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4시쯤 집을 나섰다.
등에 맨 베낭에는 옷 한두 벌 밖에 안들어 있었기 때문에 카메라와 렌즈 2개가 든 숄더백이 훨씬 묵직하다.
히로시마행 비행기의 출항 시간은 7시 35분. 공항까지 가는 리무진 버스는 4시 50분에 도착하는데 생각보다 택시가 빨리 잡히는 바람에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 사들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장장 30분동안 얼싸안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 자전거 여행 이후로 1년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
수백 번은 지나간 익숙한 일상의 거리 속에 앉아있어도 역시 기분은 남다르다.
반팔로 버티기 힘든 싸늘한 새벽 바람 속에 혼자 느끼는 고독이 흥분과 기대로 변하는 감정.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여행.
히로시마(広島) 공항엔 9시에 도착했는데, 히로시마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대기소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대부분 나처럼 저렴한 항공편을 이용해 여행을 즐기려는 한국인 관광객들인듯 한데, 그 앞에서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설명중이었다.
일본은 9월 20일부터 골든위크라 전부 어디론가 떠나려고 정신없는 상황이다.
히로시마 시내쪽 교통이 워낙 밀려서 오늘은 아예 리무진 버스 운행이 불가능하니 버스를 타고 시라이치(白市)역까지 간 후, 거기서 히로시마역까지 가는 전철로 갈아타라는 이야기.
근데 그걸 다 일본어로 설명하니 대부분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알아들을리가 있나?
일본어를 알아듣는 몇몇 사람은 알아서 슬그머니 빠져나갔지만, 꽤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냥 모르뚱구 모르뚱구 대기소 앞에 서 있는 실정이다.
어쩌겠나. 그냥 옆에 슬쩍 가서 이러저러 설명해주고 티켓 판매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티켓 판매기에도 사람이 밀려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티켓 발매기에는 사실 영어 표시도 가능하기 때문에 마음을 차분히 먹으면 쉽게 발권할 수 있지만 그 때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으니.
플랜을 착실히 짜왔을 터인 관광객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당했을 때는 원래 할 수 있는 일도 잘 못하는 법.
덕분에 티켓 판매기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몇몇에게 요렇게 요렇게 누르면 된다고 표 몇장 뽑아주고 내 갈길을 갔다.
시라이치역은 히로시마공항에서 버스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조그만 역이다. 일본 내 상당수의 지역이 그렇듯 정말 작고 아담한 농촌 간이역이라 신기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리 리무진 버스 결행 소식을 접한 역무원이 앞에 나와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티켓도 끊어주고 하면서 애를 쓰고 있다.
조금만 안내판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긴 하지만, 어느 방향이 히로시마쪽인지 헷갈려서 당황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바람에 상황은 자동 종료.
히로시마현은 11월에 단풍이 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직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햇볕 쨍쨍한건 여행에 도움이 되니 나로서는 반가울 따름.
작년 자전거 여행때는 근 1달 가까이 비만 맞아가며 페달을 밞았던 터라 여행자에게 비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가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행경비를 아주 조금만 갖고 온 터라, 경비 지출의 최대 원흉인 교통비를 줄여보고자 리무진 버스 왕복 할인권을 끊으려 했던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편도 1300엔, 왕복 2360엔)
뭐, 이렇게 갈아타면 시간은 좀 더 걸려도 오히려 가격이 싸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지만.
느긋하게 수동렌즈의 촛점을 맞추면서 전철이 오길 기다렸다.
나와 다른 전철을 타는 아이는 어디로 가는 걸까.
전철 안은 관광객들뿐 아니라 현지인들로 인해 꽤나 혼잡한 상태였다.
나에겐 여전히 어색하고 신기한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가정교사로 보이는 덥수룩한 뚱땡이 남자와 지망교 이야기를 하고 있다.
히로시마는 찾아오는 관광객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이제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전혀 어색해하는 기색이 없다.
하지만 가끔씩 귓속말로 자기네들끼리 외국 관광객에 대해 수근거리는건 좀 참아주길.
이제 일본어 알아먹는 사람도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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