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사하라 레이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은 일주일간의 고생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11.8km 라는 최단거리 스테이지.

물론 여지껏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어느 누가 이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탈락하겠나.
그 지옥같던 하루하루가 어느새 아쉬움이 가득한 추억거리로 남았다.
모든 선수들의 입가에 미소가 그치질 않는다. 서로서로 텐트를 오가며 인사하고  기념품을 교환하고 한다.

꼭 전역을 앞둔 병장들만 모아놓은 것 같은 분위기.
군대같으면 추억이라도 다시 가고싶지 않겠지만 여기는 여유만 되면 가고 또 가고싶어진다.


알맨님과 나침반님이 한국팀 물을 가져온다. 팀 내에선 중환자나 마찬가지인 나는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으면 된다.
대회 내내 감사한 마음뿐이다. 땔감도 긁어와 주시고 물도 끓여주시고. 날 업고 대신 달려주는 일 말고는 다 해주셨다.
이래서 팀이 좋은건가보다. 달릴땐 뿔뿔히 흩어져 혼자지만 도착점에 항상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기다리고 있다는 든든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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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다 끝나가니 선수들이 점점 어린애처럼 흥분한다.
안에 누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레이스 도중 최고의 디자인이다.


난 신발 신는데만 10분은 걸릴 정도로 발가락이 아파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는데
다른 선수들은 이 오묘한 생물체와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함께 달리진 않았지만 물심양면으로 팀원들을 도와주신 슈가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배고파 죽는소리하는 팀원들을 위해 밤에 몰래 스텝 식사를 챙겨와주기도 하셨다.
원래대로라면 레이스 탈락이 될지도 모르는 중죄(?)지만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

어차피 순위경쟁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떨어진 한국팀인데 뭐 어때. 거금 들여서 왔는데 말이지.


짧은 시간이지만 정들었던 네팔 구르카 군인들의 기념사진.
실례가 될까 싶어 말하진 않았지만 멀쩡해도 너무 멀쩡하다. ㅡㅡ;
세계 최강의 특수부대원들이니 뭐...


7일간 동고동락한 복면강도일당 단체샷.
약간 필름틱하게 보정을 해 봤는데, 내 보정 실력때문이 아니라 완성된 사진을 보니 심히 가슴이 쓰라린다.
그 때의 추억이 한국에 틀어박혀있는 지금의 나를 후려치는 듯 하다.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은 행복했던 곳.
지금도 한국의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곳 생각에 가슴이 막힌다.

30회 대회때 다시 가자고 약속했다. 반드시 가야지.


거의 텅텅 빈 베낭을 짊어진 선수들이 출발선 앞으로 모인다.
신나는 음악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대회 시작후 가장 들뜬 모습의 선수들이 벌써부터 사막과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즐거워한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인지, 그렇게 답답해 죽을것만 같던 하루하루의 출발시간이 어찌 이렇게 쉽게 변하는지.


슈가님은 훗날 나를 보고 참 징하다고 생각하셨단다.
이유는 발가락 그렇게 떡이 되고서도 용케 완주했다는 것과
정말 대회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도 저 버프를 벗지 않았다는 점.

실력있는 선수들은 오히려 달릴때 방해가 되서 버프를 쓰고 달릴수 없지만 나야 뭐 기다시피 걸었으니.
숨막히고 덮긴 했지만 뭐랄까 대회 내내 버프를 쓰겠다는 건 사소한 고집이었다.
덕분에 나름대로 재미있는 추억거리도 만들었으니.


드디어 21회 사하라 마라톤 레이스의 마지막 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빠른 선수들은 마구 달려나간다. 이제 CP도 없고 간식 먹을 필요도 없다. 그저 앞에 있는 결승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잠시 몸을 풀자 빨리도 오늘의 클라이막스가 눈앞에 나타난다.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모래언덕이 이젠 반갑게까지 느껴진다. 힘들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저 아쉽고 아쉬울 뿐.


과연 들어온 명성에 걸맞은 거대한 모래언덕이다.
이쯤 되면 언덕이 아니라 그냥 산이나 마찬가지. 10~20m 는 되는 경사가 속도를 매우 더디게 만든다.
마음이 가뿐해도 몸은 천근만근이라 만만히 볼 지형은 아니다. 하지만 나한테는 힘이 들어도 매우 편안했던 곳.
자갈투성이 맨땅을 박차는 것보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걷는게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부부인지 연인인지, 눈물나게 사이좋은 광경.
함께 이런 곳에 올 마음을 먹었다는게 부럽기도 하다. 한국서 이렇게 올 커플이 몇이나 될까.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 보면 조금 더 느끼고 가는 것이 있을까.
적어도 나는 많이 느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11.8km는 이제껏 달린 거리를 생각하면 우습지만 사실 CP 정도의 거리다. 사막에서 우습게 볼 거리는 아니다.
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는 적어도 2~3시간은 걸릴 거리. 마지막이긴 하지만 레이스에 집중해야 한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사막의 열기와 무신경해진 살갖을 때리는 모래바람이 오히려 머리를 비워준다.


선수들이 사막을 빠져나오고 있을 무렵 스템들은 결승점에서 축하 준비를 위해 분주하다.


이번 대회엔 참가자 가족들도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에서야 비행기로 금방 올 수 있으니 좋겠지. 한국사람이 여기서 기다린다는건 꿈도 못꿀 일이다.

그래도 홍양과 슈가님이 기다려주고 있으니 뭐.


