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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2  히로시마 여행기 13편 - 식사다운 식사, 마지막 밤 10

이제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고, 오늘 하루종일 먹은건 단풍잎 만쥬 3개 뿐.
정말로 배를 한 번 채워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모테산도 거리를 돌아본다.
걸어다니다보니 안내소의 열린 창문에서 풍기는 A4 용지의 향긋한 내음을 참지 못한 사슴들이 머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라의 사슴과 비교하면 참 얌전한 것이, 관리인이 용지에 손을 대고 있는것만으로 절대 억지로 뜯어먹으려 하지 않네.
그냥 애처로운 눈빛으로 코만 가져다 댈 뿐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풍파를 겪은 관리인께서 그들의 애교작전에 넘어갈 리가 없음.


무정하게 닫혀버린 창문을 보는 사슴의 눈망울에
내공이 약한 나는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지고 싶었다.

역시 사슴은 강하구나. 예쁜 것보다 귀여운게 더 강하다는 모 만능소녀의 명언이 떠오른다.


오전에 오면서 봤던 곳은 이렇게 황량한 벌판이 되어버렸다. 이래서 여기저기 출구를 만들어 놓은거구나.
누군진 몰라도 이런 갯벌에 신사를 지어놓을 생각을 하다니 좋은 아이디어다. 관광지가 될거라고는 예상 못했을지 몰라도.


사슴들이 너무 진하게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길래 찍은 사진.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는 사진찍는데 방해될까봐 (아님 그냥 무서워서일지도) 슬금 뒤로 물러났는데
내가 카메라에서 눈을 떼자 다시 애정행각중인 사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오모테산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가격대 성능비가 괜찮은 굴요리를 찾아다닌 결과
요 굴덮밥이 내 지갑사정에 제일 적당한 녀석으로 판명되었다.

음식점은 2층에 있었는데, 1층에 전시된 음식 모형들을 지그시 감상하고 있으니
갑자기 '어서오십시오~'라고 녹음된 목소리가 전시판 위에서 튀어나와 깜딱 놀랐다.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다들 한번씩 놀라고 가더라. ㅡㅡ;
그거 없으면 좀 더 손님을 많이 끌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800엔이나 하는 굴덮밥(かい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목도 말랐고 몸은 피곤에 찌들었던 터라 제대로 된 음식을 보니 얼굴에 환희의 빛이 감도는 듯 했다.
보통 저렴한 체인점인 요시노야(吉野家)나 마츠야(松屋)의 규동(牛丼)이 450엔 언저리쯤 되는것에 비해 비싸긴 하지만
풀어놓은 계란이나, 쌀밥의 탄력이나, 튼실해서 터질것 같은 굴의 위용을 생각하면 + 관광지라는걸 생각하면 감내할만한 가격이다.

굴은 한국서 그리 비싼 음식이 아니지만, 이곳 미야지마는 굴요리가 일본 전체에서도 유명한 곳이라 가격이 세다.
물론 가격대비 만족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먹은 굴 중에선 크기나 싱싱함이나 최상급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먹다보니 배가 많이 아쉽다.
아침 댓바람부터 돌아다니다가 먹는 첫 식사라 이대로 넘어가기는 아쉬웠던걸까.
돈 계산을 좀 해보고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본다. '혹시 여기 카드 받나요?'
다행히도 '받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이번 식사는 다음달에 한국에서 값으면 되니 열심히 먹어보자.

그래서 굴 크림 고로케 추가로 시켰다. 갓 만든 타코야키의 속만큼이나 뜨거운 녀석을 조금씩 이빨로 잘라 먹는 느낌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 속에 살짝 짭쪼름한 굴의 조합은 뭐라 말하기 힘든 즐거움을 준다.
캐첩에 찍어 먹어도 별미. 2개 400엔이라 먹으면서 손이 떨렸지만 이럴 때 먹지 않으면 언제 먹으리오.

그런데 신나게 먹고 계산하려니 '카드는 2000엔 이상부터 가능합니다' 라고 미안하다며 말하는 것. ㅡㅡ;
아니 이 사람들이... 그럼 현금 없었으면 경찰에 신고했을려나?
좀 황당하긴 했지만 여기서 깽판 부리고 히로시마 여행 날짜를 하루 줄이긴 싫어서 피같은 현금 털어 지불했다.
이제 현금은 코딱지만큼 남아있지만 사실 내일은 돈 들어갈 일이 아예 없는거나 마찬가지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이 정도 금액은 현금지불도 가능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해 히로시마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조금 남겨두고 싶었던 것.


