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터를 틀어놓고 잤는데도 콧등이 시려서 잠을 깨보니 밤중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나보다.

눈은 막 그친 참인데, 새벽까지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홋카이도 전역의 철도 대부분이 운행중지가 되어 있다.

어제 이동했던 오비히로에서 삿포로까지의 구간도 오후가 되어야 운행이 재개되는 듯 해서, 하루만 늦었다면 꼼짝없이 이곳에 갇힐 뻔 했다.

 

삿포로가 대도시이긴 해도 어제 밤처럼 시야를 가릴 정도의 눈이 쏟아지면 조심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불과 자기 집 대문 십여 미터 앞에서 길을 잃어 동사한 사람이 뉴스에 나왔을 정도니까.

 

자금과 시간적 여유만 널널하다면야 폭설로 인한 귀국 연기라는 사고도 한 번쯤 겪어볼 만한 일이지만

이제부터 미련 가지는 것은 만족스러웠던 여행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으니 시원한 기분으로 짐을 챙긴다.

 

신 치토세 공항 국제선은 차별이라 느껴질 정도로 한산하다. 홋카이도를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인가.

홋카이도 모든 지역의 쟁쟁한 기념품, 선물, 식당가가 포진한 국내선과 달리 국제선쪽엔 편의점 수준의 가게 한두 점포밖에 없다.

자국민 우선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이 선물을 사기 위해 국내선 라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

 

 

 

현실적으로는 당연히 신 치토세 공항의 수요와 크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다.

원래 자위대 공항이었던 녀석을 민간용으로 확장 개조했기 때문에 마음껏 확장하기엔 힘든 면이 있었으니까.

 

국제선도 원래 국내선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지만 워낙 수요가 폭증하는 바람에 새로 지은 것이 지금의 국제선.

수요가 없어서 간당간당한 다른 지방 공항들과 달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딸려서 골치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이런 국제선과 국내선간의 현격한 차이와 거리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 신경은 쓰고 있다.

 

무빙워크도 있지만 그보다 더 편리한 수송을 위해 사파라 관람열차같은 전동차 두 대가 왕복중이다.

나이든 사람이나 짐이 많은 사람만 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런 거 없고 그냥 마음껏 타시라고 하며 나를 불러세운다.

걸어가도 전혀 문제는 없지만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 뒤에 탄다. 기념 사진도 한 장 남기고.

 

운전중에는 보행자를 위해 경쾌한 맬로디가 울려퍼진다. 사소하지만 공항에 대한 인상을 좋게 만드는 배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원서 사 오는건 매번 있는 일이니 예상 범위 내였지만 본가에 전해줄 과자와 나침반님에게 전해줄 과자 등 부피가 큰 녀석들이 많다.

부피로 친다면, 사실 홋카이도 특산품이 아니라 닛신의 컵누들 1박스가 제일 많이 나가기는 하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컵라면인데 예전에 나침반님한테 맛보기로 몇 개 드렸더니 꽤나 상성이 좋았던 터라

온갖 맛있는 먹거리가 가득한 이곳 홋카이도에서 편의점 직원에게 부탁해 컵누들을 박스채로 창고에서 가져오게 했다.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자기한테 맛있는 거라면 희소성 따윈 상관 없다.

 

 

닛신은 그 엽기성을 자랑하는 CM으로도 유명하다.

이제까지의 닛신 CM만 모아놓아도 어지간한 코메디 프로에 꿇리지 않을 듯.

 

롯카테의 고급 과자인 '마루세이 버터 샌드'와 홋카이도산 감자튀김인 '쟈가포클' 등을 몇 개 구입한다.

본가와 나침반님에게 각각 가지고 가려니 생각보다는 지출이 많은 편.

일본에서는 여행 후 지인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행동이 사실상 강제나 마찬가지인 예절의 일부분이라

학생들의 경우 부모가 선물용 용돈을 따로 주는 경우도 있다. 지인들 거 몇 개 사기만 해도 금액이 상당하니까.

 

원래 본인에게나 남에게나 선물은 거의 사 가지 않는 편이지만 홋카이도라면 건질거리가 좀 있으니 오랜만에 소비를 즐겨본다.

 

눈축제는 끝났는데 공항은 여전히 스노우 미쿠로 성황중이다. 과자를 사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미쿠 종이가방에 넣어준다.

