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크로넨버그 감독의 행보를 아쉬워하는 호러영화 매니아들이 많을 것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과 '킹콩'을 보면서 '데드 얼라이브'때의 피터 잭슨을 아쉬움 반, 대견함 반(?)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처럼.
그나마 자기 위안을 하자면, 호러영화 감독들의 본성은
그들이 아무리 장르를 갈아치워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특히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 2005)에서 시작한 크로넨버그의 새로운 행보에는 더더욱 그것이 느껴진다.
인간의 신체를 조물락거리며 그 피부속에 감춰져 있던 본성을
신기한 장난감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무자비하게 드러내던 그도 이젠 머리가 좀 굵어진 건지
이제부터는 가죽 껍데기를 직접 벗겨서 보여주지 않고도 속의 내용물을 잘 묘사하는 능력을 구사한다.
호러영화 감독 시절의 크로넨버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이라도 폭력의 역사에서 시작한 그의 삐딱선에 무작정 불편한 시선을 던질 필요는 없을 듯.
좀 더 대중적이고 얌전해 졌을 뿐, 여전히 그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말이다.
여러가지로 전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형제격 작품인 '이스턴 프라미스'는 초반 인트로부터 쌍둥이나 마찬가지.
'설마 그럴까' 라는 관객들의 의구심을 오프닝 10분만에 증명시켜 버리는 이유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런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따라오라'는 감독의 친절하면서 명쾌한 가이드라인이다.
전작 '폭력의 역사'가 굉장히 보편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파해졌다면 이번 작품은 거기에 극사실적인 지역적 특색을 첨가해서 훨씬 더 명암대비가 분명해진 동시에
그 반대급부로 전작보다 작품에 대해 좀 더 세밀한 관찰과 배경 지식이 없이는 쉽게 그 맛을 음미하기가 어려워졌다.
대학생 때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에 대해 잠시나마 공부해 본 적이 있는데
러시아와 그 주변국들의 관계는 정말로 거칠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거기에 속한 부류들의 심적 상태는 그들 자신이 아니면 정말로 체감하기 힘들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본인이 중앙아시아를 좀 더 이해하고 있었다면 이 작품의 탄탄한 현실적 기반에 훨씬 거대한 공감대를 형성했을 것.
그걸 제대로 즐기지 못한 탓에 '폭력의 역사'와 거의 동급으로 평가하고 싶지만, 어쨌든 전작보다 더욱 리얼해진건 사실이다.
'런던이 아들을 망쳤어'라는 대사 하나가 이 영화의 모든 배경을 관객이 납득시키도록 만들어 버리는 힘도 거기서 나온다.
'스캐너스'와 '비디오 드롬'이 인간의 피부를 벗겨가며 그 본질을 탐구했고
'폭력의 역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그 한 발짝 밖에 존재하는 세계의 괴리감을 통해 그것을 탐구했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간의 거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함으로서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며, 그 본성에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번 작품은 직접 벗기는 껍질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좀 더 심층적인 본질을 까발려주는데 성공했다는 발언에 반대할 사람 없을 듯 하다.
크로넨버그가 비고 몰텐슨을 주력 배우로 삼은 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전작에서 유약한 가장과 비정한 살인자의 이면을 한 얼굴로 표현해 낸 그의 능력에 감독이 반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터.
이번엔 훨씬 더 깊은 이면을 선보여야 했던 그는, 표정 하나하나에 관객들마저 혼란을 느낄 정도로 신들린 연기력을 과시한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결코 악과 대립하는 선의 역할을 맡은 캐릭터가 아니다.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죽일수는 없지 않냐며 키릴을 설득하는 장면.
이것이 바로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인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비고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을 끌어낸다.
FSB 요원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그가 가장 휴머니즘적인 태도로 키릴을 설득하는 장면.
이것은 휴머니즘에 기반한 설득이 아니라 자신의 이면을 감추기 위해 그 인류애마저 포장지로 사용하는 전율적인 장면이다.
그나마 감독은 나오미 와츠가 맡은 캐릭터를 통해 비고의 위치를 좀 더 중립적인 인물로 당겨놓긴 했지만
아마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인간의 본질은 그 중립적인 인물에서야말로 극단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EVERY SIN LEAVES A MARK' 라는 포스터의 표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비고의 몸에 새겨진 '죄'의 문신은 지워지지 않지만, 그것은 속죄를 바라는 표식이 될 수도 없다.
죄를 짓는 행위를 악이라 생각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아이를 살리려는 비고의 행동은 인류애적인 본성이었을까. 자신이 올라가기 위한 발판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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