진 못했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범상치 않은 덩치가 인상적이다.
특히 서로우브래드의 발목은 속도를 내기 위해 사람 발목 정도의 굵기에 매우 섬세한 근육섬유들이 밀집되어 있지만
이 녀석은 말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발목 두께가 거진 사람 허벅지와 맞먹는 굵기를 자랑한다.
초식동물인 말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속도를 살리는 몸 구조로 진화했는데
예전 군마를 포함해 이런 농경마들은 과연 같은 종인가 싶을 정도로 육중한 덩치를 자랑한다.
물론 얘네들도 말은 말이니까 달리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 달리게 해 주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죽어버리는 동물이니까.
예전에는 수의사가 직업으로 인식되지도 못했지만, 농민들에게 있어 소와 말은 자식보다 소중한 자원이었으니
홋카이도에는 서양의 자료들을 이용해 열심히 공부하는 수의사들이 나름 많은 편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극도로 찬양하는 흐름이 만들어 지고, 금기로 여겨졌던 해부학과 내과 관련 서적들이 밀려와서
자연스레 이곳에서는 말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 관리에 그 지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의사든 수의사든 일단 기본은 저 수많은 부위들 명칭을 달달 외는 것. 이걸 모르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으니.
말은 특히 수컷이 호르몬 분비가 격렬한 편이라 발정기에 골치를 썩이곤 한다.
현재 경마에 사용되는 경주마는 기본적으로 거세를 하지 않는데, 한창 젊은 수컷들은 경주 도중에 암컷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조절이 힘든 수컷은 할 수 없이 거세를 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성격도 차분해지고 경주 성적도 좋아지지만
일종의 도핑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상위권 대회에는 출장이 금지되어 있다.
반에이 말들도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그 거대한 덩치로 성질 부리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거세도 많이 이루어지는 편.
190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도 거세법이 지정되어 사진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구들로 자손 번식의 꿈이 좌절된 말들이 많다.
동물의 감정을 무시한 비인도적인 처사가 아니냐 싶지만 사실 말과 소는 수천년 전부터 철저히 사람의 소유 재물로서 취급받았기 때문에
지금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긴 하다. 애초에 말이란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비싸서 재산 개념이 아니고서는 사육 자체가 힘들고.
경마와 승마 용도가 거의 대부분인 현대 사회의 말 역시 수많은 인위적 교배에 따라 재산 가치가 변할 수밖에 없어서
거시기를 달고 있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암컷과 짝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 경주마인 서로우브래드 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주마들의 유전자 지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단지 2~3마리의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
놓여있는 자료 사이에 구매욕을 자극하는 말 조각상이 버티고 있어서 한참을 쳐다본다.
오래된 자료로서 이곳에 놓여있는건지 그냥 장식으로 놔 둔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마음에 든다.
기념품점에서 발견한다면 한 개쯤 구입해 가도 나쁘지 않으리라 보는데
이번 여행은 개인적인 기념품은 구입하지 않기로 계획했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
나름 기간이 긴 여행이라 지갑이 텅텅 비는 불상사를 막으려 한 것도 있고
돌아가기전에 나침반님한테 홋카이도의 미식을 조금이나마 소개시켜 드리려고 준비중이기도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는 젊은 부모들도 많이 들어온다.
경마에 관심을 가지라는게 아니고 이 지역의 문화로서 뗄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나름 인기있는 지역.
나처럼 경마에 돈 쓸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도 와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니까.
반에이 경마는 일단 토카치 지방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지금은 홋카이도의 명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계절별로 홋카이도 내의 경마장을 순회하며 실시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반에이 경마 하면 역시 눈길을 헤치며 돌진하는 겨울이 가장 인상적이기도 하고
겨울엔 본고장인 이곳 오비히로에서 금, 토, 일요일 경기가 열리기 때문에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여름 자전거 여행때는 이 경마를 굳이 다른 곳에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냥 패스했지만
이렇게 겨울에 기회가 생겼으니 이 경기를 보지 않고 지나간다는 건 너무나 아쉬웠기에.