일단 이것도 희소성이라면 희소성이니 곱게 가져와서 여전히 방에 보관중. 막상 희소성 생각하니 재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 조금 난감하다.

 

 

 

10일 전 이 공간에 미쿠라는 괴생물체가 빡빡히 들어서 있었는데

공식적인 축제도, 개인적인 축제도 끝난 지금은 매우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원래는 이렇게 넓은 곳이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눈축제 기간 중 그러지 않아도 빡빡한 공항에 대량의 오덕을 몰고다니는 미쿠까지 들어서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쿠의 저력은 만만하지 않아서, 구석에서 여전히 방문객들의 마지막 지갑까지 털어가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여행 후 선물은 사람들간의 친근감의 척도로 사용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려고 구입해도 그 부피가 감당하기 힘들어 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공항에서 택배 서비스가 성황중인 것. 한국과는 이런 점에 있어서 정서가 많이 다르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미쿠가 덤벼들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야마토 택배와 미쿠가 콜라보레이션을 맺었다.

 

일반인이라면 저걸로 택배 서비스를 보내는 정도는 홋카이도에서의 소소한 이벤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고

오덕이라면 아마 택배 보내지 않고 박스만 사 갈 듯한 느낌이 든다. 본인도 젊을 때는 열혈 오덕이었으니 왠지 상상이 된다.

 

 

 

어제 징기스칸 폭풍흡입과 더불어 오늘 아침도 조식을 빵빵하게 즐기고 왔기 때문에 식사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혹시나 또 폭설로 열차가 연착될까봐 시간을 매우 넉넉하게 잡아 도착했고

쇼핑도 대충 다 끝냈으니 남는 시간은 역시 식당에서 때우는 것이 제일 좋다.

 

벌써부터 줄이 생겨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음식점도 있지만 지금은 라멘이나 고기류는 조금 부담스럽다.

가벼운 음식을 찾으려고 몇 바퀴 돌다가 한산한 소바집으로 들어간다.

 

이 블로그를 오래 접한 사람들은 본인이 나가노현의 300년 넘은 소바가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듯.

그래서 이런 공항 소바집에서 엄청 기대를 크게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나가노의 가게 역시 메밀을 이곳 홋카이도에서 공급받고 있을 정도로

홋카이도 메밀은 품질이 상당히 좋기로 유명하다. 속에 부담이 없어서 선택한 메뉴니 기본만 해 주면 후회없을 듯 하다.

 

국수 자체는 나쁘지 않은 레벨이지만 역시 소바는 찍어먹는 소스인 쯔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나가노의 쯔유와는 비교하기가 아쉬운 평범한 레벨이라서 그냥 그렇군 하면서 후루룩 집어넣는다.

 

 

 

뿌듯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활주로를 벗어나는데 하늘이 마지막으로 멋진 선물을 선사해 준다.

방금 전 신 치토세 공항은 운이 좋게도 살짝 눈이 그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위로 올라와 보니 알 수 있었다.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의 외계인 공중전함의 공습을 생각케 하듯 일렬로 위압감을 뽐내는 눈구름이 장관을 연출한다.

그러고보니 이곳에 입국할 때도 두터운 눈구름을 내려다보며 두근두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마운 날씨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눈만 오면 지루할까봐 맑은 하늘도 하루에 몇 번씩 보여주고, 꼭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엔 여지없이 쏟아부어 주었으니까.

10일간의 짧은 여행동안 날씨가 이렇게까지 도와 준 적은 드물다. 여름의 혹한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던 편이기도 하고.

 

 

 

여러 번 가면 점점 식상해져서 발걸음이 뜸해지는 곳도 있지만

홋카이도는 적어도 짦은 생애 한 순간동안은 아무리 찾아가도 지루해 질 틈이 없는 곳이다.

가장 일본적이지 않은 곳에 살짝살짝 보이는 일본적인 특성이 특히 그렇다.

나름 일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 묘한 이질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혼자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만 찾을 수 있다면 이 근방에서 가장 정착해서 살고 싶은 곳이다.

시야를 길게 본다면 사실 나가기 좋아하는 성격상 평생을 틀어박히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족스러운 여행이든 후회가 남는 여행이든 끝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아쉬움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예 여행에 인생을 던져버리는 사람들도 있는 것 아닐까.

 

 

 

돌아와서 바로 나침반님과 만난다. 내려가기 전에 선물을 전해줘야 하니까.

