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갈비탕'에 해당하는 글들

  1. 2012.12.15  도쿄 산책 - 타이토구 토박이 18

 

 

여행 전날 잠 못자는건 이제 전통이다.

 

이번엔 짐을 잔뜩 짊어지고 서울서 부산까지 내려가 약 3시간 가까이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체력을 소비해서

11시쯤 이제 좀 피곤하구나 싶은 묘한 피로와 기분좋은 탈력감이 엄습해 오도록 컨디션을 세심하게 조절했다.

 

여행 한번 가는데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항상 전날 잠을 못자서 여행 첫째날은 헤롱거리다가 날을 보내버리곤 했으니.

 

 

 

11시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곳까지는 완벽한 작전이었으나

사실 바이오리듬이 새벽 3시 취침 오전 10시 기상으로 정착되어 있던 신체를 간과한 것이 패배의 원인.

 

너무 일찍 잔 탓인지 새벽 3시쯤 되니까 잠이 깨서, 일부러 자려고 해도 의식이 또렷해지고 만다.

오전 11시 출발편이니 공항엔 9시쯤 도착해야 하고, 여기서 김해공항까지는 리무진으로 40분쯤 걸린다고 하니

계획대로라면 7시 반쯤 일어나서 가볍게 짐을 챙기고 상쾌한 기분으로 출발해야 했는데

새벽 3시에 잠이 깨어버리니 그대로 밤을 샐 수도 없고 다시 잠도 오지 않고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펼쳐진다.

 

잠이 안오는데 계속 누워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려서 별 수 없이 노트북의 전원이나 올린다.

별다른 계획은 없는 느긋한 여행이지만, 오랜만에 도쿄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일제히 물건 구매요청이 들어왔다.

평생동안 가장 많은 요청을 받았다고 봐도 될 정도. 대강 하루정도는 쇼핑에 시간을 할애해야 할 듯.

 

물건 사러 돌아다니는건 서점이나 아키바같은 매니아 지향소 외엔 극히 드문 경우라서

일단 물건들이 대충 어디어디쯤 산재되어 있는지 정도는 알고 가야 현장에서 허둥거리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슬금슬금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5시 30분을 넘어서야 겨우 한시간쯤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두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여전히 졸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컨디션은 최악.

옛날 대학시절이었다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그대로 엎어져 대낮까지 잠잤음에 틀림없는 그런 상태.

 

하지만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럴수도 없고, 짜증으로 가득한 얼굴을 씻어낸후 리무진 버스를 타러 간다.

김해공항까지는 40분쯤 걸린다고 해서 느긋했는데, 부산의 악명높은 교통 탓인지 1시간 10분이나 걸려서야 공항에 도착.

 

저가항공 에어아시아의 악명은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조마조마할 수 밖에 없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에어아시아는 환불해주지 않습니다'를 캐치프라이즈로 내세웠던가?

아마 그런적 없겠지만 세간의 이미지는 그런 편이다.

 

혹시 늦게 와서 탑승수속을 해 주지 않는게 아닐까 걱정하며 공항으로 들어간다.

안내데스크에 에어아시아가 몇번인지 물어보니 14번이라고 하길래 가 봤더니

40명은 넘어보이는 중국인 행렬이 이어져 있어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에어아시아의 마크가 아니라서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16번 데스크에 텅텅 빈 에어아시아 마크가 보인다.

김해공항 안내데스크의 신용도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

 

조금 늦었지만 무난히 수속을 밟고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지금부터 나리타로 이동해서 다시 도쿄로 들어가면 빨라봤자 오후 3시가 넘고

저가항공에서는 기내식은 커녕 물도 돈주고 사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침이라도 먹고 가려고 2층의 한식집에 들어가 갈비탕을 주문.

 

만원이 넘는 가격까지는 공항음식점이니 그럴만 하다고 스스로 납득을 시킬 수 있었지만

그 육수에 담궈져서도 꾸준히 비린내를 발산하고 있는 저급 중의 저급 갈비 몇 점이 들어있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몸을 사리는 편인 이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소재가 생겨서 나름 뿌듯한 기분이라고 긍정적인 발상을 해 본다.

 

그 갈비탕 진짜 개판중의 개판이다. 개밥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하면 되려나.

 

공항 검색대는 보안강화기간이라서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소지품 모두 철저하게 검사를 하고

노트북과 카메라, 줄줄이 전선과 베터리 등등 수많은 도구가 담긴 내 백팩과 사이드백은 두 번씩이나 검색대를 통과한다.

