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묘기를 감상한 후 천천히 텐만구 본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들어가기 전에도 매화나무는 여기저기서 보이니 서두를 것 없다.
이 때쯤 되니 정신이 더욱 몽롱해 지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왜 찍었는가 가물가물한 사진들도 가끔 보이더라.


본전으로 통하는 입구가 이 정도로 화려한 텐만구는 별로 없다.
텐만구 주위를 살짝 감싸는 나즈막한 산의 푸른색과 매화의 흰색, 무거운 붉은색의 입구의 조화는 실로 아름답다.
여기에 푸르른 하늘만 더해졌으면 좀 더 넓은 사진을 담았을 테지만... 우중충한 회색 하늘은 살짝 빼버리는게 나은 느낌.


매화나무 아래에 앉아 있어서 그런가, 조금 전의 황소보다는 좀 더 여유가 느껴지는 듯 하다.
뒤에는 봉납된 일본 전통주들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보통 신사들은 저 봉납주들을 좌르륵 배치함으로써 '나 이런 신사야'라는 듯한 위엄을 자랑하는데
이곳 텐만구는 어쩐 일인지 그다지 시선을 끌지 않는 곳에 소복히 배치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신성하고 위압적인 느낌보다는 운치있고 친근한 느낌이라서 그럴까.
아마 이곳을 대표하는 매화의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암약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만개하진 않았어도 매화는 매화. 꽃은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다울 뿐이다.
곤충으로 치면 탈피, 인간으로 치면 출산이나 마찬가지인, 응축한 생명력을 목숨걸고 일시에 폭발시키는 행위인데
어떤 종이든 그것은 역시 숭고하고 아름다운 듯.


본전 쪽으로는 좀처럼 발길이 가지 않는다. 주위에 담고싶은 풍경들이 자꾸자꾸 나타나서.
바다 건너서 관광지까지 왔으니 뭔가 본전을 찾아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사라지고
그냥 발걸음과 시선이 이끄는 대로 터벅터벅 걸어다니며 풍경을 즐기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텐만구 바로 옆 골목길에는 조그마한 노점상들이 타코야키나 옥수수구이 등을 팔고 있다.
가끔 아이스크림이나 타코야기 들고다니며 먹는 젊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다자이후 텐만구 안에는 쓰레기가 단 한조각도 없었다.
입구 바깥에서 담배피던 개념없는 한국인 관광객 무리를 제외하면.
이게 그렇게 어려울 일일까 항상 궁금하긴 했다. 나도 태어나서 한 번도 공원내에서 쓰레기 버린적이 없는데.

이런데서 쓰레기 한번 버려주지 않으면 금연이나 금주중인 사람처럼 초조하고 안절부절한 걸까?


160종이 넘는 매화라고 하니 정말 신기한 녀석들이 간간히 보인다.
매실 따먹으려고 매년 봄에 전지하던 매실밭 녀석들도 가만 놔두면 이렇게 되는 건가?
풍류를 즐기려면 전지를 포기하고 1년 정도는 이렇게 매화가 만발하도록 놔두는 것도 괜찮긴 하겠는데.
물론 그 다음해 전지에서 지옥을 맛보게 될테니 그냥 우리 밭의 매실나무는 매실만 튼실하게 자라나주길 바랄 수 밖에.


조그마한 연못엔 거북이가 부족한 일광욕중이다. 바닥의 상태를 보니 올라와서 한참 지난 듯 하다.
상당히 멀리 있던 녀석인데, 사진으로 확인해보니 뒷다리를 집어넣고 한껏 느긋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주변에 드문드문 떨어진 매화잎사귀를 보니 이녀석도 풍류를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꽃을 볼때면 아무 생각도 말도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냥 보고 즐기면 그걸로 행복하다.


매화는 아직 봄을 알리기엔 조금 이른 듯 하지만
대지와 가까운 곳에서는 분명히 봄이 느껴진다.
다들 매화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기고 있지만 이 녀석들은 묵묵히 제 할일을 하는 중.


본가 매실밭에서 꽃잎이 몽글몽글할때 새순들을 전지해 버린 기억이 있어서
이게 매화인지 벚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활짝 피려고 준비중인 녀석들이 반갑다.
매화는 눈이 호강하고, 매실은 배를 채워주니 어느 쪽으로든 좋은 녀석들이다.


한참동안 꽃구경하며 돌아다녔더니 아직 본전쪽으로는 이동하지도 못한 상태.
잠 하루 안자고, 배멀미에 시달리고 나면 체력이 이렇게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중이다.
저녁엔 친구한테 부탁받은 것들을 둘러보러 번화가인 텐진(天神)으로 가 봐야 하기 때문에
꽃구경도 좋지만 이제 슬슬 진도를 나가볼까 한다.


