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께서 회의차 부산에 당일치기로 내려가셔야 하는데
혼자서는 심심하다고 하셔서 마침 시간도 있겠다 같이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엄니의 왕복 차비나 식사비 등은 정식으로 지급되는 거라서 크게 부담이 없었죠.
가까운 대구 살아도 어지간하면 가 볼 일이 없던 곳이라서, 회의는 2시지만 아침 10시에 부산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관계로 역 안의 까페에서 커피 마시며 케이크와 베이글이나 쥐어뜯으며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는 중.
엄니는 좀 진한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리다고 하셔서, 아메리카노를 묽게 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당일승차권을 보여주면 10% 할인까지 되니 가볍게 먹어줍니다.
전 옛날 부산역의 기억조차 없지만, 엄니께서는 이렇게 많이 바뀐 거냐고 놀라시더군요.
서식지가 대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구의 관문인 동대구역과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
동대구역은 시작부터가 확장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아무리 쥐어뜯어도 부산역만큼 만들기는 힘들 듯.
지금의 부산역은,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펼쳐지는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배가 빵빵하니 점심은 좀 있다가 먹기로 하고, 근처에 간단히 구경할만한 곳을 찾다가 국제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배가 빵빵하니 자갈치시장은 패스하고 향한 국제시장인데, 역시나 엄니의 기억속에 있던 곳과는 너무나도 달라졌네요.
예전엔 대구의 서문시장 같은 곳이었다면, 지금은 동성로처럼 되어버렸다고 할까요.
밤새 신나게 비가 온 터라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날씨는 찝찝하고 텁텁합니다.
부산이 대구보다 더 더운건지... 조금만 걸어다녀도 온통 땀범벅이 되는군요. 습도가 너무 높네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며 이리저리 골목길을 걷다가 용두산 공원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보여서 올라갑니다.
전 기억도 없지만 엄니께서는 이곳에 와 본적이 있다고 하시네요.
에스컬레이터는 기억이 안나신다고 하는데, 50m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산이지만 이 녀석 덕분에 쉽게 올라갔습니다.
주변 풍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하시고, 확실히 새로운 느낌은 없지만 조용하고 푸근한 분위기입니다.
국제시장 등등 굉장한 번화가 주변에 이렇게 쏙하니 솟아있어서 기분전환 하기에는 참 좋은 위치로군요.
사실 볼거리는 별로 없습니다. 좀 눈에 뜨이는 녀석이라고 해 봤자 부산타워의 묘한 모습 정도인데.
그래도 주변에 비해 고지대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땀에 절은 제 목덜미를 식혀주는 것만으로도 만족.
주차장엔 관광버스도 많이 서 있던데, 대부분 중국 관광객이었습니다.
별로 볼 게 없지 않나 싶었지만 웃으면서 여기저기 사진 찍는걸 보니 괜찮은 듯?
매우 높은 확률로 저기 올라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할 테니
올라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구경만 하다가 공원을 뒤로 합니다.
날씨가 좋았다면 한번 올라가 봤겠지만, 당시엔 뭐 눈에 뵈는게 있어야...
용두산이란 이름답게 용 조각상이 멋들어지게 서 있었습니다.
산세가 용의 형상을 닮아, 왜구를 물리칠 기상을 나타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요.
일제시대 당시에는 신사도 세워지고, 이승만 시절에는 그색히의 호를 따서 우남공원이라고 개명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굴곡이 많았던 공원이라고 합니다. 한국전쟁때는 피난민들의 판자촌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지금의 한가해 보이기까지 하는 공원의 모습 뒤에는 역사라고 하는 숨은 그늘이 서려 있는 것이겠죠.
제대로 피었다 싶은 꽃은 이 무궁화밖에 없었습니다.
비가 그친지 좀 된 터라 생명력 넘치는 물방울은 많이 사라졌지만
온통 회색빛 하늘 아래서 유일하게 존재를 과시하는 저 색상만큼은 여전히 뷰파인더를 끌어들이는군요.
사진 찍고나면 반드시 확인 후, 좀 이상하다 싶으면 지워버리라고 통첩을 보내는 엄니.
