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날엔 잠을 잘 못자는, 어찌보면 당연한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잠을 자지 못했다. 제대로 못 잔게 아니라 아예 한숨도 못 잤다.
이제껏 여행 한 횟수로 치면 이런 들뜬 어린이같은 반응이 좀 없어질 때도 됐는데, 쉽지 않다.

티켓은 7시에 받으러 오라고 하는데, 조식 시작시간이 7시라서 공짜밥도 못먹고 나섰다.
다행히도 짧은 거리지만 호텔에서 터미널까지 태워주는 차가 있어 조금은 득 본 기분.

티켓 받고 돼지코 구입하고 멀미약 한개 먹고 하니 금새 출발시간이 다가온다.
자동차나 기차도 역방향으로 앉으면 멀미를 심하게 하는 타입이라서
이번에 타게되는 쾌속선 코비호도 상당히 걱정이다. 난생 처음 멀미약이란 것도 먹어본다.
출발 전 마지막으로 부산의 모습 한번 담아주고 심사대를 통과.


쾌속선 코비는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시속 80km의 속도로 선채를 바다 위로 떠서 달리는 녀석.
바다 위를 떠다닌다고는 해도 파도가 심하면 어차피 울렁거리기는 마찬가지다.
2층의 객실 의자에선 매쾌한 땀냄새가 나서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멀미약 효과가 1시간은 지나야 발휘되는데, 출발 30분전에 먹는 바람에 초반이 걱정이다.

혹시나 했던 염려가 현실이 되어, 오늘 파도가 상당히 높다.
최대한 멀리 보고 있으면 그나마 좀 낫지만, 철야한 탓에 조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그야말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
TV에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방방 뛰어대는 '점퍼'를 상영중이었지만, 영화보다 내 머릿속이 더 리얼하게 점프중이었다.
거기다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는데, 2층 맨 뒷편에서 구수한 사투리로 아주 소리를 지르며 떠들어대던
왠 아저씨 무리중 한 명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고 만 것이다.

코비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운항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선체도 일반 여객선에 비해 작은편이고, 운항중 자리를 뜨는 것을 권장하지 않기 때문에 흡연실도 없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워대니 금새 선내는 담배냄새로 가득해 졌고, 승무원들은 당황해서 온 선박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장실에서 담배 핀 색히를 잡았는데, 피우지 않았다고 멍하게 대답하는게 내 좌석에서도 들려온다.
저딴 쓰레기는 그냥 바다에 던져버렸으면 좋을것을...

그 후에도 그 덜되먹은 무리들은 우렁찬 코비의 엔진소리도 무시할 만큼 떠들어대서
피곤과 멀미로 고생하던 내 불쾌지수를 극한까지 올려놓는다. 정말 사라져야 할 족속들이다.


다행이랄까, 3시간의 승선중 후반 1시간 반 정도는 약기운이 듣기 시작했는지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멍한 기운은 마찬가지인데, 짧은 여정이니 만큼 쉬고 있을 시간이 없는 하루하루라 앞으로가 걱정이다.
다들 멀쩡히 내리는걸 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정도에 멀미하진 않는 듯. 난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아쉽게도 후쿠오카의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어 그다지 좋지 않다.
어제 부산의 날씨도 저녁부터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입국심사장의 직원이 조금 묘한 질문을 했다.
보통 카드에 작성된 것들만 확인되면 아무 말없이 통과시켜주는데
항구 입국은 그런것인지, 그 직원이 특이한 성격인지, 내 외모가 조금 부담스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숙박지는 어디인가, 여행 목적인가 일 목적인가, 2박 3일동안 어디어디 갈 예정인가 하는 것까지 물어본다.
그렇게 일본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이런 질문공세를 받아본 적은 난생 처음이라 신기했다.
10개월째 깎지 않은 머리와 다크 서클로 떡칠된 괴인이 조금 수상하게 보인 걸까.
다자이후와 유후인 갈 예정인데 날씨도 그렇고, 교통편 시간이 너무 걸려서 제대로 즐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난 위험한 사람 아닙니다'라는 느낌을 가득 담아 친근하게 이야기 하니 그제서야 직원이 웃으면서 일본어 잘하시네요라고 해 준다.
워킹 홀리데이까지 했다고 확인시켜주니 잘 놀다 가라고 인사까지 해 주며 통과. 사람은 역시 웃고 봐야 한다.

일단 하카타역 옆의 토요코인에 가서 짐부터 맡기기로 하고 100엔 버스를 탄다.
한국인 관광객수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라서, 후쿠오카 주변엔 왠만한 표지판에 한국어가 적혀 있다.
후쿠오카 시내 주요 관광지만을 빙글빙글 도는 100엔 버스라는 녀석도 있어서
상당히 비싼 일반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시내 구경은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되어있다.

토요코인에 도착하니 또 한번 트러블에 휘말렸다.
싱싱한 초짜로 보이는 직원이, 내가 사용하려는 무료 숙박권에 이상한 딴지를 걸고 나선 것.
원래 토요코인은 요일이나 기념일, 휴일, 관광시즌별로 가격이 조금씩 바뀌는데
무료 숙박권은 평일 기본 요금만큼만 깎아주고, 나머지 차액은 지불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 무료 숙박권을 써 본적이 있는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소리.
어떤 곳에서 어떤 가격이든 무료 숙박권은 싱글 1실을 하루 무료로 사용하게 해 준다.
내가 그럴 리 없다면서 확인 부탁한다고 하니, 난감해하는 직원 옆으로 다른 직원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손님 말이 맞다고 말해준다.
죄송하다면서 거듭거듭 사과를 받긴 했지만 이런 요금관련 실수는 호텔로서는 이미지에 치명적인 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텐데.

