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습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끔찍한 조식을 대충 입에 집어넣고 짐을 챙깁니다.
오전에 노크도 없이 그냥 문 따고 들어오는 청소 아주머니가 절 보고 화들짝 놀라 미안하다며 문을 닫고 나가더군요.
형님쪽 방에서도 똑같은 일을 당했답니다. 이런 걸 보면 과연 대륙의 후손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다음부터는 방에 들어가 있으면 무조건 '방해하지마' 팻말을 걸어놔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소를 나섭니다.
어제 우리를 성심껏 도와주던 경찰서에서는 아침부터 성대하게 축하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더군요.
경찰서장 생일인가 나름껏 추측하면서 가던 길을 갑니다.
신베이토우 역앞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는 형님의 말에 제가 찍어줬습니다.
구도가 마치 X스라도 하는 것처럼 나왔군요. 물론 정상적인 사진도 나왔지만 나름 조금조금씩 저작권도 존중하는 의미에서...
오늘의 목적지는 지우펀. 한국에서는 온에어라는 드라마로 인해 유명해졌다고 하네요.
전 드라마를 전혀 안보니 알리 없지만 꽤나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지우펀 하면 온에어라는군요.
일단 타이베이 중앙역으로 가야 일이 되겠죠. 거기서 다시 중샤오푸싱 역까지 간 후에 버스를 탑니다.
숙소인 신베이토우에서 지우펀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린 듯 합니다.
버스 안은 엄청 시끄럽더군요. 원래 중국어는 성조 때문에 자연적으로 시끄럽다고는 하지만...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는데,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꽤나 많습니다.
도착할 때만 해도 이렇게 맑은 하늘에 저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 화창한 날씨였는데
고도가 높고 바다를 낀 지형이라 그런지 날씨가 변화무쌍합니다.
지우펀은 1920년대 금광개발로 유명한 광산마을이었지만
광산업의 쇠퇴 후 독특한 옛 정취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이용해 관광마을로 재탄생했습니다.
골목도 엄청 좁고 낡은 건물도 많은 것이 외국 관광객들에겐 대만만의 느낌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더군요.
왼쪽의 전망대와 오른쪽의 낡은 건물이 지우편의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이런 골목이 관광하기엔 참 재미있죠. 이른 시간임에도 관광객들로 붐빕니다.
지우펀은 홍등이 켜진 야경도 멋지지만 오후 7시만 되면 찻집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숙소를 이곳에 잡지 않았은 당일치기 여행자들은 되도록 일찍 가서 먹거리와 풍경을 즐기는게 나을 듯 합니다.
사람 모이는 곳에 먹거리가 빠질 수 없는 대만이지만
이곳은 관광객들로 먹고사는 마을이다 보니 기념품점같은 평범한 상점도 많습니다.
가격도 잘 찾아보면 적당한 곳이 많아서 조그만 기념품 정도는 구입해도 괜찮더군요.
딱히 특색을 잘 살렸다기보다는 그냥 잡화점 같은 분위기가 풍겨도 그 또한 매력.
일본인 관광객이 많은지 이곳도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사람이 일본어는 잘 하더군요.
좁고 빽빽한 건물 사이로 올려다보는 얇은 하늘이 아련합니다.
시끌벅적한 시장의 풍경. 한국에서도 마음에 드는 풍경이죠.
지우펀에서도 먹거리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인기였던 땅콩엿 아이스크림 크레페.
저 땅콩이 박힌 거대한 엿덩어리를 대패로 갈아서 전병 위에 올린 다음 아이스크림을 넣고 돌돌 싸서 크레페처럼 만들어 먹는 음식.
원래는 시향차이를 넣어 먹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외국인 관광객인걸 아신 주인장이 처음부터 빼서 주더군요.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가루에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함께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지우펀에서 꼭 먹어봐야 할 간식거리라고 생각.
냄새로 사람 기절시킬 기세인 썩은 두부만큼은 여전히 손을 못 댔지만
먹을거리가 너무 풍부해서 아주 작심하고 이것저것 먹어제낍니다.
가격도 관광지라 크게 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싸니 인정사정 볼것없습니다.
잘 구워진 소라고둥도 먹고
향긋함이 코를 찌르는 버섯구이도 먹고
특이한 화장에 가발을 쓰신 유명한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소시지 구이도 먹습니다.
수제 소시지라서 향도 풍부하고 육즙이 훌륭하더군요.
앞으로도 계속 먹어야 하니 일단 조금씩 조금씩...
서울서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이런 좁고 가파른 골목길도 한국사람들에겐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네요.
아이들이 여기저기 뛰어놀기 좋은 풍경입니다.
