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가 너무 맛있어서 거하게 먹었더니 아침이 되도 여전히 속이 든든하다.

하지만 조식을 빠트릴 순 없어 얼굴 씻고 어제의 식당으로 향했는데, 이게 또 토스트와 계란 같은 가벼운 조식이 아니다.

메뉴가 어느 정도 바뀌긴 했지만 따듯한 국수와 우동, 밥과 각종 반찬, 샐러드와 생선, 고기, 생선, 조개류에다가

요구르트에서 푸딩까지 완전한 풀코스 식사를 즐길 수 있는 화려한 조식이 여전히 그 거대한 식당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배가 고프진 않지만 행복에 겨워 열심히 이것저것 주워먹는다. 오늘은 어차피 점심은 거의 건너뛰다시피 하며 강행군을 해야 하는 날이니

많이 먹어둔다고 나쁠 거 없다. 어차피 고난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 또 훌륭한 저녁 만찬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창문을 열고 바깥 날씨를 확인하려 했는데, 밤 사이 객실 안팎의 기온차로 인해 창틀이 얼어버렸다.

창문이 부서질 정도로 힘을 줘도 꼼짝을 하지 않길래 어쩔 수 없이 포트에 물을 끓여와 조금씩 부어서 녹인 후 창문을 연다.

이번 여행중 반드시 날씨가 좋아야만 하는 유일한 날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적당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비춰보인다.

 

유빙도 밤새 증식을 했는지 보기 좋게 떠 있다.

사실 겨울의 오호는 가이드비 1만엔은 둘째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등산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라이 수트를 입고 유빙 위를 걷거나 물 위에 떠보거나 하는 가벼운 이벤트를 즐긴다. 그쪽도 참가비는 1만엔.

 

본인 역시 당연히 해 보고 싶은 일이긴 한데 그건 좀 더 허약해 진 후에 즐겨도 될 것이고

여름의 오호 주변 풍경에 너무나도 압도당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다.

 

9시에 호텔 로비로 나가자 조그마한 승합차가 한 대 서 있다.

오늘의 참가자는 세 명으로, 가이드 한 분과 50대쯤 되어보이는 활기찬 아저씨 한 분, 그리고 체중 100kg 가까이 나가는 본인 한 마리.

차를 타니 길 건너 편의점으로 직행해서 오늘 먹을 점심을 구입하도록 한다. 냄새가 과하지 않고 가볍고 열량많은 녀석을 선택해야 한다.

아침을 워낙 든든하게 먹어서 주먹밥과 초콜릿 정도로 해결해보려 한다. 어쨌든 본인은 카메라 장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하니까.

 

 

 

사무실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는다. 뒷굼치 부분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반쯤 걷는 느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걷는 스키와

스틱 두 개, 카메라와 식량을 넣을 조그마한 백팩, 두툼한 스키복 상하의와 장갑 등을 받아 입는다.

 

본인 덩치에 맞는 옷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산 속 추위는 정말 무시할 수 없는 녀석이기 때문에

원래 입고 있는 옷을 벗지 않고 스키복을 위에 겹쳐입는다. 덕분에 몸이 매우 빵빵해져서 조금 거북하긴 하다.

 

예전 자전거로 땀 흘리며 올라가던 해안선 언덕을 훌쩍 통과해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곳에서 내린다.

원래 여름에는 버스 정류장과 휴게소가 위치한 오호 앞까지 차가 통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한참 아래에서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각오를 했다고는 하지만 막상 까마득한 눈길이 위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 선택이 정말 잘 한 일인가 걱정도 된다.

 

아예 제설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걸어 올라가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눈을 고르게 만들어 놓긴 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으면 평지에서도 움직이기 힘든 걷는 스키를 타고 등산을 하려니 몸 전체에 굉장한 힘이 들어간다.

