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를 해서있지 아침 8시가 될때까지 눈 한번 안뜨고 잘 잤다.
잘 잤다고 하기보단, 일어나니 몸이 피곤하고 머리가 좀 어지러운게, 피로의 조각들이 몸 여기저기에 널려있긴 했다.
덕분에 심야 프로그램들을 못봐서 좀 아쉽긴 하다. 여행와서 보는 TV는 또 각별한 맛이 있는데.

싸구려 호텔이라 공짜 조식도 없으니 9시 반이 될때까지 뒹굴뒹굴하다가 짐 챙겨서 호텔을 나왔다.
오늘은 한국에서 예약해놓은 호텔이 있으니 미리 짐 맡겨놓고 나올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오늘은 히로시마 여행의 백미인 미야지마(宮島)로 갈 예정.
미야지마는 아마노 하시타테(天橋立), 마츠시마(松島)와 더불어 일본 3대 절경이라고 불리는 작은 섬.
이 곳에 있는 이츠쿠시마 신사(嚴島神社)와 오중탑(五重塔)는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것들 보러 가는게 아니지만.

어제는 JR 전철을 탈 일이 많아서 프리패스 끊는게 오히려 손해였지만 오늘부터는 모든 교통수단을 히로덴 프리패스에 의존한다.

2일짜리 프리패스는 이틀간 히로덴과 미야지마행 마츠마에 기선(松前汽船), 그리고 미야지마 로프웨이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고 가격은 2000엔.
히로덴은 한번 타는데 150엔, 마츠마에 기선은 편도 170엔, 로프웨이는 왕복 1800엔이니 이것들을 이용할 생각이면 무조건 프리패스를 추천.


그러한 프리패스에도 단점은 있으니, 이 미야지마라는 곳은 히로시마역에서 JR 전철로는 25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히로덴으로는 50분에서 1시간 가까이 걸린다.
가격을 생각하면 프리패스를 끊은 시점에서 무조건 히로덴을 타야 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조금 아쉽긴 하다.
JR 프리패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이러나 저러나 미야지마에서 로프웨이를 타려면 프리패스가 유리한것이 사실.
다른 자동차와 똑같이 신호를 기다리며 정차했다가, 느긋하게 내리는 손님에게 돈을 받고 천천히 출발하는 히로덴을 타고 미야지마구치(宮島口)역에 내린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이 곳에서 내리고, 사실 이곳은 히로덴 종점이라서 요금도 전철 내리면서가 아닌 개찰구 앞에서 정산한다.

내리자마자 미야지마행 배를 타러 간다.
이곳에서 미야지마까지는 배로 10분밖에 안떨어져 있지만 이권탓인지 JR에서 운영하는 JR 페리와  마츠마에 기선이 바로 옆에서 따로 운행되고 있다.
프리패스를 가진 사람은 마츠마에 기선 역시 맘대로 탈 수 있으므로 생각할 것도 없이 그쪽으로.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인지 미야지마행 기선은 10분에 한번씩 쉴새없이 왔다갔다하고, 걸리는 시간도 10분밖에 안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면 사실 게임 셋.
일부러 일요일을 피해서 온 미야지마였지만 지금이 일본의 골든위크라서 의미없는 몸부림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현기증이 생길 정도.


선착장 옆에서는 무슨 수상 경기장 같은게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뭔가가 트랙을 돌고 있다.


출발하자마자, 사실은 출발하기전에도 잘 보이는 미야지마.
특이하게도 좌석 앞에 미야지마 소개 영상을 틀어주는 TV도 있다. 그거 볼 시간이나 있을까.


기선들은 정말 쉴새없이 왔다갔다한다. 확대해보고 알았지만 기선들끼리 스쳐지나갈때는 서로서로 사진 찍는 장면이 많이 잡혔다.


드디어 일반 관광객다운 관광이 기다리고 있는 미야지마에 도착.
평범한 여행도 이쯤 되니 제법 마음이 들뜬다. 그런데 날씨가 꽤나 더워서 시작부터 조금 사기 저하.
선착장 앞에는 관광객을 마중나온 여관 차량도 있고, 지도와 가이드북을 뒤적이는 외국인들도 많다.


내가 미야지마에 온 이유 첫번째.
길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이 사슴들을 보기 위해.

미야지마에 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고, 가장 먼저 익숙해지는 장면이다.
교토 근처의 나라(奈良)와 이곳의 사슴은 아무런 제약없이 돌아다니고 손님들을 갈취해 뜯어먹는 유명한 터줏대감들이다.
나라에서 먹이를 돈으로 주고 사도록 하는 바람에 관광객들에게 이골이 난 사슴들이 사람들을 덥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지만
이곳은 먹이 주는것을 완전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 사슴들보다는 조금 순한 편이다.

먹이주는걸 금지해서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안내서까지 뺏어먹긴 하지만.


나라의 사슴들을 겪어봤다면 충분히 공감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사슴들은 꽤 무섭다. 순해보여도 힘도 세고 떼거지로 얼굴 들이밀면 힘약한 노약자나 여자는 나자빠질 정도.
이곳에서도 가끔씩 방심하고있는 사람들에게 서든 어택을 가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사진찍을 맛이 난다.
하지만 손안에 먹을게 없다는걸 알아차리는 순간 바로 무심하게 떠나버리므로 크게 걱정하진 말자.

손안에 먹을걸 들고 이런 벤치에 앉아있다면 당신 머리위에는 사조성이 빛나고 있으리라.


