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라 레이스의 마지막 관문이자 클라이막스인 스테이지 6.
마지막 스테이지인 내일은 11.8km 밖에 되지않는 이벤트성 레이스이기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 코스이자, 이틀 코스인 Long Day를 제외하고 가장 긴 거리를 자랑하는 스테이지다.

사하라사막에서 5일간 만신창이가 된 후에 비로소 맛보게 되는 풀코스 마라톤.


내 몸 상태를 점검해 봤다.
양쪽 발 뒤꿈치 심한 화상으로 연고와 함께 붕대로 칭칭.
양쪽 새끼발가락 발톱 모두 빠진상태, 양말이 진물에 절어서 파리들이 달려든다.
오른쪽 어깨 물집과 화상, 간단히 터트린 후 붕대로 고정시켜놨다.

그리고 거의 바닥을 드러낸 식량.

레이스를 위해 준비한 식량은 일단 7일분의 아침, 저녁식사. 이건 건조 알파미와 건조 비빔밥, 건조 된장가루 정도다.
알파미는 부피는 나가지만 가볍고, 물만 넣으면 금새 밥이 되기 때문에 아시아계 선수들이 많이 가지고 온다.

그리고 레이스 도중도중 먹을 육포와 파워젤, 땅콩과 초콜릿 등의 고칼로리 간식.
실질적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주식이나 마찬가지다.
CP 통과하고 물 받을 때마다 앉아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준다. 그렇게 고단하고 더워도 아주 행복하게 목구녕으로 넘어간다.

MDS 위원회에서는 선수들에게 반드시 하루 4,000kcal 이상의 음식을 지참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CP에서 한끼 대용으로 먹을 육포와 초콜릿, 땅콩 등을 2,000kcal 정도로 묶어 각각 비닐로 싸놓았다.
그런데 그 간식거리도 거의 남지 않았다. 오늘은 두 CP당 한 봉지 정도로 아껴먹어야 겨우 내일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을 때 요긴한 마라톤용 파워젤도 전부 떨어져서 알맨님 것을 사정사정해 몇개 얻어냈다.
원래 규정위반이긴 하지만 중도 탈락한 홍양분의 음식도 슬그머니 팀에서 챙겨놨다. ㅡㅡ;

출발 당시 거의 80%의 무게를 차지하던 음식들이 바닥을 드러내서 홀가분해야 하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출발 때나 지금이나 어깨를 짓누르는 힘은 전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 무거워진 듯한 느낌은 든다.


그런데 오늘 대부분의 참가자들 얼굴은 밝다.
레이스 중 가장 힘든 날이 될 것이 틀림없었음에도, 모두 즐겁고 들뜬 상태다.
어제 하루 쉰 것 때문에 체력이 회복된걸까? 아니라는데 내 발톱의 때를 건다.


대회 종료를 하루 앞둔 지금에서야 사막 레이스에 익숙해 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평생 처음 내딛은 사막에서의 걸음은 6일만에 이방인을 원주민으로 만들어 놓았다.


같은 아시아계 출전 선수 (홍콩이던가?) 브라이언은 원래 대회 내내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매력남이었지만서도.
우리 쪽이 기분이 좋아지자 함께 치는 장난에도 좀 더 힘이 실린다.


Long Day를 통과한 후 나도 마음의 짐을 한 뭉치 내려놓은 기분이다.
5일 전의 나라면 30km 구간도 그렇게 지옥같았는데 어떻게 풀코스를 뛸 수 있겠냐고 한숨을 팍팍 내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익숙하다.

힘든건 매한가지지만 그냥 무던하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오만하게도 조금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이미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졌지만 그래도 여지껏 160km 거리를 달려왔다.
이제 남은 54km 따위가 뭐가 대수인가 싶은 기분이다.

Long Day의 환희까지 맛본 내가 이제 탈락할 리가 없다고 스스로 믿기 시작하니, 5일 전과 다름없는 사막의 뜨거운 아침도 반가울 따름이다.


아,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구나.
난 완주 못할거라고 그렇게 되뇌었는데, 머릿속 마지막 남은 약간의 고집과 꼴불견인 허세가 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선을 넘어가자 이제 내 비관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 체념한 듯 하다.

대회 시작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카메라 들고 바람 부는 모래언덕으로 놀러갔다.
대회 첫날의 깔끔했던 모습은 모두 사라져 버린 거지꼴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누구보다 멋졌다.


