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점점 맑아져서 아침의 잿빛은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도시와는 향기가 달라서 아직까지 기분이 그리 나빠지지 않지만, 요즘 몸이 몸같지 않아서 살짝 걱정 되는것도 사실.

 

최대한 무리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느긋하게 이동중인데, 그래도 숄더백의 무게만큼은 어쩔 수 없다.

가지고 온 세 개의 렌즈중에서 원래는 50mm 단렌즈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편인데

렌즈 갈아까우는 수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24mm 단렌즈와 70-300mm 줌렌즈 두개만을 주력으로 사용중이다.

중간 화각은 대강 이런저런 방법으로 때울 수 있지만 광각와 망원은 렌즈빨이 너무 강하다.

 

 

 

민가원이 귀중한 볼거리들과 압도적인 전원 풍경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규모면에서 그리 큰 편은 아니라 사진찍으며 느긋하게 둘러봐도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날씨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으니 이제 슬슬 시라카와고의 진짜 모습을 구경하러 가 봐야 할듯.

 

히다 타카야마를 왕복하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정도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꼼짝없이 갇히기 싫으면 어쨌든 시간만큼은 잘 지켜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해야 한다.

아직 4시간 넘게 남아있기 때문에 문제는 없지만, 시라카와고 정도의 마을은 조금만 방심해도 시간을 잊어버리는 무서운 곳이니 조심해야 할 듯.

 

 

 

관리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진 모르겠지만, 정말 입장료 받을 만큼은 꾸며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입장료 받는 일본의 정원도 산책로로서 훌륭한 구성을 이루고 있지만

이곳 민가원은 산책을 주 목적으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산책하기에 모자란 점이 없는 곳이다.

억새지붕 위에 돋아난 새싹들의 모습만 봐도, 정통 정원의 기계적 예리함마저 느껴지는 인공적 자연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언덕을 살짝 돌아서 내려오면 보이는 조그만 집은 방앗간인 듯 하다. 물레방아와는 다른 단순한 방식.

일본식 정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대나무 소리 통통 울리는 그 방식과 똑같다.

소리를 내기 위한 조합이 아니라 곡식을 빻기 위한 절구통이 반대쪽 끝에 구비되어 있을 뿐.

 

물론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구동되고 있다. 저 곳에 물이 가득 차면 바닥으로 쏟아지고, 가벼워진 무게로 반대쪽의 절구가 곡식을 찧는다.

물레방아에 비하면 단순하고 효율이 떨어지지만, 제작이 간단해서 많이 쓰이곤 헀다.

 

 

 

무게 조절은 돌맹이로 했나 보다. 과학적인 계산보다 사실 이쪽이 실생활에서는 더 간단하다.

대나무의 통통거리는 소리는 아니지만 실용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서 들리는 쿵쿵 소리도 나쁘진 않다.

 

 

 

언덕을 내려오고 나니 전체적인 풍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금 전 임시 거주용 건물 주위에 만들어진, 연못처럼 생긴 곳의 물은 이렇게 밑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디자인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미의식이 함축된 전통 정원과는 달리

일단 형태를 갖춰놓으면 나머지 부분을 알아서 자연의 손길이 메우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물이 있는 곳에는 방앗간이 있는게 인류 공통의 문화이긴 한데

일본에 대해 어느정도 공부는 하는 본인 입장에서도 아직 알아보지 못한 정보가 있다.

한국의 물레방앗간처럼 이곳도 밤중에 남녀간의 데이트 장소로 사용되었을까나?

 

방앗간이라는 게 단순히 인기척이 없고 소음(?)을 줄여주는 곳이라 애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방앗간 자체의 이미지도로 충분히 성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장소였으니

일본에서도 적당히 비슷한 일화가 있지 않을까 조금 궁금하긴 한데, 이런 걸 어디다 물어봐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세삼스럽게 느끼는 점인데

도시의 철근 콘크리트 숲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주택가의 꽃들이, 전쟁의 포화속에서 병사가 꺼내 들어보는 애인 사진과 비슷한 느낌이라면

이곳의 꽃들은 온통 녹색과 암갈색의 조화속에 살짝살짝 포인트를 찍어주는 발레리나의 발끝과 같은 느낌이 든다.

 

척박한 환경의 꽃은 의무감을 가진 듯 강렬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반면

너그러운 환경의 꽃은 없어도 될 것 같지만 은근히 밋밋함을 지워주는 향신료 역할을 한다.

 

꽃과 녹색 자연에 뒤덮혀 조금은 우충중해 보이는 저 갓쇼즈쿠리 건물은

이곳 민가원에 입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 역할을 하고 있다.

