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도 충분히 잤겠다 편안한 기분으로 일어난다. 무료 조식을 먹으러 가는건 언제나 기분좋은 일.
관광 시즌이라 그런지 한국, 일본, 중국 관광객들 덕에 1층 로비는 가득가득하다. 어쩔 수 없이 합석할 수 밖에.
사실 토요코인 호텔은 처음엔 조식 시스템이 없었는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뒤늦게 조식 시스템을 도입하는 바람에
예전에 만들어진 호텔들은 대부분 1층 로비에 테이블을 차리고 있어서 좌석 여유가 별로 없다. 합석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울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대의 부부와 밥을 먹다가 아내분이 슬그머니 말을 걸어오신다. 부산보다 5배 정도는 먼 오키나와에서 오셨다고.
작년 자전거 여행때 오키나와도 갔다고 말씀드리니 남편분이 '그럴때는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연락해서 이러이러한 여행중이니 취재해보라'
고 연락을 주고 그걸로 유용한 맛집이나 숙소, 관광지 정보를 얻고, 운 좋으면 출연료도 받아먹고 하는게 좋다고 조언을 해 주신다.

본인 성격상 매우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 때의 빈곤함을 생각하면 역시 얼굴이 두터워야 여러가지로 편한 것은 사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날씨만큼이나 낙천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눈 딱 감고 그렇게 해 보는것도 좋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나가노현에서는 뭐 신문 기사에도 실리고 하긴 했지만.

8시 50분 유후인발 버스를 타고 2시간 20분동안 달리고 달린다.
한국인 관광객 몇 명을 포함해서 10명을 넘지않는 승객들을 보고, 유후인은 지금 쫌 널널한가 하고 기대를 품는다.
그냥 승용차였다면 1시간 40분만에 도착할 듯. 중간에 정차하는 곳도 많고 하타카 시내에서는 몇군데 빙글빙글 돌도 출발하기 때문.
큐슈엔 그런 곳이 많긴 하지만, 인기척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한적하고 빡빡한 숲과 산의 광경도 훌륭하다.

유후인에 도착해서 다시 버스 터미널 안 매표소로 들어간다. 어제 표를 발행할 때 돌아오는 티켓은 시간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버스가 오후 5시인데, 그때 갔다간 부탁받은 물건 쇼핑할 시간이 너무 촉박할 것 같아서 4시 버스를 부탁했다.
그러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유후인 역과 버스터미널은 바로 붙어있는걸 알 수 있었다.

검은색 목조 건물인 유후인역은 관광지답게 신경을 많이 쓴 느낌. 버스 안에서의 예상과는 달리 자가용이나 기차로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은 아쉽다.
저 위층엔 뭐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여행하는동안 깔끔하게 까먹어 버리고 역안으로 들어가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낙담하기도 했다.
대기중인 택시가 유후인 역만큼이나 인상적인 녀석이라 슬그머니 프레임에 넣어본다.


이곳에 대한 기대치는 다자이후 못지않게 높았지만, 그 기대치의 종류가 조금 다르다.
다자이후는 텐만구와 스타벅스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일반적인 관광처럼 평소 보기 힘든 것들을 감상하기 위한 일종의 사명감이 있었다.
유후인(湯布院)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대표적인 온천 휴양마을. 용출량이 일본에서 3번째로 많은 곳이다.
이곳에 대해선 사전에 조사한 것도 없고 가보려고 마음먹고 찾아본 곳도 없다.
단지 깊은 산골마을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하며 순수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왔기 때문에 시간에 쫓길 일도 없다.
그냥 발걸음 가는대로 하염없이 걸어다니면서 이 아담한 마을의 분위기에 잔뜩 취하는 것이 오늘의 유일한 목표.

물론 천연온천이 솟아나는 분위기좋은 여관 같은곳에서 주인장이 차려주는 호화 요리를 먹으며 별빛을 바라보는
그런 호사스러운 휴양만큼은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오늘 둘러볼 유후인은 온천 명소가 아니라 그냥 평온한 시골 마을인 셈이다.