결국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직원이 나를 데리고 와서 뭔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

 

규정이 그렇겠지만, 위험에 대비해서 짐은 승객 스스로가 풀어서 보여줘야 하는데 이게 마치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 준다.

비닐에 한 웅큼 들어있는 깔끔한 냄새의 새하얀 가루덩이를 보고 직원의 눈초리가 본격적으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는데

그 가루의 정체가 절약정신에 빛나는 여행푸어인 본인이 집에서 퍼담아온 분말세제라는 사실에 허탈한 미소가 퍼지는 모습을 보니

왠지 멍청한 공무원들을 느긋하게 따돌리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모 비밀요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살짝 머리가 가벼워진다.

 

 

 

나리타에 도착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 도쿄는 더 이상 관광목적으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출발 전날 서울에 엄청난 폭설을 시작으로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갔기 때문에

혹시나 싶어서 조금 두꺼운 옷도 가지고 왔는데, 도착해보니 쓸데없이 짐만 늘린 꼴이 되어버렸다.

최고온도 11도에 최저온도 3도. 강수확률은 0%에 한없이 화창한 날씨가 이어진다.

 

여러가지 사정상 항상 사용하던 교통카드 SUICA도 본가에 놔 두고 왔기 때문에 또 구입해야 했다.

나리타에 도착하면 도쿄까지의 교통비 + 도쿄에서 숙소까지의 교통비 해서 3천엔 가까이 나가기 때문에

매번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가까운 하네다 공항 도착편은 저가항공이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고.

 

잠을 엉망으로 잔 탓인지 머리도 지끈거리고 컨디션은 엉망이다. 타국에 도착한 들뜬 기분 역시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다.

도쿄에서는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곳 타이토구(台東区)의 숙소를 찾아오는데

이곳이 도쿄 안에서는 반쯤 슬럼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좀 못사는 동네라, 백팩커나 노숙자, 일용직들을 위한 저가숙소가 많이 있기 때문.

한인노동자가 많은 신오오쿠보(新大久保) 쪽도 적당히 저렴한 숙소가 있긴 한데, 난 여행중 한국인들 보고싶지 않다.

그런 이유로 타이토구는 도쿄에서의 고향이라 할 만한 곳.

반대로 말하면 전혀 여행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타이토구라고 해도 슬럼지역만 있는게 아니고, 그 유명한 관광지인 아사쿠사(浅草)도 있긴 한데

사실 아사쿠사 역시 예전엔 슬럼가였다. 일렬로 늘어선 명물 상점가인 시타마치(下町)역시 한자의 뜻을 생각해 보면 금새 알 수 있고.

일단 아사쿠사까지는 걸어서 15분쯤 되는 가까운 거리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짐을 풀고나서 아사쿠사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딱히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슴이 설레지도 않지만.

 

타이토구도 진짜 슬럼가라 할 만한 곳은 골목 여기저기 쓰레기 천지인데, 이곳은 그래도 아사쿠사 근처라서

상당히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도 없고, 화단도 꽤나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모습.

 

 

 

내게 있어 신선한 볼거리라고 하면 현재로서는 이 녀석밖에 없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던 2010년 5월에도 이 장소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 똥덩어리 옆에서 뭔가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지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도쿄에서는 스카이트리에 대한 기대가 꽤 컸었는데

타워에 관심이 없는 나는 몇개월이나 지난 여행 한창중에서야 저 녀석 이름이 스카이트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정도니.

 

 

 

이게 2010년 한창 건설중이던 스카이트리의 모습.

원근감 탓에 별로 커 보이지도 않았다. 도쿄타워보다는 좀 큰가 하는 정도였는데.

 

사실은 도쿄타워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고, 착공 당시 계획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634m 짜리 타워였다.

실제로 인류가 만든 가장 높은 타워로 기네스북에 등제되기도 했는데, 비정하게도 그 타이틀은 단지 며칠간만 이어졌을 뿐.

당시 세계 여기저기서 어리석은 마천루 경쟁이 이어지고 있었던 때라서

며칠만에 바로 아랍 에미리트의 '부르즈 할리파' 가 830m 의 높이로 그 타이틀을 가져가 버리긴 했다.

아직도 전파송출탑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녀석이라고 하니,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할 듯.

