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미터의 짧은 거리를 간신히 기어서 단상가람에 도착했다.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가람 주위를 둘러싼 숲속 풍경이 멋들어져서 셔터를 누른다.

울창하긴 울창한데도 이렇게 조경이 멋진 숲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보통 이런 산속 깊은 곳은 어딘가 살짝 어둡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데.

 

도착하자마자 정면에 거대한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와서, 혹시 내부 보수중이라 못 보는건가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는데

앞쪽 표지판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2015년 개창 1200년을 맞아 1843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중문(中門)을 건설중일 뿐

나머지 사찰들은 멀쩡하게 공개중이다. 여기까지 와서 단상가람 구경을 못했다면 정신적인 충격이 컸을 듯.

 

진언종의 현재 총본산은 콘고부지(金剛峰寺)이지만, 원래 홍법대사가 수행하던 본당은 이곳 단상가람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를 가진 불당은 이곳에 거의 집결해 있다. 국보급 보물들도 굉장히 많았지만 현재는 영보관에 보관중.

 

 

 

가람은 산스크리트어 상가-아라마(sanghārāma)의 한음표기인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하는 거주지를 뜻한다. 한국에서도 쓰이는 말이라서 포스팅에서 일본어 표기가 아닌 가람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공사중인 중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보이는 금당(金堂)의 모습. 단상가람의 본당에 해당하며,

현재 건물은 수많은 화재 끝에 1932년 재건된 녀석이다.

워낙 중요한 가치를 가진 건물이라 가까이서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심하게 복원되어 있다.

 

 

 

코야산의 모든 사찰이 그렇듯 이곳도 실제 진언종의 승려들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곳인데

그 덕분에 더더욱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까.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대다수의 문화재급 사찰에 비해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처음 창건되었을 당시인 819년의 건축양식과는 사실 차이점이 많이 보이지만

살짝 굽이친 서까래와 원만한 곡선을 그리는 처마의 구조는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고려시대 건축된 사찰인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중국, 일본을 모두 포함해서도 으뜸간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적어도 일본에서 이 정도로 미려한 모습을 한 사찰은

나라에 남아있는 극소수의 사찰과 닛코의 사찰, 그리고 이곳 뿐이라고 평가해 본다.

심심한 느낌이 없잖아 있는 현재의 일본 사찰 양식과는 레벨이 다르다.

 

  

 

금당 내부는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외부와 달리 상당히 화려하다.

건축 당시, 당대 일본 최고의 예술가가 그려넣은 약사여래 불화가 굉장하다고 하는데, 원본은 영보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가람 내부에 있던 수많은 국보들이 관리와 보존을 위해 대부분 영보관으로 이전되는 바람에 조금 아쉽지만

돈 주고 보물 관람하는데 조금 인색한 편인 나로서도, 몸 상태만 괜찮았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가람의 사찰들 대부분은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딱히 보여줄 것도 없긴 하지만.

 

 

 

 

금당 왼편엔 넓은 마당과 함께 조그마한 벤치 몇개가 놓여있다.

문화재 덩어리인 단상가람안에 의아하게도 흡연 가능한 장소가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흡연문화에 꽤나 관대해서, 대부분 흡연금지인 명승지 입구 앞에 흡연소가 설치되어 있는 일본에도

이렇게 가람 내부에 흡연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상당히 드문 케이스. 혹시 승려들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걸까.

 

어쨌든 벤치에 앉아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 휴식을 취하며 가람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한다.

오쿠노인에서 숱하게 봤던 거대한 삼나무들은 역시 이곳에서도 잘 어울린다.

날짜를 잘 잡아서 그런지 관광객의 모습이 정말로 드물어, 몸은 아파도 날짜 하나는 참 잘 선택했다고 자화자찬 해 본다.

 

땀을 식히고 욱씬거리는 왼쪽 발목을 진정시키며 이 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에게 신성함과 경건함을 일으키는 근원은 종교가 아니라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속과 떨어져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이 일반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미지라고 한다지만

만약 그 세속이라는 곳에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면 아마도 이곳과 세속의 경계는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적 신비함도 결국엔 나무와 흙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고의 발달로 인해 언어라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동시에 언어로 인해 인간의 사상과 개념 자체에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 처럼

 

종교가 가지는 경건함과 신비함 역시 원래부터 자연이 가진 요소였음에도, 단지 사람의 머릿속 필터를 거쳐

종교라는 관념으로 구체화 된 결과물일 뿐이라고, 이런 풍경을 보면서 상상해 본다.

 

한마디로, 인류의 모든 위대한 사상과 개념은 그 모태를 자연 그 자체에 두고 있다고 말이지.

먼 길을 돌아와서 진리를 갈구하지만, 결국 태초부터 누구에게나 내재된 본능의 산물이었을 따름.

