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게 털어놓는 느낌이 있지만, 약 40시간의 수면없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건
그래도 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다자이후 여행에서 텐만구만큼이나 기대하고 있는 스타벅스 때문.
일본 텐만구의 총본산이자 큐수 최고의 역사와 전통의 도시 다자이후.
작년 겨울, 그 중심 상가인 오모테산도에 스타벅스가 들어섰다.
나처럼 일본쪽 전공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상당히 큰 충격이었을 터라고 생각.

블로그에 써갈기는 글은 따로 자료를 준비한다거나, 초본을 완성하고 수정해 나간다거나 하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냥 그때그때의 감정을 크로키하는 기분으로 기록하는 반 개인적인 수첩과도 같은 곳이니까.
하지만 이번 다자이후 텐만구의 스타벅스에 대해서 썰을 풀자면 좀 더 깊숙한 곳부터 시작해야 할 듯 하다.
이것도 최소한도의 설명이긴 하지만, 이 정도조차 하지 않으면 이 스타벅스가 가지는 의미를 전달하기가 어려워서.


일단 한대 맞고... 가 아니라 한번 보고 시작하자.

일본의 오모테산도 거리는 일반적으로 신사나 유명 관광지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상가 거리를 일컫는다.
아닌 곳도 있지만 이런 상점 주인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혹은 대를 이어서까지 같은 장소를 지켜가는 부류가 많다.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오모테산도 거리는 상당히 배타적이고 완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깊은 신사로 들어가는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이곳은, 사회 계층적으로 보면 하급 상인들의 생계형 가게였지만
신사의 역사와 전통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동질 의식을 가지고,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노력해 왔다.

반대로 그런 가게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은 조악하고 고급스럽지 않은 부류에 속한다.
지역의 특징을 살짝 가미한 가벼운 간식거리나, 정성을 들였다고는 하지만 단가가 높지 않은 잡동사니들이 주력.
이는 현대에 와서 도쿄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아사쿠사의 상점 거리에서 쉽게 관찰해 볼 수 있다.
동네 문방구에서나 팔 법한 플라스틱 권총, 뜬금없는 드래곤 볼 장난감 등등...
신성한 신사 앞에서 만나볼 수 있는 물건들 치고는 위화감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는, 애초에 신궁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사가 원론적으로 엄격한 곳이 아니었다는 이유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신토라는 일본의 종교가 - 비록 종사자들에게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고 있다고 해도 -
서민들에게는 단지 삶의 애환을 풀고 힘겨운 현실의 짐을 잠시 내려놓는 휴식처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축제날 불량식품이나 만들어 팔고, 소소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던 하층민들의 가게에서 값비싼 명품을 판매할 이유가 없었던 것.

얼핏 보면 뭔가 모순적인 듯 하지만, 이 두 부분을 떼어내고 나면 의외로 간단하다.
상가 사람들은 그곳의 신성함과 엄숙함을 존경하고 지켜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쌓아올려진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다.
신성함과 엄숙함은 신사 안에 들어가서 마음껏 즐기면 되니까.
따라서 터무니없는 사기를 치지 않는 한, 서민들에게 즐길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오모테산도 거리는 격식에 관계없이 마음 편한 상품과 먹을거리를 내 놓는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스타벅스라는 세계적 브랜드를 이 공식에 대입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까.
커피라는 소재 자체는 현재의 일본에게 위화감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이곳 텐만구 거리에는 근 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커피점도 있다.
문제는 스타벅스라는 브랜드 그 자체에 있다. 이 브랜드는 위에서 말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토박이 상인들과는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에.
스타벅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책이 서점을 점령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보시길.

완벽하게 이질적인 외국 브랜드의, 큐수 제일의 전통 거리 진출이라는 화두는 작지만 거대한 도전이자 실험이다.
기자 딱지라도 차고 있었다면 주변 상가 주인들과 인터뷰라도 하고 싶었을 정도로, 스타벅스의 진출에 대해 한마디 들어보고 싶었다.
과연 이것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이곳으로 들어가서 세계적으로 통일된 브랜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어떨 것인가.


스타벅스의 마케팅과 경영방침은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고 끊임없이 벤치마킹될 정도로 유명하다.
스타벅스가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 브랜드가 된 이유는 커피가 맛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3rd place' 의 이념이 현대사회의 피곤에 찌든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간 것이다.
집, 직장에 이은 세 번째의 장소. 집이나 직장처럼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가지고, 여유와 편안함을 구가할 수 있는 장소를 추구했기 때문.