미야지마는 그리 큰 섬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거의 없다.
세계문화유산인 이츠쿠시마 신사까지는 거의 일직선으로 길이 나 있어서 그냥 길따라 가기만 하면 만사 OK.


물론 중간엔 관광객을 쉽게 보내지 않으려는듯 오모테산도(表參道) 상점가가 포진하고 있다.
오모테산도라는 이름은 도쿄 하라쥬쿠(原宿)에도 있는데, 특정 지명은 아닌듯? 둘다 유명 상점가를 지칭하고 있다.


온갖 공예품과 특산품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도 여행지의 법칙을 피해갈 수는 없는게
유명하고 발길이 많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의 상점가일수록 공예품의 질이 떨어지고 얄팍한 상술이 드러나 보인다는 점.

차라리 홋카이도 후라노의 라벤더 특산품이 더 나았다는 느낌이다.
경주에서 토산품 살게 제일 없듯이 쿄토나 미야지마에서는 선물 살 생각 않는게 좋을 듯.

이러나 저러나 이곳 미야지마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굴과 단풍잎 만쥬(もみじまんじゅう). 특산품은 못사도 먹을건 먹어야지 작정중이다.
여기서 한끼 먹으면 어지간히 하루치 식비를 다 써버리는 결과라서 조금 겁을 먹고 있긴 하다.
진을 뺄 정도로 둘러보고 피로와 허기짐에 쓰러질 듯 선착장으로 향할 그 순간에 굴을 먹어볼까 싶다.


말을 안 해서 그런데, 선착장에서 800m 정도 떨어진 이츠쿠시마 신사까지 가는데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세상 천지에 사슴이 너무 많아서 이리저리 찍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
쿄토에서도 느낀 거지만 난 일본에 대한 전체적인 관심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본의 전통 문화엔 딱히 흥미가 없는 듯 하다.
절이나 신사같은거 봐도 별로 느껴지는 것 없고, 과대포장된 문화재나 2중 3중으로 입장료를 받아챙기려는 장삿속에도 실망했기 때문일까.

애초에 한국에서도 절이나 문화유산엔 거의 관심이 없었으니.
내 관심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 나와의 심리적 차이에 쏠려있고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무생물적인 관점에서라면, 사람이 만든 유산보다는 지역별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미묘한 차이를 구경하는게 더 좋고.


슬금슬금 이츠쿠시마 신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바닷속 토리이(鳥居)도 어렴풋이 보인다.
물론 바다와 바로 맞닿은 거리에서 파도를 넘나보며 걷는 분위기도 꽤나 마음에 든다.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데도 정말로 사슴한테 먹이를 주는 사람도 없고 (나뭇잎을 주려는 애들은 몇 있었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보기 힘든 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쓰레기에 관련된 일본인들의 소심함과 결벽주의에 대해 냉소하는 이들도 많지만,
난 아무래도 더러운것보다는 깨끗한게 낫다. 특히 사람이 더럽힌 것에 대해서라면.


묘하게도 바다를 따라 늘어선 담 사이사이에 이렇게 출구가 있다.
자칫하면 아이들이 빠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보안이 허술한데...
바닷물은 금방이라도 밀고 들어올 것 처럼 바로 앞에서 출렁인다.


물론 중간중간에 사슴들의 애교를 찍는것도 잊지 않았다. 내 앞에서 친히 털까지 골라주시는 사슴님.
소심한 나는 카메라에 때 묻을까 싶어 만지진 않았지만.
변명 좀 더하자면 가이드에는 먹이주는것 외에 만지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사슴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게 좋으니까. 그리고 혹시 병원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써놓긴 했는데 이미 이 사슴들은 자연 그대로고 뭐시고도 없다. ㅡㅡ;
그리고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희한하게도 먹이는 안주면서 만지기는 잘 만지고 있었다.


접사로 마구 들이대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별로 겁먹는 기색도 없다.
단지 손에 먹을것이 안 들려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관심이 없어져 버리는 것만 빼면.
사진 잘 보면 눈동자에 내 모습도 비춰지고 있지만 명암을 높여서 잘 안보일듯.


원래같으면 이곳 명물인 굴 튀김이나 굴 구이, 오징어 구이, 닭꼬치, 구운 옥수수와 생맥주 한잔 들고 이런 벤치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며
극락 기분을 만끽해야 정상이지만 이번 여행은 좀 과도하게 헝그리한지라 그럴 여유가 없다.
사실은 이곳에서 먹기로 계획했던 단풍잎 만쥬도 2~3개 정도만 사서 맛만 볼 정도의 자금적 여유밖에... T_T

자전거여행 할때는 가난과 배고픔이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오는터라 딱히 감정상할것도 없는데
정상적인 관광객 행새를 하며 유명 관광지에 서 있으니, 왠지 무일푼이라는 사실이 괜스래 서글퍼지는 느낌이네.
나도 먹으려면 카드 긁어가면서 먹을 수 있지만 그러려고 온게 아니라서.
그리고 이 은근히 만성적인듯한 피로감과, 나를 적당히 소심하게 만들어주는 초라함이 오히려 솔직한 나다워서 그게 낫다.

수백만원짜리 DSLR 매쳐들고 다니며 배곯는 헝그리 여행자라. 나름 매력있지 않나.


애고 귀여워라.
고양이가 제일 좋긴 하지만 이녀석들의 태평스러움을 보고 있어도 기분이 맑아진다.

잡아먹을 순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