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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30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 (Kingdom of Heaven Director's cut, 2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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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영화들을 잘 만들어 줘서 매우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인 리들리 스캇이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실망했던 영화가 '글라디에이터'였다 보니 이 영화도 내심 기대 반 불안 반으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극장에서 감상 후에는 여전히 낙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주로 나오던 불만이었던 '밋밋한 스펙타클'이 문제가
아니라, 전개의 개연성이 상당히 들쭉날쭉했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랙 호크 다운'같은
영화에 애초에 정치적 공정성따윈 기대도 하지 않은 터라 스캇 감독 특유의 세심하기 짝이 없는 미장센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는데, 에픽물에선 그것만큼이나 서사의 흐름이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기 때문에 거기에만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랙 호크 다운'의 경우엔 '라이언일병 구하기'와 멋진 승부를 펼치면서도, 두 작품 모두 공정성과는 담 쌓은 작품이라
딱히 어느 한 쪽이 두드러져 보이진 않았는데, 이 '킹덤 오브 헤븐'에는 뛰어넘어야 할 막강한 벽이 버티고 있었다.
에픽물에선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시대의 명작 '반지의 제왕'의 절대적인 명성이 그것이었는데, 올리버 스톤 특유의
느낌은 잘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참을성을 시험하는데 일조해 버린 '알렉산더'나, 대놓고 전통 블록버스터
영화를 표방한 볼프강 페터슨의 '트로이'등의 작품들이 거센 비평과 함께 침몰해 버린 전례가 이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극장개봉판 사상 초유의 동시 3부작 제작을 힘에 입은 거대 에픽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하기엔 그 후의
작품들이 억울할 지경이었고, 가뜩이나 긴 상영시간 덕에 무리없이 짜여 있었던 구성의 탄탄함도 상상을 초월하는
확장판의 퀼리티 덕분에 그 명성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했는데, 애석하게도 이 '킹덤 오브 헤븐'은 극장 개봉판으로는
그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구멍 쑹쑹 뚫린 전개를 보여주는 바람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꽤나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생략해 버린 터라 필연적으로 나올 감독판이라고 해서 더 좋아질
수 있으려나 걱정도 했었는데, 나의 사랑스러운 리들리 스캇 감독은 내 기대를 몇 배는 뛰어넘는 최고의 감독판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비교적 개봉판과 확장판의 차이가 심했던 '왕의 귀환'보다 훨씬 더 큰 차이를 보였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있겠는가. 추가된 50분 가량의 장면과 결합된 감독판은 아예 이야기 자체가 판이하게 틀려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이것은 부족했던 설명을 덧붙였다기보다는, 아예 등장하지조차 않았던 스토리를 집어넣어
훨씬 깔끔하고 납득 갈 만한 전개를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개봉판 영화에서의 주된 불만이 어색한 이야기 전개였던 사람이라면 두말 할 것 없이 감독판
을 다시 봐야 할 것이다. 감독판은 리들리 스캇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밀도높고 응집력 높은 전개력을 자랑하는
진정한 에픽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블랙 호크 다운'에서 조금씩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조명 포기'는, 덕분에 가장 리얼한 근대전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해 줌과 동시에 아쉬운 점 역시 남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반대로 '너무나도 중립적'이라는 불평이 터져나올 정도로 시종일관 담담한 시점으로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내 입장에선 '블랙 호크 다운'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단번에 씻겨 나갈 정도로 만족한 편이었는데
의외로 이 극도의 중립적 시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스펙타클한 쾌감의 감소가 많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었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거의 제 2의 '블레이드 러너'라고 느껴질 만큼 눈 돌아가게 만드는
엄청난 미장센과 역사적 고증이 가미된 공성전 씬이 얼마나 놀랍게 다가왔는지. 흥분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 내 이야기와의 차이점은 상당수 존재하지만, 스캇의 특기인 집요한 리얼리티 추구의 결과
영화 내 등장하는 건물, 의상, 소품, 전쟁 등 거의 모든 시각적 요소들은 그보다 더 할수 없을 정도의 사실성을
자랑하고 있다. 섬세하기 그지없었던 '반지의 제왕'의 그것조차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니 말이다.

논란이 많았던 발리앙 역의 올랜도 블룸도 그 소심하고 내성적인 느낌을 소화하는데 제격이었고, 시대상과 비교해
볼 때 조금은 과하지 않나 싶은 그의 휴머니즘 사상도, 작품 전체를 꽤뚫고 있는 감독의 중립성을 대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과장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의 괴리감조차 없으면 더욱 밋밋한
작품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역설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한데.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도덕성을 떡쳐먹고 있는 현실속에서 발리앙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련한 향수마저
느껴지니 말이다. 쑥맥같아도 차라리 그게 낫다.

여러가지 면에서 감독판은 에픽물을 아주 싫어하는 부류만 아니라면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제대로 된
명작이라고 거리낌없이 말하고 싶다. 감독판을 5점 만점이라면 개봉판은 2점 정도밖에 줄 수 없을 정도로 두 버전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니, 극장 개봉판에 실망한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놓쳐선 안되는 작품이라고 생각.




P.S. 볼드윈 4세(극중 인물들 발음 체계가 좀 이상한 듯. 보드엥으로 읽어야 되는거 아닌감?)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했다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 굳이 이런거 알아야 영화매니아라고
자랑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 감상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니 별 의미없지만, 굳이 노튼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볼드윈 4세의 연기는 극중 최고의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주인공 발리앙 따위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존재감이 막강하다. 데뷔작 '프라이멀 피어'때 부터 감동만 받고 있는데, 이 배우 정말 놀라운 연기력의 소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