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에서 날씨가 휙휙 변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시레토코의 대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격변은 또 각별하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뉴스레터(?)의 장면처럼 아름답게 내려앉는 눈꽃이 온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풍경은 참으로 절경이다.

아마 트래킹 초반부터 이런 눈이 팍팍 내렸다면 기가 팍 꺾였을 수도 있겠지만

푸른 하늘을 마음껏 감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만한 즈음에서부터 이렇게 내려주니 오히려 반가운 기분도 든다.

 

든든한 가이드분과 몇 년동안 이곳을 찾아 오는 단골 일행분 덕분에 두려움도 없이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고만 있다.

다들 비슷한 기분인 듯 대화도 없이 한동안 역동성과 고요함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시간을 조용히 즐긴다.

 

 

 

해가 워낙 빨리 지기 때문에 이제부터 슬슬 다시 둘러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가이드분의 말에 따라 다시 장비를 챙긴다.

물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어차피 남은 건 오호 중 가장 크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호수만 돌아보면 되니까.

 

장비를 챙기고 막 떠나려는데 세상을 연기처럼 뒤덮던 그 눈발은 어디가고 순식간에 다시 화창한 하늘이 펼쳐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경험했던 일이지만 정말 놀라지 않을 틈을 주지 않는다.

 

본인은 그냥 날이 맑아졌다는 정도였지만 가이드분은 조금 전보다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구름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니 운이 좋으면 라우스 산봉우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났기 때문.

겨울에는 맑은 날 라우스 산의 꼭대기를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데, 이번에 보게 된다면 첫 참가인 나에게는 굉장한 행운이라고 한다.

 

 

 

첫 번째 호수로 향하는 길은 겉보기에도 쉽지 않다.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다가 수풀이 빡빡해서 스키를 게걸음으로 옮길 공간도 부족하다.

가이드분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루트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하신다.

결국 약간 두르더라도 덜 위험한 곳으로 가기로 한다. 우리와 엇갈린 또 한 팀은 걷는 스키가 아니라 스노우 슈즈를 신고 있기 때문에 경사 높은 곳으로 용감하게 전진중.

 

스키라는 게 그냥 슥슥 밀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평지에서 스무스한 이동을 위해서는 평소 걷는 것 처럼 발을 지면 위로 띄울 수 없는 점이 오히려 어색하게 작용해서

허벅지 뒤쪽에 굉장한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전신운동이라 해도 될 만큼 체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키를 신지 않고 일반적인 신발로 걸어다니는게 편한가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스키라는 게 설원을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니까.

걷는 스키는 일반적인 스키보다 폭이 넓고 길이가 짧은 편이라 눈 위를 걸어도 몸이 덜 빠지는 장점이 있다.

그냥 신발로 이런 곳을 걸어다니면 기본적으로 무릎 위까지는 푹푹 빠지게 되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설명 할 필요가 없을 듯.

문제는 본인 체중이 너무 강렬해서 앞의 두 분이 발목 정도까지 빠지며 스키로 밀고 나간다고 하면

나는 거의 정강이까지 잠겨서 이동하는 느낌이라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심한 편. 그러니까 자업자득이라는 말이다.

 

 

 

고생 좀 해서 거친 수풀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첫 번째 호수에 도착한다. 한 쪽이 바다와 인접해 있고 휴게소에서 가장 가까우며 크기도 가장 큰 호수.

여름에는 불곰 출몰로 인해 첫 번째 호수만 둘러볼 수 있었기에,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와의 접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나무로 된 고가도로 위에서만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던 본인이, 그 울창하고 신비로운 매력을 내뿜던 호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높이 3~4미터의 목책로 주변에는 전기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불곰이 접금하지 못한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시레토코의 풍경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이 곳을 찾게 되었다.

 

 

 

여름 목책로 위에서 찍었던 사진. 1년 간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빼앗기는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시레토코에서 가장 높은 라우스 산과, 드레스처럼 구름을 두르고 있는 산맥과 온갖 생명력으로 흘러넘치는 오호의 모습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이란 게 이렇게도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어 주곤 했다.