오랜 방황끝에 본전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좀 번들번들해 보이던 입구와는 달리 본전쪽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중후한 느낌이 든다.
오른쪽의 매화나무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사후 하룻밤만에 쿄토에서 이곳까지 날아왔다는 그 매화나무.
그래서 이름도 토비우메(飛梅)라고 한다. 거 참 빠르기도 하지.


토비우메보다는 이 녀석이 주변 환경과 참 잘어울려서 한 컷 담아봤다.
본전의 왼쪽에 분홍 매화, 오른쪽에 흰 매화라. 참 운치있는 광경이다.


본전 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이것.
점점 커가는 매화나무를 위해 울타리 부분을 뚫어낸 마음가짐이 훌륭하다.
소소한 배려지만, 그 덕분에 하나의 조각상과 같은 조화로움이 눈길을 끌게 한다.
다자이후 텐만구의 깊은 역사와 훌륭한 경관은 이런 세심함이 있었기에 더욱 빛이 나는게 아닐까.


일본 신사에 들어가서 이 에마(絵馬)를 카메라에 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원래는 진짜 말을 봉납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겐 꿈도 꾸지 못할 헌물이었고 신사 측에서도 말의 관리에 힘들어했기 때문에
나무나 종이에 말을 그려서 대신 봉납하던 관습이 지금의 에마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 신사의 주요 관광 수입원중 하나.

신사에 들르면 여기서 재미있는 소원이 적힌 에마를 찾아보는게 빼먹을 수 없는 즐거움인데
텐만구의 총본산인 이곳은 그야말로 거의 대부분의 소원이 성적에 관련된 것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다.
한글로 써진 에마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높은 확률로 커플의 염장질이 낳은 산물일 가능성이 있다.


신에게 비는 소원이란 개인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시길.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이 정도 내용이라면 이곳의 신도 납득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에마를 본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이라는 내용이다.
이 녀석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조금은 행복해 진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 소원은 이루어 졌겠지.


글씨를 보니 어린아이가 적은 에마인 듯 한데...
아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씨도 대체 이 녀석이 뭘 빌었을지 궁금해 했을 듯.
뭘 어쩌라고?


본전 주변은 조형적으로도 그렇지만 색상의 조화가 훌륭하다.
일본에서 가장 신성하다는 이세 신궁을 비롯해 상당수의 신사들 중
이렇게 알록달록한 신사는 손에 꼽을 정도니까.

영험한 색으로 여겨지는 붉은 색의 건물과, 그 주위를 매꾸는 푸른 숲이 일본 신사의 기본 배치인데
수많은 매화꽃이 더해지니 좀 더 친근해지는 느낌이다. 일본의 신사는 이 정도로 어깨의 힘을 빼는게 좋다.


만족스럽게 구경후 왔던 길을 되돌아 텐만구를 빠져나가는 중.
같은 길이지만 방향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전혀 달라진다.
이건 신사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라는 것을 자전거 여행중 깨달았다.
도쿄와 나고야를 왕복하던 도중, 급하니까 이건 돌아올 때 찍어야지 하고 지나갔던 것들은
돌아오면서 보니 그 때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라서 '이 곳이 정말 그때 그 곳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센다이 주변의 인심좋은 모텔 아주머니가 인생의 교훈으로 삼던 '一期一会'라는 말과 일맥상통 할 듯.


가던길에 담았던 중요문화재 지하사의 모습도 한번 더 담아본다.
보수야 수도 없이 거쳤겠지만 600년 전의 목조 건축물이 이 정도 수준으로 보호되고 있다는 것은 감탄할 만 하다.

건축 당시에는 이 앞에 불단과 금으로 만든 제구들을 놓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지구상의 금속 중 가장 안정화된, 자연적으로는 결코 부식되지 않는 불멸의 상징인 황금은
아마도 인간의 욕심때문에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고 쉽게 상하는 나무재질의 사당만은 600년동안 살아남아 전해지고 있다. 역사공부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닐까.


이끼와 풀로 덮힌 나무의 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에 든다.
일부러 찾아다니진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본 기억이 없는 모습.
나쁘게 보면 나무에게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살짝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리얼한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어서 좋다.


이 정도 되면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미술 작품이 되는구나.
나이테는 나무를 잘라내야 확인할 수 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저절로 나이가 연상되는 듯 하다.

시각은 5시 쯤이라 여유가 있는 편인데, 체력적인 여유가 많이 부족해서 슬금슬금 텐만구를 빠져나온다.
사실 다자이후에 온 이유가 이곳 텐만구 이외에도 하나 더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널널한 것도 아니다.
친구에게 부탁받은 물건은 오늘 중으로 구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일단 가게 위치와 판매 여부 확인차라도 7시 반 정도까지는 텐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서 텐진까지는 30분 조금 더 걸리기 때문에, 살짝 조급만 마음과 파들어가는 안구를 진정시키며 텐만구를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