 

도쿄 시민들에게는 꽤나 자긍심 고취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일지도. 일단 세계 유수의 높이를 가진 타워니까.

 

 

 

 

2008년 계획 당시엔 610m 로 높이를 정했지만 634m 라는 높이가 된 이유는

'634' 라는 숫자를 '무사시'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

 

과거 도쿄를 무사시노쿠니(武蔵国)라고 불렀기에, 일본인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 정도로 충분할 듯 하다.

원래 내가 자전거여행을 끝내고 도쿄로 돌아올 2011년 5월쯤엔 개장을 준비하던 시기였어야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인해 개장이 1년쯤 늦춰져서 2012년 5월에야 처음으로 관광객들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은 2011년부로 지상파 디지털 전환이 완료되었고, 고층빌딩이 많은 도쿄 지형상 고층 전파송출탑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타워지만, 실상은 연간 550만명이 저 타워를 오르기 위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는 굉장한 관광지가 되었다.

타워를 오르지 않는 사람들도 지상쪽의 거대 쇼핑몰 소라마치(空町)를 둘러보기 위해 오기 때문에

실제 스카이트리로 인한 관광객 창출은 연간 2500만명이라고 한다. 언제까지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장사인 듯.

 

일단 입장료를 내면 하단의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또 요금을 내면 100m 위의 위쪽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타워 높이는 634m 이지만 전망대는 300m, 400m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니 조금 맥빠지는 현실.

 

현재 도쿄에서는 단연 가장 화제가 되는 관광지이긴 한데, 애초에 타워를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몇만원이라는 입장료를 내면서 저기를 올라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 반면, 도쿄는 이제 가슴뛰는 새로운 관광지가 아닌 본인 입장상, 여행 맛이라도 좀 느껴보려면 저기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고.

 

대충 찾아본 바로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한번 올라가는데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일단 밑의 쇼핑몰 소라마치에라도 한번 들러봐야 할 테니, 아침에 일찍 가서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

1시간 줄서야 한다면 공짜로 올라가라고 해도 안 가겠지만.

 

 

 

해질 무렵의 스카이트리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화창한 푸른 하늘에 반사되는 인공구조물의 기하학적 상쾌함도 없었고, 야경을 비추는 라이트역시 아직 점등되지 않았으니.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를 하는데...

스카이트리는 저 아사히 똥덩어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저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굉장히 높고 압도적인 건축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첫인상은 역시 임팩트가 없다.

 

도시 복판의 타워에서 가장 볼만한 광경은 뭐니뭐니해도 야경임에 틀림없지만

그걸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는것도 아닌 고로, 스카이트리는 야경보러 사람이 미어터지기 때문에

밤에 찾아가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파에 밀려서 사진 담을 여력도 없을테고.

 

겨울이다 보니 해가 일찍 져서 뭔가 의욕적으로 둘러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료 항공권을 받게 되어서 아무 예정도 없이 온 도쿄라, 이렇게까지 의욕없는 관광도 참 오랜만이다 싶다.

걷다보면 힘이 나겠지 싶어서 아사쿠사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사쿠사쪽은 서민들의 생활력이 느껴지는 활기찬 동네지만, 그 전까지는 그냥 단조로운 빌딩들의 연속.

왠지 현재 기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평범하고 단조로운 풍경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다.

기분에 맞춘 사진 결과물을 담는건 괜찮은 행동이지만, 다른 관광객처럼 들뜨고 재미있는 사진도 좀 담았으면 하는데.

 

 

 

기분이 들지 않는데 상쾌한 사진 따위 찍을수가 있나.

언제나 그랬듯이 기분 가는대로 담아본다.

 

도착 첫날 오후 늦게 시작한 여행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텐션이 떨어져 있으니 스스로도 좀 걱정이 되긴 한다.

어제부터 조금씩 조카 우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해서 조금의 죄책감도 남아있었는데

여러가지 요인이 더해진 끝에 이런 로우텐션이 되어버린 듯.

 

솔직히, 지금 나의 기분을 풀어줄 녀석은 딱 두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맛있는 거 잔뜩 찾아먹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진질.

조카 돌보느라, 푸른 하늘아래서 새 카메라로 사진 찍어본 일이 거의 없었다 보니

뭔가 담고 싶어서 조금씩 근질근질하던 차에, 도쿄는 한없이 맑은 하늘이 계속된다고 하니.

 

여행의 감성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던 예전과는 조금 방향을 바꿔서

사진을 마구마구 찍어서 여행의 텐션을 올려야겠다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린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해 봐야지.

