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린코 앞엔 마르크 샤갈 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피카소와 쌍벽을 이루는 근대화가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문제는 내가 아는 샤갈의 작품은 '마을과 나' 하나밖에 없고, 그 작품이 이곳에 있을리가 없다는 것.
가벼운 습작을 많이 남긴 샤갈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곳 미술관의 작품들 역시 그런 부류일 듯 하다.
외관도 마음에 들고 테라스에 까페도 있어서 들어가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입장료가 있고 날씨탓인지 까페가 바깥과 차단되어 있다는 아쉬움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역 앞의 거리 이후로 관광객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지만
킨린코의 첫 모습은 딱히 인상적이라기 보다는, 소박하고 정갈한 느낌을 한 약간은 담백한 호수였다.
영양상태가 좋은지 물속엔 상당히 많은 수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예전 홋카이도의 시코츠 호수는 입이 딱 벌어질만한 장관이 여기저기 펼쳐졌지만, 반영양호였던 탓에 수중 생물이 거의 살지 않았었는데
이곳은 천혜의 환경과 온천수의 풍부한 미네랄로 인해 물고기들이 신나게 번성중인듯 하다.
호수 너머에 보이는 까페인지 여관인지 모를 건물이, 사방 자연으로 덮힌 이곳에서 사람냄새를 조금 풍기고 있다.
만약 여관이라면 여유있을때 하룻밤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호수를 바라보며 즐기는 저녁과 아침풍경이 참 매력적일 듯.
크기는 좀 작다고 할 만한 호수인데, 분위기에 맞게 아담한 산책로가 이어져 있다.
호수 바깥으로 빠지는 개천에도 물 속의 바쁜 움직임이 보인다.
물고기에게 먹이 주는 시스템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으로 이만큼 풍부한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이른 봄이지만 역시 이곳 유후인이라는 곳의 풍요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지금의 풍경도 훌륭하지만 초여름쯤의 킨린코의 모습이 심히 기대된다.
샤갈 미술관이 초라해질 정도의 미려한 풍경화 한 장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 하다.
아무리봐도 민가로 보이는 집들이 몇 채 있는데, 센텀시티나 광안리의 주상복합 아파트보다는 조금 더 부럽다.
호수를 돌아볼 때면 항상 담아오는 사진이 있는데, 이렇게 수면에 입을 맞추고 있는 나무의 모습.
반영사진 등을 찍어도 재미있겠지만 어쩐지 이 모습이 예전부터 마음에 든다.
특히 잎이 만개한 소나무가 지긋한 곡선을 그리며 수면에 살짝 걸터앉은 듯한 모습이 최고.
일단 킨린코를 한바퀴 정주행했다. 좀 전에 보이던 가게 쪽까지는 가지 않고. 거기선 호수가 안 보이는것 같아서.
얼핏 화장실로 보일 정도로 조그마한 무인 신사가 킨린코의 마지막 코스를 장식하고 있다.
무인이든 유인이든 신사 앞의 소원 종이는 항상 나뭇가지에 걸려 있군. 한 녀석만 빨간게 눈에 띈다.
지인과 함께 저녁즈음 이곳을 찾았다면, 저기 걸터앉아 맥주 한 캔과 담배 한개피로 킨린코를 안주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봄에 피지 않는 녀석인 걸까. 개화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은행잎과 닮긴 했지만 크기를 봐선 아닌 듯 싶고.
자연계에서도 이렇게 아웃사이더적인 녀석이 있어야 좀 더 재미가 있지.
킨린코는 산책하기엔 그만인 코스지만, 이곳 유후인이 그렇듯 특출난 포인트를 가진 곳은 아니라서
호수를 즐기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민가 근처의 수로를 감상하거나 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더욱 좋을 듯.
신사는 정말 아무것도 없지만, 신사보다 이 나무가 훨씬 더 영험해 보인다.
나만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신목이라고 불러도 무리없을 정도의 거대하고 쭉쭉 뻗은 모습이 인상깊다.
신성하고 영험한 것은 아무래도 좋은데, 뻗어있는 모습이 참 건강해 보여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 녀석도 몇 백년은 되었겠지. 사람의 주름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은 피부를 보면
얘네들도 속으로는 어느 정도 사람에게 익숙해져서 담담한 느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도 해 본다.
눈썰미가 좋은 분들은 킨린코의 첫 사진에서 저 조그마한 토리이를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신사도 아담하기 그지없는데, 물 위에 세워진 저 토리이도 아담함의 극치를 달린다.
일본 3대 절경중 하나라는 이츠쿠시마(厳島) 신사 앞의 거대한 물속 토리이와 극단적으로 비교되기는 하는데
킨린코의 배경에는 요 정도 녀석이 정말 딱 어울린다.
이 토리이를 지은 사람이 돈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지었으면 재미없을 뻔 했다.
이곳까지 왔으면 일단 킨린코 산책은 마무리. 돌아가기전에 거목 한장 더 남긴다.
킨린코 옆의 산책로로 빠질 수 있었지만 일단 왔던 길을 조금 더 되돌아간다.
그 조그만 물 속 토리이를 제대로 담은 사진이 없었기 때문. 신사 앞에서 망원렌즈로 무장을 변경하고 진군.
훗날 돌아와서 저 간판의 킨린코 소개글을 읽어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로,
원래는 유후다케(由布岳)산의 기슭에 위치한다고 해서 '산 밑의 연못'(岳下の池)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는데
모리 쿠소(毛利空桑)라고 하는 유학자가 저녁무렵 이곳 물고기들의 비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고 킨린코(金鱗湖)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방금 전 지나쳐 온 곳과 동일한 곳에서 찍은 사진. 저 위쪽은 광각으로, 이건 망원으로 담았다.
나무들은 본능적으로 물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일까.
적당히 담을만한 장소까지 와서 망원을 최대한으로 당겨 신사와 토리이를 담는다.
킨린코의 아담함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역시 여기는 저 정도 토리이가 제일 어울리는군.
가끔 완전히 물 속으로 도망쳐버린 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들어가 버리면 썩어버리는데, 그럼애도 나뭇가지 위로 새로운 생명들이 자라나고 있다.
킨린코 산책코스를 막 빠져나오려는 순간 묘한 모습의 꽃이 눈에 들어온다.
그다지 본 기억이 없는 꽃이고, 모양이 신기해서 한참동안 바라본다. 해바라기같은 두상화인듯이 보이는데
중앙부가 아직 덜 핀건지, 저게 만개한 모습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힘들다.
꽃 이름이라도 적혀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냥 반 야생화처럼 피어있던 녀석이라서 그런 거 없다.
아마 이곳 주변에서 피는 꽃일테니 산책하다보면 좀 더 마주일 일이 있을거라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킨린코를 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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