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겨울 최대의 프로젝트 김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엔 제가 본가에 내려와 있기 때문에 밑준비는 거의 다 제가 하는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일당 10만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일단은 씨도 안먹히는 것 같군요.
아침부터 부지런히 명태, 다시마, 멸치 등 각종 해산물을 듬뿍 넣은 거대 솥에 물을 끓입니다.
이거 다 끓고 나면 똑같은 양으로 한 솥 더 끓여내야 하죠.
올해는 좀 많이 만들어서 물건값 대 주는 이모집에 몇포기 보내드려야 하기 때문에.

자화자찬이 되는 것 같지만, 엄니가 만드시는 김치가 주위에서 워낙 인기만발이라
산악회 회원들도 일단 산에만 올라가면 엄니 김치만 찾아대는 바람에 한포기씩 김치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도 합니다.
전 훗날을 대비해 김치 만드는 법을 전수받으려고 이렇게 자원하게 되었죠. 그런데 일당은?


육수 우려낸 다음은 적당히 재활용도 해가면서 한 솥 더 끓입니다.
이번엔 재활용을 했으니 좀 더 오래 푸욱 고아냅니다. 여기까지 거진 3시간은 잡아먹었군요.


미용실에 파마하러가신 엄니를 대신해 찹쌀도 준비합니다.
나중에 풀 먹일때 쉽게 하려면 씻은 찹쌀을 물에 불려놓은 것이 편하죠.
햅찹쌀 잔뜩 사왔으니 이제 이걸로 1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군요.

찹쌀을 보니 문득 삼계탕을 해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새록새록 피어오릅니다.


스무 개 가까운 무도 제가 씻어야지 팔 아픈 엄니가 씻겠습니까.
마침 온수도 잘 나오질 않아서 손이 퉁퉁 불어터질 때까지 막막 씻고 또 씻었습니다.
지인분이 가져다 주신 유기농 무라서 어떤 녀석은 산짐승이 파먹은 흔적도 있더군요.


엄니 파마하시는 동안 일단 이 정도까지는 준비를 해 놨네요.
물론 돌아오자마자 쉴 틈없이 시장에서 주문해놓은 절인 배추 40포기를 끙끙거리며 옮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밑 층에 사시는 처자께서 한 봉지 들어주시며 뭐가 들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라고 하시길래
무심결에 '토막시체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불투명 비닐에 꼭꼭 쌓인 무거운 것이 뭔가 그걸 생각나게 해서...


팔이 부러지도록 배추를 옮겨도 아직 할 일은 태산이군요.
엄니께서는 분노의 칼질로 무를 아작내시고, 저는 뭔가 불친절한 도구 하나 갖다놓고 무를 채썰기 시작합니다.
자칫 힘조절 잘못하면 제 살점도 길쭉하게 갈려나갈 것 같아서 조심조심하며.



이렇게 채썬 녀석들은 김장 담글때 배추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속'이 되는데
올해는 좀 많이 담그다 보니 부족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일단 대강 준비가 갖춰져 가는군요.
얼핏 봐도 힘쓰는 일이 꽤 많은 과정인데, 엄니께서는 수십년간 이걸 혼자 다 하셨다고 하니
제가 용써봤자 먹힐 틈이 없습니다. 그냥 잠자코 도와드리는 수 밖에.

이렇게 만들어 먹다보니 밖의 김치는 맛이 없어서 못먹는단 말이죠.


산뜻한 맛을 더해주는 갓도 빠질 수 없습니다.
너무 박박 씻으면 향이 날아가기 때문에 흐르는 물에 살짝살짝 흙만 턴다는 기분으로 씻어줍니다.


파도 비슷한 요령으로 살짝 씻습니다.
전 파 종류는 참으로 안좋아합니다만, 김치와 함께 잘 숙성된 녀석은 그럭저럭 맛있게 먹을 수 있더군요.


김치가 숙성될 때 맛을 보조해주는 중요한 요소인 청각도 잘 씻어서 물기를 뺍니다.
요녀석 식감이 오돌오돌한게 괜찮은데, 김치와 함께 삭아버리면 식감은 사라지고 시원한 맛을 내어 주더군요.
이제까지 들어가는 재료비만 해도 대체 얼마인지...


