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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5  2월 15일 오비히로 - 한 잔 한 개피 그리고 증기 6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몸을 떨며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이 호텔의 전망 좋은 객실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쪽이지만

저 언덕에 추억을 가지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이 풍경이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아마 살아가는 동안 이 풍경은 몇 번이고 더 보게 될 듯.

 

아침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쾌청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하늘이 유지될런지.

오늘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인 토카치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비히로(帯広)까지 이동한다.

렌터카가 없는 본인으로서는 나갈 때나 들어갈 때나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갈아타야하는 시레토코라는 곳이 가장 이동하기 귀찮은 곳이지만

어제의 황홀한 경험만으로 그 정도 수고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다.

 

단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도착 하기만 하면 오케이였던 때와 달리

아침에 나가는 버스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출발일이라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움직이며 새벽에 일어나 후다닥 조식을 챙기러 간다.

 

이곳에서 기차가 움직이는 샤리역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90분 혹은 2시간에 한 대씩밖에 운행하지 않기도 하고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버스의 운행시간과 샤리역의 열차 운행시간이 연계되도록 조절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계획대로의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이동 시간이 연쇄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어마어마한 손실이 생긴다.

첫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오비히로에 도착하는 시간이 최대 3시간 넘게 차이날 수도 있어서

아무리 피곤한 몸이라도 날렵하게 움직여 짐을 싸고 나가야 한다. 체크아웃 시간이 널널한 관광호텔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긴 하다.

 

 

 

로비에서 샤리로 가는 버스를 어디에서 타는지 물어보니 손으로 그려서 인쇄한 지도까지 건네주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거리는 눈길을 느긋하게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편이라 30분 일찍 나온 본인으로서는 안도감이 든다.

샤리행 버스와 열차는 시간 연계가 철저하니까 한번 버스에 타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도 건네 줘서 든든하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조그만 마을 안에서도 담을거리는 눈만큼이나 쌓여있다.

원래 어디까지가 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행자를 위해 깔끔하게 눈을 치워 놓았는데

반듯하게 잘 닦아놓은 길 옆으로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양의 길인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아스팔트 길이고 삿포로처럼 도로 밑에 열선이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 미끄러움 주의는 어제의 오호보다 더 신경써야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일찍 도착해 편안한 마음으로 대기중인 버스에 앉아 있으니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올라탄다.

어제 함께 오호를 거닐었던 사카이 씨와 눈이 맞자 양측 모두 순간 어리둥절 하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사카이 씨는 어제 바로 삿포로로 돌아간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욱 놀랍기도 했고.

피곤해서 그냥 푹 쉰 다음 오늘은 쿠시로(釧路) 습지 부근의 온천 마을에 들렀다가 삿포로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오비히로행 역시 쿠시로 습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동 거리의 절반 정도는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홀로 여행을 좋아하긴 해도 이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언제나 대환영이기 때문에 즐겁게 동승한다.

어제까지는 오호 투어에 너무 정신을 뺐겨서 동행하던 사람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나니 비로소 사카이 씨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조금 더 빨리 기억에서 잊혀졌을 듯.

 

샤리 역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여있다. 겨울 비수기라고 해도 여전히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곳 지역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으니까.

10분쯤 뒤에 열차가 도착하는데 사카이 씨가 이제 막 문을 열고 있는 역내 매점에 들어가 맥주 없냐고 물어본다.

가게 주인이 턱하니 거대한 금속 드럼통을 꺼내더니 시원하게 생맥주 한 잔을 뽑아준다. 뭔가 신기한 볼거리로 느껴진다.

 

나도 한잔 하겠냐고 해서 이런 기회니 고개를 끄덕였는데, 당연히 본인 분의 맥주값을 내려고 하다가 저지당했다.

일본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며 사카이 씨가 웃는다. 일본인들이 더치페이에 철저하다는 일반 상식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 신선할 듯.

본인은 시골을 많이 달리다 보니 이미 이런 호의에는 나름 익숙해져 있기는 하다. 사실 도심을 벗어나면 일본 쪽이 이방인을 훨씬 더 챙겨주는 편이다.

 

 

 

굳이 삿포로가 아니라도 일단 홋카이도의 생맥주 레벨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수준.