당연히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으니 다시 요금을 낼 필요는 없다.

 

물론 들어가서 쉬어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은 되겠지만

이런 하늘 아래에서 굳이 건물 안에 들어가 쉬고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나중에 그냥 야외에서 앉아 쉬기로 한다.

 

 

 

휴게소가 한 군데가 아니다. 멀리 보이는 저곳은 아예 신발 벗고 올라가서 편안히 누워있을 수도 있는 곳이다.

안쪽에서는 시라카와고와 민가원의 역사에 대해 소개하는 방송이 TV를 통해 상영중이다.

 

젊은 사람이 없는건 아닌데, 아무래도 쉬어가려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이 좀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저 안에 들어가려는 의지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만약 들어가서 슬쩍 앉아있다 보면 또 나이든 분들이 말 좀 걸어올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보면 또 일본어 잘하네~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죽이 잘 맞으면 식사 한끼나, 집에 초대받거나 하는 일도 생겨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일본에서의 본인은, 나이 든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평소같으면 여행의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결코 마다하지 않는 그런 가상의 이벤트도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원하지 않고 생겨날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인연을 되짚어가기 위한 여행이니까.

 

 

 

동그란 공터 옆에는 아담한 선물 가게가 문을 열고 있다.

그 앞에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 주는 벤치가 놓여있어서 일단 거기 앉아 숨을 고른다.

날씨는 점점 맑아지고, 그러면서도 비를 머금지 않은 밝은 구름이 데코레이션을 잊지 않아서 경치 감상에는 최적의 구성.

 

일기도 좀 쓰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다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본다.

시라카와고의 마을 안은 훨씬 바쁘고 상업적이겠지만, 이곳 민가원은 보존되어 있는 갓쇼즈쿠리 가옥만큼이나

가게도 힘은 뺀 느낌이랄까. 80은 가볍게 넘어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가게와는 관계없는 잡일하면서 앉아 계신다.

 

사진 좀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마음껏 찍으라 하셔서 다행.

고추다발은 천으로 만든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말려놓은 녀석들도 판매중이다. 먹으라는 건 아니겠고.

한국과 비슷하게 복이 들어오는 부적같은 것이긴 한데, 남아선호사상과 결부된 이미지는 없다.

 

 

 

마을 안 가게들은 아마 이것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다양한 물품으로 관광객들의 신경을 자극할거라 예상해 본다.

이곳은 정말 할머니와 가족들이 직접 만든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난 것 없이 수수한 상품들이 대부분.

 

헝겊이나 혼수건, 인형, 짚을 꼬아 만든 것들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건 실제로 사용할 사람과 함께 오면 구매해도 아쉽지 않겠는데

시라카와고를 와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 줘봤자, 이 곳의 느낌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그닥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곳의 단점이자 장점이라고 할까,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울릴만한 선물이 별로 없다.

 

 

 

그나마 무난한 선물로는 이게 제일 눈에 들어오긴 한다.

완성도도 상당하고, 모두 수작업으로 만든 녀석이라 다들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 역시 거의 어디서나 마데인 차이나의 손길을 벗어나기 어려운데, 시라카와고 토종 수제품이라 흥미가 간다.

 

그런데 역시, 이 녀석을 선물할 만한 관계에 있는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이 곳에 직접 와보기를 권유하는 입장에서라도

이 녀석을 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 것으로 먼저 접하기보다는 일단 시라카와고에 한번 가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입체적인 실물이 아닌 사진 정도라면 뭐, 괜찮지 않을까.

 

 

 

바람이 불 때마다 묘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나무로 만든 풍경이 내는 소리였다.

귀를 간지럽히는 유리 풍경의 맑은 음색과는 달리 또르륵 거리는 부드러운 화음이 시라카와고의 풍경에 잘 맞는다.

아파트에서 그닥 활용할 일이 없어서 항상 아쉬운 풍경인데, 이 녀석을 보니 본격적으로 집에 풍경 설치할 만한 곳을 찾아보고픈 욕망이 샘솟는다.

 

여름의 시라카와고에 발을 들인 이상, 겨울에 다시 찾아가지 않을 일은 없을거라 확신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지금 뭔가를 사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다음에 찾아오면 좀 더 생각해보고 물건을 고르는 안목이 생길 테니까.

 

그러고보니 이게 판매용인지 그냥 달아놓은건지도 모르겠다.

 

 

 

기념품은 접어두고, 흔쾌히 촬영을 허가해 주신 할머니의 가계에 도움을 보태기 위해

크게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해 먹는다.