겨울에 말들이 끌었던 눈썰매가 전시되어 있다. 눈 덕분에 조금 편하게 끌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만큼 말이 쑥쑥 빠지기 때문에 여름에 비해 편했으리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물론 소중한 재산인 동시에 가족과 다름없는 말이었던 만큼 이곳 사람들의 말에 대한 애정은 각별한 것이니
그 덩치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먹이와 휴식을 제공해 줬음에는 틀림없다.
반에이 경마는 채 200m 도 되지 않는 서킷 길이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경기 방식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지금도 동물 학대라고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경주마들은 계절별 첨단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하고 더없이 편안한 잠자리와 최상급의 식사를 제공받지만
어찌됐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육되고 있는 것이니 학대라고 불러도 근본적으로 반박할 만한 여지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인류 역사가 이러한 동물들의 힘 없이는 발전할 수 없었으니 동물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죄는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듯.
자료관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반에이 경마는 겨울이 진국이고, 겨울이라면 눈이 펄펄 내리는 곳에서의 강렬한 경주가 최고.
이번 여행은 원하는 장소에 원하던 날씨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어서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시레토코에서 단 하루만에 맑은 날씨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는데
이렇게 반에이 경마마저도 폭설이 맞이해 주니, 운이 참 좋았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오비히로의 겨울은 매섭기 그지없지만 추위마저도 나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화덕은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조금 매니악한 볼거리.
조금 전 언급했던 만화 은수저에 등장하는 화덕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농고에 다니는 주인공이 학교 안에서 만든 재료들만으로 이 화덕을 이용해 피자를 만들어 먹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연히 신선도로는 최상급인데다 이런 화덕에서 구워내 바로 먹는 피자니 그 맛은 만화를 읽으면서도 저절로 느껴질 정도.
실제로 피자를 구워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은 그런 이벤트가 벌어지기엔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듯 하다.
경마장은 아직 개장 전이지만 토카치무라 구석을 살짝 빠져나가보면 경마장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한 배려로 한 켠에 마련해 놓은 놀이터는 마치 늪처럼 늘어가기 무려울 정도로 눈이 쌓여있다.
삿포로에서부터 눈 내리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까지 쏟아붓는 눈은 처음이라 점점 흥분감이 고조된다.
경마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대충 경주를 감상할 수는 있지만
입장료도 주된 수익원이고, 가능한 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모습을 잘 담아내기 위해서는 장소 선정이 중요하니
이제와서 몇 천원 밖에 안되는 돈을 아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것과 별개로 저 의자에 앉을 용기조차 나지 않는것도 사실.
반에이 경마가 겨울의 이벤트라고 해도 역시 쌓이는 눈을 아무렇게나 방치해서는 레이스가 불가능하니
직원들이 무전기까지 써 가며 이곳저곳 눈을 퍼내고 트랙을 점검중이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망원으로 찍고 보니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어서 긴장이 풀리는 느낌.
군대에서라면 절대 저렇게 웃으면서 제설작업을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한국 남자들은 일단 눈 하면 군대가 연상되는 것도 병이라면 병.
반에이 경마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경사로가 눈에 들어오는데, 처음엔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다는 인상이다.
저런 경사로가 두 개 포함되어 길이가 2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직선이지만, 경주마들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라 한다.
대강 내용은 알고 있지만 역시 직접 경주를 보지 않으면 그 박력을 느끼기 힘들 듯.
경마장 안도 각종 먹을거리와 기념품점 등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으니 이곳 토카치무라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며 배도 좀 채우고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배가 고플 시간은 아니지만 방금 전 봤던 이곳 한정 우유 라멘이 궁금하기도 하고.
우유가 들어간 라멘이라면 얼핏 떠올리기에 느끼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자랑하는 한정 상품으로 내 놓은 녀석이니 기본적인 맛은 보장하리라 생각한다.
버스표를 구입하면서 받은 200엔 할인권도 있으니 먹지 않을 이유도 없다. 잠시 후에 들어갈 경마장 앞의 거대한 포스터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방향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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