입에 먹거리를 주렁주렁 달며 신나게 골목을 탐색하다가 지우펀 차방에서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차를 마시고 싶은 시간대이기도 했고, 가게 아주머니의 적극적인 권유로 들어가게 되었네요.
이곳엔 각종 오룡차, 철관음, 보이차등을 팔기도 하고 뒷뜰에서 차를 마실수도 있으며
조그만 지우펀 민속 박물관도 마련해놓고 있는, 꽤나 규모가 큰 찻집입니다.
오룡차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차의 원류인 중국 운남성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지금은 대만이 세계적인 중국차 강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정신없을 정도로 시끌벅적하던 골목길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한쪽에서는 뒷뜰에서 차를 마시는 손님들을 위해 분주히 찻물을 끓이고 있습니다.
관광지로서 상업성에 찌들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곳은 나름의 정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네요.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이제껏 제가 대만에서 본 사람 중에선 가장 능숙한 영어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찻잎은 마시고 남은 걸 가져갈 수 있다고 하는군요. 한두 잔씩 팔수 있는 차가 아니라서 이해는 합니다만 가격이 꽤나 비쌉니다.
찻잎의 품질에는 자신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니 일단 한번 마셔보기로 합니다.
함께 먹을거리로는 녹차인지 오룡차인지를 가미한 치즈케이크 한 조각.
주인 아주머니가 양이 너무 작으니 좀 더 시키라고 말했지만 배를 채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이것만 시켰습니다.
차를 타 마시는 방법을 한번 시연해 주시고 나면 다음부터는 직접 알아서 타 마십니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질리도록 마셔대는 차라서 우리 일행은 능숙하게 타 마시죠.
분명 청차계열의 오룡차였지만 굉장히 맛이 옅고 은은한 느낌으로, 청차와 녹차의 중간쯤 되는 맛이었습니다.
요즘 대만의 차 트렌드인가 보네요. 차의 취향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딱히 어떤 맛이 더 훌륭하다고 따지긴 힘들죠.
물은 저렇게 옆에 준비된 화로에서 적당히 끓어주고
수시로 점원이 와서 물을 채워줍니다.
중국차를 워낙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대만에서 마시는 첫 차다 보니 원없이 신나게 마셨네요.
바깥 경치도 탁 트인게 참 보기 좋았습니다만 순식간에 좋던 날씨가 안개속으로 묻혀버리네요.
안개에 뒤덮힌 산자락의 풍경 역시 차를 마시기는데는 좋은 안주거리가 되니까 문제없습니다.
날씨가 좋았다면 청명한 하늘과 함께 저 멀리 바닷가도 보였을텐데...
여행에서 모든 걸 만족할 순 없지만 워낙 순식간에 변한 날씨라 타이밍을 잡지 못한 아쉬움은 남네요.
대구 본가에선 한때 엄니하고 차 마실 때 마다 제가 차를 탔었는데
형수님이 타주시니 받아 마시기만 하면 되서 편했습니다. 형수님은 안 편하셨겠네요. ㅡㅡ;
절벽에 매달린 듯한 낡은 옛집도 그림이 됩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이런 곳에서 아늑한 시간을 보내기 좋습니다.
너무 죽치고 앉아있으면 여행에 지장이 생기니 그럴수도 없긴 하지만.
뒷쪽의 일본인 관광객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완전 발광하듯이 웃고 나자빠지던데요... ㅡㅡ;
그때는 '정말 미친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환장을 하길래 황당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한 장 찍고싶기도 했지만 의도가 불순한터라 그냥 이렇게 말로만 남기기로 하고 패스.
당시에 열심히 기록을 남기던 필름카메라 세븐이.
여행에 DSLR 대신 필름카메라를 갖고 온건 처음이라 찍을 당시에도 긴장 많이 했었죠.
현상하고 보니 대단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히 괜찮은 결과물들을 보여줘서 조금 자신이 붙었습니다.
다음 오사카 여행때는 좀 더 잘 찍을 수 있기를.
마음껏 차를 마신 후, 형님부부는 엄니 선물로 드릴 자사호를 구입했습니다.
이 집에서 직접 만든 자사호라는데, 손잡이 끝부분이 독특하게 만들어져 있어 차를 따를때 뚜껑이 떨어지지 않아 편리하네요.
차를 다 마신 후 남은 차를 가지고 적당히 건물 내부를 구경하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인진 모르겠는데 가게 쪽 말로는 기울어져가는 지우펀을 부흥시키는데 이 가게가 큰 공헌을 했다고 하더군요.
지우펀의 가게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의 찻집이니 차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가서 피로를 풀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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