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왔던 쪽보다 좁고 오래된 길이라서 운치는 느껴지는데, 그만큼 길이 험하다는 뜻도 되니
어느 정도 걸어야 끝이 보일런지 걱정부터 앞선다. 누가 보면 여기가 험한 산골짜기인줄 알겠군.
다행히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 무리하지말고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가면
어쨌든 출구에 도착은 할 테니까 거기서 좀 쉬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일이 없어, 아픈건 둘째치고 연신 셔터를 누르게 되는 건 행복하다.
아마 제정신이었다면 좀 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인상에 남는 걸 더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전거 여행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이라면, 기대했던 히메지(姫路)성이 보수공사를 들어가서 볼 수 없었던 것과
모노노케 히메로 유명한 야쿠시마(屋久島)에 가지 못했다는 것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야쿠시마와는 생태 습성이 전혀 다른 곳이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노노케 히메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곳들이 눈에 들어온다.
참배객의 인파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점이 플러스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기도 하고.
드문드문 새소리 정도밖에 들리지 않는 외딴 길을 거의 혼자서 걸어가며 이런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행운이랄 수 있다.
이쪽 길은 좀 더 산속 깊은 곳이라서 조금 전의 빡빡하고 정갈한 묘석들의 모습보다는
불규칙적이고 산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당연히 이쪽 길이 더 마음에 든다.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곳곳에 보수공사 표지판이 놓여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유지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공식적으로는 약 천년간, 실제로는 수백년 정도의 나이를 먹은 곳임에도 이 정도 보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죽고 몇백년 더 지나면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
입혀놓은 옷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본래는 새빨간 색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알 방법은 없다.
저 석불의 나이가 대강 백살 쯤 된다면, 내가 이 석불과 인연을 맺은 시간은 고작해야 수 초밖에 되지 않는 찰나의 순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문화유산이 가진 가치가 아닐까 싶다.
모종의 사고로 잘린 건지, 참배길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잘린건지 알 수 없는 삼나무 옆에
일본에서 역사가 긴 회사인 쿠보다사의 묘석이 보인다.
이제까지 봐 왔던 삐까번쩍한 기업들, 산요, 닛산, 토요타, 샤프, 파나소닉 등의 묘석에 비해 꽤나 오래전에 만들어진 묘석인 듯 하다.
원래 농기계, 엔진 중장비 등을 제작하는 회사로 유명한데, 요즘엔 친환경 발전, 리사이클 제품, 수자원 건설 등에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아마 중장비나 농기계 만져 보신 분들은 쿠보타라는 이름이 그리 어색하진 않을 듯.
연륜이 있는 회사라서 좀 딱딱한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일본 국내에서도 사원 복지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저 멀리서 아주머니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걸 보고 뭘까 싶어 슬금슬금 다가가 봤는데
내 몸굵기의 네 배는 되어보이는 거목 밑의 풍경이 묘한 형태로 되어 있어서, 나도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
이런 모습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참배길에 워낙 가까이 있는데다, 길을 만드느라 깎아낸 산 때문에 점점 앞으로 구부러 지는걸 방지하기 위해
밑에 돌맹이를 고아놓은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모습의 둥치가 만들어진게 아닌가 한다.
자전거 여행때도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몇번 있는데, 나무라는건 올려다 볼때 만큼이나 둥치 부분도 신기한 볼거리가 많더군.
둥치가 조금은 불안정한 모습의 삼나무지만, 다른 것들 못지않게 훌륭하게 자라나 있다.
원래 이런건지 모르겠지만 스크류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성장한 모습이 보인다.
나무가 워낙 굵은 탓에 되려 윗부분의 줄기가 가늘어 보이는 착시현상이 나타날 정도.
조금 과장하면 살짝 바오밥나무 같은 모습이랄까.
아주머니들이 찍은 모습은 이것이었을까.
반대편으로 가 보니 저런 공간 사이에도 석불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돌 위에 놓여진 동전들을 보니 역시 인기가 꽤나 많은 듯 하다.
