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호텔 찾아 가려는데 미치노에키 바로 옆에 시레토코 자연관이 위치해 있어서 또 들어가 본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딴 길로 새는 것이 인간의 습성인지, 그냥 나만 삐뚤어진건지 모르겠지만.
자연관 안에는 입구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안내원 한 명 빼고는 아무도 없다.
배경음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조용해서 약간 긴장될 정도.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니 무리없이 승락해 준다.
실제로 가서 보는게 단연 뛰어나겠지만 겨울에는 통제되는 곳이 워낙 많고
여름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퀄리티의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운과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힘들다.
시레토코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고
그 덕택에 사람과 접촉하길 꺼려하는 불곰 등이 자연스럽게 시레토코 곶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다.
여름에는 배를 타고 곶 주변을 돌며 불곰을 관찰하는 프로그램도 성행중이지만 겨울엔 유빙때문에 배가 움직이지 못하고
어차피 불곰들이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상품은 전부 휴무가 되어버린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시사철 한 번씩은 찾아오는게 일과라고.
무료 입장이다 보니 많은 걸 바라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멋진 사진들과 바닥에 깔린 불곰과 여우의 발자국 등이 재미있게 꾸며져 있다.
지붕 위쪽에 흰꼬리수리 사진을 배치하는 등 입체적인 전시를 위해 노력한 흔적도 좋다.
버드 워칭 등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끈기와 횟수가 중요해서, 나처럼 겨우겨우 몇 년만에 찾아오는 사람으로서는 접하기 힘든 체험도 많이 할 듯.
특수한 목적 이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시레토코 반도 선단부.
좌측 지도의 푸른 해안선이 시작되는 곳이 현재 본인이 서 있는 우토로 마을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불곰의 서식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한데, 워낙 자연 친화적인 주민들이기도 하고
관광객들에게 불곰에 대한 대처법을 철저하게 숙지시키기도 해서 아직까지 인명 피해가 난 적은 없다.
농작물 피해는 빈번히 일어난다고 하지만 적절한 보상도 주어지고, 주민들이 애초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여름엔 며칠만 머물러도 불곰 보기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예전에는 딱 하루 숙박했을 뿐이고
그 날 불곰 출현이 목격되었기 때문에 오호 중 첫 번째 호수를 제외하고는 전부 출입금지가 되어버려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운이 좋으면 첫 번째 호수를 거니는 불곰도 볼 수 있었겠지만.
출입금지지역이 아닌 라우스산을 비롯한 몇몇 봉우리들은 여전히 불곰과 조우할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굉장히 험한 산이기 때문에 전문 가이드 없이 그냥 설렁설렁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편에 속한다.
라우스산은 겨울에도 등반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해안선에서 바로 시작하는 1600m 짜리 설산 등반은 나에게는 무리.
비싸고 화려한 전시보다는 속이 알찬 느낌이 드는 곳이다.
겨울엔 유빙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해상보안청의 유빙정보나 직접 찍은 유빙 사진들을 정보로 전시하고 있다.
매년 유빙이 처음 보이기 시작하는 날도 기록해 놓는 등, 여러가지로 꼼곰한 정보를 보여준다.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레토코에서 1주일 정도 머무르며 곳곳의 비경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솔솔하겠지만
나처럼 짧은 시간안에 홋카이도를 최대한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쉽지만 맛보기로 훑어볼 수밖에 없다.
시레토코는 '이런 멋진 곳이니까 많이들 오세요'라는 관광지의 마음가짐보다는
'이런 멋진 곳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관광지 수입과 동시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걱정하기도 하는 머리아픈 고민을 하고 있다.
오호 주변 트래킹도 팀당 인원을 제한하고, 반도 선단부를 둘러보는 유람선도 크기와 출항 횟수를 제한하는 등
돈만을 생각한다면 필요없을 노력을 많이 기울인다.
관광이라는 것이 소모적인 발상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기본 상식임에도, 그걸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
시레토코 양 쪽 해안선에 자리잡은 두 개의 마을, 우토로와 라우스 각 지역에서 관찰되는 독수리의 숫자를 매주 기록해 나가는 챠트도 전시되어 있다.
흰꼬리수리와 참수리로 종류를 나눠서 기록하는 꼼꼼함도 보인다. 안일한 관광지라면 얻을 수 없는 정보.
누군가가 그려놓은 흰꼬리수리의 그림은 겨울 철새의 고독감과 강인함을 미려하게 표현해 놓았다.
