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움직이는걸 싫어한다.

여행가는건 무지하게 좋아하는데, 내 기분에 플러스 요인이 될 뭔가가 없으면 털끝 하나도 움직이길 싫어하는

이시대의 대표적 게으르니스트다. 생활 자체가 그러다 보니 보통 친구들과의 교류는 우리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밖에 나가는것도 귀찮고, 집에 박혀있는 날이 많다 보니, 모임이 있거나 용건이 있는 친구들은 우리 집으로 자주

오곤 한다. 다른 사람 눈치볼 것 없이 혼자 살고 있으니 만나기도 편하겠지.

우리 집은 그래서 버스 정류장 휴게소 의자 같은 느낌일까.

가지가지 이유로 우리 집에 머물다 간 친구들이 꽤 된다. 길게는 1년에서 짧게는 며칠동안.

프라이버시에는 생리불순 여자만큼이나 신경질적인 성격이라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 편하게 머물다 갔을지는..

오늘도 3박 4일을 묵고 간 한 친구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수술이 끝난 아버지를 서울에 남겨놓고.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날이었을 터.

미친듯이 위로해 주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불안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사실은 눈꼽만큼도 소용없는 짓이라는거 알고 있다.

시체나 다름없는 얼굴로 올라와서 잠도 못자던 친구는 결국 수술실 문을 나오는 의사 입에서 잘 됐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서야 진심으로 웃고 진심으로 안도하며 밥도 잘먹고 잠도 잘 잤다.

사실 그동안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그 친구한테 격려하면서 했던 말과 100% 일치하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전문 의학 공부도 해 본적 없는 놈이 뭘 알겠냐마는, 살아온 환경상 병원과 환자, 질병에는 익숙하다.

내가 그렇게 닳고 닳도록 해준 조언과 충고는 그 녀석을 2시간도 채 잠자게 하지 못했다.

의사의 5분 남짓한 수술 경과 보고는 그 녀석을 10시간도 넘게 숙면을 취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내 존재가 이놈의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놈의 세상에는 핵폭탄 스위치가 눈앞에 있기만 하면 아주 신나게 눌러버릴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아직 두려움에 떠는 친구에게 잠 한번 재워줄 만큼의 위로도 만들어 줄 능력이 없나 보다.

무력한 인간일수록 발버둥 치며 올라가는 수 밖에 없을 거다.

무능과 나태에 의해 침전되어가는 이 죄의식은 나를 조금이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겠지.

이 죄의식조차 없다면 나는 내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어찌됐든, 좋은 하루를 보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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