내가 모래언덕 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때
경이적인 체력으로 마구 내달린 행자분은 벌써 대망의 결승선을 넘었다.
7일만에 접하는 문명 세계의 흔적과 완주 기념 메달. 얼마나 기뻤을까.


결승점에 도착하는 선수들이 차례차례 들어온다.
끝날 것을 알고 있지만, 끝이 없어보이는 모래언덕을 넘고 또 넘었을 때 멀리서 보이는 저 문명의 흔적을 볼 때의 느낌은 남다르다.


이 때의 환희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라고 하고싶지만 사실 난 뭔가 벅차오르거나 그런 건 별로 없었다.
우는 사람도 있고 감격하는 사람도 있고 기뻐 날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때의 난 그냥 무덤덤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난 내가 내딛는 순간 순간의 발걸음을 즐기는 성격이라
소설을 쓸 때도 그렇지만, 완성되어버리면 그 순간 그 기쁨은 나를 떠나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엔 미련남기지 않고 무덤덤하게 넘겨버리곤 하는데, 아마 이 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던 듯.


짧은 거리라고 해서 안전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21년이라는 오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사하라 레이스는 경기가 끝나고 마지막 주자 한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결코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모든 안전이 보장되는 편안한 놀이터에서 신나게 모래장난이나 하고 온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알맨님도 결승점에 도착하셨다.
한국 팀들은 산전수전 겪은 편이라 그런지 감격에 겨운다거나 하는 느낌은 별로 없는듯. 다들 비슷하다.


결승점에서는 어쨌든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 카메라에 한번 더 나온다.
고생고생하며 저 거대한 깃발을 들고 완주한 선수는 여기서 그만큼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게 된다.

나는 다음 대회때 어떻게 튀어보이면 좋으려나.
다스베이더 복장을 하고싶긴 한데 아무래도 목숨을 걸어야 할것 같아서 고민이다.
아마 주최측에서 만류할듯. 좀 더 시원하게 튈 수 있는 복장을 찾아봐야 할듯.


나도 실제로 그럴 기분이 들었다면 저렇게 감격에 겨워보고도 싶었는데.
내가 달려온 길보다 오히려 옆 선수들의 저런 모습을 보는게 더 감격스럽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군대를 다녀와서일까, 다들 무난한 모습이니.

하지만 나타나지 않을 뿐 가슴 속에서는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내 걸음걸이가 일본 아이돌 그룹과 비슷해서 항상 조금 앞에 내가 걸어갔는데
이 인간들이 TV 연출을 하고 싶은건지 결승점 바로 앞에서 막 뛰기 시작했다. ㅡㅡ;
난 별 생각없이 그냥 뒤에서 걸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
TV 스탭까지 동반한 애들이라 결승점에서 인터뷰도 하고 시간을 질질 끌어서

난 버스 줄서서 기다리는 승객처럼 뒤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기분이 좀 상했다.
그냥 내가 먼저 앞으로 달려가버릴걸.


나침반님은 이번 스테이지에선 일부러 뛰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사하라의 마지막을 음미하셨다고 하신다.
난 원래 걸었으니 다행은 다행이다.
두 번째 완주였으니 우리보다 느끼는 점이 많으셨을 거다.


뭔가 조금 허탈하기도 하고, 아주 약간 기쁘기도 하고.
환희에 차서 '해냈다!' 라고 즐거워 하기엔 내가 대회도중 부린 추태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터라 그러기도 힘들다.
유일하게 마음을 치유시켜 준 사실은, 그래도 완주는 했구나 하는 것일까.

어쨌든 돈값은 했다.


완주 메달과 식사거리를 받은 후 사진 한장.
오른쪽은 일본 선수. 굉장히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젊은 학생이라 대회 도중 가끔 이야기 나눴다.
몸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육상선수라서 그리 어렵진 않았을 듯.


결승점에서 내 발목을 잡은 3인조 민폐녀들.
인터뷰는 결승점 통과하고 나서 하라고... ㅡㅡ;

좋다고 브이 그려주는데 화낼수도 없고 그냥 좋은게 좋은거라고 넘어갔다.
다음에 만날땐 앞질러 주겠어.


일주일만에 남에게서 제공되는 식사를 입에 넣었다.
지친 몸에 영양소가 들어가니 조금씩 조금씩 흥분과 즐거움이 고개를 든다.
대회 후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서 배를 채우고 있으니 간신히 내가 완주했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나도 참 독한 놈이다.


버스를 타고 다시 와자자테 시티로 돌아가면서 나침반님과 나는 서너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눴다.
아직은 뒤죽박죽인 사하라 레이스 소감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휙휙 지나가 버리는 사막의 풍경을 나눴다.

1주일동안 정말 의미없는 짓을 사막 한가운데서 벌이다 돌아온다는 느낌도 들어서 조금 웃었다.


단순히 아쉽다는 말로 정의하기엔
그 흘러가는 버스 밖 풍경이 너무 복잡해 보인다.

여지껏 세상 살아오면서 겪어보지 못한, 성취감과 허탈감이 뒤섞인 묘한 그리움.
아주 살짝 기분이 좋은듯 한 그 감정은 인생에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귀한 경험이었음에 틀림없다.

레이스가 끝나면 그리워지는게 이곳 사하라라는 말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그 감정은 레이스 끝나기 전까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동물인가보다.

이제 와자자테에서 하루 푹 쉬고 다음날 프랑스로 날아가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