사실 제 입장에서는 '에고 늙었는데 뭐 아무렇게나 나오면 어때'라는 사상보다는 훨씬 좋으니까
분부하신대로 영 이상하게 찍힌 건 지워버리고 다시 한번 곱게 담아드리려고 노력해 봅니다.
말단 양호교사에서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교장직을 맡게 되었지만,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만큼
사회적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죠. 앞으로도 계속 카메라 결과물에 신경써 주기를.
솔직히 말해서 부산에 온 뒤로 계속 근질근질합니다.
몇달 전에 부산항에서 배 타고 여행떠나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말이죠.
내가 지금 바다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맘만 먹으면 당장 항구로 달려가서 표 끊고 대강 환전하고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대마도로 휙 떠나버리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하지만 자기 신분을 스스로 잘 파악하는 것도 인간된 도리이니...
불끈불끈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지금은 자숙해야 할 시기라고 몇 번이고 세뇌를 거듭합니다.
2시에 엄니가 회의 참석하시고 나면 너댓시간동안 저만의 시간이 생기니
병아리 눈꼽만큼밖에 돌아본 적이 없는 부산이라는 도시를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말이죠.
에스컬레이터 말고도 빙글빙글 돌아가며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일단 점심시간이 다 되었고, 회의에 늦으면 안되니까 그냥 계단으로 후다닥 내려가기로 합니다.
용두산공원은 정상이 훵하니 비어있어서, 이런 산책로 주변이 제일 우거져 있더군요. 그걸 배경으로 한 장 담아봅니다.
옷 선정을 잘해 오셔서 강렬한 대비를 선사해 주시네요. 인물사진은 거의 담지 않지만 왠지 보람이 있습니다.
나름 신경쓴 옷차림을 하고 오신 엄니 옆에 다 떨어진 옷 걸쳐입고 어슬렁거리는 노숙자같은 제가 붙어다니니... 뭔가 난해한 조합.
엄니께서는 휭하니 앞으로 나가버리셨지만 저는 걸어가면서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녀석들을 담느라 뒤쳐집니다.
이 무거워빠진 카메라와 가방을 들쳐매고 온 만큼은 본전을 건져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흐물흐물해진 하늘을 대신해서 뷰파인더를 치장해 줄 녀석은 역시 생기 넘치는 식물 녀석들 뿐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배어내도 나무들은 여전히 힘을 다해 생명을 틔워내는군요.
훗날 이곳을 찾게 되었을 때는 이녀석들조차 배어내져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내려가면서 우연히 부산타워를 보니
주위의 나무들이 왠지 이글이글 불타는 형상을 하고 있는 듯 해서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 1974)이라는 영화를 생각하며 담아봤습니다. 잘 타고 있네요.
불탄다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어릴 적 봤던 '불타는 소림사'라는 영화가 자꾸 생각납니다.
한국영화 말고 중국 무협영화였는데, 끝이 얼마나 황당한지 어린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녀석이었죠.
용두산 공원을 내려오고 나서는 뭘 먹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여러가지 광고로 도배를 해 놓은 삼계탕집에 들어갔습니다.
초복이 가까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미어터지고 있었는데, 운이 좋아서 바로 들어가 앉을 수 있었죠.
바로 옆에 여자사람 두분이 삼계탕을 앞에 두고 사진을 열심히 찍길래 조금 의아했는데
말하는걸 들어보니 일본 관광객이더군요. 한국의 삼계탕은 일본에서 건강식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인 제 입맛으로는, 그 집 삼계탕 그렇게 맛있다고 하진 못하겠더군요.
그 사람들이 그거 먹고 한국 삼계탕에 대한 안좋은 인식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꾸역꾸역 한그릇 비웠습니다.
아직 복날도 아닌데, 오늘 하루 그 집에서 대체 몇백 마리의 닭들이 사라져 갔는지를 엄니와 함께 토론하면서 대로변으로 걸어갑니다.
택시 타면 회의장까지는 금방이라고 하니, 엄니 택시 태워서 보내드리고 부산 하늘아래 덜렁 혼자가 되어버렸네요.
엄니께서 회의 끝나고 저녁식사 후에 부산역으로 돌아오실 때까지는, 혼자 여행하는 느낌을 살려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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