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야생고양이의 잠자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잠'이라는 행위를 편안하고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야생동물이 얼마나 될까.

그 중에서도 고양이란 녀석은 특별하다.
수천년동안 사람과 함께 지내왔고, 그 뛰어난 적응력으로 대다수의 야생동물들이 절멸한 대도시 안에서도
여전히 밤의 지배자로, 밤의 도둑놈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까.


하지만 소음과 기척에 민감한 고양이가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닐 듯.
도시의 야생고양이들은 안심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자기보다 위협적인 존재로 가득한 곳.

유린해야 할 상대는 거의 사라지고, 과거 자신의 먹잇감들이 하던
쓰레기나 뒤지는 일에 익숙해져버린 도시의 최하층 천민인 고양이는
이미 막강한 포식자의 위치를 잃어버린지 오래.


가식적이든 지능적이든 사람의 손길에 익숙해진 고양이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사냥의 본능과 한적한 고독의 즐거움을 포기한 대신
가만 있어도 귀엽다며 달려드는 사람들의 손길과 넉넉한 식사, 그리고 편안한 잠을 얻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애초에 이 녀석들에게 자발적인 선택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운과 우연의 기구한 일치로 인해
사랑받는 애완동물이 되던가, 증오를 한 몸에 받는 도둑고양이가 되던가.

그걸 인간들이 불쌍하다 애처롭다 그래도 이게 낫다 등의 잣대로 판단하는건
애완고양이든 도둑고양이든 이미 반쯤은 '고양이'로서의 자신을 거세당한 녀석들에게
그 오만함을 너무 과하게 들이대는 행동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왜 가면 갈수록 사회가 썩어있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가.
형식적으로는 분명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물리적인 편안함을 얻었고
배가 고파 굶어죽는 사람도 형식적으로는 줄어들었고
하찮은 병 하나 치료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도 형식적으로는 줄어들었는데.

문제는 그게 형식적인데 있다는 점이겠지.
그리고 어디선가 그 모순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겠지.

그래서 양떼나 몰고 농사나 지으면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며 대를 이어가던 시절과
모든것이 포화되었으면서도 너무나 부족한 무언가 때문에 매말라가는 지금의 상태 중
어느 것이 더 행복하고 좋았던 시절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사자 본인의 몫.

그저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판단만 해야 한다.
어느 쪽의 고양이가 더 고양이다운가, 더 행복한가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고양이들은 그저 환경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칠 뿐이고
그것은 인간이 이렇게 발전하기 훨씬 전부터 야생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던 일이니까.


애완동물이든 반려동물이든
그런 형식적인 단어에는 그저 사람의 죄책감과 가식의 껍데기만 늘어붙어 있을 뿐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고양이를 필요로 한다.

분명히 고양이의 의지보다는 사람의 강제성이 더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래도 고양이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필요로 한 것이겠지.


그래서 길들여진 고양이의 편안한 잠을 옆에서 보는 것은 행복하다.

아마 찰나의 운명이 빗겨갔다면 평생 그런 편안한 잠 한번 자 보지 못했을 녀석은
'그래도 홀로 도시의 밤거리를 누비며 자유로웠던 시절이 좋았는데'
라는 불만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녀석들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을 뿐.
불평이 있다면 약간의 지루함과
 다이어트랍시고 음식을 조금씩 주는 인간에 대한 불만 정도 아닐까.

좀 더 지성이란 걸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그들의 머릿속 진실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다만 내가 고양이의 잠자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행복감은
분명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혹은 내가 동경하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사소한 대리만족감 때문일 것이다.

그게 고양이에게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매력일 테니까.