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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23  2월 14일 시레토코 - 만찬 10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눈에 새겨놓는게 여러모로 이득인 시레토코의 모습.

슬슬 구름이 다시 라우스산을 가리기 시작해서, 내려가는 중간중간 몇 번이고 카메라를 꺼내 희미한 흔적을 담아본다.

한동안 보이지 않을 듯 했던 정상이 구름 사이로 살짝 솟아있는 모습 또한 온전한 모습과 다른 매력을 뽐낸다.

 

옷을 두 겹이나 입긴 했어도 속이 질퍽거릴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린데다가

태양이 낮아짐과 더불어 체감 온도도 확연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피로가 빠른 속도로 몰려온다.

오전 10시쯤 볼일을 봤던 방광은 거의 터질 듯 하고, 아침에 든든하게 차 있었던 위장은 빨리 뭐라도 집어넣어 달라고 아우성 중.

 

하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이 곳의 풍경을 많이 봐 두고 싶은 마음 뿐이다.

 

 

 

호수와는 달리 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조그만 하천은 여전히 얼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는 눈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저 곳을 거니는 팀도 있었던 듯 하다.

용캐도 저곳까지 내려갔구나 싶었는데 그 순간 조금 힘을 써서 내려갈 만한 샛길의 흔적이 보이자

동행하던 일행분이 나보고 같이 내려가 보자고 한다. 강가에서 보는 라우스산 쪽의 풍경이 멋질 것 같다며.

 

걷는 스키를 타고 내려갈 만한 곳은 아니라 조금 망설이긴 했다. 통풍의 후유증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한번 스키를 벗으면 다시 신기가 꽤나 괴로웠기 때문에. 하지만 역시 저 밑에서 나를 유혹하는 설경의 힘에는 이길 수 없다.

 

 

 

운도 좋게 고생해서 내려간 하천 아래에서는 또 다시 타이밍 좋게 라우스산이 구름 너머로 보인다.

그것도 정상 부분만 또렷하고 밑에 은은하게 구름이 깔린 모습은 나를 찍어달라고 어필하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파도마저도 얼어붙어 모든 것이 정지된 것 처럼 조용하던 오호 주변과 달리 힘차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와 가까워지니

왠지 라우스산 너머는 그림처럼 현실감이 사라지고 일행들은 그 그림 속에서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고생해서 내려오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같이 내려가자고 권유한 일행 분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배려심을 포함하는 표정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괜히 일행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듯.

아마 사하라 사막 때도 그런 습관 때문에 멤버들 괜히 속썩인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혹독한 겨울이라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에 이 곳의 생명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여름이라면 불규칙성을 한껏 빛내고 있을 바위조각들이 눈으로 부드럽게 뒤덮혀 버려 꽤나 귀여운 모습으로 변신중이다.

 

고생해서 이 쪽으로 먼저 내려왔던 이름모를 팀이 이해가 가는 풍경.

 

 

 

내려갈 때는 거의 눈에 의지하다시피 해서 깨닫지 못했지만

올라갈 때 아무래도 발이 너무 깊게 파인다 싶어 고생을 좀 했다.

 

이곳저곳을 밟다 보니 그 면모가 드러나는데, 사실 우리가 이동했던 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고

운 좋게도 옆으로 누운 굵은 나무 밑둥을 밟았기 때문에 깊이가 얕다고 생각했던 것.

 

저 밑둥을 밟지 않으면 허벅지 위까지 쑥쑥 빠져버리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여름이라면 아마 허공에 발을 딛고 허우적대는 광경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투시 능력이라도 있으면 눈 속에 파묻힌 지형을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을텐데.

쌓인 눈만으로 없던 길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위험하면서도 신비롭다.

 

 

 

차를 타고 장비를 벗으니 등산 후 느끼는 이질감이 살아난다.

걸어다닐때는 익숙하지만 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몸 속에 대기중이던 찝찝함이 폭발하는 기분.

빨리 돌아가서 옷을 던져 벗어버리고 샤워를 해야겠다는 욕망이 솟아난다.

 

하지만 가이드분은 또 이 장면을 놓치기가 힘들다며 이미 몇 대의 차량이 멈춰 있는 언덕쪽에 주차를 한다.

우토로 마을에서 오호 쪽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라도 수풀이 빡빡한 편이라

이렇게 주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스팟은 딱 한군데밖에 없다.

 

자전거 여행때도 온갖 악을 쓰며 간신히 올라가다가 페달을 멈추고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던 그 곳이다.

산맥 끝자락과 바다 사이에 소심한 듯 이루어진 우토로의 모습을 굽이돌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장소.