자연은 딱히 치장하지 않아도 너무나 아름답다는 진리를 몸으로 체감하는 지역의 사람들이라
맛있는 먹거리와 편리한 기반시설로 무장한 도시 관광지와는 다른 매력을 사방에서 체감할 수 있다.
이 그림을 삿포로의 어느 미술관에서 보게 되었다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는 힘들었을 듯.
숙박지도 잡지 않은채로 짐을 짊어지고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낸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늦기 전에 호텔로 들어가 내일 트래킹 예약도 해야 하지만, 왠지 들어가서 짐 풀고 나면 다시 나올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을까.
삿포로와는 달리 눈 치우는데도 한계가 있는 곳이라 중간중간 얼어있는 땅이 많다. 걸을 때 한층 조심해야 한다.
자전거 여행 때 묵었던 호텔은 당연하게도 자전거로 가기 가장 편한 길가에 위치해 있다.
시레토코의 고급 호텔은 상당수가 경치가 좋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경사가 무시무시해서
관광용 버스를 타고 올라가지 않는다면 꽤나 힘든 언덕이었으니, 자전거로 잘 엄두도 내지 않았다.
반가운 기분으로 호텔로 들어가는데, 전혀 예상밖으로 빈 방이 하나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여름에도 예약 없이 바로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비수기인 겨울에 만실이 되어버렸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온다는 말을 미안한 표정으로 건네는 프론트 직원의 말에 다시 한번 세상 참 빨리 변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일본의 관광지에서는 예약 없이 숙소를 찾으로 오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이 일본 최북단의 조그마한 마을에까지 사람이 들어차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껏 버스에 내려서 밖을 돌아다니는 관광객은 한 명도 없었는데, 다들 관광버스를 타고 먼저 와 있던 것일까.
투숙을 하지 못한다는 점 자체는 별 것 아니지만, 예전의 추억을 되살려 보려 했던 시도가 무산되어서 아쉬움이 크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문 밖에 동사한 새 한마리가 쓰러져 있다. 타이밍도 좋게 이 녀석을 보니 더욱 서글퍼지는 기분.
옆의 정원에 녀석을 옮겨주고 일어나니 살짝 걱정도 된다.
혹시 시레토코의 모든 호텔이 전부 만실이라면 나는 오늘 여기서 얼어죽는 것일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지만.
하는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다른 호텔을 찾아본다.
언덕 위의 호텔은 어쨌든 올라가기 귀찮으니 최후의 수단이고, 해안가에 인접한 거대한 호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서 걱정하며 들어가 본다.
자전거 여행당시 묵었던 호텔의 세 배는 되는 육중한 덩치의 호텔인데,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걱정부터 먼저 든다.
조심스럽게 혼자 묵을 방이 있냐고 물어보니 잠깐 조사를 해 보더니 괜찮다고 한다. 안도의 한숨.
가격은 10만원 정도로 본인 입장에서는 싼 편이 아니지만, 비지니스 호텔이 아니라 굉장한 관광호텔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계산을 마치고 키를 받을 때 프론트 직원이 오늘 저녁 오로라 레이저 쇼가 열린다며 팜플렛을 한 장 건네준다. 일단 내용은 들어가서 보기로 한다.
여러 번 증축을 거듭했는지 호텔은 본관, 신관, 별관으로 나눠져 있고 각각의 구역으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도 따로 배치되어 있다.
가장 저렴한 별관 방으로 들어갔는데도 문을 열고 들어간 첫 인상은 내게 너무도 과분한 느낌이라는 감탄 뿐이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현관 앞 이중문 사이에 위치해 있고, 자동 조절되는 매립식 난방기 덕분에 방 안은 이미 따뜻한 상태.
비지니스 호텔과 비교하면 안에서 자전거 타고 될 정도로 넓직넓직한 크기에, 고풍스러운 디자인까지 본인을 압도한다.
여기에 조식, 석식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가격이니 이 정도면 오히려 저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당연하겠지만 관광호텔이나 싱글은 없으니 트윈을 마련해 준 듯 하다. 공간을 생각하면 더블룸을 주는 게 더 나았을 법 하지만.
밖이 워낙 추워서 그닥 활용도는 없지만 베란다 비슷한 공간에서 느긋하게 앉을 수도 있으니 세삼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여름에 왔다면 여기 앉아서 느긋하게 창가를 바라보는 재미도 음미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보니 바깥 풍경도 매우 훌륭하다.
TV가 놓인 책상 쪽에도 투숙객을 흡족하게 하는 것들이 비치되어 있다.