 

 

 

일반적인 불교 가람과는 달리 이곳 단상가람에는 신사도 들어서 있다.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토리이(鳥居)가 이곳에서는 왠지 낮선 느낌.

물론 홍법대사와 관련이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고, 후대에 일부러 세워둔 신사는 아니다.

 

 

 

이곳의 신사는 따로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고 그냥 니우묘진(丹生明神)이라는 토지신을 기리는 어사(御社)라고 불리는데

일본에서는 훈음과는 맞지 않게 미야시로(みやしろ)라고 부르기도 한다.

 

니우묘진이라는 신은 홍법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건립할 때 그를 수호해 준 토지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 사찰을 짓는 승려도 축복해 주는 토지신이라는 개념은, '모든 사물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 신토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든 카톨릭이든 힌두교든 자신들의 신과 다를바 없는 한 명의 신일 뿐이며

신토를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날 성당에 간다던가, 사찰을 찾아 절을 올린다던가 하는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

 

코야산 한국 가이드북에는 이러한 설명 싹 빼버리고 그냥 '묘신사'라는 이름 하나만 달랑 쓰여있어서

대체 이게 뭔가 싶은 사람들이 많을 듯 하다. 나머지 중요문화재 설명하기에도 페이지가 모자라니 어쩔 수 없지만.

 

사진의 건물은 미야시로가 아니라 그 앞에 건립된 산노인(山王院)이라는 배전.

이 곳은 규모가 큰 신사에서 쓰이는 양식처럼 본전과 배전이 나뉘어져 있는데

이 배전은 또 불교 사찰건물의 양식을 상당부분 빼다박은 건축물이라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다.

 

이렇게 신사와 사찰이 한 곳에 세워져 있는 광경은 일본에서도 극히 드문 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일본에서 이곳밖에 없다.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지만.

 

 

 

정작 미야시로 신사는 그 강렬한 주황색이 워낙 두드러지는 바람에

이곳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어색함 탓인지 한 장도 담아오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구경했는데

산노인은 신사 양식과 불교 양식이 훌륭히 조합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구도를 잡고 뷰파인더를 바라보는데, 문득 '코야산의 시린 산속에서 해가 막 떠오늘 무렵'의 산노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듯 해서

색온도를 조절해서 그때 느꼈던 이미지를 재현해 보려고 노력해 봤다.

보정 프로그램 쓰는것도 쥐약이라서 마음먹은 것처럼 뚝딱뚝딱 고치진 못하지만, 대강 이런 느낌.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해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신사 앞이라면 에마(絵馬)가 빠질 수 없지.

그런데 그냥 신사가 아니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에마 역시 불교식과 신토식이 따로 걸려 있다.

한국과는 조금 다르지만, 진언종식 에마라는 느낌. 쓰여 있는 소원도 읽기힘든 한자로 쓰여 있는 점이 특징.

참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일본인들의 에마 사랑은 이곳에서도 멈추지 않는구나.

 

 

 

이곳은 전형적인 신사의 에마를 걸어두는 곳.

역시 진언종의 총본산인 만큼 이런 에마보다는 불교식으로 소원을 비는 곳이 훨씬 빡빡하다.

 

대체로 신사의 에마들을 잘 살펴보다 보면, 소원 빈다기 보다는 반쯤 우스갯소리를 적어놓는 경우가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장난스러운 에마가 보이지 않는다. 세삼 이곳을 바라보는 일본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거기다가 옛 향기 가득한 이곳 단상가람에 걸맞게도, 오랜 시간이 지나 매직으로 쓴 글씨가 지워져 버린 에마마저 찾을 수 있다.

이제껏 꽤나 유명하다는 신사는 다 찾아가본 나로서도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에마마저 이렇게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광경은 소소하지만 확실히 각인되는 여행의 추억이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굉장한 사찰들이 꽉꽉 모여있는, 보물상자같은 단상가람이지만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다. 한시간에 두 번 오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타려면

지금부터라도 이동속도를 높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소 발걸음 대로라면 이곳 단상가람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만

혹사에 혹사를 거듭한 왼쪽 발목은 원래 이동속도를 1/10 이하로 줄여버린데다

덕분에 계속 부담을 준 오른쪽 다리는 근육이 터질듯 단단해진 상태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일 때를 생각해서 구경하다보면 자칫 버스를 놓칠지도 모르는 위험성이 있었다.

 

단상가람의 입구까지 최소한 버스 도착 15분 전에는 도착해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될 것 같아서

하나라도 더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서두르게 된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혼자 쇼를 벌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

 

 

 

단상가람은 17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저 녀석들이 전기로 빛을 밝히는지, 여전히 초롱불을 사용하는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쉽다.

어둠 속에 잠긴 단상가람 사이사이에서 조그맣게 빛나는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지.

조용한 산골짜기 사찰 아래 울려퍼지는 우렁찬 셔터소리에 그나마 기운이 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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