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가 끝나고 모로코 와자자테 시티로 돌아온 선수들은 방 배정받고 간단히 샤워하고 저녁 뷔페를 즐겼다.
버스에 타서부터 잊고 지냈던 1주일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기분이 상당히 다운되었다.
1주일만에 샤워를 하는데 온 몸에서 황토색 물이 줄줄 흐른다.
물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발가락쪽에 물이 닿는것 자체가 지옥이라 그냥 대충대충 씻고, 모래에 푹 절은 장비들을 욕탕에 물 받아서 담궈놨다.
뷔페는 그렇게까지 고급은 아니었지만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던 1주일이 지난 후, 처음으로 먹어보는 진수성찬이라 거의 눈이 뒤집혔다.
야수처럼 음식을 쓸어넘기고 나서 한국팀 일행은 와자자테의 밤을 즐기려고 밖으로 나갔지만 난 10분쯤 따라 걷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샌들을 하나 사지 않으면 도저히 걷기가 힘들 것 같았다. 몸 여기저기 안 쑤신곳이 없어서 노는건 다음날로 미루고 호텔에서 수면.
대회 다음날은 와자자테 시티에서 하루 지내면서 기념품을 받고 대회 수상식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대회 도중보다 더 어질어질하고 몸이 무겁다. 항상 힘든 여행의 끝에 겪는 통과의례 같은 것.
아침은 간단한 시리얼과 빵, 커피와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다.
유럽쪽 선수들은 아침을 별로 안먹는 습관때문인지 그냥 간단히 요기만 하고 나가는데
한국 팀은 눈치볼것 없이 무지막지하게 갖다놓고도 두번 세번 음식 챙겨오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프랑스로 돌아간 후 바로 유럽여행을 나가려는 알맨님과 행자분은 버터와 잼 챙기느라 분주하다.
한국 팀은 슈가님이 알아놓은 MDS 현지 도우미 한분에게 차를 빌려타고 와자자테 시티 투어를 하기로 결정해 놓은 상태라
오전에 기념품만 받아챙기고 시상식은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완주가 목적이었고, 우리들중 수상할 사람도 없으니.
아시아 에이전트 제임스 장님이 못마땅해 하시는 눈치인데, 우리는 일단 경기 끝냈으니 말도 못알아듣는 시상식장에 갈 생각은 없다.
대회 기념품 받는데 줄이 장난아니다.
와자자테 시티도 일단 사하라에 포함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터라 이 햇살은 무섭다.
여기 줄 서있으니 세삼 용케도 이 날씨에 장비 짊어지고 내달렸구나 싶다.
난 아침에 의료진에게 가서 땜빵으로 메워놨던 발을 다시 한번 정비했다.
내가 정비를 받는 동안 한 외국인 선수는 휠체어에 타고 나가더라. ㅡㅡ;
의사는 물집을 아주 작은 바늘로 살짝 살짝 터트리고, 발가락에는 아프지 않게 세심하게 거즈를 둘러놓았다.
3~4일간은 목욕같은거 하지 말고 간단한 샤워만 하란다. 발톱이 뜯겨나간 곳이 심하게 아프거나 곪으면 병원에 가보라네.
기념품을 챙겨든 후 일행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와자자테 시티는 모로코에서도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역시 한국같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에게 이곳은 한적한 전원같은 곳이나 다름없다.
일단 시장에 가서 내 불편한 발가락을 쉬게 해줄 샌들을 구입했는데, 이곳 역시 가격흥정은 필수.
처음에 10달러 부르는걸 생까고 나오면 몇걸음 안가서 뒤에서 붙잡아 다시 들어가고를 반복한 결과
스폰서 기아자동차에서 선물로 받은 흰색 나일론 T 셔츠 한벌과 1달러 정도로 가죽 샌들 하나 교환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서는 줘도 안입을 순백색 '기아맨' 티셔츠지만 모로코 사람들은 이런 나일론 소재의 셔츠가 매우 마음에 드는 듯 하다.
다음 올때는 남대문시장에서 나일론 티셔츠 잔뜩 들고와서 물물교환이나 하자고 우리들끼리 농담조로 주고받았다.
난 해외에 나가도 쇼핑에 전혀 관심이 없는 타입이라 그저 물건등 구경이나 할 뿐이지만
패셔니스트 슈가님은 모로코의 옷이나 장신구에 매우 관심이 많은 듯 여기저기 둘러보고 고민에 빠지는 듯 했다.
가이드가 모는 차를 타고 점심먹으러 출발.
식당 앞에서 멋들어진 하늘과 함께 서로서로 사진 찍으며 놀았다.