시레토코풍 시간이라는 이름의 과자와 함께 특허상품이라는 고급 효자손까지 놓여있어서, 노년층 관광객들의 편의를 봐 준다.
일본은 노년층의 관광 수요가 매우 높은데다가 기본적으로 자금 여유도 넉넉한 편이라 그 계층을 잡기 위한 지역의 노력이 대단하다.
맛있는 식사와 훌륭한 편의시설, 뜨끈한 온천 등이 고급 숙박지의 기본 소양.
나 같은 사람이 혼자 이런 곳에 투숙한다는 게 왠지 굉장한 낭비인 것 처럼 느껴지는 건 무리가 아닐 듯 하다.
공간이 널널해서인지 비지니스호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용적률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가루차도 녹차 호지차 커피 등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원래 2인용 객실이라 그런지 모든 용품들이 두 개씩 진열되어 있는데, 적정한 금액을 지불했으니 마음껏 써도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왠지 혼자 오게되면 이것들 중 하나씩은 소중하게 남겨놓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오래된 호텔이라 전자식 키카드 같은 건 없다. 나무를 깎아 만든 썩 괜찮은 모양의 열쇠고리가 인상적.
키카드는 소지가 간편하지만 그 대신 잠깐잠깐 밖으로 나갈 때 객실의 모든 전원이 전부 꺼져버리기 때문에 난감할 때도 있다.
이런 옛날식은 전원을 켠 채로 나갈 수 있어서, 휴대폰을 충전하거나 할 때 유용하기도 하다.
본인 입장에서는 이런 고급 호텔에 묵었다는 자체가 매우 신기한 경험이라 방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사진 찍기 바쁘다.
한동안 감동에 젖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네이처 가이드 투어 쪽으로 전화를 건다.
급작스러운 예약 요청에 잠깐 알아보고 다시 전화를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와 살짝 긴장한 상태로 대기중인데
3분쯤 지나니 전화가 와서 투어가 가능하다는 희소식을 알려 준다. 가이드비는 1만엔. 하루종일 가이드 역할을 해 주니 비싼 편은 아니다.
오호는 현재 폐쇄상태기 때문에 식사도 물도 전기도 화장실도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미리 주지해 준다.
점심거리는 편의점에서 준비해 가기로 하고 방한복이나 베낭 등은 모두 가이드 쪽에서 제공해 준다고.
현재 옷 상태로도 추위를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오호 쪽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니 방한복을 입을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사히 예약을 마치고 한 숨 돌린 후, 호텔 로비에서 받은 오로라 판타지 팜플렛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믿기가 어렵지만 1958년 시레토코에는 오로라가 출현한 적이 있다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해 시작한 레이저 쇼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위도를 생각해 봤을 때 시레토코에서 오로라가 보인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극히 낮은 빈도로 위도 60도 이하의 지역에서 나타나기도 한다니 믿을 수 밖에.
겨울이라 관광 수입이 확연히 줄어드는 계절에 어떻게든 자구책을 생각해 보려는 마을 사람들의 열의가 느껴져서
레이저 쇼 자체에는 그다지 기대감을 갖지 않았음에도 관람료 500엔 정도는 흔쾌히 지불해도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프론트에 내려가서 티켓을 구입한다.
시작은 8시 부터라서 그 전에 석식을 먹으면 될 듯 하다. 옥상에는 훌륭한 온천도 있다고 하니 레이저 쇼 끝나고 몸을 녹이면 딱 좋을 것 같다.
사실 이 호텔 안에서는 꽤나 저렴한 방이라 그런지 창밖 풍경이 바다가 확 트여 보이는 방향은 아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훨씬 정감이 가는 모습인데, 저 멀리 보이는 오르막길이 자전거로 오르며 개고생했던 그 길이라서.
저기를 넘어갈 때만 해도 꽤나 가파르구나 싶었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시레토코 고개는 중간에 비도 쏟아지고 해서 참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저 위에서 이쪽을 바라보면 우토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아마 내일 즐길 오호 투어도 저 곳을 통과해 갈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리라 예상해 본다.
바다가 얼어있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지만 지금은 해가 많이 저물고 있어서 크게 감흥이 오지 않는다.
가난한 본인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호텔의 모습에 놀라고 해서 기분이 많이 들떠있다. 내일부터는 조금 더 진정하고 경치를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지니스 호텔에서는 석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대충 편의점에서 때우거나 했는데
이곳의 석식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하며 6시쯤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은 본관과 신관쪽에 위치해 있어서 이쪽에서 가려면 꽤나 많이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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