가이드 분은 전문가라서 확확 올라가고, 함께 투어에 참가한 분은 사실 몇 번이고 겨울 오호를 정복한 베터랑이라

맨 뒤에서 10분도 되지 않아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둘을 따라가기 바쁘다.

 

가이드분이 무리할 필요 없이 앞사람이 만들어 놓은 스키 라인을 따라가는게 편하다고 조언해 주신다.

두분 다 얼굴이 참 선하고 부담없이 친절한 성격이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격려를 해 준다.

괜히 나 때문에 속도가 느려져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1만엔이나 내고 딴 생각할 것 없이 마음껏 자연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웃는다.

 

기가 막히게도 오호로 가는 산길은 걷는 스키로 40~50분 동안 한 번의 끊임도 없이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고

30분 정도의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다시 끝까지 오르막이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덕분에 평탄면이 나올 때까지는 스키를 신은 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간이 없다. 그냥 묵묵히 이를 악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실로 오랜만에 땀을 좀 빼고, 스틱을 잡은 손이 저려오는 만큼 걷는 스키에도 익숙해지자 체력적인 부담은 줄어든다.

40분쯤 오르고 나니 마침내 그냥 서 있을만한 평지가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처음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시레토코의 거대한 풍경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이드분은 NHK 쪽에 동물 발자국이나 이곳 풍경 등을 촬영해서 보내는 일고 하고 계시기 때문에

중간중간 멈춰서서 뭔가를 사진에 담고 있다. 사람이 들어간 적 없는 설원에 가지런한 폭의 발자국이 길게 찍혀 있는데

가이드분은 슬쩍 보기만 해도 어느 동물의 것인지 금새 알아차린다. 매년 이곳에서 가이드를 하지만 올 때마다 신기하지 않은 모습이 없다고.

 

중간에 멀리 길 너머에 가옥의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더미가 있어서 가이드분에게 물어보니

예전 시레토코에 원주민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거주하고 있을 때 살던 집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어차피 생활이 불가능해서 우토로 등으로 내려와 생활하고, 봄부터 다시 들어와 채집과 수렵 등을 하며 살아갔었다고.

통제구역으로 지정된 후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린 집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뒷정리를 해 준다.

 

 

 

카메라를 꺼낸 김에 두 사람 사진도 좀 찍고 하며 휴식을 취한다.

다들 조그마한 컴팩트 카메라를 들고 왔는데 본인만 거대한 DSLR을 들고 와서

가뜩이나 느린 발걸음 때문에 미안한 터라 좀처럼 카메라를 꺼낼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

 

딱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금새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두분 다 전혀 신경쓸것 없이 필요할 때마다 사진 마구 찍으라고 하신다.

아무도 방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긴 내 입장에서도 두 분이 사진 찍을 때 기다리는 게 지겨운 적은 없었으니까.

 

각자의 백팩에는 이름표와 연락처가 든 카드가 걸려 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순찰용 자동차가 아주 가끔 왔다갔다 하는 곳이라서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오호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다행히도 곰은 동면중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름보다 더 안전하다는 말도 있지만.

 

 

 

어느 정도 평지를 걷고 나자 가이드분이 '자, 이제부터가 조금 난관입니다' 라고 격려인 듯한 말을 꺼낸다.

경사가 좀 전보다 더 가파른 오르막길이 주욱 펼쳐진 채로 일행을 맞이한다.

기본적인 제설 작업이라도 완료해 놓았으니 이렇게나마 이동이 가능하지, 1m 가까이 쌓인 눈을 그대로 놔 뒀다면

사람의 힘으로 오호 부근까지 올라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겨울 중 입산이 허가되는 약 20일간을 위해 그래도 지역에서 힘을 많이 써 준 느낌.

 

걷는 스키나 허약한 지구력이나 기본적으로 적응의 문제기 때문에 가파른 경사에도 불구하고 첫 등반 때보다는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경치를 구경할 만한 여유는 없이, 묵묵히 비니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쳐다보며 한 걸음씩 몸을 움직일 뿐.

