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시각의 버스 한대를 일부러 그냥 보낸다. 어차피 동물원은 빨리 폐장하는 것이고

줄 서서 간신히 빠른 버스를 타 봤자 40분간 카메라 가방과 씨름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 귀찮기도 해서.

 

30분만 기다리면 또 한대가 오는데, 매일 아침 3~4분의 전철 간격에도 늦을세라 허둥지둥대는 삶 속에서

여행중에 그 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은 충분한 사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여유롭게 자신의 버스에 돌아가지만, 어제까지와는 달리 화창하기 그지없는 하늘 아래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고운 눈더미 속의 조용한 풍경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뒷모습이긴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찍는 것이라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머리 위에 떠 있는 펭귄 마크가 어떻게 해도 머릿속에 남아서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셔터를 누른다.

 

딱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를 고려해서 찍어놓은 마크는, 마치 동물원에 다녀온 사람들의 마음 속 생각을 떠올려 놓는 듯한 인상을 준다.

본인은 펭귄의 귀여움과 함께 이상행동을 보이던 대형 동물들에 대한 애처로움이 뒤섞여 있어서

저기 앉으면 어떤 마크가 떠오를까 씁쓸한 기분이 살짝 들지 않는것도 아니다.

 

 

 

기다려서 탄 버스다 보니 어렵지 않게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이동했다.

창문이 뿌옇게 물들어 정겨웠던 시골길 풍경을 카메라에 담진 못했지만,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눈으로만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사히카와 시내에 도착해도 시간은 그리 늦지 않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지금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쉽다.

오늘은 여행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느낌으로 일정을 잡아놨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냥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맛있는 거나 먹고 돌아가는 일 뿐.

 

은근히 본인 서식지인 대구 동성로와 닮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아사히카와 시내의 모습.

아사히카와 역에서 일직선으로 주욱 나 있는 길은 소박하긴 해도 겨울 축제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다.

삿포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아직까지는 도시라는 느낌이 남아있지만

내일 목적지인 시레토코와는 너무나 분위기가 달라서 묘한 기분이 든다.

 

 

당연하게도 시레토코엔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이 없으니 일기도 좀 쓸겸 해서 눈에 보이는 맥으로 들어간다.

하교시간인지 교복 입은 학생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얼핏 들어보면 역시 일본의 국민게임 몬스터 헌터 이야기.

 

일본의 맥도날드는 기간제 메뉴가 많아서 항상 색다른 녀석을 주문하곤 하는데

동계올림픽 기간이라 올림픽에서 유명한 각국 나라들을 이미지해서 만든 버거가 있어 그걸로 선택.

 

버거가 아니라 감자튀김에 바리에이션을 준 메뉴였다. 치즈를 주욱 뿌려서 먹는데, 따듯한 감자튀김과 함께 하니 참 고소하고 맛있다.

치즈도 듬뿍듬뿍 주는 덕에 조금 느끼하긴 해도 한 끼 식사로 문제가 없을 정도.

 

 

 

버거는 예전에 먹었던 매우 특징적인 몇몇 메뉴들과 비교해 큰 차이는 없다.

한국과 비교해 워낙 기간한정 메뉴가 많아서 자꾸 먹다보면 뭐가 다른지 헷갈리는 일도 생긴다.

 

추운 바깥에서 거닐다 들어와 먹는 음식치고는 조금 따스함이 부족하지 않나 싶지만

느긋하게 찍은 사진 정리하고 일기 쓰는데는 패스트푸드점 만한 곳이 없다.

 

 

 

조식 챙겨먹고 길을 나서서 처음 뱃속에 집어넣은 음식이라 조금 행복해진다.

 

하지만 아사히카와는 홋카이도에서 간장 라멘이 가장 유명한 곳이라 그걸 먹지 않고 보낼수는 없다.

점심을 먹지 않았으니 햄버거 하나 먹고 라멘 정도는 가벼울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한동안 뱃속에 뭘 집어넣지 않다가 갑자기 먹으니 생각보다 배가 불러온다.

 

산책 좀 하고 배를 진정시킨 다음 어떻게든 라멘만은 먹어야겠다고 다짐.

 

광장에는 색소폰을 부는 반라의 아저씨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고양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추운 겨울에 반라라는 설정이 좀 안타까웠는지, 아저씨와 고양이 목에 목도리가 둘러져 있는 모습이 또 정겹기 그지없다.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 않지 않지만, 이 작품은 쿠로카와 아키히코(黒川晃彦)라는 작가의 작품으로

이곳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역에 상당히 많이 세워져 있다. 물론 포즈나 들고 있는 악기가 다르다던다 하는 차이점은 있지만.

 

쿠로카와씨는 '조각은 사람이 참가함으로서 완성된다' 라는 철학을 가지고 대부분의 동상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다녀가는 벤치에 설치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항상 윗통을 벗은 아저씨와 그 옆에 앉아있는 고양이, 혹은 비둘기가 세트로 전시되어 있어 푸근한 인상을 풍긴다. 어쩐지 미야자와 켄지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

일본의 왠만한 도시에는 어딘가 비슷한 포즈를 한 동상이 세워져 있어서 일본 여행을 많이 즐기는 사람이라면 이 동상 찾는것도 재미 중 하나.