 

한 시간에 한두 번밖에 버스가 오지 않는데다가 마지막 입장 시간도 매우 이른 편이라

관광 버스나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으면 느긋하게 즐기기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짧은 시간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당연히 저 목책로 위에도 눈이 쌓여있어서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여름의 목책로 높이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눈이 어느 정도 쌓여있는지 짐작이 갈 듯.

그 웅장하던 생명력이 모두 눈속에 갖혀버린 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정도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이런 풍경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또 문명인의 생활이란 것이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 있는 북방여우의 가지런한 발자국을 보니

그 녀석도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가며 화려했던 여름의 회상에 젖어보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행 분은 도쿄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매년 삿포로까지 7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로 온 다음

바로 삿포로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오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도쿄에서 이곳으로 이사올 계획을 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름다운 산과 들은 조금만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여름엔 불곰이 거닐고 겨울엔 얼어붙은 호수를 거닐 수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바다와 근접한 산맥 끝자락 풍경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겨울엔 그렇게도 보기가 힘들다던 라우스산의 정상이 아주 조금씩이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주위엔 구름이 많아서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모습만이라도 일행들은 열심히 사진 찍기 바쁘다.

한국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일본의 산은 산맥의 아름다운 곡선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굵은 선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는지 상층부는 수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설산의 위용을 자랑하는데

사실 라우스산은 출입 통제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등반이 가능하다.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아니면 매우 위험하긴 하지만.

 

 

여름의 그 압도적인 생명력을 모두 평탄한 눈밭으로 덮어버리는 겨울의 모습은

이 곳에 한 번 이상은 와서 원래의 모습을 느껴본 뒤에야 비로소 그 매력이 배가 되는 느낌을 준다.

 

불규칙적인 지형 속에 사냥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습지와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수풀을 모두 동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겨울 시레토코는

거대한 힘으로 밀어버린 듯 깨끗한 설원 속에 가지런한 여우의 흔적만을 남긴 체 느릿한 숨을 내쉬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자라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 개념에 대해 꽤나 흐리멍덩해 진 상태였는데

이 모습을 보면 그 사계절이란 게 축복은 축복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와 마주닿는 쪽의 산들은 서서히 깎아지른 듯한 정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일행들의 셔터도 바빠지고 있다.

꼭 가장 높은 산만이 인상적이란 개념은 없고, 맨 끝의 산부터 라우스산까지 형제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위용을 뽐내는 모습은

어떤 강력한 인연으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듯한 결합감을 느끼게 한다.

 

카메라를 꺼내고 넣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본인은 이제까지 조금씩 부담감을 안고 있었지만

정상이 드러나 갈수록 쉴새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다른 일행들 덕분에 개운해 진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마구 찍어댄다.

 

 

 

분명 같은 모양이지만 여름과 겨울의 모습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다르다.

여름의 산이 바다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겨울의 산은 가만히 바다 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겨울의 산은 단색으로 통일되는 동시에 강한 햇빛에 의해 명암이 강해져 좀 더 우락부락해 보이는데

그럼에도 여름보다 조금 더 차분해 진 듯 하다. 아마 산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구름이 이동할 때마다 일행들의 일사불란하던 움직임은 무질서하게 변해간다.

걸어가면서도 몇 번씩 고개를 돌려 구름이 어디까지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우스산의 정상이 보인다 싶으면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러면 나머지 일행들도 자연스럽게 멈춰서서 몸을 돌리게 된다.

 

눈 오는 설산의 모습도 물론 좋지만, 이런 하늘에서는 산의 혈관과 근육이 더욱 대비를 드러내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진다.

 

 

 

목책로 위에서 보던 풍경 속에 들어가 반대로 그 목책로를 풍경삼아 감상하는 경험은 참으로 신선하다.

사실 겨울 홋카이도 여행 계획은 삿포로 눈축제와 Y양을 만나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레토코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여름에 저 목책로 위에서 오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런 데 잘못 들어갔다간 습지에 가라앉아 버리는 거 아닌가 겁을 낼 정도였는데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를 이렇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현실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네이처 가이드분도 매년 도쿄에서 먼 길을 찾아오는 일행 분도 겨울의 시레토코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현재 걷고 있는 수풀 언저리가 바로 여름 목책로 위에서 감탄하며 바라보던 그 첫 번째 호수의 저 멀리 가장자리라는 사실.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는 실감을 느끼기 힘든 것도 여전히 납득이 간다.

