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인 MDS 대회는 모두 끝이 났고, 이제 프랑스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는 순간 선수들은 각자 갈길을 가게 된다.
아쉬운듯한 행자분의 표정.

사실은 햇빛이 너무 강해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것 뿐.


모로코행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던 붉은 대지와 멀어지는 순간 절반의 후련함과 절반의 아쉬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대회 끝난 후의 진행이 너무 빠르게 느껴져서인지 정신없이 그냥 멍할 뿐.

프랑스에 도착하고 선수들은 뿔뿔히 흩어지는데 행자분은 아직도 아이나씨한테 미련이 남았나보다.
사진만으로는 부족한지 조끼 뒤에 사인까지 받았다. ㅡㅡ;


장하다 행자.
지금 연락은 좀 하고 사는지 모르겠네.


파리의 적당한 호텔에 자리를 잡고 푹 잤다.
그닥 푹 잔것 같지도 않고, 대회 직후라 그런지 마음이 붕 떠있는 느낌이라 이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사하라에서의 밤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3차원 입체영상으로 재생 가능한데.
아침에 비둘기께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더라. 저게 방 안으로 날아 들어오면 파트리크 쥐스킨트 흉내를 낼수 있을려나.


나와 제임스 장씨는 오후 비행기편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낮에 잠깐만 파리를 둘러보고 드골 공항으로 가야 한다.
나침반님은 가져온 자전거로 유럽여행, 홍양은 개인여행, 알맨님과 행자분과 슈가님은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나도 기왕 온 김에 여행하고 싶었지만 일단 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대체 리포트 써야 한다. T_T
더군다가 발가락 상태가 엉망이라 오래 걸어다닐수도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

유럽엔 다음에 와서 뽕을 뽑아야지.


하루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파리를 돌아보면 얼마나 돌아보겠나.
이제부터 자전거 여행이라는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나침반님은 그냥 숙소에 있기로 하고
제임스 장님은 베르사유로
홍양은 오후에 에펠탑 앞에서 만나기로
알맨님, 슈가님, 행자분과 내가 대충 아무데나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유럽에서 제일 볼게 많은 파리라고 들었는데, 과연 밖에 나가기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 광경뿐이다.
길거리에 서 있는 일반 건물들이 대부분 영화에서나 볼 법하게 세워져 있으니.
북적이는 도시는 좋아하지 않지만 미적 감각이라고는 광화문 앞 똥덩어리 조각상만큼도 없는 서울의 도시 풍경과 비교하니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한참동안 눈이 즐거울 수 있는 놀라운 도시더라.


지하철에서 표 끊는 법 때문에 애먹이고 있으니 한 거지분께서 슬금슬금 다가와서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굉장히 쾌활한 사람이라 서로서로 서투른 영어에 농담까지 섞어가며 짧은 시간 재미있게 놀았다.

표 끊어주고 나니 돈 좀 달라고 해서 잔돈으로 남은 동전 조금 줬다. 여기서 자선사업도 해 보는구나.
한국 돈으로 5백원도 안되는 동전이라 별로 아쉬울 건 없고, 재미있는 추억 하나 남겨준 답례라고 생각하고 사진 한방.


일단 오늘은 루브르 박물관, 세느강, 에펠탑 정도 둘러볼 예정인데
사실 저곳들은 한 곳당 1주일씩 잡아도 모자라는 곳이긴 하다. ㅡㅡ;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튀겨먹는 속도가 필요한데, 조금 걷다보니 그럴 마음도 사라진다.
어차피 다 못 볼거 그냥 느긋하게 파리의 길거리 풍경이나 즐기는게 마음 편하다고 생각해서.
파리도 나름 대도시지만 그 날의 하늘은 무지하게 깨끗했다.
4월이지만 거의 초겨울 날씨나 마찬가지라 사람들 옷차림이 심상치 않다.

길거리 집들이 전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으니 도시 전체가 관광을 위해서 만들어진 듯한 느낌.


루브르 박물관에 사람이 왜 이리 없나 했더니만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일이다. ㅡㅡ;
사실은 들어갈 엄두도 못냈지만.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박물관 들어가봤자 남는건 아쉬움밖에 없을거다.

그래도 이곳 역시 바깥 풍경만 즐겨도 충분히 배가 부르니까 후회는 없다.

행자분은 옆에서 지나가는 초등학생쯤 되보이는 단체 관람객 아이들 보면서 귀엽다를 연발.
외모와는 달리 아이를 매우 좋아하고, 아이들도 행자분을 좋아한다.
나는 외모만큼이나 아이를 별로 안좋아한다. ㅡㅡ;


루브르 앞에서 낮잠 즐기는 사람.
행자분이 옆에서 따라하는걸 재미있게 찍었다.