눈으로 덮힌 산을 걷는 스키로 올라가는 일은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미끄러운 진흙 오르막을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스틱에 힘을 주지 않으면 스르륵 뒤로 내려가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해서, 마침 동계올림픽이 개최되고 있을 그 당시엔

크로스 컨트리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지 가소롭게나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약 2시간에 가까운 등산을 마치고 드디어 원래 오호 관광이 시작되는 휴게소 앞에 도착을 했는데

눈 앞에 나타난 모습은 살짝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제설작업이고 뭐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지표면과 휴게소 지붕이 이어져 있는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당연히 휴게소는 사람이 없고 출입도 금지되어 있으며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다.

500ml 물 한 병만 들고 온 나로서는 벌써부터 타는 듯한 갈증때문에 반 이상 병을 비워버린 상태라

이제부터는 여기가 사하라 사막이구나 하는 최면을 걸어서 물을 아끼는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다행히도 여기서부터는 다섯 개의 호수가 위치하고 있는 탓에 고저차가 심한 곳은 없지만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릎까지는 푹푹 빠지는 눈길로 이 다섯 개의 호수를 전부 돌아봐야 한다는 것.

호수가 전부 얼어있기 때문에 그 위는 완전한 평지임에도, 그 호수로 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하는

30~40cm 정도의 별 것 아닌 단차마저도 겨울에는 어마어마한 장애물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눈 속 지면의 상태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가이드분이 앞장서서 가장 통과하기 편할 만한 지점을 고르기로 한다.

산을 올라왔으니 이젠 오호를 즐겁게 산책하면 되리라 생각했던 본인의 안일한 상상은 무참히 찢겨나가고

여름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비경에 첫 발을 딛는 순간부터 어마어마한 눈과 갑자지 쑥 꺼지는 구멍에 털썩 쓰러지고 만다.

 

호수로 내려가는 길에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기가 매우 힘든데, 스키를 탄 상태에서는 미끄러워서 그냥 몸을 일으킬 수가 없고

스틱을 이용하려 해도 도무지 어디가 땅끝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푹푹 꺼져버리기 때문이다.

왠지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으로 약 3분간 일어나려고 열심히 애를 쓰지만 손을 짚을 곳이 없는 눈속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원래 길이 아니고 숲 속을 헤쳐나가는 도중이라 일행들이 스키 방향을 돌려서 이쪽으로 오기도 어렵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 때는 미리 준비라도 하고 가서 망정이지만, 편안하게 관광 기분으로 와서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니

왠지 부끄러움과 오기가 동시에 폭발해 순수하게 허벅지 힘만으로 100kg 의 거구를 확 들어올려서 간신히 탈출한다.

 

 

 

여름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다섯 번째 호수 위에 서 있다.

밑에는 얼음이라 스틱을 단단하게 찍을 수 있어 편하다.

겨울이긴 하지만 호수 위라서 좀 걱정도 들었지만, 시레토코의 겨울은 이런 호수쯤은 자동차가 달려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얼어 있다.

 

가이드분과 함께 여우가 지나간 흔적을 신기해하며 찍는다. 불곰이 잠을 자는 겨울은 추위에 강한 북방여우가 활개를 치는 계절.

북방여우는 홋카이도 전역에서 서식하는데, 도심 근처의 여우들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서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도 촬영이 가능하지만

이곳은 사람과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 경계심이 강하다. 실제로 볼 수 있다면 대단한 행운이겠지만 지금은 발자국만 봐도 즐겁다.

 

자전거 여행 때는 초속 9m 짜리 순풍을 맞고 워프하듯 신나게 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길 옆으로 뛰어나온 북방여우를 보고 깜짝 놀라 녀석의 코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적이 있었는데

둘 다 얼마나 놀랐는지 10초 가까이 서로의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피할 생각도 않았던 추억이 있다.