막 해가 지려는 시간이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각대에 거대한 카메라를 장착한 후 셔터를 누르고 있다.

저 멀리 바다 근처에는 유빙 체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자전거로 언덕을 넘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어주던 호텔 직원분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던 여름의 사진.

분명 같은 장소지만 식상해 질 일은 전혀 없는 풍경들이라 감회가 새롭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강렬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여름의 시레토코가

바다마저 얼어붙어 조용히 숨 죽이고 있는 겨울의 모습으로 변하는 데 6개월이라는 찰나의 시간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지식으로 이해해도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신비로움을 체감하기가 힘들다.

 

 

 

사무실에 들려 옷을 돌려드리고 나서 다시 호텔 앞까지 배웅을 받는다.

여러가지로 폐를 많이 끼쳤다고 인사를 드리니 웃으면서 다음에도 꼭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하신다.

 

도쿄에서 온 일행분은 오늘 야간버스로 삿포로로 돌아가신다며 굉장한 활동력을 자랑하신다.

자기는 매년 이곳을 찾기 때문에 다시 온다면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 한다.

본인 역시 모자라는 건 돈과 시간이지, 기회만 된다면 당연히 몇 번이라도 오고 싶은 곳이니

살다 보면 다시 한번 만나서 술잔이나 기울일 수 있지 않으려나.

 

호텔에 들어서서 일단 객실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1층에서 화장실을 찾아 밀린 액체를 방출한다.

가벼운 런너스 하이 상태였는지, 오호 주변에서는 그야말로 활기에 넘쳐 날뛰었는데

호텔의 은은한 조명과 온기 속에 들어오니 온 몸이 벽에 짓눌리는 듯한 감각으로 돌아온다.

 

황홀했던 석식 뷔페를 즐기기 전에 일단 씻기는 씻어야 하는데

이게 또 호텔 옥상의 대형 온천이 그냥 후다닥 씻고 나오기에는 너무 훌륭해서

조금 이른 시간에 온천에서 몸을 녹이기엔 또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 난감하다.

1층 로비에서 무료 비치된 주스를 마구마구 퍼 마시며 잠깐 생각하기를, 일단 객실에서 가볍게 샤워만 하고

식사를 즐긴 후 밤 9시쯤 온천에서 쌓인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샤워를 마친 후 몸을 식히려고 잠깐 침대에 엎드려 TV를 보는데도 등줄기가 내려앉는 듯 피로가 노곤히 몰려온다.

여기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분명 황홀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다음 날 아침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어제 챙기지 못한 카메라를 가지고 식당으로 향한다.

호텔이 크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식당의 모습에 매번 압도된다.

폐가 될까봐 좌석 쪽은 담지 않고 음식 코너만 담았는데, 좌석 규모는 이 곳의 5배가 넘는다. 동시 수용 인원이 500명은 넘을 듯.

창가 쪽 좌석은 오호츠크해가 시원하게 보이는 대형 유리라 벌써부터 인기가 높다.

경관이 좋은 곳은 혼자서 앉아 즐기기에 테이블이 커서, 미안한 마음에 그냥 2인용 조그만 식탁에 혼자 자리를 잡는다.

 

 

 

높은 천장쪽에서 은은하게 엔야의 음악이 깔리는 이 곳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신비롭다고 표현할 만하다.

얼어붙은 바다와 뒤덮힌 눈 속에서 코와 눈을 자극하는 요리를 엔야의 음색과 함께 즐기는 시간은

아무리 피곤한 하루였더라도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호텔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로 시설, 규모, 서비스, 요리 수준이 모두 최상급이다.

식기도 메뉴별로 따로 담을 수 있도록 구분이 되어 있어 음식이 섞일 걱정도 없다.

해파리 냉채나 특정 해산물 요리등은 1인분으로 나눠져 따로 아담한 그릇에 담겨 있어 먹기도 편하다.

 

해산물의 품질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바로 구워내는 스테이크 역시 육즙 날아가지 않게 잘 구워 놨다. 굵은 후추까지 잘 뿌려놨고.

음식의 질에 대해 만족은 못하지만 여러가지를 즐긴다는 점을 좋아해 뷔페를 가끔 찾는 본인이지만

퀄리티에 실망하지 않고 먹으려면 최소 기준이 강남의 보노보노 정도라, 에슐리나 빕스 같은 곳에서는 그냥 싼 맛에 먹는다는 느낌인데

이곳은 11만원짜리 호텔 투숙비에 이런 석식과 만만치 않은 조식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보노보노와 동급 이상이다.

