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한가지에 빠져들면 아주 깊숙히 파고드는 성격입니다.

거기다 게으르니즘이 기본 옵션이라, 그 열정이 식는데도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죠.

그래서 또래 나이대에서 유행하는 것들에 대한 적응시기가 항상 평균보다 늦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카메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지난 번 사하라 사막 마라톤때 부터 카메라의 필요성을 조금 느꼈고

올해 말에 다녀올 장기간 여행을 위해 큰맘먹고 싸구려 똑딱이보다 조금 더 좋은 FZ18 을 구입해서 사용해 보니

이제 슬슬 카메라 성능에 대한 뽐뿌를 받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잠깐, 고성능 카메라에 대한 뽐뿌는 제 미숙한 카메라 실력을 감추기 위한 의도라기 보다는

하드웨어적인 요소를 파고드는 제 매니아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하는게 맞을 겁니다.

10년 전쯤부터도 당시 최고의 화질을 자랑하던 캐노퍼스의 그래픽카드를 보며 그 배선의 아름다움에 빠지곤

했으니까요. 다행히도 요즘엔 컴퓨터 하드웨어에 대한 애정이 조금 식은편이라.. 한창 파고들때는 국내

하이엔드급 부품이란 부품은 다 써봐야 직성이 풀렸었죠. DVI 단자가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에이조의 듀얼

DVI 지원 LCD 모니터를 사기도 했고 말입니다. (당시 18.1인치 구입가 330만원.. T_T)

이번 FZ18 을 사용하면서도 사실 이 카메라 성능의 절반조차도 못 내는 실력이란 거 잘 알고 있지만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신형 카메라들의 매력적인 스펙이 계속 끌리는 것은, 강조하지만 하드웨어에 대한

취미 때문입니다. (물론 저걸로 찍으면 허접한 실력을 성능으로 조금 더 가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요즘 뽐뿌를 받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DSLR 과 일반 컴팩트 디카의 성능 차이를 알아버렸다는 것이겠죠.

제가 FZ18 구입할 때만 해도 DSLR 과의 차이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몇번 찍다보니 금새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겠더군요.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은 DSLR 소식을 찾다 보니 니콘의 괴물 모델인 D3 를 필두로

요즘 디카시장이 아주 엄청난 속도로 발전과 경쟁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습니다.

대다수 초보자의 사진에 대한 소박한 염원은 역시 선명하고 깨끗한 사진 + 심도조절이 자유로운 사진 정도가

될 텐데.. 타 DSLR의 ISO800 정도의 화질을 ISO6400 에서 뿌려주는 D3 의 성능을 보고 섬뜩함마저 느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니콘의 플래그쉽 DSLR 'D3' 국내에서만 600만원 가까운 폭리를 취하고 있는 니콘때문에 평판은 최악이지만 성능은 현존 최강급.



물론 가격이 상상도 못할 수준이라 가볍게 포기해 버렸지만, 60~90만원대의 엔트리급 DSLR 마저도

FZ18의 노이즈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란 걸 깨닫고 보니 또 다시 카메라에 대한 뽐뿌는 슬금슬금..

하지만 FZ18 마저도 계속 들고다니기 귀찮을 정도의 부피인데, 이 시대의 대표적 귀차니스트인 제가

렌즈포함 600~800g 은 아주 간단히 넘겨버리는 DSLR 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루종일 가지고 다닐 수 있을

것인가 하는게 제 뽐뿌질을 억제하는 중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철칙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려는 듯, 1년 넘게 출시를 미뤄오기만

하던 시그마의 'DP1' 모델이 하필이면 제가 이런 생각 하고 있을 때 정식 출시가 되어버리네요. ㅡㅡ;

사용자 삽입 이미지

컴팩트 디카와 DSLR 의 경계허물기 첨병역할을 하고 있는 DP1

이 DP1 이란 놈은 보시다시피 컴팩트 디카의 바디 안에 DSLR 급 센서를 장착한 혼혈아 같은 느낌입니다.

컴팩트와 DSLR 화질의 차이는 센서 크기와 렌즈 성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컴팩트 디카의 7~10배

크기의 센서가 박혀있습니다. 위의 D3 처럼 1:1 풀프레임 센서는 아니지만 그 거대한 DSLR 센서를 그대로

저 크기에 집어넣었다는 건 발상의 혁명이라 칭할 만 하죠.

거기다 시그마 특유의 포비온 센서가 가지는 화질은.. 안써봤으니 모르겠습니다. ㅡㅡ; 이건 넘어가고.

DSLR 뽐뿌를 막아주는 가장 큰 이유인 무게와 크기의 압박감을 비웃기라도 하는 제품이라 정말 가슴에 직격을

날렸습니다. 물론 좀 더 조사해 본 결과 F4.0 의 낮은 조리개값과 ISO800 이라는 부실한 감도, 거기다 그 단점을

크게 부각시켜 줄 손떨림 방지기능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눈에 들어와서 이 뽐뿌도 조금씩 진정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이 중에서 ISO800 이라는 감도제한은 센서의 크기와 특징이 맞물려 노이즈 억제에서는 굉장한

성능을 보여주고 있는 편이라 굳이 비난할 만한 건 아니지만, 손떨림 방지기능의 부재를 감쇄시켜줄 만한

방법으로는 사용하기 어렵다는 약점은 그대로임에 틀림없습니다. 광량이 부족한 실내나 야경사진 촬영시에

상당히 애먹을 수 밖에 없는 모델이란 얘기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릭해서 큰화면으로 보시길. 이것이 똑딱이 크기의 디카에서 나오는 결과물?


문제는 올해 후반기에 다녀올 장기 여행에서 찍을 사진은 거의 대부분이 야외 풍경사진이란 겁니다.

악평이 많았던 시그마의 이전 모델도 광량이 풍부한 야외 촬영에서만큼은 발군의 화질을 보여줬으니..

다행히 아직 5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고민하고 (사실은 가격내리기를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

체력을 기르던지 해서 훨씬 풍부한 성능에 저렴한 DSLR 도 무리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몸을 만들던가..

(찍사분들이야 공감하시겠지만 DSLR 세트 들고 지리산 종주 하는 느낌을 상상해 보시길.. 완전 개고생.. T_T)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는 중에도 문득 무언가가 제 머리를 치고 가면서 현실을 일깨워 주곤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 평생 가장 잘 찍었다고 생각하는 한 장. 아까워서 일부러 화질 낮춰서 올렸습니다. ^^


1주일간의 사하라 마라톤 마지막 날. 양쪽 새끼발가락 발톱이 전부 뜯겨나가고 뒷꿈치에 물집이 주렁주렁 달리고
 
발이 퉁퉁 부어서 신발이 벗겨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헉헉거리며 손떨림 방지도 없는 코닥 V570 으로 아무렇게나

셔터 눌렀던 그 때의 사진이, 저에겐 최고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역시 사진은 기술보다는 감성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죠. 그 때 저와 함께 사하라를 달렸던 분들이 아니라면 제 사진보다 저 위의 DP1 사진이 월등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진의 역할이란 역시 이런 개인적 감성의 보존이겠죠. 물론 그 감성을 일반 대중에게

까지 전달하는 것이 프로 사진사라는 분들이겠지만 말입니다.

제 성격을 고려해 보면 여행 가기 전에 뭐라도 카메라 한 개는 더 살것 같습니다만.. ^^ 사진을 대하는 기본 마음

가짐만은 계속 잊지 말고 이어나갔으면 좋겠군요. 사진은 기술보다 감성이라는데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