꽤나 늦은 시간이지만 아직도 이곳에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있다.
이츠쿠시마 신사의 야간 풍경은 꽤나 멋지다는 소문. 하지만 그것까지 다 보고 돌아가기는 힘들다.
JR 페리는 11시까지 운행하지만 내가 프리패스를 이용할 수 있는 마츠마에 기선은 8시까지밖에 운행하지 않기 때문.

밥을 먹으니 포만감과 함께 은근히 쌓여있던 피로도 함께 몰려오는 것 같다. 그래도 이 나른함이 기분 좋은 것 역시 여행의 장점.


순식간에 섬을 나와서 막 출발하려는 히로덴 하나를 그냥 보냈다.
사람이 꽉 차있어서 앉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

이곳에서 목적지인 히로시마 역앞은 종점에서 종점이기 때문에 일단 여기서 앉으면 끝까지 앉아갈 수 있다.
지친 대퇴부를 이끌고 1시간 가까이 서 있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일부러 다음 히로덴을 기다린다.

이 시간에 이런 관광지에서 전차를 타는 사람은 다들 나만큼이나 지쳐있기 때문에 빈 자리에 눈을 번뜩인다.
염치불구하고 줄 잘서 있다가 문 열리자마자 뛰어들어가서 한 자리 맡을 수 밖에.

다행히도 15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무난히 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영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히로시마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항상 여행의 마지막 밤은 감회가 남다른 법. 히로시마 역안의 맥도날드에서 달맞이버거(月見バーガー) 세트를 사들고 호텔로 들어간다.
어제 그 편의점 앞에는 여전히 고양이들이 배회하고 있었는데, 어제 보지 못했던 이 녀석은 삶의 무게가 그대로 느껴지는 모습이다.

한쪽 눈은 보이지 않는 듯 하고, 오른쪽 앞다리가 반쯤 잘려나가서 세 다리로만 걷고 있었다. 다른 녀석과는 달리 일부러 내 쪽으로 다가오려 하지도 않는다.
먹을걸 주고싶었지만 이 녀석은 그냥 무심한 듯 시크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슬쩍 자리를 피해버렸다.


결과적으로 내가 주려던 음식은 앵앵거리며 달려드는 새끼들에게로 넘어갔다.
내가 이 녀석들과 놀고 있으니 한 할아버지가 웃으며 다가와서 주절주절거리신다.
이 녀석들 오래 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새끼 낳아가며 살고 있다거나,
나처럼 길가던 사람들이 적당적당히 잘 도와주고 있다거나,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거 아닌가, 사람한테 너무 길들여지면 곤란할텐데 라는 둥의.

확실히 내가 이곳에서 본 10여마리의 고양이들은 전부 중성화수술이 되어 있지 않은 도둑고양이다.
중성화 후 방사된 고양이는 귀 끝이 삼각형으로 잘려 있기 때문에 금새 구분이 가고, 그런 고양이들에게는 먹이를 주도록 장려하고 있다.

도쿄에서는 꽤나 활발히 이루어지는 작업인데, 이곳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보다.


숙소에 돌아와서 달맞이버거를 놓고 한 장.
배가 든든한 상태였는데도 이녀석을 가져 온 건, 작년 2달간의 자전거 여행때 이녀석과 얽힌 사연이 많기 때문.

제대로 휴식할 곳도 없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맥도날드라는 자유스러운 휴식공간과, 고칼로리 햄버거는 신의 선물이나 마찬가지.
오래 있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든든한 화장실과 세면대, 빵빵한 에어콘까지 완비한 그곳은 헝그리 여행자의 간이 호텔.

자전거 여행을 위해 일본에 도착했던 첫날 밤. 불안에 가득 찬 채로 터벅터벅 걷다가 들어간 맥도날드에서
한국에 없는 메뉴를 보고 그 재미있는 작명 센스에 기분이 좀 풀려서 먹어봤던 달맞이 버거 세트는
여기저기서 내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래서 일본에 올 때면 꼭 이녀석을 챙겨 먹는다. 예전만큼 맛있어서 눈이 돌아갈 정도는 아니지만.


짧은 여행이라 마지막 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아니, 사실은 어느 여행이나 마찬가지. 2달짜리 여행이든 3년짜리 여행이든 여행의 마지막 밤은 항상 아련하다.

오늘따라 TV 프로그램도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새벽까지 징하게 기다려서 심야 애니메이션이나 한 편 보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