물 맑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렇기도 하고, 일본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끄트머리 기차역 매점에서 파는 생맥주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아침부터 쌓인 눈을 바라보며 생맥주 한 잔이라는 매우 드문 경험을 즐기며 기차에 오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조금 늦게 올라섰다면 앉을 자리도 없었는데, 다행히도 사카이 씨와 둘이 앉을 자리는 확보했다.

맥주를 손에 들고 기차에 타서 홀짝홀짝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라 나름 신선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문득 건너편 창가에 훌륭한 풍경이 흘러가고 있다.

당연히 건너편에도 중국인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소심함을 한껏 발휘해서 카메라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사카이 씨가 망설임없이 카메라를 꺼내 건너 풍경을 담기 시작하니 본인도 슬며시 카메라를 꺼낼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을 피해 풍경을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장 찍고나니 용기를 낸 보람은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도쿄에서 시레토코까지의 거리는 거진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이런 여행 패턴을 가진 사람은 나처럼 음울한 사람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플러스적인 성향이 강해서 옆에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는 느낌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카이 씨다 보니 이것저것 알고 있는것도 많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사카이 씨가 차장석 쪽으로 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는 찍을거리가 많다고.

짐을 자리에 놔 두고 이동한다는 게 살짝 부담되기도 하지만 일단 사카이 씨에게 이끌려 카메라만 들고 운전석 쪽으로 이동.

 

이런 스팟은 이미 유명한지 좁은 차장실 내부엔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나 보다.

덜컹거리는 원맨 열차 앞쪽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니 철도원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이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열차를 운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실감된다.

 

 

 

이쪽 홋카이도에서는 꽤나 드문 터널을 지나는 노선이라서 더욱 유명한가보다. 그리고 어쩐지 이런 터널은 겨울과 어울린다. 카와바타의 영향일까.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지지할 만한 공간이 없고 화각상 망원렌즈를 사용해야 해서 셔터 누르기가 힘들지만 셔터스피드를 높이고 손떨림 방지를 최대한 이용해 몇 장을 담아본다.

열차에는 이제껏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차장실 쪽 풍경을 담아본 적이 없는데

도심과 달리 이런 대자연의 품 속을 달리는 열차의 풍경은 상당한 흥미를 동하게 만든다.

여러가지로 정보가 풍부한 사카이 씨 덕에 모르고 지나갈 뻔 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 고마울 따름.

 

 

 

월급은 적고 고된 홋카이도 철도원의 생활이지만

매일 이런 풍경을 스쳐지나가며 열차를 조작하는 직업도 분명 급여 이외의 매력이 존재할 법 하다.

지하철 같은 곳에서 열차 몰아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좀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특히나 일본에서 가장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가지고 있는 홋카이도 철도는

디지털 기기에서 느끼기 힘든 육중함과 애상적인 매력이 남아있어서 철도 매니아들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사카이 씨는 딱히 철도 매니아가 아니지만 이 곳을 지나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듯 하다.

 

어느 정도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는데, 사카이 씨가 조금 뒤에 또 볼거리가 하나 있다고 기대감을 주입해 준다.

아침 맥주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원맨 열차의 흔들림이 묘하게 느껴지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

일단 헤어지기 전까진 사카이 씨가 모든 볼거리를 다 제공해 줄 것 같아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어느 정도 달리니 사카이 씨가 이제 앞으로 가자고 다시 일어난다.

여전히 정보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산 아래로 기차가 돌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참 기묘하게 생긴 산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육중한 근육질 몸매 밑으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예술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많은 홋카이도라 이런 철로를 개설할 때 참 고생 많이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언급했듯이 교도소에서 많은 인원이 이곳 노동에 투입되었는데, 시체도 못 찾고 사라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혼자였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장관을 소개해 준 사카이 씨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한다.

 

 

 

시레토코에서 오비히로까지는 꽤나 긴 여정이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간의 1.5배 정도 되지만 철도는 홋카이도 섬의 외곽을 주욱 돌아가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이동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어림잡아 6시간 정도. 그리고 노후된 철로 사정때문에 정차해야 할 경우도 많다.

 

열차 자체는 홋카이도 남동부의 도시 쿠시로(釧路)에서 한 번 갈아타면 되지만 그 전에는 두 번 정도 정차를 한다.