 

 

 

겨울은 겨울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이곳이 정말 호수 위라는 감각이 살아나질 않는다.

거기다 여름에는 멀리서 수풀에 가려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하는 호수를 담는 것 외에는 접근할 수가 없고

불곰 목격 정보가 들어오면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를 제외하면 모든 트래킹이 금지되기 때문에

호수 위에서 사진을 담은 이런 체험은 오직 겨울에만 할 수 있는 보물과도 같다.

 

특히나 이 곳을 여러 번 와 본 두 사람이 나한테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것이

첫 번째 여행, 그것도 단 하루밖에 없는 시간에 이렇게 날씨가 좋은 건 로또에 가까운 경험이라며 좋아하신다.

 

어딜 봐도 일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언덕 너머 오호츠크해가 넘실대는 비경 속에서의 시간은

일절의 다른 유희가 필요없는 순수한 자연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이다.

 

 

 

한 번 넘어지고 나니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여전히 호수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의 조그마한 높이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여름엔 몇 걸음만에 후닥 넘어갈 수 있는 그 곳을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고생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세 번째 호수에 도착하니 다른 팀이 먼저 와 있다. 네이처 가이드는 몇 군데가 있긴 한데 다들 친한 친구나 마찬가지라 반갑게 인사.

가이드의 지도를 받고 있는 아저씨는 걷는 스키 대신에 테니스 라켓처럼 생긴 장구를 신고 있는데, 확실히 저런 건 눈에 덜 빠지고 편리한 느낌이 든다.

본인은 처음부터 저걸 신청하지 않았으니까 걷는 스키를 타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게 있었다면 조금 쉬웠을지도.

 

 

 

구름에 가린 산은 이런 호사스러운 날씨 속에서도 아쉬움이 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개의 봉우리 중 이곳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산이 있다고 한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긴 해도, 오늘 같은 날씨라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이드분이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속의 호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동물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긴다.

북방늑대보다 사슴이 더 많은데, 정작 그 사슴은 이미 홋카이도에서 유해 동물로 지정되어 겨울마다 사냥을 당하는 신세다.

늑대가 전멸하고 불곰의 서식지가 줄어든 이후 이 녀석들의 번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줄어들어서

지금은 그냥 놔두다간 농작물이나 초원이나 삼림이나 아예 박살이 나 버린다고.

 

매년 겨울 사냥 가능한 개체수를 발표하면 허가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정도의 사슴을 사냥해 간다고 한다.

사슴고기는 꽤나 맛있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사냥해가는 경우도 많다.

 

시레토코가 자연의 힘 가득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조절 없이 자체 정화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그 정도의 천연 자연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지만. 얠로우스톤에서부터 아프리카 사바나까지 사람의 손 없이는 유지되기 힘들다.

 

 

 

네 번째 호수에 도착하니 수풀 중앙에 고요한 호수 위의 풍경이 마치 대회가 끝난 콜로세움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라우스산이 보이지 않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기념으로 사진 찍으라고 바람을 넣는다.

자기 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 편이지만 워낙 의미가 깊은 곳이다 보니 이것도 추억이다 싶어서 카메라를 건네 드린다.

물론 그냥 평범하게 앞면 나오는 건 재미가 없어서 호수를 바라보는 뒷모습을 남겨달라고 했지만.

 

다들 카메라는 잘 다루는 편이라 별 설명없이도 잘 찍어주셔서 매우 만족스럽다.

 

 

 

베터랑 참가자 분은 호수 안쪽가지 이동해서 기념사진 많이 찍으신다. 몇 번째 호수인가를 알기 위해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즘 셀카가 그렇게 유행이라던데, 본인 역시 자기 얼굴 찍는 거 좋아했다면 여기는 그냥 별천지다.

속된 말로 좀처럼 들어가기 쉬운 곳도 아니라 자랑하기도 좋으니까. 본인은 애초에 사람을 찍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예외이긴 하다.