모로코에 와서 가장 감명깊었던 건 역시 하늘. 서울에서는 1년에 10일간도 볼까말까 한 시린 하늘이 여기선 그냥 일상이다.
나도 슈가님이나 홍양과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상대에게 기대어 찍다보니 완전 여성을 덮치는 야수처럼 나왔다. ㅡㅡ;
음식 잘 하는 곳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솔직히 기대엔 영 못미쳤다.
그리 싼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모로코 사정을 우리가 알 리 없으니 진짜 잘 하는 집인지 아닌지는 그저 오리무중.
모로코라는 국가보다 더 유명한 카사블랑카 시티에서라면 미리미리 준비 좀 하고 갔겠지만.
뭐가 어찌됐든 우리는 그냥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만없이 맛있게 먹었다.
사하라 1주일을 겪은 우리들에게 이런 요리라도 감지덕지일 뿐.
배를 채운 후엔 역시 쇼핑일까.
기대에 가득 찬 슈가님을 따라 차를 타고 이리저리 달려서 토산품점으로 직행.
중간에 뭔 일인지 경찰이 차를 세우기도 했는데, MDS 관련자라는 걸 아니 그냥 보내줬다.
모로코에서 MDS는 프랑스쪽에서 상당한 지원금이 들어오는 귀중한 연례행사니 모르는 사람도 없고 모두들 친절하다.
한 껀 해먹으려는 장사꾼들 마음이야 한국 못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하지만 한국인의 흥정능력을 무시하면 안되지.
달콤한 민트티 한잔 받아먹고 몇 시간동안 슈가님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적정 가격에 사기 위해 노력하셨다.
막판엔 가게 주인이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정말 한국인과는 거래 맘놓고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사태에까지.
커미션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 가게에 데리고 온 현지 스탭 아저씨도 난감한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시길.
난 물건값 잘 깎는 성격이 아니라 내가 살 물건이 있었다면 후하게 값 매겨먹을수 있었을 텐데.
그동안 나침반님과 나와 행자분은 밖에서 모델놀이나 하며 놀았다.
어떤 이 중엔 저 완주 기념 티셔츠를 값 잘 쳐줄테니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만.
그리고 MP3 같은 기기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어떻게든 물물교환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도 부자가 아니라 MP3 같은걸 바꿀 순 없었다.
적어도 나침반님과 나는 아직 사하라 마라톤의 꿈에서 깨지 못한 듯 싶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곳.
한국에서 이 하늘 한번 보기 위해 얼마나 그 흐릿한 풍경을 참아내야 했는지.
저녁식사를 마친 후 행자분은 아직도 포기를 못하고 일본인 아이돌그룹 아이나씨를 붙잡고 난리다.
그만 정신 좀 차리시면... ㅡㅡ;
은근슬쩍 어깨에 손도 올려보고.
이럴땐 부럽다고 해 줘야 정상적인 남자 취급을 받을려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오늘 구입한 모로코 의상으로 갈아입으신 슈가님.
내 눈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물건들로 저렇게 코디를 해 내는것도 참 신기했다.
몇 시간동안이나 흥정에 흥정을 거듭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 왠지 득본 기분.
물론 난 그냥 손만 빨며 구경했을 뿐이지만.
저녁엔 피터와 함께 근처 야시장에 가 봤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좀 겁나기도 했지만 사실 와자자테 시티는 MDS에 워낙 익숙해서 외국인에게 해코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밤거리에서 모여 노는 젊은애들도 그냥 방긋방긋 잘만 웃으며 우리와 인사했다.
여성분이 끼어있다는 걸 알고 함께 술마시자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후문이.
밤이 깊어질수록 나침반님은 아쉬워 하신다.
아마 그 아쉬움을 잊지 못해서 두 번이나 이곳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아쉬움이 충족되었을 리는 없을 터.
밤엔 호텔 옆의 바에서 구르카족과 함께 맥주 마시며 놀았다.
짧은 동행이었지만 같은 동양인들끼리 친근감이 작용했는지 그들도 굉장히 아쉬워 했다.
피터는 내일 프랑스로 가지 않고 바로 모로코 여행을 시작할거라니 이 친구와도 오늘이 마지막.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난 여러명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이런 분위기엔 따라가질 못해서 그냥 못마시는 술이나 홀짝홀짝하며 남들 이야기나 들었다.
다음날 아침 홀가분해진 짐을 챙겨서 프랑스로 출발한다.
내 전리품은 완주 메달과 완주 티셔츠와 MDS 버프, 그리고 망가진 발가락과 마데인 모로코제 샌들 한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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