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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7.24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200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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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배경은 1982년의 스웨덴.
전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도 그랬고, 감독 자신도 밝혔듯이 이 작품은 시대상을 부각시킨 배경을 활용하진 않았다.
'판의 미로(Pan's Labyrinth, 2006)'처럼 알고 있다면 감상에 큰 플러스 요소가 되는 작품과 달리
1980년대 스웨덴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감상엔 아무 지장이 없다.

이 작품이 '굉장히 스웨덴틱한 영화'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시간적이 아닌 공간적 배경을 기막히게 잘 살렸기 때문이니까.
잘 만든 영화는 어디서든 통한다는 말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는걸 증명하듯
이 작품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이유는 '너무 잘 만들어서'라고밖에 할 수 없겠다.
북유럽의 끔찍할 만큼 아름답고 황량한 자연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고독의 본능을 심어주었고
사람이 만든 영화 역시 (원작 소설도 마찬가지) 그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태어났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경, 인물에서 느껴지는 고독.
함께 모여 수다를 떨 때도 어딘가 지쳐 보이는 사람들.
학생들이 가득 차 있을 때도 여전히 삭막해 보이는 교실은
혼자 남은 오스칼이 교실의 불을 끌 때, 사방에서 숨을 죽이던 암흑같은 고독으로 일순간 덮혀버린다.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뱀파이어는 훈남 호스트로도, 근육질 액션스타로도, 백마탄 왕자님으로도 나타나는데
북유럽의 근원적 고독을 등에 안고 태어난 12살의 뱀파이어 이엘리는 내가 본 최고의 뱀파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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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의 외모, 수백 년의 인생, 중성적 존재이자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야수.
그리고 왕따당하며 내면에 폭력과 증오를 키워가는 진짜 12세의 인간 오스칼의 내면적 대변자.

이 수많은 요소를 한 몸으로 표현해낸 이엘리 역의 리나 레안데르손은 영화를 찍을 당시 11세였다.
그야말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는데, 감독이 가장 중요한 이 배역을 찾는데 꼬박 1년을 보냈다는 인터뷰를 보고 '과연!'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이프를 나무에 꽂으며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는 오스칼과
단지 살기 위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피를 빠는 이엘리.

마음 속으로 수십 번을 살인하는 오스칼이 그 나이 또래가 겪는 혼란을 나름대로 소화해 내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살인과 흡혈행위에 아무런 분노와 폭력성을 내제하지 않은, 수백 년을 성숙한 개체인 이엘리는
오스칼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치며 그를 성장시키는 전지자에 가깝다.

장르적으로 명백히 성장드라마에 속하는 이 작품이지만 그 성장의 주인공은 12세의 오스칼이지 이엘리가 아니다.

그녀는 오스칼에게 첫사랑의 섬세함과 애매함을 가르쳐 주고
내면에서 끓고 있는 폭력성의 표출을 도와주며
자신이 갖고 있는 수백 년간의 고통을 체험시켜주며
오스칼에게 선택의 기회를 던져준다.
가끔 다정하지만 의지할 수 없는 어른인 오스칼의 부모 역할을 톡톡히 대신해 주고 있는 것.

특히 마지막 수영장 씬의 고요한 학살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한 폭력의 대리 표출이었다.
역대 호러영화의 전당에 들어가도 될 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이 장면은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에서 한니발 렉터가 경비원들을 살해한 후 즐기는
평온한 음악과도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는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독은 '자기 생각으론' 분명한 해피 엔딩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오스칼의 미래는 영화의 첫 장면과 완벽하게 오버랩된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에
진정으로 씁쓸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는 더욱 아름다우면서도, 예정된 슬픈 비극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환선을 그린다.

자기와 사귀자는 말을 들은 이엘리가
한동안 망설이다가
'지금과 변하는 것이 없다'는 오스칼의 말에
'그럼 사귀자'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영생의 존재로서의 동반자의 역할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기를 거치는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무성애적 사랑이기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는 더욱 극대화 된다.

오스칼은 이엘리와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그가 맞이할 미래는 이엘리가 몇 번이고 반복해 온 허무함으로 끝남을 알고 있으니까.

고전적인 뱀파이어물은 신물이 났다며 온갖 변종 꽃미남, 미녀들을 생산하는 영화계지만
2008년에 이런 우직할 정도의 정통 뱀파이어물이 눈 돌아갈 정도의 영상미를 과시하며 등장한 것은
결국 인류 역사와 함께 할 영원의 생명을 가진 뱀파이어라는 소재는
아무리 식상하다고 해도 그 근원에 인간 본성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는 이상
그 수명을 다할리는 없다는 사실을 기분좋게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 마지막 장면의 모스 부호는 스웨덴어 'PUSS'
영화를 다 본 후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시길.

* 왜 이엘리가 '자신이 XX가 아니라도 괜찮아?' 라고 묻는가에 대한 대답은
영화 중간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장면에 나와있지만
원작 소설에 비해 굉장히 압축된 영화상에서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장면을 넣은 것은
애초에 이엘리가 오스칼의 이성적 상대가 아닌 내면의 동일체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에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감독의 의도에 잘 들어맞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