 

시간이라는 요소 외에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동일한 장소에서 느끼는 낯설음은, 여러 곳을 이동하며 즐기는 여행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그래서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여행이라도 전혀 아쉽거나 지겹지 않은 법이기도 하고.

 

 

 

가이드분은 이미 이곳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시레토코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제껏 실컷 출입금지 지역을 누비고 다니긴 했지만, 여름의 한계였던 목책로 끝을 넘어가 바다쪽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서

겨울의 우리들은 저 한계마저 넘어서 직접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즐거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목책로가 상당히 높아서 저 위에서도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그림 한 점처럼 구경만 하던 그 장소에 두 발로 걸어가 볼 수 있다는 체험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흥분할 수 있다.

 

 

 

목책로 위에서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숨겨진 부분을 볼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먼저 온 팀은 저 밑까지 내려간 듯 흔적이 보이는데, 가이드분 말로는 저기까지 갈 필요는 별로 없을 듯 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려갔다가 고생 좀 하겠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고.

 

목책로 위에서 봤을 때는 언덕 뒤가 바로 바다인 줄 알았는데, 옆으로 돌아와 보니 뒤쪽에도 어느 정도 공간이 있다.

저 부분의 여름 모습만큼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는 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한쪽 면만 보이는 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

 

 

 

호텔 창문 안에서 바라보던 것과 달리 이런 곳에서 유빙을 보면 정말로 그 거대한 바다 위에 얼음이 떠다니는구나 싶다.

바닷물이 얼은 것이니 유빙도 짠 맛이 날까 궁금했지만 경치 구경하느라 금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8개월이나 지난 이제서야 다시 생각이 난다.

 

여름에 배를 타고 이 쪽을 통과해 가다보면 가끔 해안가 부근에서 장난치고 있는 불곰들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당연히 그 비싼 배를 탈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일반적인 여행을 위해 찾아올 때는 반드시 멀미약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곳이지만 어쩐지 다소곳이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한 듯한 즐거움을 뒤로 하고 스키의 방향을 돌린다.

 

 

 

사진이란 녀석이 가지는 장점은, 특정 시공간에 대한 떨어져가는 기억력을 복구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미 4년이나 지난 추억이라 세세한 지형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었는데

목책로 뒤에 봉긋 솟은 저 언덕 옆을 지나면서 담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비로소 다른 시간대의 두 풍경이 시간을 초월한 하나의 관념으로 정립되는 기분이다.

 

이제 여름과 겨울의 모습을 모두 마음 속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름에 찾아가면 설원이 생각나고, 겨울에 찾아가면 푸르디 푸른 습지가 생각나는 즐거운 선순환만 남게 되었다.

 

 

스키를 신고 있기는 하지만 프로급 선수가 아니고는 어차피 하산할 때도 천천히 걸어서 조심소심 내려가야 하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금도 결코 이른 시간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니까.

 

아슬아슬하게 사람 애간장을 태우던 구름이 선심을 썼던 것인지, 돌아가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살포시 커튼을 걷듯이 물러나 준다.

겨울 시레토코 여행 첫날이자 마지막 날에 깨끗한 하늘 아래서 라우스산의 정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다른 두 명도 당연히 즐겁겠지만 본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그 자전거 여행때의 가슴 묵직했던 감동이 재현되는 기분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길지 않은 사진생활이지만 이제껏 찍은 사진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바로 이곳에서 담았다.

시레토코란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셔터를 누른 후 십여 분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시선을 고정시켰던 기억이 난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습지인지 알 수 없을 듯한 두려움을 간직한 호수 주변의 경이로운 모습과

바다와 접한 그 다섯 개의 호수를 굽어보는 웅장한 라우스산의 풍경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출입 불가능했던 두려움 위를 걸어가는 기분은 언어로 설명하기가 참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