차 한잔 마시며 육수가 식기를 기다린 후 밤이 되서야 다시 작업에 들어갑니다.
김치에서 가장 중요한 양념을 만들 시간인데요.
적당한 분량이라고는 도통 알 수 없는 '손맛'이라는 개념으로 만들어지는 녀석이라
눈대중으로라도 엄니의 배합 요령을 잘 쳐다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해산물 육수에 찹쌀을 넣고 끓여서 만든 풀입니다.
구수한 해산물 냄새를 맡아보니, 그냥 저대로 간 맞춰서 죽으로 먹어도 건강식이 되겠다 싶더군요.


풀과 육수를 적당히 혼합해가면서 바탕화면을 깔아줍니다.
풀의 양이 미묘하게 바뀌면 점도가 금새 달라지니, 비슷하게 만들려면 조절 잘 해야 하겠더군요.


이제부터는 매운 고춧가루와 덜매운 고춧가루를 적당히 섞어가면서 본격적인 만들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냥 감으로 쑴풍쑴풍 넣어버리시는 엄니를 따라가기엔 쉽지 않네요.
중요한건 맛이니, 일단 만들어놓고 맛을 봐야겠습니다.


적당히 점도가 있는 양념은 골고루 휘젓는데 상당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대충 섞어서 알맹이가 남아버리는 건 제 성격상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이제부터는 화려한 양념쇼가 시작되는군요.
새우젓, 생강, 마늘, 까나리액 등등을 넣어가며 무자비하게 휘젓습니다.
없어지지 않을 것 같던 찹쌀도 어느 샌가 양념과 동화되어 사라져 버리는군요.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면서 하여간 열심히 섞어줍니다. 팔이 꽤 뻐근합니다.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해산물 찹쌀죽의 마수에 빠져서
제가 땀 뻘뻘흘리며 양념을 휘젓고 있는 동안 엄니께서는 바닥에 조금 남겨둔 찹쌀죽을 맛있게 드시고 계십니다?

물론 긁어모아서 저한테도 떠먹여 주셨습니다. 살짝 소금만 넣었는데 그야말로 최고급 죽이더군요.
문득 형편없는 죽 체인점보다, 이렇게 죽 만들어 팔면 장사 잘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정도 재료로 수지 맞추려면 죽 한그릇에 얼마가 되어야 할지 감이 안잡히는 바람에 포기.

근데 그렇게 휘저으면서도 찍을 건 다 찍어내는 저도 참 대견하군요.
얼굴이 찍힌 것도 있습니다만 엄니께서 절 죽이시려는 것 같아서 일단 초상권에 침해되지 않는것만 올립니다.


일단 그럭저럭 맛있어 보이는 양념이 되었군요.
하지만 일단 여기서부터 맛을 슬쩍슬쩍 보면서 간을 맞추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살짝 숨이 살아있는 배추에 찍어먹어 보며, 현 상황에서 살짝 짜게 느껴지는 정도가 훗날 제일 알맞더군요.
고춧가루도 중간중간 계속 넣어주면서 장인정신에 빛나는 간 맞추기가 시작됩니다.


설탕은 조금만 넣고, 몇 년째 잘 숙성중인 매실 액기스 원액을 듬뿍듬뿍 넣어줍니다.
숙성 년도에 따라서 색깔이 전혀 다르군요. 오래 삭히면 반쯤 식초화 or 알콜화 된다고 하는데
그 때가 가장 감칠맛도 있고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언젠간 먹을 날이 오겠죠.


약 2시간 가까이 저어가며 맛을 본 후 OK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청각이나 생굴은 내일 김장 시작하기 직전에 넣으면 될 것 같군요.
생굴은 금방 먹을 김치엔 넣으면 맛있지만 오래 숙성시킬 녀석에는 넣으면 맛이 없습니다.

뻐근한 양 어깨 덕에 맛있게 양념이 만들어 진 것 같네요.
제가 직접 고소하게 볶은 들깨도 듬뿍듬뿍 넣어주고, 내일 아침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런걸 수십년간 혼자 하셨다니... 숭고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요.
내일 담그는 일은 아버지하고 같이 하겠지만, 일단 90% 가까이 제가 도맡아서 해 봤으니
앞으로의 생활에 유용한 지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자취하게 되면 제가 만들어서 몇포기 보내드려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