 

 

 

사진질과 더불어 텐션을 올려주는 요소는 단연 먹을거리.

일본 3대 라멘이라고 불리는 키타가타(喜多方)라멘을 파는 라멘집을 들어가 본다.

사실 맛있는 키타가타라멘을 먹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일본 3대 라멘이라고 하면 홋카이도의 삿포로, 후쿠오카의 하카타, 후쿠시마의 키타가타를 꼽는데

애초에 도쿄에서 장사하는 이상 본고장의 오리지날에 비할 수가 없다는 건 다들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도 여기 들어와서 별 특색없어보이는 라멘 한그릇을 주문한 이유는, 이곳이 아사쿠사이기 때문.

하층계급의 주 생활무대였던 아사쿠사 주변은, 소위 말하는 저급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잘나신 분들의 문화보다도 더 사람사는 맛이 난다고 해서 인정받긴 하지만

어쩄든 별것 아닌 잡화점, 싸구려 먹을거리와 장난감등이 주된 상품이었던 마을.

 

이런 아사쿠사이기 때문에, 딱히 뛰어나다고 할것도 없는 무난한 라멘 한그릇이라도 불평없이 먹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난 무난 말은 하지만, 아침에 먹었던 김해공항의 갈비탕보다는 백배 낫다.

엔화 그대로 계산해도 이 라멘이 갈비탕보다 더 싼데, 그 개똥같은 비린내 갈비 생각하니 이건 아주 맛있는 편.

아사쿠사라서 이런 라멘도 맛있게 먹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아침의 그 악몽을 지워내려고 입좀 헹구는 의미도 있었다.

 

 

 

가볍게 한그릇 비우고 다시 아사쿠사쪽으로 향한다.

원래는 숙소에서 컵라멘 사들고 먹기도 하는데, 저녁으로 라멘을 먹어버렸으니 오늘은 자중해야 할 듯.

일본 라멘은 나트륨 함유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서, 저녁 연속 두그릇을 먹거나 하면 다음날 거울에서 호빵맨을 볼 수 있다.

 

자전거 여행처럼 땀을 비오듯 흘리는 나날이었다면 삼시세끼 라멘도 어렵지 않았는데.

가뜩이나 기분 난잡한데 자전거 여행 생각까지 하면 돌이킬 수 없이 다운되어 버리니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한다.

 

속속들이 다 구경한 아사쿠사지만 그래도 한가닥 기대되는 점이 있다면

고감도에 강한 신형 카메라를 들고 해질무렵의 아사쿠사 거리를 구경해 본 적은 없다는 것.

매번 대낮에만 오다 보니 밤거리의 풍경을 놓쳤는데, 사실 사람 붐비는 도시의 본모습은 밤거리에서 드러난다.

반대로 첫날은 대낮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다는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친숙한 아사쿠사라도, 여지껏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오후 4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해는 거의 다 저물어가는 상황이다.

겨울 여행은 이게 참 괴로운데, 해가 지는것과 관계없이 시간만 보고 평소처럼 즐기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사람의 바이오리듬이란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걸 여행중 체감할 수 있었다.

 

여름엔 7~8시까지 열심히 돌아다녀도 몸이 깨어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겨울에 5시를 넘어버리면, 마음속으로 아직 5시밖에 되지 않았다고 아무리 읖조려도 피로가 몰려오는게 느껴진다.

 

그나마 아사쿠사는 해가 져도 수많은 인파가 여전히 북적이는 곳이라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어 다행.

아사쿠사 관광의 시작을 알리는 카미나리몬(雷門) 앞의 사거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내가 익숙해하던 도쿄의 모습과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드디어 조금씩이나마 여행의 시동이 걸리는 느낌이 든다.

기껏해야 똥덩어리 보이던 북동쪽 스미다가와(隅田川) 건너편에, 복잡한 빌딩숲을 가볍게 무시하는 듯한 스카이트리의 위용이 보인다.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여행에서 빠트릴 수 없는 즐거움인데

저 멀리서 단순한 배경이 되어줄 뿐이지만, 이곳 아사쿠사에서도 사람들이 길가다 서서

연신 휴대폰의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스카이트리라는 건물 하나가 아니라, 저 녀석으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변화를 구성하고 있다고.

스카이트리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나에게 이런 변화를 감지시켜 주는 계기가 되어 주었으니 가볍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