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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1  2월 15일 오비히로 - 쌀쌀한 도시 10

 

 

사카이 씨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이리저리 검색하며 여러 지역들에 대해 설명해 준다.

기계가 삼성 갤럭시라서 일부러 보여주면서 웃는다.

삼성이야 일본에서도 유명하지만 실제로 일본 스마트폰의 절대 다수는 아이폰이라 오히려 이쪽에서는 레어한 쪽에 속한다.

매년 도쿄에서 이곳까지 놀러오는 사람이니만큼 개성이라고 할까, 매니아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 왠지 납득이 간다.

이쪽에서는 갤럭시 쓰는 사람이 매니악한 편이니 한국과 비교하면 참 재미있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쿠시로 습지에 다다르자 사카이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뒤쪽의 빈 공간으로 이동한다.

쿠시로라는 도시가 홋카이도에서 그나마 유명한 편에 속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 쿠시로 습지 때문.

일본에 남아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자연습지로,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여름엔 압도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자전거 여행 때는 이동 수단이 그러다보니 습지 내부까지 깊숙하게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변만 슬쩍 돌았는데

당시 도로 왼편에서 고양이를 사냥해 입에 물고 있던 북방여우와 마주친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자전거를 멈춰줬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어 조금 의아했는데

혹시나 싶어 도로 건너편을 살펴보니 새끼 여우 몇마리가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뒤로 슬금슬금 빼 주니 잔뜩 경계하며 도로를 건너가 새끼들과 함께 풀숲 속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를 참 좋아하는 본인이지만 자연 속의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내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는 없었던 기억.

 

여름과는 너무나도 다른 황량한 모습에 약간 실망도 했지만 쿠시로 습지는 이렇게 잠깐 지나가는 걸로는 도무지 감상할 수 없는 곳이다.

이미 1980년에 람사르 조약에 등록되었으며, 한국 최대의 습지라는 우포늪의 50배가 넘는 크기를 가진 녀석이라서.

우포늪이 1억 4천만년전에 생성된 것에 비해 쿠시로 습지는 고작 2천만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30년 전부터 사라져가는 습지 보호운동을 시작한 터라, 4대강 등의 무자비한 파헤치기로 거의 고사 상태에 이르른 우포늪에 비해

오히려 1980년 조약 당시보다 30% 정도 습지의 크기가 늘어난 상황이다. 여러가지로 씁쓸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쿠시로 습지는 여름 홋카이도 여행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절경 중의 절경이라

열차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이 아쉬운 모습을 여름 여행의 영양분으로 삼으며 참기로 한다.

 

 

 

사카이 씨는 쿠시로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는데 지정좌석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앉아갈 수 있는 터라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마구 달린다.

바쁜 작별인사였고 딱히 연락처도 받아놓은 게 없지만, 시레토코에 찾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본인 역시 쿠시로에서 갈아타긴 해도 어차피 JR 레일패스를 이용해 모든 좌석을 예약해 놨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

홋카이도의 레일패스는 외국인 관광객만 구입할 수 있어서 이런 사치를 부리는 것도 나름 뿌듯한 일이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외진 곳을 지나왔기 때문인지, 이제 번듯한 열차를 타고 양복을 입은 비지니스맨들 사이에 앉아서 현대 문명의 향취를 느낀다.

 

사카이 씨가 떠나고 나서는 별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음악이나 들으며 1시간 정도를 달려 오비히로에 도착한다.

쿠시로나 오비히로나 자전거 여행때 지나갔던 곳이라 여전히 주위 풍경은 낯설지 않다.

홋카이도 동부에서 가장 큰 도시라서 아침까지 머물렀던 시레토코의 대자연의 풍광은 금새 사라진다.

 

 

 

토요코인에 투숙하자 룸 키와 함께 신문을 한 부 건네받았다. 당연히 일본 신문.

여권까지 복사해 갔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신문을 건네 준 것인지.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긴 해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라 이대로 호텔에 틀어박히는 건 재미가 없다.