 

 

 

다섯 개의 호수 중 유일하게 중간에 섬이 만들어져 있는 두 번째 호수의 모습.

사실 오호의 호수들은 각각의 큰 단일 호수가 아니라 주변에 습지와 늪지 등등 다양한 모습을 갖춘 불연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굉장히 입체적이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무가공의 혼합체인데, 그것을 눈이란 녀석이 이렇게도 단순하게 밀어버린다.

 

아마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가 봐도 여기가 정말 거기인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사람이 대부분일 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여러 번 가도 아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사박사박한 동물들의 발자국과는 달리 걷는 스키와 스틱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흔적은 꽤나 우악스럽다.

멀리 보이는 저 정도의 사소한 단차마저도 이런 환경에서는 거대한 장애물로 느껴진다.

익숙해 졌다고는 하나 호수와 호수 사이를 넘나들 때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언덕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가벼운 비포장 산책로가 겨울엔 범접하기 힘든 험한 길로 변모하는 이 모습은

사람이 역사를 통해 편의성이란 것을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구해 왔는가를 세삼 느끼게 해 준다.

 

 

 

호수 위는 눈도 적게 쌓이고 바닥이 얼음이라 스틱을 힘껏 지지할 수 있어서 참 편하다.

 

일단 호수에 도착해 사진 촬영과 구경을 하기 시작하면 걷는 스키도 걸리적 거리기 때문에

스키를 탈착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하는데, 본인은 통풍의 흔적 때문에 왼쪽 엄지발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스키를 한 번 벗었다가 다시 신으려니 발끝에 힘을 줘서 밀어넣어야 하는데, 왼발 끝은 아무리 힘을 준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통풍의 무시무시한 격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완치 후에도 그렇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상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도 발가락 끝은 여전히 그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는 듯 일정 이상의 힘을 주지 않도록 퇴화해 버린 기분이다.

 

한동안 씨름을 하다가 머리를 짜 내서, 신발을 벗어서 손으로 스키와 체결한 후 다시 신는 방법으로 해결하긴 했다.

 

 

 

호수 위의 섬 앞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행분. 나도 찍어주겠다고 했지만 원체 본인 사진을 찍는걸 싫어해서.

기념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 사진이라도 충분하다.

사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피사체가 주인공이고,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그 역할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거기에 누가 들어가던 그것은 나의 추억이니까.

 

여름에는 호수에 접근은 커녕 이렇게 수풀의 방해 없는 장소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침엽수가 많은 곳이긴 해도 폭발적인 생명력을 자랑하는 이곳의 여름은 수풀의 밀도가 어마어마해지기 때문.

 

 

 

경황이 없어서 이제껏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이드분의 베낭 뒤에는 걷는 스키가 아닌, 다른 팀의 아저씨가 신고 있었던 스노우 슈즈가 걸려 있다.

비상시를 대비해 가지고 온 것일까.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고생하는 나한테 저걸 신겨줬으면 좀 나았을 텐데.

 

하지만 가이드분이 하는 일이니 다 의미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냥 걷는 스키로 계속 이동한다.

일단 나름 익숙해지기도 했으니, 이중으로 입은 두터운 방한복에 몸 안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지만 더 이상 무서울 건 없다.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저 아담한 언덕도 겉보기와 달리 밑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걷는 스키로는 게다리걸음으로 간신히 올라갈 수준이라

호수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꼭 저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항상 각오를 다지게 만들기는 하지만.

 

실제로 저런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언덕배기는 개울처럼 푹 파여 있거나 나무뿌리, 바위 등으로 들쑥날쑥한 곳이 많아서

자칫 스틱에 의지해서 이동하다가 균형을 잃고 고꾸라질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노련한 네이처 가이드가 앞에서 지형 상태를 확인해가며 일행은 인도하는 것.