사실 자전거 여행이 그렇듯, 유명 관광지를 바쁘게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눈과 머리에 집어넣는것 보다 이런 여행을 더 좋아한다.
자랑할만한 스팟도 없고 사진이 뿌듯하게 나올만한 포인트도 없지만, 기본적으로 여행이란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것.
관광과는 관계없는 시골 사람들이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는 곳이라도 나에게는 주변 가로수, 주택가의 지붕, 낯선 표지판 하나가 전부 볼거리니까.
한국과 닮은점이 많은 일본의 풍경이지만 사실 조금만 꼼곰히 뜯어보면 같은 부분을 찾기가 힘들다.
사람과 사람의 이어짐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마을이란 결코 같을수가 없다. 비슷할 수는 있지만 근본은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유후인 역에서 유후다케 산쪽으로 쭉 이어진 관광로를 벗어나서 살짝 평범한 주택가를 돌아봤다.
처음부터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일단 시골마을 유후인의 모습을 먼저 눈안에 새겨놓고 싶었으니까.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하고, 마을은 깔끔하다. 전봇대 옆의 불법 투기물도, 하수구 근처의 담배꽁초도 없다.

대여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저런 녀석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광경만 봐도 이 유후인이라는 곳의 특징은 대강 설명이 가능할 듯.
동물들이 사람의 거주지 앞에 거리낌없이 서 있는 마을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타입이지. 겉치레가 없는 솔직한 마을이니까.
물론 곰이나 맷돼지까지 마을 복판에 내려와서 내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적도 있긴 한데, 그래도 일단 좋다.


약 20분간 일반 거주지를 슬쩍 둘러본 후 본격적인 관광 궤도에 올랐다.
유후인 역을 나서면 정면에 보이는 유후다케 산은 이곳 마을에서 신성시 되는 산으로 유명하다.
역사가 깊고 외진 마을에는 이렇게 마을에서 영산으로 추앙받는 산이 있다.
굽이치는 산맥의 아름다움이 유명한 한국의 명산과는 달리 이렇게 영산으로 추앙받는 산들은 대부분 고고하게 솟아있는 편이다.
그리고 대부분 한밤중 2~3시에 산을 올라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면 좋다는 이야기도 영산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얼핏 들은바 이 유후다케 산은 이 부근 토박이들에겐 위엄있는 산이라기 보다는 이 마을을 있게 해주는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을 느끼는 산이라고 하더군.
유후다케 산에서 뻗어나온 완만한 능선이 마을을 감싸안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

날씨는 흐리지만 그 휴우타케산을 담기 위해 건널목 한가운데서 카메라를 쳐들었는데
사진에 보이는 자동차가 반대편 차선을 넘어서 나를 피해가는 모습이 들어와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에 뒤에 차가 있는줄도 몰랐는데, 경적도 울리지 않고 그냥 스윽 돌아서 가 버린 것.


조금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인파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온천으로 유명해진 농촌마을이란 어떤 이미지일까 마음 속에서 상상해 본다.
척박한 땅도 아니고, 대대로 농사 짓고 살아오는 곳이지만, 솟아나오는 온천 덕에 관광객은 항상 몰려든다.
자연스럽게 마을은 타지역보다 적당히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을 얻게 되겠지.

하지만 이곳은 교통의 요지도, 정치의 요지도 아닌 외지인 탓에 외부에서 오는 사람도, 외부로 나가는 토박이도 별로 없다.
몇 대째 농업에 종사하며 조금 여유로운 생활에 만족할 뿐. 야망이 없는 넉넉함에서 오는 느긋함이 이곳의 특징이라고 할까.
유후다케 산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넉넉하고 소박한 마을 풍경에서 느껴지는 듯 하다.


가게 옆에서 솟아나는 작은 온천물에 삶은 계란이 놓여져 있다.
계산은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는데, 사실 이곳은 가게 안에서 눈에 확 뜨이는 곳도 아니고
관광 거리 바로 옆이라서 유동인구도 굉장히 많다. 그냥 가져가 버려도 눈치 못 챌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옆에는 계란을 떠담을 국자와 바구니까지 체인에 연결도 되지 않은체 덩그러니 놓여있다.
역시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든다.


유후다케산을 지표로 해서 쭈욱 걸어나가다 보니 점점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의 수가 줄어든다.
사실 중앙 거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이렇게 여느 평범한 시골 마을과 다를바 없는 풍경이 바로 펼쳐진다.