홋카이도의 면적을 생각하면 결코 길지 않은 10일여간의 여행 중에 굳이 이런 도시에 멈춰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이지만

도착 당일인 오늘은 어차피 멀리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몸이 좀처럼 침대 위를 떠나지 못한다.

조금 전 지나왔던 쿠시로 근처의 평원에서는 무려 이글루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특별 체험도 할 수 있었지만

숙박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닌데다 그런 고생은 자전거 여행 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즐겼기 때문에 딱히 아쉽진 않다.

 

이곳은 원래 아이누어로 토카치(十勝) 지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 최대의 평야 지대라 낙농업의 성지이기도 하고 그 덕에 오비히로 시는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한 편이다.

미식가들에게도 나름 유명한 곳인데,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인해 각종 유제품들의 품질이 매우 신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유를 사용하는 고급 과자류가 인기를 끈다.

 

홋카이도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인 롯카테(六花亭) 본점이 이곳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그 외에도 굉장한 레벨의 과자, 케이크점이 포진하고 있다.

과자 마을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예전 포스팅의 오타루 여행쪽에 보이는 과자점의 상당수가 이곳 오비히로에 본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달달한 과자나 케이크류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지금은 과자보다 더 필요한 게 짭짤한 식사라서 그렇게 당기지 않는다. 아침식사 이후로 맥주 한 잔 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낙농업과 함께 양돈업도 크게 발달한 토카치 지역에서는 이곳의 지역 음식이라 할 만한 돼지고기 덮밥 부타동(豚丼)도 유명하다.

원래 일본의 대표음식중 하나인 덮밥은 소고기를 얹은 규동, 장어를 얹은 우나동 정도가 일반적인데

이곳 토카치 지방에서는 소중한 노동력과 유제품 생산원인 소를 마구 잡아먹기 힘들었고, 장어는 있을리가 없으니

겨울에 강하고 대량 사육이 용이한 돼지를 덮밥 재료로 사용하면서 이 지방의 독특한 식문화를 만들었다.

 

요시노야 등의 전국 체인점 메뉴에 올라오는 곁다리 부타동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신선함으로 유명한 녀석인데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오비히로의 밤거리로 나와 보니 지금 꼭 부타동을 먹어야 할 의무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내일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 급하게 이곳의 특산물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기도 했고

내륙 지역이라 홋카이도에서 겨울이 가장 매서운 곳인 만큼 뭔가 좀 더 몸을 따뜻하게 해 줄 무언가를 갈구하게 된다.

 

 

 

쌓여 있는 눈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시레토코에서 느꼈던 어딘가 푸근했던 겨울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의 바람은 정말 꽁꽁 싸맨 옷가지 사이의 조그만 틈새로도 가차없이 파고 들어오는 칼날같은 매서움을 자랑한다.

안면 근육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시레토코의 야외 온천에서 눈을 맞으며 즐기던 그 겨울과는 달리 산을 넘어 불어오는 내륙의 바람은 자비심이 없다.

 

체감온도가 영하 15도에 이르고 있어서 밤거리를 오래 즐길만한 여유도 없다. 사실 시레토코에서 건너온 터라 별로 보고 싶은 풍경도 아니긴 하지만.

그나마 오비히로가 꽤나 큰 도시라서 이 정도지, 토카치 평야 부근에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모 유명 만화가의 아버지는 그런 추위에서도 빤스 한장만 입고 밖을 나돌아 다닌다고 하는데, 과연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울 따름.

 

 

 

먹을 게 없으면 부타동이라도 먹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불쑥 시야에 나타난 인디언 카레.

그러고보니 왜 이제껏 이 녀석을 잊고 있었을까 싶다. 전혀 생각나지 않다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분명 대자연의 뜻이라 믿으며 길을 건넌다.

 

외지 사람들이 오비히로 하고 떠올리는 음식이 부타동이라면 실제 지역민들의 소울 푸드로 인식되는 것이 이 인디언 카레.

오비히로 안에서는 카레 업계의 절대적인 정점에 군림하고 있어서 코코 이치방야 같은 전국구 체인점이 발 들일 틈도 없다.