이와같은 '3rd Place'의 개념을 잘 생각해 보면, 위에서 언급한 오모테산도의 서민적 휴식공간과 사실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외국계, 범세계적이라는 이질성을 제외한다면 스타벅스야말로 이런 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갈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단 하나. 브랜드의 특수성에서 오는 이질감을 어떻게 해소하고 이 거리에 녹아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신사 오모테산도의 입점, 그것도 텐만구의 총본산이자 큐슈의 역사도시 다자이후의 입점이다.
이 무게를 떠안을 수 있는 방법으로 스타벅스는 우직하지만 확실한 직구로 승부수를 던졌다.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쿠마 켄고(隈研吾)에게 디자인을 맡긴 것.
이 사람의 건축에 대한 지론은 '자연스러운 건축', '약한 건축' 등등의 책이 번역되어 있으니 참고.
쿠마 켄고의 지론은 확고하다. '자연스러운 건축은 그것이 지어지는 장소와 행복한 관계를 가지는 건축이다.'

사실 건축가의 지론은 한 번쯤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으나, 이것에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요소가 있다.
그들의 건축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껴야 한다는 것. 이거 없이는 단순한 이론서에 지나지 않고, 건축가의 의지를 느낄 수 없다.

스타벅스가 이곳 다자이후 텐만구 오모테산도 지점의 디자인을 그에게 맡긴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에 틀림없다.
위에서 열거한, 스타벅스 입점에 대한 이곳의 항원반응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쿠마 켄고의 지론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곳의 스타벅스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이곳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마치 수십, 수백년 동안 이 자리에 존재해 왔던 것 처럼 아무 위화감을 주지 않고 서 있어야 한다.
다자이후의 전통깊은 오모테산도와 행복한 관계를 가지는 자연스러운 곳이 되어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쿠마 켄고의 답변은 과연 훌륭하고 감탄할만한 녀석이었다.

다른 상가와 마찬가지로 얇고 가벼운 무채색 외관.
신사 등의 처마에 쓰이는 방식과 동일한, 못을 쓰지 않고 곧은 나무를 엇갈려 끼워맞춘 전통적 디자인.
외부에서 실내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이 나무의 흐름은, 긴 통로 형식으로 된 가게 안쪽을 지나 외부 정원으로 이어진다.
그 정원에는 다자이후의 상징인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다.
텐만구의 토리이와 연못을 통과해 현실 세계의 근심을 잊고 본전에 도달했을 때 펼쳐지던 매화의 향연.
쿠마 켄고는 스타벅스를 이곳과 융화시키기 위해, 이곳의 상징인 텐만구를 해석하고 재창조해낸 것이다.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찻집이라면 주위에 널리고 널렸다.
에도시대 지어진 고풍스러운 하이칼라 찻집, 낡은 테이블과 단정한 테이블보가 손님을 맞이하고
정장을 입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뽑아주는 커피 향기가 퍼지는 가게로 만들수도 있다. 그게 더 쉽다.
하지만 젊은 현대인이 그런 까페에 들어갔을 때, 스타벅스의 가치관인 '3rd Place'를 만끽 할 수 있을 것인가?
가볍게 잡담하고 최신 전자기기로 여가를 즐기며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단지 낡은 껍데기를 두른 가벼운 스타벅스일 뿐이다. 어떻게 해도 저 마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쿠마 켄고의 실험정신 가득한 이 스타벅스는, 범인인 나의 머리로는 어떻게 쥐어짜도
이렇게까지 조화로우면서 '3rd Place'의 개념을 상처입히지 않은 더 좋은 대안을 생각할 수가 없다.


정원쪽 자리는 사람들이 가득해서 사진 찍기도 뭐하고
건물 안쪽은 아무래도 태양광보다 조명이 열악해서 일기 쓰기에 좋지 않아
오모테산도쪽 바깥 테이블에 걸터앉아 주문한 커피와 함께 이 감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다니는 길 바깥에 앉아서 글 쓰고 있으니 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글 쓰는 도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대단해~'라고 외치며 사진을 마구마구 찍어댔으니
아마 그날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카메라 속엔 곰처럼 웅크리고 뭔가 깨작거리는 괴인의 모습이 많이 담겼을거라 생각.


스타벅스의 위험한 도전은 성공적이었다고 개인적인 평가를 내린다.
적어도 이 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이런 곳에 스타벅스라니'라는 식의 평가를 들어본 적은 없다.
머리를 비우고 걷다보면 이 곳이 스타벅스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자연스럽다.
문득 눈을 돌려서 이 곳을 인식하게 된다면 감탄과 환호가 저절로 솟아날 것이다.
이것으로 스타벅스는 이런 특수한 지역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매장에서 유용하게 통용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얻었을거라 생각해 본다.

시원한 커피 한잔 마시고 나니 그나마 제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 하다.