기분이 업되니 설정샷도 만들어본다. 거칠게 불어준 모래바람이 반가웠던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추억을 남기려는 슈가님을 방해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쓰는 걸러와 나침반님.


대회내내 고개만 떨구고 한숨만 쉬던 모습밖에 찍힌게 없어서
간만에 과도하게 폼이나 잡아보자 싶어서 한 장.
그래도 이런거 한두 장 찍어놓으니 나중에 볼때 재미있긴 하다.


이놈의 행자분은 끝까지 일본 아이돌 그룹 쫓아다닌다.
그리 좋냐? ㅡㅡ;

그런데 난 누가 아이나씬지도 이제 잘 모르겠다.
저 가냘픈 몸으로 버티고 있다는건 정말 감탄스러운 일이다. 연예인을 우습게 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이때 처음으로 한 것 같다.


마지막 고난이자 마지막 환희의 레이스!
내일은 이 감정과는 다른 아쉬움의 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100명이 넘는 탈락자를 낸 역대 최고난이도의 레이스를 견뎌낸 선수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첫 출발 이후로 가장 활기넘치는 듯한 선수들의 모습을 모래언덕에서 급히 카메라를 꺼내 찍었던 이 사진이
레이스 도중 찍었던 사진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녀석으로 남았다.


원래 볼거리 가득한 사막이지만 내 기분을 알아주는건지 마지막으로 큼지막한 선물을 하나 준비해 줬다.
옆의 4륜 바이크와 크기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거대한 녀석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듯.

종착점을 향해 가는 레이스다 보니 점점 날씨도 덜 더워지는 탓인지 이런 거대한 나무도 보인다.
내일 결승점은 사람이 사는 꽤나 큰 마을 어귀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보다는 살 만하다.


등번호 1번의 에이스 아한살 선수는 1주일동안 저런 유아용 베낭같은 녀석에 먹을거 전부 집어넣고 달렸다.
물론 원주민 출신이라서 이점이 많긴 하겠지만 정말 저렇게 먹고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게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후발주자인 나는 이 사람 뒷꽁무니도 못 보는 처지라, 스텝 자격으로 참가한 슈가님이 이리저리 차 타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오셨다.


여성주자중 1위를 달리고 있는 선수, 베낭의 무게배분도 완벽하다.
여기 와서야 나침반님이 알려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런 레이스에서는 가슴 앞쪽에 보조베낭을 달아야 무게배분이 잘 되어 어깨에 부담이 덜 간다는 것.
나는 앞에 조그만 카메라 하나 달고 모든 짐을 등 뒤에 달아놨으니 그렇게 힘들었던가 보다. 다음엔 좀 더 편하게 갈 수 있을거다.


마음이 편안해 진 것과 사막 레이스와는 사실 별개의 문제다.
내 마음이 어떻게 변했던 어쨌든 오늘은 레이스 중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풀코스 스테이지.
그동안 사막을 해집으며 선수들의 안전을 책임졌던 자동차들도 한계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칼날같은 자갈밭에 상처를 입고, 유리같은 모래알에 엔진이 엉켜버린다.


레이스 첫날, 길 중간중간에 엎어져 고통스러워 하던 선수들을 대신해
이제는 자동차들이 옆에 널부러져 있다. ㅡㅡ;
서로서로 수고했다고 목례를 날리고 가던길을 걸어간다.

이번 스테이지는 전반부 상당부분이 거대한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분에 체력소모는 심한 반면 다리에는 부담이 덜 간다.
익숙해 진 탓인지, 10분만 걸으면 통증이 없어지고, 모르핀 한대 맞은 몽롱한 느낌으로 그저 걷고 또 걷다보면
그제서야 아, 이게 TV에서만 보던 진짜 사막이구나 하는 늦은 감탄이 세어나온다.

레이스 최후반부가 되어서야 이 정도 여유를 찾다니, 나침반님이 두번 온 이유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아쉬워서였을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얼마나 굉장한 능력을 보이는지는 대부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
내가 원래 상당히 부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라서.

하지만 이곳에서는 단순한 긍정의 마인드만으로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남아있는 물의 양을 계산하고, 적당히 배고픔을 참으며 아껴 씹어야 할 육포의 달콤함을 애써 잊으려 노력한다.
충분히 널널하다고 계산해서 가져온 음식이 간당간당하다.
사막이라는 곳은 지식만으로 커버할 수 없는 경험이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곳이다.
서울보다 좀 더 야성적이고 좀 더 순수한 곳이다.