이는 시골 철로가 단선 운행을 하기 때문에 마주보고 오는 열차를 미리 보내는 등의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의외로 여기저기서 승하차 하는 승객들로 분주하다. 홋카이도에도 온천이 많아서 겨울 여행객들이 유지되나보다.

15분 정도 정차를 하게 되어 사카이 씨와 함께 밖으로 나와 공기를 마신다. 담배를 꺼내 들고 피냐고 물어봐서 어쩔까 하다가 한 대 받아든다.

사카이 씨는 나보고 담배 피는 줄 몰랐다며 놀란다. 어제 하루종일 오호를 돌아다니면서도 담배 피고싶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고보니 사카이 씨는 어제 오호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피웠던가.

본인은 여행 중 이런 식으로 권유받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담배를 피지 않으니 헷갈릴만도 하다.

 

홋카이도에도 화산이 많고 그러기에 온천도 많은데 이 부근은 특히 그런 곳이 많기로 유명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곳으로, 조금 더 한적한 곳에 가면 텅 빈 논밭처럼 넓은 평야가 있는데

그곳에서 삽을 들고 무릎 위쪽 정도까지 흙을 파내려가면 온천이 졸졸 솟아나오는 신기한 장소가 있다.

 

 

 

어차피 오비히로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잡아놓은 게 없기 때문에 이런 느긋함도 좋구나 싶다.

사카이 씨는 또 다시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준다. 여기서 10분 쯤만 더 기다리면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사실은 이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맞은편에서 기차가 놀랍게도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라는 것이다.

원래는 전부 폐기하기로 했지만 한 대만을 관광용으로 개조해 이 부근을 어슬렁거리게 하고 있다고.

일본 본토쪽에는 아직 몇 대인가 운행하는 녀석이 있지만 홋카이도에서는 이곳의 증기기관차가 유일하다.

 

타이밍을 일부러 잡은 것도 아닌데 그 녀석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물론 사카이 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정차시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놓쳐버렸을 수도 있었을 듯.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육교 위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멀리서 오는 기차를 찍으려면 높은 데가 좋을 듯 하니.

낡은 합판을 이어붙여 만든 옛날 육교인데 또 친절하게 유리창은 전부 달아놓았다.

얼어붙어 있으면 열기가 힘들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별 무리없이 열려서 장비를 갖추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은 정보를 잘 모르는 것인지, 그냥 많이 봐서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도 기차를 보러 나오지 않아서 사카이 씨와 둘이서만 육교 위에 올라와 있다. 왠지 이득 본 기분이기도 하다.

연습삼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원맨 열차를 담아본다.

이런 필름틱한 색상 왜곡은 앞으로 달려 올 증기기관차에게 적용해야 하지만 이것도 나름.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든 단선 철도지만 덕분에 이런 즐거움이 생기기도 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증기기관차의 첫 인상은 그다지 우람하거나 은하철도의 느낌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퍽퍽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니 역시 실제 경험해 본 적 없는 친근함을 느낀다.

 

기차 하면 칙칙폭폭이 뇌리에 박혀있기도 하고, 워낙 미디어에서 폼 잡을 때 잘 나오는 녀석이라

실물로 달리는 모습을 보니 뭐가 현실적인지 언뜻 구별이 잘 가지 않는 느낌도 든다.

어찌 보면 이제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관광열차라서 좌석이 전부 양쪽 창문을 향해 있고 운행 속도가 느린 녀석인데다 요금도 결코 싼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듯 하다.

승강장에서는 이곳에서 탑승 후 다시 반대편으로 출발하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서 있고

개중에는 열차 안 승객들에게 즐겁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인사는 역시 전동 기관차보다 이런 녀석이 더 어울리긴 한다.

 

창문으로 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이런 설경을 즐기며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을 먹는다거나.

실제로 이 기차 안에는 중간에 난로가 있어서 위에서 밤을 구워먹을수도 있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것에 큰 매력을 느낄 만한 나이는 아닌가 싶다.

뭔가 우수에 젖어볼 만한 시간도 없이 사카이 씨와 함께 서둘러 내려간다.

이 기차가 홈에 도착하면 다시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출발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