수십억을 들여서 호화스럽게 세운 거대한 묘석보다
이렇게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 자리잡은 석불 쪽에 동전이 훨씬 많이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다들 생각하는건 비슷한 건지.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자꾸 야쿠시마와 비교를 해서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조금이나마 사진에서 본 야쿠시마와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런 모습들이 워낙 반가워서라고 이해해 주길.
사실 일본에서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이 야쿠시마였는데
지난 자전거 여행 당시 야쿠시마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한겨울이었고
자전거째로 배를 타고 가기에는 교통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좋게 생각하면, 야쿠시마는 자전거 여행 도중이 아니라도 제대로 날 잡고 본격적으로 돌아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훗날 더욱 완벽하게 즐기기 위한 일시적인 유보라고 해도 되긴 된다.
야쿠시마에서 추정 연령 5천년의 죠몬 스기라는 삼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왕복 약 15시간 가까운 산행을 해야 하는데
그곳만큼은 혼자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일부러 속을 파낸 것이 아니라면, 정말 절묘한 장소에 놓여있는 석불이다.
제대로 된 묘석이 아닌, 이렇게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석불 중에서는 가장 명당이라는 느낌.
그래서 그런지 뭔가 놓여있는 것도 많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세전함까지.
마치 서민 흉내를 내면서 영업하는 강남의 포장마차 같은 느낌이랄까?
좁은 산길을 빠져나오자 점점 길이 넓어지고 깔끔하게 정비된 것이
조금씩 출구가 가까워져 가는 느낌이다.
좀 전에 나무 둥치에서 사진 찍던 아주머니들이 멀리 사진에 보인다.
망원으로 당겨 찍은 녀석이라서 사실 훨씬 멀리 있지만, 지금 걸음걸이로는 저분들 속도가 훨씬 빠르다.
땀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찢어지는 발목의 통증을 참고 걸어가고 있지만
왠지 조금 더 가면 끝이라는 생각에 배가 부르게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참배길은 인생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아픈 몸이 원망스럽지만 그렇다고 감상을 소홀히 한 건 아니니 뭐.
여기서 본 석불 중 가장 단순하고 특징적인 녀석.
이쯤되면 정말로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건지 의심이 갈 정도다.
혹시 인류가 멸망한 후 수천 수만년이 지나고 나서 다른 생명체가 이곳을 찾았을 때
조잡한 상태로 봐서 '이 녀석들이 이곳에서 제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너무 앞서나간 걱정인가?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묘석과, 분명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묘석이 혼재해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묘터 지정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진다. 그냥 낡거나 부서졌다고 그걸 치워버리고 새 묘석을 세우진 않을텐데.
가족들의 성묘는 좀 전에 봤던 입구쪽에서만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데
이 근처에도 조금 젊어보이는 어머니와 딸이 간략한 음식을 들고 묘석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살아서 이어져 가는 문화 유산이라는 점도 이 곳의 장점이라고 생각.
이미 수백년전 현실과의 맥이 끊겨버려서, 지금은 단지 관광객의 볼거리로만 여겨지는 문화재가 수없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걸어가면서 눈에 들어온 오륜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녀석.
안개낀 날이나, 저녁무렵에 이런 산길을 걷고 있으면 지금과는 달리 꽤나 음산한 기분이 들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문화재라고 해도 공동묘지는 공동묘지라서, 이곳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고 들었으니.
현실세계와는 정반대로, 이곳에서는 묘석과 삼나무보다 이런 꽃을 보기가 더 힘들다.
꽃 이름은 모르지만 잎사귀가 밑으로 늘어진 모습이 독특하다. 저런 모습이 꽃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 하다.
이 정도 깊숙한 산골이라면 야생동물에 대한 경고문 같은거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이 곳에 와서 그런 표지판을 본 적도 없고, 개나 고양이는 물론 어떤 숲짐승도 본 적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참배객이 이어지다보니 이 곳은 사람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일까.
코야산 주변은 여전히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 대부분이고, 일본의 산은 한국과는 달리
등산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도 굉장히 드물어서
아마도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야생동물은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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