오늘 레이스는 왠만한 상위 랭커가 아닌 한 최소 6~12시간은 걸리는 장거리다.
육포 등의 간식거리로 허기를 채울수는 있지만 밥이 주식인 한국인으로서는 많이 허전한 느낌.
그래서 어느 정도 레이스 중간에 밥을 먹어주는 시간도 필요하다.
한국 팀에선 1,2위를 다투는 행자분도 중간에 짐을 벗어놓고 밥을 먹는데
왠만한 노숙자 저리가라 할 만큼 애처로운 표정으로 밥을 입에 집어넣는 모습에서 진한 동료애를 느낀다(?)

일단 고추장만 있으면 어디서든 꿀맛.


6일 동안 사막 한가운데서 레이스를 벌이다 보면 가끔 풍경이 지겨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두 다리를 교차시켜 앞으로 가기만 하면
어디선가는 우리를 보면서 박수를 쳐 주는 스탭들이 기다리고 있다.

중간중간 나트륨 알약이 필요한가 묻기도 하고, 쉬고있는 선수들과 앞서가는 선수들이 서로서로 격려해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조금 늦어버린 시간인가.


사막에는 생명체가 별로 없다고들 하지만
파리만큼은 서울보다 더 많은 느낌이다. CP에서 쉬기만 하면 어디선가 파리떼가 날아든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내가 씹어먹는 육포보다 피와 진물로 얼룩진 내 양말쪽에 더 환장을 한다는 것. ㅡㅡ;

원래는 열 마리가 넘는 파리가 저 부분에 수북하게 앉아있었는데 카메라를 뒤적거리다 보니 다 날아가고 용감한 한 마리가 남았다.
내 식사를 방해하지 않아서 오히려 안심.
발톱이 빠지고도 나 참 용케 참는구나.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스텝들을 비롯해 몇몇 팀 동료분들도 내 몸 상태로는 완주 못할거라고 생각하셨단다.
나도 그랬으니까 화는 전혀 나지 않는다.


세삼 느끼는 거지만 사막에서의 풀코스 마라톤은 정말 허벌나게 멀게 느껴진다.
익숙해짐이 이렇게도 편리한 것이구나 싶다.

아픔도 배고픔도 갈증도 걷다보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풍경과 함께 지나가 버린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끝없는 지평선도 익숙해지다보니 이제 허탈한 걱정이 생긴다.

다른 팀원들은 경기 후 프랑스에서 유럽 여행을 즐긴 후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대학교 재학중에 교수들 허가를 받고 15일 정도 휴가를 받아온 나는 그럴 여유가 없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쉽다는 느낌보다 남겨두고 온 수업 따라가는 걱정, 대체 레포트 어떻게 써야 하나 등의 걱정이 머릿속을 메운다.

그런 세상과 단절하기 위해 찾아온 사막에서...
다음에 갈 때는 이 지평선같이 마음을 평온하게 먹을 수 있을까.
아마 나침반님도 이런 아쉬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1년만에 다시 돌아왔을지도.


이제 당연하게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13시간 가까이 걸려 어두컴컴한 마지막 야영지에 도착한다.
레이스를 끝내며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든 적이 있었나.
이젠 달리고 싶어도 더 이상 달리지 못한다.

이 사막의 불합리함에 그렇게도 진저리를 치던, 고통으로 가득한 마음이 며칠만에 변해버리다니.
이것이 사막의 매력인가보다.

마지막을 앞두고 모두 대회 시작전보다 더 흥분된 마음으로 텐트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미 어떤 친구들보다 오래 사귄 듯한 친근감으로.

해가 지자 주최측에서 초청한 관현악단의 야외 연주가 시작되었다.
많은 선수들이 오손도손 모여앉아서 사막 한가운데 울려퍼지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즐기고 있었지만
밤중에도 모래바람이 심해서 만사 귀찮은 나는 그냥 텐트 안에서 근근히 울려퍼지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동료들과 사막과 레이스에 대해 서로서로 신기한 듯이 수다를 떠는 것이 더 재미있어서였을까.
적어도 대회 도중엔 연주회같은 이벤트도 좋은 추억거리가 되긴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는 대부분 레이스 도중이나 텐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제 사하라에서의 발걸음은 11.8km 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 코스엔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게 힘들면 힘들수록 아쉬움만 커져 가는 느낌이다.

6일만에 나를 이렇게 바꿔놓은 사하라 사막. 참 놀라운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