동대문의 밤거리에 도착하니 역시 사방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여기가 한국'이라는 느낌이 엄습해 온다.

멀리서 보면 쌍동이같아도 가까이서 보면 정말 달라도 이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다.

 

국밥을 주문해도 알았다던가 고개를 끄덕인다던가 하는 리액션 하나 없이 휙 돌아 가버리는 아줌마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역시나 한국'이다.

사실 더 풍족해질리도 없지만, 아무리 풍족해진다 해도 불친절이 친절로 바뀔 일은 절대로 없다. 친절은 부유함에서 오는 사치가 아니다.

 

 

 

나침반님에게는 닛신 컵누들 한박스와 쟈가포클 한박스, 마루세이 버터 샌드를 선물로 건내드린다.

나침반님 집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25도 이하에서만 보관하면 괜찮다고 적혀있으니 뭐.

 

오비히로에서 시작한 제과점 롯카테의 간판 스타같은 녀석으로, 모든 재료를 토카치산으로 사용한 고급이다.

가지고 온 선물 중에서 크기는 가장 작지만 가격은 가장 비싸다. 포장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부담갈 정도.

본인이 사서 먹는 것이야 아무렇게나 포장해도 관계없지만 역시 선물이 주가 되는 과자다 보니 예의바르게 포장되어 있다.

 

 

 

다행히도 훗날 나침반님이 맛있었다고 평가하셔서 구입한 보람이 있었다.

집에도 하나 들고 왔는데, 엄니는 역시 포장에 질겁을 하셨다. 뜯기가 아깝게시리 뭐하러 이렇게 멋지게 싸 놓았냐고.

 

허물없는 가족끼리야 사실 이런 거 구입해 봤자 감흥없이 확 뜯어서 팍팍 씹어먹을 뿐이다.

아무래도 '가족끼리 시식용' 이라고 저렴하고 엉성한 포장지를 두른 상품을 따로 발매해 줬으면 싶다.

 

 

 

쿠키 속에 진한 버터, 그리고 사이사이에 건포도가 들어간 살짝 고풍스러운 과자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본인에게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지만, 분석적으로 파고든다면 재료의 질이 워낙 뛰어나서 아껴 먹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달고 짠 맛과 함께 스폰지처럼 부드러운 쿠키와 농후한 버터의 고소함이 조화롭다. 요 한 조각이 2000원쯤 하니 결코 싼 가격은 아니다.

개인적으로야 양보다는 질이기 때문에 싼 과자 많이 먹는것 보다야 이런 거 한개씩 먹는게 훨씬 만족감이 크긴 하다.

입맛이 저렴한 편인지, 그냥 신선한 오징어만 씹고 있어도 다른 과자 생각이 나지 않는 편이지만

역시 1년이나 되다 보니 사진 정리할 때 가끔 이 녀석의 맛이 생각나기도 한다.

 

 

 

오타루에서 이별할 때 Y양이 선물로 덥썩 사 줬던 초콜릿.

선물은 사실 이쪽에서 줘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하나 받아버려서 조금 난감했다.

 

연락을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도 키타미에서 한국어 교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본인 역시 키타미 주변에 일자리만 있으면 당장 짐 싸서 날아갈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교습소 원장이 한국인이라 그건 포기.

오랜만에 안부나 물어볼까 싶다. 사실 여건만 된다면 2015년 2월에도 당연히 날아가고 싶지만.

 

 

 

왁자지껄한 밤풍경이 한국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역시 이런 도시 모습은 내 취향이 아니다.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모습은 활기가 아니라 발버둥으로밖에 안보인다.

 

나침반님은 서울 토박이지만 역시 나만큼이나 서울 좋아하지 않는 듯. 그러니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겠지.

일단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는 점에서 삿포로와 크게 차이가 난다. 10일동안 눈바닥 말고는 본 기억이 없다.

눈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기분. 황량한 아스팔트 도로를 보니 금새 홋카이도가 그리워진다.

 

사람이라면 무릇 자제심을 갖고 살아가야 하니 2015년 겨울에 다시 날아가는 사치스러운 일은 하지 않겠지만

시간이든 자금이든 여유만 있다면 언제나 파묻히고 싶은 곳이 홋카이도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되는 기분으로 나침반님과 헤어진다. 이제 깨어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