 

 

 

갑자기 가이드분이 가방과 스키를 벗더니 조그마한 삽을 들고 눈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하며 멀뚱멀뚱 서 있었는데, 한동안 열심히 삽질을 해서 구덩이를 만들어 놓은 가이드분이 '여기 앉아서 점심 드세요' 라고 하신다.

눈 때문에 양반다리 말고는 할 수가 없는 일행들을 위해 의자처럼 걸터앉을 수 있도록 구덩이를 만들어 주신 것.

그런 줄 알았으면 도와드리는 시늉이라도 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굉장히 미안한 기분이다. 사실 삽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산을 오르고 호수를 거니는 3시간 동안 한 번도 앉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편안한 자세로 눈더미에 앉아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야간행군 후 먹는 컵라면에 뿌려지는 마법의 조미료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눈을 파서 의자를 만든다는 방법 자체가 이런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긴 했어도 지금 본인의 몸 상태에 비하면 꽤나 강행군이었기 때문에 은근히 배가 고프다.

한국 편의점보다는 훨씬 레벨이 높지만, 그래도 125엔짜리 연어 초밥 하나에 그렇게까지 감탄할 일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대자연의 설원을 반찬으로 먹는 점심은 극상의 만찬이나 다름없다. 이 순간 이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여행의 행복.

 

날씨가 순식간에 흐려지고 조금씩 눈이 날리기 시작하는데, 편안한 자세로 앉아 주먹밥을 씹고 있으니 그것 역시 멋들어진 영화 한 편이나 마찬가지 느낌이다.

보통은 라우스산이 가려져서 아쉽다거나, 돌아갈 때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리라 생각하지만

행군 끝의 휴식과 식사, 그리고 앞에 펼쳐진 고요한 호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할만큼 부정적인 생각이 싹 사라져 버린다.

 

 

 

가이드분은 서 있는게 편하다며 앉으려 하시질 않는다.

시레토코 네이처 가이드들은 모두 이곳이 좋아서 자진해 활동하는 봉사단체나 마찬가지다.

가이드비가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대여해주는 장비와 이동 경로, 일행들 뒷바라지를 하루종일 맡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곳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아닌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오래 살아왔다면 아마도 어느 날 여행중에 이곳을 알게 되고, 몇년동안 여기를 그리다가 결국 비슷한 행적을 걷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바람이 별로 없어 적막 속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에 더 부러울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의 야간 레이스 때 그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서 있으면 모래 흘러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비슷한 느낌.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는데, 이곳의 아름다움도 일단 리스트에 올라갈 정도의 위력은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이곳의 눈은 한국에서 봤던 싸라기같은 눈과는 확연히 다르다. 기온 차이 때문인지 옆에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맨눈으로도 육각형의 눈결정이 그대로 보일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데, 평생 이런 눈은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사진으로는 설명이 어려울 것 같아 크기 비교를 위해 초콜릿 박스 옆에 떨어진 눈을 담아본다.

이런 눈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 진 설원은 딱딱하게 뭉치지 않고 설탕을 깔아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기온 탓에 잘 녹지도 않아서 오랫동안 결정 모양을 유지하는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도 신기한 즐거움.

 

 

 

식사중에 괜히 내가 따라와서 발목을 잡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더니 둘 다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손을 흔든다.

 

단순히 위로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가이드분은 시계를 꺼내서 보여주며 지금까지 예정했던 스케쥴과 전혀 차이가 없이 적당한 페이스로 트래킹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오히려 처음에 과연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이렇게까지 맞춰줄 줄은 몰랐다고 하시니 그나마 위안이 조금 된다.

 

거의 기어서 가다시피 했지만 젊을때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도 하고, 일본 전국 자전거 일주도 했다고 말씀드리니 두 분 모두 웃으면서 납득하는 분위기.

백여 미터 옆에 바다가 위치해서 그런지 하늘을 뒤덮은 눈 속에서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고 앉아있는 지금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가끔 가만히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가이드분의 뒷모습을 보면, 이 사람은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에 오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읽혀지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