일단 보고싶은건 다 둘러봐서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간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이번 여행은 자금도 꽤 널널하고 해서 명물 군것질이라도 한번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자금이 많아서 널널한게 아니고 쓸 데가 없어서 널널한 것이니 오해는 마시고.
따끈따끈한 매화가지떡 하나를 사서 먹기전에 찍어본다.
우메가에모치((梅ヶ枝餅)라고 하는 이 녀석은 팥앙금이 든 찹쌀떡을 구운 것인데, 겉은 바삭하고 중간은 쫄깃하며 속은 달콤하다.


맛이 특출나게 좋아서 유명한 건 아니고... 먹으면 나쁜 기운이 사라진다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얽힌 설화등등 덕분에 이름을 날린다.
그래도 이곳 명물이라 허접하게 만드는 곳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으면 훌륭한 맛을 자랑하니 여기까지 온 이상 한개쯤 맛보는 것을 추천.


그닥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건물 자체는 에도시대에 지어진 유서깊은 찻집의 모습.
사실 위의 스타벅스 설명에 나온 하이칼라 찻집에 대한 묘사는 여기를 말하는 것이다.
느낌이 좀 중후하고 가격이 센 편이라는 소문인데... 다자이후의 정취를 느끼려면 이런 곳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전철역 앞 사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큐슈 라멘대회 1위한 집'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잠깐 망설이다가 들어가 버렸다.
후쿠오카 하면 하카타의 이치란 라멘이 너무 유명해서, 이번 여행의 라멘은 그걸로 정했었는데
다자이후보다 하카타쪽이 몇 번이라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 새로운 경험도 해 볼겸 시식해 보기로 했다.

단보(暖暮)라는 이름의 라멘집인데, 10시간 이상 끓여낸 돈코츠 국물에 특제 매운소스가 포인트라고 한다.
저 매운소스는 조금만 많이 넣어도 일본인들에겐 꽤나 괴롭다는 평이라, 매운걸 잘 못먹는 나도 조금만 넣어달라고 했다.

챠슈는 상당히 얇지만 말 그대로 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느낌. 맛이 아주 진하게 베여있다.
국물에 자신있다는 말답게 어마어마하게 진하고 제대로 우려낸 육수의 맛이 목을 자극한다.
매운소스와 적당히 섞이니 한국인이 시원한 목넘김이라고 표현할만한 칼칼한 맛도 일품이다.
단지 짜도 너무 짜다. 육수의 깊은 맛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짜게 만들었는지 조금 의아할 정도로.
일본 라멘에 매우 익숙해서 왠만큼 짠 녀석은 무리없이 즐기는 나로서도 이 집의 육수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맛없음을 짠 맛으로 가리는 수를 쓰는 건 아니고, 든든한 육수와 잘 뽑아낸 면, 부드러워서 녹아버리는 챠슈의 맛은 훌륭하다.
마음 단단히 먹고 자극을 원한다면 한국인도 한번쯤 즐길만한 라멘이라는 평가를 줄 수 있지만, 정말 상당히 짠 편이니 주의를 요망.


또다시 꾸벅꾸벅 졸면서 텐진에 도착. 정말 피곤해 죽겠지만 부탁받은 물건을 찾는 겸 해서 한바퀴 돌아본다.
후쿠오카 시민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할까. 전날 둘러봤던 부산의 센텀시티는 저리가랄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이 끝없이 즐비하다.
조금만 과장하면 도쿄의 긴자거리와도 차이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쇼핑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캐널시티란 곳도 쇼핑하기엔 참 좋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일부러 찾아갈 생각은 없으니 텐진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단지, 친구가 부탁했던 닌텐도 3DS의 게임 소프트는 대체 어디서 사야 할지 조금 막막하다.
도쿄에서 쉽게 찾아가던 아키하바라의 게이머즈나 소프맙, 애니메이트 등이 대체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단지 텐진에 매장이 있다는 말만 듣고 와 버렸는데, 텐진이 이렇게 넓은줄은 몰랐으니.

결국 한시간 반동안 텐진의 모습이나 구경하면서 걸어다니다가, 유명 체인점인 TSUTAYA에서 찾던 소프트를 발견.
내일저녁 시간이 한번 더 있으니, 좀 더 싼 녀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일단 위치와 가격만 확인해놓고 돌아나왔다.

호텔 앞 편의점에서 이틀동안 마실 음료수 한 병과 생수 한병, 피로회복용 초콜릿 한개 사고 들어오니 8시 반.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욕탕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조금은 제정신이 돌아온다. 오랜만에 보는 일본 버라이어티쇼도 나름 재미있다.
일본어가 조금 되다 보니 외국 방송 보는것도 신선해서 여행의 즐거움이긴 한데
침대에 누워 조금 보고 있으면 고개가 흔들흔들거려서 오래 버티진 못한다. TV 못보는 게 아쉬운 건 나로서는 참 희귀한 일.
내일은 7시에 일어나서 조식먹고 출발하면 되니까 새벽 1시쯤에 자도 문제는 없는데,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10시 반쯤 결국 리타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