일본의 전국체인 비지니스 호텔 중에서 수퍼호텔과 더불어 가장 저렴한 측에 속하는 토요코인은
그나마 수퍼호텔보다는 조금 나은 숙박환경과 전국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는 점포로 인해 나름 인기가 있는 곳인데
저렴함은 어쩔 수 없는지 가끔 이렇게 나보다 더 숙박규정을 모르는 직원들이 있기도 하다.

비지니스 호텔중 돈 좀 더주고 편안히 즐기려면 역시 루트 인 호텔이 좋다.
내부 시설도 훨씬 고급스럽고, 무료 조식의 질이 왠만한 중급호텔 이상이라서 추천.

이러저러한 후에 짐을 맡기고 카메라 가방만 짊어진 후 하카타 역으로 출발. 사실 걸어서 3분거리다.
하카타 역과 버스터미널이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모든 후쿠오카 여행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일단 버스터미널로 가서 내일 출발할 유후인행 왕복 버스티켓을 끊는다.
유후인행 버스는 완전 예약, 지정 좌석제이니 까먹기 전에 미리미리 예약 해놓는게 좋다.
외국 관광객인데도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꼼꼼하게 물어 적는다. 로밍폰도 관계 없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이번 후쿠오카 관광 중 가장 비싼 5천엔짜리 왕복 티켓을 끊고 나니 일단 할일은 다 한것 같아서 안도가 된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었기 때문에 터미널 안에서 바로 보이는 맥도날드에 무작정 들어가 신제품인듯한 녀석을 주문.
매년 일본 맥도날드에서 기간한정으로 소개되는 아메리카 시리즈의 최신작 비버리힐즈 버거.
여행중 텍사스, 하와이안, 뉴욕, 캘리포니아 등등... 나름대로 이유는 붙여서 만든 버거시리즈를 맛봤는데
아직도 이 시리즈를 계속하고 있는게 좀 신기하긴 했다.

패티, 계란, 치즈의 조합은 평소 좋아하던 달맞이버거와 비슷하지만, 아보카도 소스의 깔끔하고 달콤한 맛을 첨가한 녀석.
짠 맛의 패티와 달콤한 아보카도 소스의 조합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한국 맥도날드보다는 훨씬 낫고.
맛과는 별개로, 이 사람들의 아메리카 햄버거에 대한 정의가 대체 뭔지 먹을때마다 궁금해지긴 한다.



다자이후(太宰府)로 가는 방법은 조금 귀찮다.
한국 관광객이라면 3일간 버스 무제한인 산Q패스나 철도 프리패스를 많이들 사용하는데
다자이후는 양쪽 모두 사용하기 곤란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철도 프리패스는, 다자이후까지 가는 철도가 프리패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철이라서 의미없고
산Q패스로는 다자이후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중간에 내려서 좀 걸은 뒤 마을버스를 100엔 내고 또 타야 한다.

이번 여행중 내가 계획한 코스를 비교해 보니 산Q패스 구입해봤자 잘해야 본전치기 수준이라
그냥 개별적으로 요금 내기로 하고 마음편하게 전철을 탔다. 하지만 이 전철도 중간에 갈아타야 한다.
이곳 후츠카이치(二日市) 역에서 내린 후 다자이후가 종점인 전철을 타면 된다.
왠만해서 철도를 타면 자리에 앉거나 졸지 않는 성격인데, 멀미의 영향도 있고 해서 체력이 거의 바닥이라
자리에 앉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든 탓에 자칫하면 후츠카이치를 지나칠 뻔 했다.

큐슈의 쿄토라는 별명이 붙은 다자이후는, 그 명성에 비해 주변 주택가가 꽤나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 후츠카이치 역도 대부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서 있을 뿐, 여행객의 모습은 그닥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일본은 한창 졸업 시즌이라서 여기저기 학생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완전히 외진 곳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일본은 아직 무인역이 많다) 이런 적당히 낡아보이는 역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다.
여기저기 낡은 모습이 보여도 그게 더렵다는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점이 예전부터 마음에 들었기 때문.
약간 강박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쓰레기나 껌딱지 등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화려한 타일과 사이버틱한 공간을 연출하는 새로운 역도 시커먼 껌딱지가 붙어있으면 보기 흉하다.
낡은 것과 더러운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걸 이런 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자이후까지 와서도 날씨가 그닥 좋아질 기미가 없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사진 욕심일 뿐이고, 감상에 큰 지장은 없으니.
후츠카이치 역까지 한산했던 모습은 다자이후 역에 내리자마자 꽤나 시끌벅적하게 변한다.
일본은 지금 4일 연휴기간에 졸업식까지 겹쳐서, 날씨가 좋지 않아도 여행 인구는 꽤 붐비는 편이다.


원래같았으면 그런 이유로 훨씬 더 붐벼야 정상이지만
지금이 딱 만개할 시기인 벚꽃이 올해는 겨울의 추운 날씨로 인해 1주일 정도 늦게 핀다고 하니
봄의 여행에 벚꽃이 없으면 라면먹고 밥 안말아 먹은 듯한 느낌을 받는 일본인들에게는 큰 손실일 듯.

사실 다자이후의 벚꽃은 유명해서, 사방팔방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게 무척 아쉬웠지만
내가 기후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가는... 게 아니라 즐길 수 밖에.


조그마한 토리이 사이로 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고 이제부터 진짜 여행 시작한다는 느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