이곳 사람들은 심지어 집에서 냄비를 들고 와서 카레를 싸 가기도 한다고. 젊은 창업자의 끝없는 노력이 만들어 낸 절묘한 루의 깊은 맛이 만들어 낸 전설이다.

 

 

 

카레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젠 밖에서 사 먹는 카레에 만족하지 못하고 집에서 거하게 만들어먹는 습관이 생긴 본인이라

코코 이치방야 정도의 그럭저럭 괜찮은 카레도 만족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닌데, 이 인디언 카레는 본받고 싶은 맛 중 하나다.

 

자전거 여행때는 한여름이라 카레가 그렇게까지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신료의 배합은 놀라웠다.

소고기, 돼지고기, 야채를 기본으로 한 세 종류의 루가 그 강렬한 향신료 안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포인트.

 

해산물 카레 등 비싼 녀석도 있지만 이곳 인디언 카레는 지극히 저렴하고 서민적인 풍취가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싼 녀석을 주문해도 실망하는 법은 없다.

카레만으로 배를 채우려면 세 그릇 정도는 먹어치워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허기와 추위를 달래는 정도로만 즐기기로 생각하고

중간 매운맛의 비프 카레를 주문한다. 이 정도라면 밖에 나와서 군것질 한 번 더 할 여지는 충분히 남겨놓는 양이다.

 

한국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카레 향기가 얼어붙은 코 속을 통과하는 순간 척수 부근에서부터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도 일본식 고형카레와 한국의 가루 카레를 서너 종씩 배합해서 루를 만들긴 하지만

이곳의 루는 시판용 카레가 아니라 갖가지 향신료를 직접 사용해서 그 독특한 풍미를 만들다 보니 흉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건더기가 많은 한국의 카레와 달리 이곳은 고기 이외의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야채의 겉모습이 아예 남지 않을 정도로 수십 수백시간을 끓여 일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만 발전한 독특한 방식이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입맛 들이면 한국의 카레는 그냥 맹물이나 마찬가지.

 

 

 

콧물을 참으며 전신을 자극하는 카레를 한 그릇 비우고 나니 행복감이 몰려온다.

오비히로에서 인디언 카레를 잊고 있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이제 나도 늙었구나 싶다.

 

양이 허기를 해결한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내일 먹을 간식과 음료수까지 구입한 후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들어가기 전에 조금 더 배를 채우자고 생각하고 모스버거로 들어간다. 여기 햄버거는 맛있는 반면 크기가 워낙 작아서 간식거리로는 유용하다.

 

카레를 즐긴 후라 달콤한 토마토소스의 맛이 약간 옅어지는 역효과가 있었지만

아삭아삭한 양파의 식감과 치즈의 부드러운 맛이 빈 속에 자극적이었던 카레의 향기를 중화시켜준다.

겨울 저녁이라 모두들 일찍 귀가했는지 한적한 분위기에, 숙소에 돌아가도 할 일은 없었기에 느긋하게 밀린 일기를 쓰며 햄버거를 씹는다.

밖에는 칼날바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슬눈이 내리고 있지만 내일만큼은 좀 더 펑펑 내려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여행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던 날씨가 떡하니 나타나는 바람에

내일까지 그런 행운을 바라기엔 좀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희망은 희망이다.

함박눈은 도시 여행에서는 매우 번거로운 녀석이지만 내일은 오히려 눈이 신나게 내려주는 게 일정에 도움이 된다.

 

카레와 햄버거로 속이 든든해지고 따듯한 가게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으니 스스륵 눈이 감겨온다.

숙소로 돌아와 뜨끈한 욕조에서 몸을 녹인 후 TV를 즐기며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쑤셔서 이리저리 뒤척여 줘야 좀 편안해 지는데 그러면 TV를 보기가 힘들어 살짝 귀찮다.

사실상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내일 여정에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며 전등을 끈다. TV는 타이머 설정해 뒀으니 잘 떠들다가 알아서 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