이곳이 관광지로 유명하긴 하지만, 적어도 관광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은 아니다.
자전거 여행때는 각인될 정도로 숱하게 봐 왔던, 친근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던 평범한 마을의 모습.
촉박한 일정에 맞춰서 여기저기 버스와 기차로 옮겨다니며 워프라도 한 듯 관광지를 찾아다닐 때는 좀처럼 지긋하게 바라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 덕에 일반 주민들을 위한 상가도 당연히 들어서 있는 탓에
무인도 외에는 일본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파칭코점 역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년간의 자전거 여행동안 '세상에 이런 촌구석에도 파칭코냐'라고 할 만한 상황을 워낙 많이 만나서,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설마 유후인에 와서 파칭코 가게에 들어갈 외국 관광객은 없을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여기서 들어가보면 어느 누구도 경험못할 체험을 한 셈이 되니, 튀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관광지의 모습이 거의 사라져가는 무렵, 조금씩 카메라의 뷰파인더에서 살짝 이질감이 느껴진다.
손가락 끝의 정전기보다도 미세한 느낌이지만, 사진을 재생해가며 결과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 가슴에 걸린다.
사진을 담을 때는 이렇게 본인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미세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게 좋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담으려고 했던 것과 어딘가 달라보이는 느낌. 사진은 이런 사소한 것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높아진다.


정확하게 이거다 싶을 정도로 그 원인을 파악할만큼 본인의 내공이 출중한 편은 아니라서
잠시 고민해 보다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 어색함의 원인은 렌즈의 화각 때문이라고 판단해 두기로 했다.
유후인에서 이제까지 찍은 것들은 넓은 풍경을 한눈에 담아주는 광각 단렌즈를 사용했는데
내가 걸어다니면서 눈으로 느낀 유후인이라는 마을은 이 광각렌즈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특징없는 평범한 민가, 깔끔한 골목길, 아기자기한 마을의 풍경을 보던 나의 시선은 이것보다 좀 더 좁고 집중되어 있었던 듯 하다.
한 장에 많은 것을 담아내고, 사물을 좀 더 웅장하고 넓게 표현해 주는 광각렌즈는 이 마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마을의 조각들 하나하나를 담아내는 것이 이 유후인이라는 마을을 표현하기엔 어울린다는 느낌.
그래서 일단 표준화각 단렌즈로 갈아끼워 본다. 40년전에 만들어진 완전 수동 렌즈는 아무래도 유후인과 나 사이의 시선에 더 어울릴 것 같다.


친숙한 편의점이 있는 곳까지 걸어오자, 그 앞에는 인도라고 할 만한 길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다.
더 앞으로 나가면 아마 유후다케 산과 그 주변의 온천, 여관등이 나타날 법 한데
그 옆 표지판에는 킨린코(金鱗湖)라고 하는 호수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
아마 유후인의 유명한 호수인듯 한데, 이 정도에서 킨린코로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걸음을 옮긴다.

킨린코 호수는 몇백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래도 그 짧은 거리 사이는 느긋한 민가와 유유히 흐르는 수로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조금 늦잠자고있는 봄이란 녀석이 야속하긴 했지만, 화려하게 만개한 것 보다 이렇게 움트는 듯한 모습도 좋다.
집 앞마당에 이런 녀석이 서 있어서, 집주인 본인에게나 나처럼 슬쩍 들른 관광객에게나 좋은 눈요기거리가 되는 건 참 기분이 좋다.
그럴듯한 담도 없는 집이라서 훨씬 더 푸근한 느낌이라고 할까.


민가는 아니지만, 가게를 차린다면 이런 디자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멋진 녀석이다.
창틀의 매마른 가지마저도 멋진 장식이 되는데, 저 녀석들이 푸른 색으로 솟아나는 시기엔 얼마나 멋진 조합이 될 것인가.
대도시에선 별로 어울릴것 같지 않은 건물이지만 유후인의 분위기를 표현하기엔 딱 적당히 푸근한 녀석이다.

킨린코 호수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사라졌던 관광객들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뭐랄까, 분비된 호르몬을 따라 정확하게 구역이동을 하는 개미가 연상되는 듯 하다.
일단 관광지에서 인적이 없어지면 루트를 벗어났다는 말이 되니, 사람이나 개미나 별로 다를 것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