 

200엔짜리 아이스크림 치고는 많이 작아서 결코 싸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지 않는 것은, 이곳 민가원의 가게에서 판매하는 모든 상품들은

시카라와고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메밀 아이스크림 역시 이곳 사람들이 기른 메밀로 만든 녀석이라.

 

사먹으면서도 쓴웃음이 난 것이, 메밀을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봤자 맛과 향이 느껴질 일이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 중간에 땅콩도 박아넣고 한 성의가 느껴지는데

결국 아이스크림은 설탕 없이는 맛이 나지 않는 녀석이라, 그 강렬한 맛이 메밀의 미묘한 맛을 다 가리는 바람에

그닥 맛있다고 칭찬할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완전히 메밀의 맛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맛 배합상 좀 무리가 있는 모델이다.

 

하지만 수제 아이스크림인데다가, 좀처럼 보기 힘든 조합의 아이스크림이라 후회없이 즐겼다.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뿌리까지 씹어먹고 나서도 한동안 가만이 앉아있는다.

이제 발걸음을 옮기면 민가원을 떠나게 되는데, 이 앞에 진짜 시라카와고 관광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이곳의 풍경을 좀 더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다. 마을은 마을대로, 이곳은 이곳대로 매력이 충분한 곳이다.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눈을 부라리며 사냥감을 찾아 다닐때에는 오히려 지나치게 되는 장면들이 많다.

이렇게 시각과 화각이 제한되는 벤치에 퍼질러 앉아서

망원렌즈를 갈아끼우고, 슬쩍 훑어보면서 미처 눈에 들어오지 못했던 장면들을 되새겨 본다.

 

좀 더 익숙해지면, 이렇게 벤치에서 느긋한 기분으로 뷰파인더를 훌훌 돌려보는 기분을 유지하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 보며 휴식을 겸하는 촬영을 계속한다.

 

 

 

민가원 역시 사람이 살지 않는 전시용 가옥이라는 점만 빼면

마을 사람들이 유지 보수하며, 실제로 마을에서의 생활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 정원을 많이 둘러본 사람이라면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대비되는 듯한 엄격함과 자연스러움의 조화가 눈에 들어올 듯.

 

경남 사천의 조그만 시골집은 엄니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가끔 가는 곳인데

거기도 한가족이 아궁이에 사용할 만큼의 장작은 모아놨다. 겨울에 불 때고 들어가면 참 뜨끈뜨끈한데.

 

한국은 이제 그런 장작도 꽤나 비싸서, 자칫하면 도둑맞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느끼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적어도 그럴 걱정은 없지 않을까 싶다.

일본 전체가 한국보다 목재가 훨씬 풍부한 편이기도 하고, 이곳은 특히 목재 수급에 별 어려움이 없는 곳이라.

 

시골마을 하면 생각나는, 이렇게 목재를 가득 재여놓은 모습은, 이 모습 그대로가 마을의 풍족함을 나타내는 지표처럼 느껴진다.

 

 

 

여행 차림새는 아닌 듯, 총천연색 조금 촌티나는 분홍 셔츠 입은 5~6살짜리 꼬마숙녀가

자기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달려와서 그네를 한동안 타다가 사라진다.

주위에 부모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해서, 시라카와고 주민일 것이라는 예상이 틀리지 않으리라 본다.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었겠지만, 부모도 없는 아이들 노는 사진을 담는 건 왠지 유리가슴인 본인으로서 좀 겁나는 일이다.

아시아쪽에서 특히 한국과 일본은 사진 찍히는데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 더더욱 셔터 누르기가 힘들다.

서양쪽은 별 문제없는 듯 하고, 인도같은 곳은 아예 서로 찍어달라고 난리인데. 국민성 탓하기 전에 본인의 담력을 기를 필요가 있겠지만.

 

그건 그렇고, 국가 중요 문화재가 산재한 이곳 민가원 한켠에, 관광객 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자연미 넘치는 그네가 놓여있다는 사실은

본인이 이곳 시라카와고를 더 좋아하게 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참 아름다운 녀석이다.

 

 

 

십여 분간 벤치에서 엉덩이 한번 떼지 않고도 이것저것 찍을 수 있는 것은

시라카와고가 그만큼 건질 장면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일수도 있고

망원 줌렌즈가 사람 좀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이유 덕분일수도 있고

이렇게 앉아있지 않으면 괜히 마음 조급해져서, 담을 수 있는것도 못 담는 성급한 초보 여행자가 원인일수도 있다.

 

나비의 날개짓처럼 흔들리는 꽃잎들을 쳐다보며 조금 더 여유있게 둘러볼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