 

 

 

여름이라면 아직 대낮이지만 홋카이도의 겨울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막무가내로 여행을 즐기는 본인같은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몸에 무리가 가기 전에 자연스레 휴식처로 인도하는 효과가 있다.

 

배가 그리 꺼지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아사히카와의 간장 라멘만큼은 먹어보고 가야한다는 결심에

적당히 음식점이 많아보이는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본다. 원래 간장 라멘을 좋아하기도 해서 뭘 먹어도 그닥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5시 쯤이라 저녁먹기엔 이른 시간인지, 아늑해 보이는 가게 안은 한 사람도 없다.

너무 일찍 와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라멘 매니아인 본인이 아직 섭렵하지 못한 아사히카와 간장 라멘에 대한 갈망 탓에 어쩔 수가 없다.

 

라멘만 먹기엔 또 뭔가 아쉬우니 라멘집의 정식이나 마찬가지인 볶음밥과 세트로 주문해 본다.

좀 전에 햄버거 세트를 먹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10시간 가까이 공복으로 돌아다녔으니 이 정도 사치는 즐겨도 되리라 생각.

 

볶음밥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일반적인 레벨이다.

찰기가 부족한 쌀과 강한 화력이 만나야만 만들어 낼 수 있는 고슬고슬한 식감은 라멘을 먹기 전 준비운동으로 딱 맞는 느낌.

볶음밥에 양념이 충분히 스며들어가 있어서 밥과 라멘을 번갈아 먹기에 약간 번잡한 느낌이 들어 항상 볶음밥을 다 먹은 후에 라멘을 잡는다.

 

추운 겨울날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비로소 접하는 진하고 뜨거운 국물의 맛은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간장 라멘은 겉보기에 돈코츠 라멘 등등보다 소박해 보이긴 해도 이 목 깊숙한 곳까지 자극하는 얼큰하고 칼칼한 느낌은 중독성이 있다.

배가 부른것도 잊고 연신 국물을 퍼넘기는데, 겨울의 라멘 국물은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흡입시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황홀하다.

 

 

 

과연 삿포로와 쌍벽을 이루는 라멘 명소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맛이다.

연달아 햄버거와 볶음밥, 라멘을 흡입해서 배는 그야말로 터질 듯 비명을 지르지만 이 맛을 즐겼다는 점만으로도 대만족할 뿐.

 

여행중에는 편의점에서 소소한 야식을 구입해 즐기는 것이 일상이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더 이상 먹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산책하는 겸 슬슬 걸어다니다 숙소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뭔가 무지막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삿포로의 눈축제 기간과 달리 적당히 생색만 내는 듯한 분위기의 아사히카와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터질듯한 배를 붙잡고 가볍게 산책하기에 적당할 정도의 고요함이 매력이다.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녹색 물결은 산과 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완전히 대도시화된 삿포로와 달리 아사히카와는 아직 도시이면서도 대자연의 품 안에 안겨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라

슬슬 적응하기 어려워져 가는 대도시 사람들의 스타일과 달리 적당히 느긋함을 유지하고 있는 기분이 도시 곳곳에서 풍겨온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시내쪽으로 나오니 이제서야 겨울밤 분위기가 살아나는 중.

아사히카와 역도 굉장히 반듯한 느낌이었는데, 이쪽은 전체적으로 뭔가 단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양쪽 보도에는 눈이 싹 치워져 있어도 중앙 부분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돈한 눈길로 보인다.

 

동물원에만 신경이 팔려서 막상 아사히카와라는 도시는 정말 겉만 한번 핥아보고 떠나는 식이 되어버렸지만

배만 꺼져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한 그릇 더 해치우고 싶은 쇼유 라멘의 맛은 꽤나 오랫동안 침샘을 자극할 듯 싶다.

 

 

 

숙소에 들어가보니 친절하게스리 휴대폰 충전 잭을 상시 비치해 놓았다.

매번 짐을 풀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카메라와 휴대폰 충전 케이블을 꺼내는 것이라, 이런 소소한 편의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미니 USB 뿐만 아니라 아이폰과 구형 휴대폰의 단자까지 전부 구비해 놓아서 그 꼼꼼함에 만족.

자전거 여행 때 베낭을 도둑맞아서 그 안에 있던 충전 케이블까지 없어지는 비극이 일어난 적이 있다.

나가사키 한국 대사관에까지 가서 알아봤지만 워낙 구형 휴대폰이라 충전 단자를 구할 길이 없었다.

결국 두 달 가까이 극도로 전력을 아껴가며 달린 끝에, 오키나와에서 상봉 겸 관광하러 오신 엄니에게서 여분의 충전기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단자 통일도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시대라 참 애를 많이 먹었다. 기술의 발전과 규격의 통일은 체감적인 편의성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목욕을 하고 나서 창밖을 보니 조금 전까지 청명했던 하늘이 거짓말인 듯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

눈은 내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지만 바깥 쪽 도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가리는 모습은 박력이 있다.

이제 슬슬 다이내믹한 홋카이도의 겨울 날씨에도 익숙해 지고 있어서 별 걱정없이 침대로 들어간다.

어차피 내일은 시레토코에 도착하는 것만이 유일한 일정이다. 따로 뭔가 즐길 시간이 없으니 그냥 열차 밖의 풍경만이 나를 기다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