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기념관을 둘러보고 다시 히로시마역으로 돌아왔다.
간간히 내리던 비는 후련하게 그쳤는데, 이제 돌아보기로 계획했던 곳은 다 돌아봤다.
시간은 2시 반. 이제 여기저기 어슬렁 거리다가 5시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면 된다.
원래대로라면 히로시마 공항까지 50분 정도 걸리는데
요즘 골든위크라 도로가 막힐 가능성이 있어서 조금 느긋하게 가기로 생각중.
아침 10시 30분쯤 티켓 미리 끊어놓으려고 왔을 때 안내원이
'현재 공항까지 소요시간이 1시간 30분' 이라고, 가려는 분들은 일찍 출발하는게 좋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히로덴을 타기도 귀찮아서 (수중에 남은 돈은 2700엔. 이걸로는 윈도우 쇼핑도 서글프다) 그냥 역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원래 시간때우기 좋은 곳은 수만 권의 만화와 인터넷, 무제한의 팝콘과 음료수가 제공되는 인터넷 까페인데
거기 들어갔다간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를 팝콘과 음료수로 때워야 되는 사태에 직면하기 때문에
히로시마역에서 바로 이어진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역시 백화점이란 곳은 나하고 별로 맞지 않는 곳이다.
일본에서 내가 백화점을 들어가는 이유는 간단한 식사 때우기나, 서점, 애완동물 용품점에 들어가기 위해.
옷이나 기타 상품들은 애초에 한국에서도 관심이 없었으니.
불행히도 히로시마역과 이어진 백화점에는 애완동물 용품점에 애완동물이 거의 없었다. ㅡㅡ;
도쿄 오다이바(お台場)의 유명한 상점가인 비너스포트에는 눈을 정화시키는 귀여운 동물들을 잔뜩 구경할 수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 좋은데, 이곳엔 그냥 관련용품밖에 없더라.
그래서 결국 서점에서 2시간 가까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버렸다.
다행히 이곳 서점은 일본 최대의 서점 체인인 쥰쿠도(ジュンク堂)라서 백화점내 서점 치고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2시간 보내는 건 식은 죽먹기.
2700엔중 2000엔은 책 사려고 남겨둔 돈이기 때문에 신중히 고르고 고르다가 아즈망가대왕 신장판을 골랐다.
일본 4컷만화의 전설이자, 19금 성인만화작가였던 아즈마 키요히코씨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명작중의 명작.
처음 연재시엔 할당 페이지도 제대로 받지 못한 땜빵용 4컷 만화였는데, 놀라운 호평속에 당시 최고의 인기작으로 급부상.
현재 일본 만화계의 수많은 4컷만화 전문 잡지들은 이 작품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 것.
원래 4권이었던 작품을 학년별로 3권씩 묶었고, 각종 새로운 일러스트, 새로운 에피소드를 추가한 푸짐한 구성이다.
특히 현재 키요히코씨의 그림체와 많은 이질감을 보이는 1학년 초반 에피소드를 상당부분 새로 그린 탓에
같은 내용이라도 신선한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돋보이는 신장판.
가끔 '전부 새로 그려줬으면 좋았을걸' 하는 독자도 있지만
'요츠바랑!'을 연재중인 작가가 틈틈이 이만큼이라도 새로 그려줬다는 건 감지덕지할 일이다.
원래 대부분의 신장판 도서가 표지 일러스트 한두 장 새로 그리는걸로 때우는 데 비하면 굉장한 정성이 들어간 것.
'요츠바랑!'에서 확연히 들어나는 점인데, 키요히코씨는 단행본 작업시 배경 디테일 등을 거의 뜯어고칠 정도로 신경쓰는 사람이라
이런 멋진 신장판이 나올 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게임한다고 발로 연재하는 토가시같은 작자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이건 히로시마 여행 첫 날 구매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대학교때 읽던 책을 잃어버려서 생각난 김에 다시 구입했다. 그러고보니 번역본도 없는데 또 사야하나... ㅡㅡ;
쇼핑을 마치고 푸드코트에서 라멘+교자만두 세트를 670엔에 사먹으니 이제 손안에 든건 30엔 남짓.
확실히 히로시마는 오코노미야키가 주력인지 라멘이 별로 맛이 없었다.
도쿄 위쪽부터 홋카이도 끝까지 모든 지방의 라면은 다 먹어본 터라 입맛이 까다로워졌나?
암튼 인스턴트 라멘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 그냥 배만 채웠다.
교자만두는 금방 튀긴 만두를 접시에 담고 옅게 희석한 간장을 밑에 살짝 깔아서 주는데 이건 라멘보단 괜찮았다.
5시에 리무진 버스를 타니 도로가 막히지 않아서 45분만에 도착해 버렸다.
2시간을 공항에서 버텨야 하는데 히로시마공항은 작디 작은 시골공항같은 느낌이라 별로 볼거리는 없다.
애초에 인천공항같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공항은 세계에 몇 없으니 비교할 대상이 아니지만.
그놈의 오코노미야키 한번 못 먹어본게 한이 되어서 공항 라운지의 음식점을 찾아갔는데
명색이 국제선까지 있는 공항 음식점에 신용카드를 안받는단다. T_T
아무리 카드사용률이 높지 않다고 해도 그 정도 편의는 봐주면 안되겠니?
환전소도 오후 3시까지밖에 하지 않는터라 그야말로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떠는 무리에서 떨어진 새끼양 꼴이 되어버렸다.
인천공항의 24시간 환전소가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한게 잘못이었나벼.
의자에 앉아서 E-Book 이라도 볼까 싶어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낮선 여성분이 말을 건다.
여행 첫날 공항에서 결행된 버스 사건 때, 나한테 도움을 받은 분이라고 하신다.
난 전혀 얼굴 기억을 못하는데 (시선기피증이 있어서 원래 거의 눈을 안마주치기도 하지만) 어떻게 단번에 기억을 하셨냐고 물어보니
'너무 인상이 강한 분이라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왠지 울고싶다. T_T
고등학교때도 튀지 않으려고 정말 얌전히 생활했는데, 막상 그때 친구들 만나보면 반에서 제일 기억하기 쉬운 애였다고 하니
세상만사 모두 의도대로 돌아가진 않는가 보다.
그분과 여행 후기를 주절주절하며 후다닥 시간을 보내버리고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
공항 리무진을 타고 서울 시내로 가는 순간은 항상 아쉬움과 그리움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보통은 여행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는건지 모르겠다.
난 돌아오는 순간 그저 다시 떠나고 싶은 생각뿐인데.
여행 도중에 생기는 아쉬움이 아닌, 여행 끝나는 순간 생기는 아쉬움 때문에
나는 또 어디론가 떠나려고 애태우는 중이다.
피곤하고 뻐근하고 배고파도
모든 인간의 부정적 감정이 용서되는
인간이 가장 선해질 수 있는 순간이 여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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