 

 

 

투숙객이 아닌 사람들도 식사하러 많이 찾아오는 모양인데

전용 식권을 사용한 사람들 테이블을 전부 기록해 놓는 듯, 투숙객에게만 내어주는 신선한 회 몇조각을 따로 전해준다.

테이블이 2인용이라 그런지 두 접시를 내려놓길래 '전 혼자 왔습니다만' 하고 물어보니

점원 아가씨가 웃으면서 '두 접시는 못드시나요? 라고 대답한다. 흔쾌히 두 접시를 혼자서 즐겁게 비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뷔페에 놓인 회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재료 자체가 조금 더 비싼 것인 듯.

혹시나 하고 담아 온 게살도 맛살이 아니라 진짜 게살을 찢어놓은 녀석이라, 평생 게살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준다.

그릇이 구역화되어 있어 얼핏 보면 양이 적을 것 같지만 이걸 두세 접시 먹으면 상당히 배가 부르다.

메뉴가 상당히 다양해서 한 종류씩만 먹더라도 충분히 세 접시 이상 나오기 때문에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즉선 라멘, 소바, 우동 등도 바로바로 만들어주기는 하는데, 국물을 많이 마시면 다른 걸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만 맛본다.

내장을 깔끔하게 드러내서 구운 빙어를 씹으면 맥주 한잔이 생각난다고 하는 연상을 해 보는데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라 술은 다음 여행에 무리를 주리라 생각해 패스하기로 한다.

 

원래 술은 유료지만 이 날은 또 투숙객에게 와인 한잔씩 돌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사양하며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구색내기에 급급하는 뷔페점과는 달리 디저트를 위해 어느 정도 위장을 비워놓을 가치가 충분한 녀석들.

아이스크림은 말할것도 없고 각종 젤리와 계란 케이크 등등 디저트만으로도 한 끼 채울 수 있을만한 품질이다.

퐁듀는 블랙과 화이트 초콜릿이 따로 흐르고 있어서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투숙 이후 두 번째 석식이지만 이렇게 배가 불러서 더 못먹는 것을 아쉬워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뷔페는 매우 오랜만이다.

지붕도 굉장히 높은데 거기서 울려퍼지는 엔야의 몽환적인 음악이 식사를 좀 더 우아하게 만들어 줘서 오히려 조금 위축되는 느낌도 든다.

 

일기를 쓰며 소화를 시키고, 좀 더 들어가겠다 싶으면 다시 음식을 담고 하면서 시레토코의 마지막 밤을 여한없이 즐긴다.

 

이후의 옥상 온천 역시 매우 인상깊은 체험이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쉬울 정도로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내부는 일반적인 온천과 다를 바가 없지만 낮은 계단을 살짝 올라가면 무려 야외로 통하는 문이 존재한다.

밖으로 나가면 증기로 가득한 노천 온천이 눈보라 치는 시레토코의 밤과 어우러져 현실감을 잊게 한다.

영하 10도에 펑펑 퍼붓는 눈을 맞으며 어깨까지 온천에 담그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심지어 호텔 측에서 서비스로 자연센터 쪽에 거대한 조명을 쏘아주기 때문에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는 모습을 조명 사이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오호를 탐험할 때는 화창한 날씨로 라우스 정상까지 보여주고

밤에는 이렇게 옥상 노천 온천에서 쏟아지는 눈꽃을 감상하며 몸을 녹이는 경험을 선사해주니

이번 여행의 운을 이곳에서 다 써버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절묘한 타이밍에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목욕 후에는 또 시원한 체험이 기다린다. 호텔 지하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천연수를 자연 정수되는 도자기 속에 담아 놓았다.

이 물은 맛있는 물 명선에도 몇 번이나 선정된 경력이 있다고 화려하게 선전을 해 놔서 과연 어떨까 하고 마셔 보는데

한 잔 마시는 순간 바로 다음 잔을 도자기 입구쪽에 가져다 대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온천 후 마시는 물이 원래 맛있긴 하지만 이 녀석은 확실히 시중에 판매되는 물과 느낌이 다르다.

물의 맛은 직접 마셔보지 않는 한 설명하기가 어려워 난감해도, 호텔 홈페이지 소개에서도 한 장을 차지할 만큼 자신있게 내 놓을 만한 녀석이다.

 

미련이 남지 않을만큼 보고 먹고 마시고 하며 흡족하게 보낸 시레토코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역시 긴 시간과 경비를 들여 이곳 땅끝까지 찾아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음미하며 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즐긴다.

내일은 또 이동하는데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하지만, 오늘의 만족감만으로도 내일을 즐겁게 보내는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