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위크라 빈 방이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의외로 아주 쉽게 저렴한 구석탱이 비지니스 호텔 하나를 잡았다.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었다면 보험용으로 예약해놓은 호텔도 필요없었는데.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다른 손님은 방이 없어서 돌아가는 모습을 봤다.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나보다.
새벽3시에 기상 -> 버스1시간 타고 공항 -> 비행기1시간30분 -> JR 40분 + 30분 + 30분
걸어다니는 것보다 뭔가를 타고 가는게 묘하게 더 피곤하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최대한 숄더백을 가볍게 한 후 침대에 누워 TV 를 봤다.
확실히 철저한 개인공간은 가장 신속하게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나보다.
시간은 이미 유명한 장소를 둘러볼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일본에 오면 항상 들르는 서점과 전자상가에서 눈요기나 해 볼까 생각했다.
히로시마시의 특징이라면 역시 노면전차 히로덴(広電)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고, JR 전철보다 느긋하게 도시를 둘러보며 움직인다는 느낌이 마음에 든다.
1일 패스나 2일 패스를 끊으면 든든하게 돈값을 하니 교통료 줄이는데도 일조를 하는 녀석.
이 길다란 노면전차가 어떻게 복잡한 도로를 따라 움직이나 싶었는데, 전차 연결부분이 저렇게 이동방향에 따라 스르륵 움직이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저곳에 발을 얹어놓으면 회전에 따라 슬금슬금 움직이는게 참 재미있다.
맞은편 의자에서 백인 여성이 똑같이 재미있는듯 저곳에 발을 얹어놓고 웃는다.
나만 어린애틱하게 노는게 아니었네.
원래 슬쩍 둘러보는 상점가나 유흥가로는 거대 체인 파세라 백화점이나 혼도리(本通) 상점가가 있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전자기기와 애니메이션 관련상품에 관심이 많은 고로 전자상가 데오데오가 있는 카미야쵸(紙屋町)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을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전자상점가와 애니메이션 관련 상가는 상당히 근접해 있는 경향이 강하다.
애니메이션 오타쿠와 전자기기 오타쿠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 이건가?
이곳의 애니메이트는 아주 작은 규모라 거의 볼건 없었다. 여긴 애니 오타쿠들에겐 시골 촌구석이다.
데오데오에서 신형 PS3 구경도 좀 하고, 홈시어터와 아이팟 구경도 좀 하고, 국내 발매되지 않은 DVD도 좀 구경하고.
옆의 서점에서는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聽け)'를 한권 사고 이리저리 책들을 둘러봤다.
저 책은 대학교때 읽던 원서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통에, 이번이 기회라 생각하고 다시 구입한 것.
피곤하고 배가 고파서인가 저 제목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 터라 직원아가씨한테 위치를 묻기가 애매해서
'하루키의 데뷔작 말인데요,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어버렸더니 이 아가씨가 하루키 데뷔작이 뭔지 모른다. ㅡㅡ;
일단 하루키 작품이 모여있는 구간에 데려다줘서 어렵지않게 찾았지만 아가씨가 조금 쑥쓰러워하는 것 같아서 괜히 이쪽이 미안해졌다. 도서관 사서도 아니고 서점에서 일한다고 다 문학매니아는 아니니까.
싸구려 규동으로 살짝 배를 채우고, 호텔에 돌아가서 먹을 KFC 치킨 한봉지 손에 들고 히로덴을 기다린다.
이런 여행에서는 가능한 한 밖에서 배부를 정도로 먹지 말고 숙소에서 먹을 음식을 따로 장만하는게 좀 더 이득보는 기분이다.
어차피 호텔에서 TV 보면서 한참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 입이 심심하지 않게 먹어주면 여행의 하루를 마감하는데 좀 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더라.
히로덴의 분위기를 찍으려 셔터를 눌렀는데 콧구멍에 손을 가져가는 학생이 파인더에 들어와 버렸다. T_T 결코 일부러 찍은건 아니니 이해해주길.
불행중 다행이라고 조리개를 엄청 개방해서 찍었더니 약간의 아웃포커싱 효과는 있다.
예정된 모든 일정을 지친 몸으로 소화하고
적당한 먹을거리를 손에 든 채
천국과도 같은 숙소로 가는 교통편을 기다릴 때의 뿌듯함.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히로덴은 굉장히 신형 전차와 오래된 구형 전차가 혼재되어있다.
들어갈 때는 그냥 아무 입구로나 들어가면 되지만
나갈때는 승무원이 있는 맨 앞쪽과 뒷쪽 출구로만 나가야 한다.
승무원이 검사는 하겠지만 사실 중간 입구쪽으로 내려도 눈치채지 못하게 할 정도는 된다.
인력적으로나 승차요금 환수 능력으로 보나 꽤나 비효율적인 운행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게 돈 많은 선진국임을 은근히 내세우는 듯한 느낌이라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예전에 엄니께서 서울 지하철의 바뀐 발권 시스템에 아주 분노하시며 역무원에게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대구 지하철처럼 회수용 토큰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음에도
보증금을 더 내고 구입해서 다시 카드를 반납하며 돈을 돌려받는다는, 어이없을 정도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을
뒤늦게 도입했다는 사실을 보면, 조금 구식이고 인건비가 들어간다고 해도 그 나름의 좋은점이 있다는 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애초에 서울 지하철의 개떡같은 발권 시스템은 거대한 커미션 따먹기의 농간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역앞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 사들고 오는데 보도 옆 수풀에서 뭔가를 와득와득 뜯어먹는 길고양이를 발견.
내가 일본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
어딜 가나 이 녀석들과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어디선가 앵앵거리며 나에게 다가오는 새끼 고양이.
처음엔 몰랐는데 이곳은 길고양이의 대량 서식처인 듯 하다. 어림잡아도 6~7마리가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사실 치킨같은거 주는건 좋은 일이 아닌데, 비교적 대접을 잘 받는 일본의 길고양이 중에서도 대도시 역 주변에 서식하는 애들은 꽤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터라
이런거라도 없는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에 살점을 조금 떼어줬다.
사진을 잘 보면 보이겠지만 이녀석도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가장 반가운 이 녀석들은
마치 내가 가려는 길을 앞서서 도착한 후 나를 반겨주는 오래된 친구와 같은 느낌을 준다.
크게 말다툼이나 의견차이를 보일 일도 없이 적당히 냉정한 개인주의를 즐겨주는 시크한 친구같은.
정말 애처롭게 울던 새끼고양이가 아쉬운듯 내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안한데 나도 꽤 가난해서, 이거라도 먹고 힘을 내야 하거든. T_T
별로 맛있지는 않았지만 치킨을 좀 뜯고 뜨거운 욕조에서 몸을 푹 고은 후 침대에 누워 TV를 틀었는데
내 머릿속보다 내 육체가 더 힘들었는지 30분도 보지 못하고 자동으로 눈이 감겨버렸다.
원래 일본에서 심야 TV 보는것도 여행의 낙중 하나였는데, 피곤하니 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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