이게 마음에 자유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프랑스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라면 광화문 근처 돌담 길바닥에서 졸고 있는 사람을 보고 정상인이라곤 생각하지 않겠지.
질서와 규칙에 목매는 일본인들의 생활습성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런 자유스러움도 부럽다.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겠지 싶지만, 적어도 한국의 생활습성과 나는 많이 맞지 않는가보다.
놔 둬도 될 곳엔 쓸데없는 오지랍 작렬하고 지적해야 할 곳엔 그냥 좋은게 좋은거지 하고 넘어가는 것들.


행자분은 흉내내기에 맛들였다!
덕분에 재미있는 사진 많이 찍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반대편 할머니도 웃으면서 좋아하시길래 마음이 놓였다.


그 명성에 비해 파리는 그다지 큰 도시가 아니라서 조금만 걷자 바로 세느강에 도착.
서울의 1/6 크기에, 인구는 200만이 조금 넘는다. 여유로와서 좋겠다.

세느강은 한강에 비하면 쥐꼬리만한 수준이지만 주위 풍경은 압도적이다.
석조 건축이 발달한 유럽답게 위엄있는 건물들이 세느강 주위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모습은 참 장관이더라.

길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 솜씨를 뽐내고, 강 위에선 유람선이 한적하게 떠다니는 풍경은 정말 영화같다.
평일인데도 공원엔 사람들이 꽤 많이 나와서 푸근한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세삼 부러운 마음 뿐.


좁은 골목길 몇개를 지나 에펠탑에 도착.
하지만 1년내내 올라가려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답게 바글바글하다.
오래 줄서서 올라가고 싶진 않은터라 그냥 주위에서 에펠탑의 모습만 빙 둘러봤다.
파리 시내 풍경을 좌악 훑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는데, 요금이 꽤나 비쌌고 사람이 워낙 많아서 무리.

알맨님 일행은 여기서 홍양 만나기로 했으니 야경이라도 보러 올라갈 수 있겠지.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드골 공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일행들과 진한 포옹 한번씩 나누고 헤어졌다.
지나고 나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학교건 뭐건 신경끄고 두세 달 유럽을 돌아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일한 변명거리인 망가진 발가락을 위안으로 하고 지금까지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숙소에 돌아와서 나침반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나침반님은 이제 막 사하라 레이스를 끝내고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유럽대륙을 여행하신단다.
레이스를 위해 가져온 짐과 조립식 자전거, 유럽여행중 필요한 장비까지 합하면 어마어마한 무게다.

옆에서 봐도 너무 황당한 계획이라 말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확신이 내 마음속에나, 나침반님 마음속에나 있었기 때문에
그냥 몸조리 잘 하고 무사히 다녀오라는 말만 건넸다.

몸도 엉망이고 머리도 어질어질한데 잠은 안오고 정신만 말짱한 최악의 상태라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디스한테 수면제 없냐고까지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 정말 다행은 다행인게, 어찌나 피곤했는지 이륙후 눈 감았다가 뜨니까 인천공항이었다. ㅡㅡ; 16시간은 내리 잘도 잤다.
나는 신경이 엄청 예민한 편이라 잠자리에 누워도 잠들려면 30분에서 1시간은 뒤척거려야 하고
옆에서 바스락 소리만 들려도 금새 잠이 깨는 불편한 타입인데도
비행기 안에서 그만큼 잤다는건 인생 최고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지막까지 앞으로는 체험하기 힘든 이벤트를 선사해 주는군.

절뚝거리며 공항을 나오자 택시기사가 'Where are you going?'이라고 반겨주신다.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 이젠 どこに行きますか。라고 물어본다. ㅡㅡ;
한국어로 대답하지 무지 놀라는 기색이다. 전혀 한국인처럼 안보인단다.
뭐, 슬리퍼 질질 끌고 '전선생 -> 전인권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어오긴 했지만 이렇게 못알아 볼수도 있는건가?

아무튼,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도중 서울 하늘엔 빗방울이 맺혔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겨우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사하라의 하늘이 그리워서.

한국에 도착해보지 않으면 그 느낌을 모른다더니, 역시 경험자의 조언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30회 대회때 다시 함께 가기로 했으니 이 아쉬움을 잘 간직했다가 5년 뒤 환희와 기쁨의 원료로 삼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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